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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의 작은 박물관, '파이아키아'를 직접 방문해봤다

그는 차곡차곡 자신의 영혼이 만들어지며 남긴 흔적들을 모았다. 2만 장의 장서와 1만 장이 넘는 CD, 5000장의 DVD와 700여 장의 바이닐을 멋지게 모아두기 위해 거대한 작업실 겸 수장고를 꾸렸다. 이타카로 향하던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여행지 이름에서 따와 ‘파이아키아’라 부른다. 건축가 봉일범이 설계한 이 공간에서 그와 만났다.

BYESQUIRE2020.11.07
 

파이아키아에서 이동진을 만났다 

 
여기에 와보니 얼마나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을지 짐작이 가요. 심지어 이 공간과 수집품에 관한 책 〈파이아키아, 이야기가 남았다〉까지 내셨어요.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지만, 역시나 떼땅저가 가장 눈에 띄네요.(2020년 1월 영화 〈기생충〉에 최고상을 수여했던 영화배우조합상(SAG) 시상식에서 경매를 목적으로 마련한 참석한 배우 122명의 사인이 전부 담긴 떼땅저 므두셀라 보틀이다.)
아, 비싼 거 좋아하시는구나.(웃음) 눈에 띄죠. 근데 그게 워낙 크고, 일단 현실에서 6리터짜리 샴페인을 볼 일이 별로 없으니까요. 게다가 수백 명의 사인이 있으니까요. 오는 사람마다 탐내는 게 다 달라요. 본인의 즐거움과 관심 있는 분야가 다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마그넷이 제일 탐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기타를 탐내기도 하고요.
 
어떻게 저 귀한 걸 낙찰받았어요?
(비딩을) 세게 하기도 했지만, 제가 경매를 또 잘해요. 제 생각이지만요.(웃음) 경매는 워낙 많이 해봐서요. 경매라는 게 심리전도 필요하고, 침도 발라놔야 하거든요. 언제 경매를 하느냐, 얼마에 하느냐,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죠. 또 떼땅저처럼 엄청나게 보이는 수집품이라 할지라도 그걸 실제로 노리고 배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다음은 관심이죠. 일단 저 물건을 경매한다는 거 자체를 일반인들은 알기가 힘들어요.
 
모든 배우의 사인이 들어간 건 전 세계에 2병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렇죠. 2병 중에서도 저 사진에서 브래드 피트가 쥐고 있는 바로 저 병은 저거 하나밖에 없죠.(웃음)
 
수집품 중에 서명이 들어간 게 많은데, 서명을 받는 행위의 의미는 뭘까요?
글쎄요. 결국은 수집하는 사람에게 굉장히 중요한 건 가격이 아니고, 일단 나와 서명자의 관계예요.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먼저죠. 예를 들어, 제 수집품 중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수많은 아티스트의 서명이 담긴 물품이 있는데, 그 유명한 롤링스톤스는 없단 말이에요. 왜냐하면 제가 롤링스톤스를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엇, 의외네요.
그게, 안 좋아한다는 게 싫어한다는 건 아니죠. 롤링스톤스의 수집품은 꽤나 비싼데 그 돈을 써가며 챙길 정도로 좋아하진 않아요. 이건 사실 미친 덕질의 향연이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좋아해야 한다는 게 첫 번째 전제죠. 두 번째는 고유성이에요. 예를 들어 공산품이라도 한정반이라고 하면 사는 사람들이 있죠. 그럼 수집가는 뭘 사느냐 하면, 한정반의 초판본을 얻으려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초판에 저자나 아티스트가 서명을 하게 되면, 공산품이라도 고유한 물품이 되는 거죠.
 
 
좋아하는 감독들의 서명은 촬영 현장 사진에 있는 걸로 모았다. 특히 시점 연기를 보여주는 클로드 샤브롤의 사진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감독들의 서명은 촬영 현장 사진에 있는 걸로 모았다. 특히 시점 연기를 보여주는 클로드 샤브롤의 사진을 좋아한다.

직접 받지 못한 사인에는 증서가 대부분 붙어 있나요?
아뇨. (증서가 있는 건) 일부죠. 대략 30~40% 정도 되려나요? 비싼 수집품일수록 증서가 있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걸 ‘메모라빌리아’라고 하는데, 미국에서는 꽤 산업화되어 있어요. 산업화된 제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신뢰도죠. 그래서 미국에는 제임스 스펜서 오센티케이션(JSA) 같은 보증기관들이 잘 발달해 있어요. 그런데 싼 수집품은 감정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굳이 감정이 필요하지 않은 게 더 많죠.
 
비틀스 4명의 서명이 다 있는 수집품도 결국은 구했어요.
그럼요. 너무 자랑하고 싶어요. 근데 그게 사진이 사실 폼이 나는 건 아니잖아요. 티켓이니까.
 
티켓이라도 그게 어디에요.
근데 그 티켓 자체가 또 중요한 거긴 해요. 비틀스가 뉴욕의 셰이 스타디움에서 공연한 것 자체가 록 음악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거든요.
 
보통은 자기 세대에 듣던 음악에서 취향의 확장이 멈추잖아요. 여기 와보니 전혀 멈추지 않았네요. 이렇게 음악 취향이 넓고 깊은 영화평론가는 정말 처음 봐요.
제가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음악평론가보다 한참 모자라긴 할 거예요. 그렇지만 음… 웬만한 음악평론가보다 제가 음악을 훨씬 더 많이 들었을걸요? 일단 나이가.(웃음) 또 요즘에도 하루에 한 6시간가량 음악을 들어요.
 
정말 대단하네요.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사인본을 2달러에 샀다는 얘기도 좀 놀라웠어요.
이렇게 작업실 사진이 공개되고 나면 ‘영화평론가가 돈을 이렇게 많이 벌어?’라는 반응이 제일 많아요. 근데 수집은 돈으로 하는 게 아니거든요. 실제로 이 수집품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안 비쌀 수도 있고요. 또 이 수집품들의 금전적인 가치는 저한테는 하나도 안 중요하거든요. 예를 들어 지금 이걸 다 되팔면 오히려 샀을 때보다 값이 떨어졌을 거예요. 수집품으로서의 가치를 생각하고 수집한 게 아니라, 내가 너무 좋아서, 너무 갖고 싶어서 산 거거든요. 쉽게 얘기하면 수집은 돈으로 하는 게 아니고, 열정으로 하는 거예요. 호기심으로 수집에 발을 들이는 사람 중에도 진정으로 수집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드물어요.
 
안 그래도 묻고 싶었어요. 책을 읽다 보니 수집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맞아요. 그냥 전 유전자 차이라고 생각해요. 내향적인 사람이 있고, 외향적인 사람이 있는 거와 비슷하죠. 예를 들어 여행하는 게 좋은 사람이 있고, 방에서 뒹굴뒹굴하면서 휴식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여행이 휴식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반면에 휴식이 여행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제가 예전에 SBS에서 〈이동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라디오 방송의 디제이를 할 때 주장한 방향성이 ‘취향의 비무장지대’라는 표현이었어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취향에서 싸우려고 하면 안 돼요.
 
‘수집’이 제게는 없는 성향이라, 뭐랄까, 수집의 근원이 되는 마음을 갖고 싶어요.
거칠게 얘기하자면, 그건 못 가져요.
 
‘못 가져요’란 말이 가슴에 박히네요. 그런데 정말로 그런 욕망이 제게 생기면 좋겠어요.
(웃음) 어떻게 보면 욕망이 치명적인 한계이기도 하지만, 뒤집어서 얘기하면 그 사람의 굉장한 재능이기도 해요. 욕망을 욕망할 수는 없어요. 수집과 수집벽은, 기분이 우울한 사람과 우울증에 걸린 사람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요. 마찬가지로 수집하는 습성과 수집벽 사이에도 건널 수 없는 강 같은 게 있는 거죠. 수집벽은 쉽게 말하면 저주받은 질병 같은 거예요.
 
저희 사이에 강이 하나 있네요.
있죠. 대양이 있어요.(웃음)
 
 
어떤 예술이든 간에 그 예술에서의 성취를 일반화할 수는 없어요. 작가라고 해서 어떤 작가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핑크 플로이드의 브레인 로저 워터스가 서명한 베이스 기타와 배우 122명의 서명이 담긴 6리터 짜리 떼땅저 므두셀라 보틀.

핑크 플로이드의 브레인 로저 워터스가 서명한 베이스 기타와 배우 122명의 서명이 담긴 6리터 짜리 떼땅저 므두셀라 보틀.

이번 책에 ‘운이 좋았다’는 표현을 썼어요. 생각해보면 처음 기자로 활동하던 시기가 한국 영화의 부흥기가 태동하던 때와 딱 맞물렸죠.
네, 그것도 운이 좋은 거죠. 어떻게 생각하면 저랑 비슷한 나이대의 감독들이 한국 영화의 지금을 일군 분들이죠. 우연히 그런 사람들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고, 비슷한 시기에 사회 활동을 했죠. 그런 면에서 굉장히 운이 좋아요. 제가 만약 한국 영화의 암흑기인 1970~1980년대에 활동했다면, 굉장히 힘들었을 거예요.
 
한국 영화 부흥기의 효시를 언제로 봐요?
보통은 세대로 나눠요. 1988년도부터 얘기를 많이 하죠. 그해에 이명세, 박광수, 장선우 등 걸출한 감독들이 연이어 데뷔작을 냈어요. 1990년대 말쯤으로 잡기도 해요. 1995년에서 1999년도쯤이죠. 지금 활동하는 거의 대부분의 한국을 대표하는 프로듀서, 감독, 배우가 다 그때 데뷔했어요. 데뷔가 조금 빠른 박찬욱 감독을 제외하면 봉준호, 이창동, 홍상수가 그렇죠. 부산영화제가 생기고, 〈씨네21〉이 나온 것도 그때죠. 어떻게 보면 1995부터 1999년까지 약 4, 5년의 시기가 지금 우리가 누리는 영화 환경을 만든 거예요.
 
그런데 전 또 새로운 이동진, 새로운 봉준호가 탄생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아까 말한 부흥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평론가는 그걸 또 열심히 읽어내고 비판하던 부흥의 시대가 오래전에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맞아요. 신(scene)에는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인류나 국가처럼요. 한국 영화계에 흐르는 열정이 총량이 있다고 치면, 1999년과 2009년과 2019년은 다르겠죠.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정도의 재능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2020년에 태어난다면 지금의 그 감독처럼 될 수 있을까요? 안 될 거라고 봐요.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진짜라고 해도, 그 재능은 특정 시공간을 만나야 터질 수 있어요.
 
비평집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를 보며 크게 감탄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와보니, 이 많은 수집품을 모으고 또 그걸 모은 곳으로 여행을 다니며 언제 그 많은 글을 썼을지, 상상이 좀 안 가요.
한국에서 제 나이쯤 되는 남성과 비교하면, 시간 쓰는 데 굉장히 큰 차이가 있어요. 일단 저는 살면서 당구(이동진의 학창 시절에는 PC게임과 비교할 만한 놀이가 당구였다)를 친 적이 어릴 때도 거의 없고, 게임도 하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한 게임이 지뢰찾기죠. 텔레비전도 거의 안 봐요. 제가 마지막으로 본 드라마가 〈사랑이 뭐길래〉예요. 1992년도 작품이죠. 골프도 안 치고, 골프채를 잡아본 적도 없어요.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 저는 책을 보고 영화를 보죠. 저라고 하루를 48시간으로 쓰는 비법이 있는 건 전혀 아니고요.
 
아까 잠깐 얘기한 취향의 비무장지대에 대한 얘기를 잠깐 하고 싶네요. 저도 예전에 본 조비를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을 파는 친구에게 ‘팝가수 취향’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저는 에어 서플라이를 좋아하는 사람인데요 뭐.(웃음) 취향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솔직히 얘기하면요. 다만 싸우지 말자는 거죠. 취향에는 설득할 수 없는 측면이 있죠. 어떤 사람들이 ‘취향’이라고 말하는 것의 상당수는 사실 교양이에요. 반대로 또 어떤 사람들이 ‘교양’이라고 말하는 의미의 상당은 사실 취향이죠. 이 두 가지를 섞어서 써요. ‘취향의 비무장지대’는 실용적인 입장에서 말한 거예요. 싸워서 뭘 하겠어요. 그런데 취향 자체를 권력으로 생각하는 힙스터가 있죠. 어떤 특정한 취향을 가진다고 해서 그 취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계급적으로 얕잡아보는 일군의 사람들, 또 그 깔아보는 맛으로 덕질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실제로는 본 조비를 좋아하면서 본 조비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허위의식을 가진 부류도 있고요. 또 자신이 최상위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뻐기고 싶어 하는 부류도 있죠. 그런데 진짜 훌륭한 향유자들은 에어 서플라이를 좋아하면 에어 서플라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죠. 책에 써놓고 제 입으로 말하니까 이상하지만요. (웃음)
 
맞아요. 생각해보면 교양 있고 지식이 넓고 깊을수록 당연히 취향도 넓고 깊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교양을 쌓고 취향을 가꿔온 사람들은 뭔가 진짜를 구분해내려는 욕망 같은 게 있지 않나요? 예를 들어 펄 잼을 좋아하는 사람이 니켈백을 짝퉁처럼 보는 마음이요.
저는 진짜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진실은 확률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특히 취향에 있어서요. 니켈백은 너무 후진 취급을 받잖아요. 근데 니켈백의 어떤 노래는 좋아요. 다만, 니켈백의 음악이 세계에서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겠죠. 어떤 예술이든 간에 그 예술에서의 성취를 일반화할 수는 없어요. 작가라고 해서 어떤 작가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취향의 상대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다 보면 1년만 지나도 아무도 안 볼 것 같은 웹소설의 독자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과 그 웹소설이 동등한 두 작품이라고 주장할 수 있죠. 그렇진 않아요. ‘H.O.T.’가 비틀스보다 위대하다고 말할 수는 없죠. 그렇지만 H.O.T.를 비틀스보단 좋아할 수 있죠.
 
저도 책은 좀 모으는 편인데 집에 놀러 오는 사람 중엔 ‘다 읽었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절대 다 못 읽잖아요.(웃음)
다 안 읽죠. 다 못 읽죠. 다 못 읽는다는 것은 산술적으로 계산해봐도 금방 알 수 있어요. 이 공간에 책이 2만 권 있잖아요. 매일 하루에 한 권 읽는다고 쳐도 60년을 읽어야 2만 권이잖아요.
 
그니까요. 그럼에도 책을 사는 데는 이유가 있잖아요. 다 읽진 않아도 내 머릿속에 어떤 책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를 아카이빙해두는 거죠.
그럼요. 아주 중요하죠. 어떻게 생각하면, 읽지도 않을 건데 왜 갖고 있느냐는 건데, 폼 나라고 갖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어떤 책은 표지만 봐도 안 보는 것보다 훨씬 나은 독서 행위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모든 책을 완독할 필요도 없고, 인간의 삶이 유한하니 그럴 시간도 없고 말이죠. 저는 지적인 호기심이 극단적으로 심한 케이스인데, 특정한 사안에 대해 알고 싶을 때 10권의 책을 본다고 치면, 개중에는 발췌독만 하는 책도 있고 완독하는 책도 있고 그래요. 그게 다 독서 행위예요. 3, 4페이지 읽는다고 해서 실패한 독서는 아니에요.
 
 
‘파이아키아’에는 빨간 수집품들만을 모아둔 공간이 따로 있다.

‘파이아키아’에는 빨간 수집품들만을 모아둔 공간이 따로 있다.

책을 단순히 모으다가 장서를 정리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확립하는 순간이 일종의 분수령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맞아요. 중요해요. 심지어 책을 분류한다는 거 자체가 학문에서 굉장히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죠.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굉장히 중요했던 오래된 지적 목표 중 하나기도 하고요. 책이 적으면 상관없는데, 1000권이나 1만 권으로 늘어나면 분류가 치명적으로 중요해지거든요. 책이 2만 권쯤 되면 제대로 분류하지 않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저도 처음에는 듀이 십진법을 사용해보기도 했어요. 제가 다니던 대학의 개괄식 서가에 가서 거기에 있는 번호를 베껴 적용해보기도 했고요. 근데 장기적으로는 제게 안 맞는 방법이더라고요. 분야별로 나누고, 그 분야의 작품과 2차 저작물로 또 나누는 지금의 방식을 만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대로 가져가고 싶을 만큼 좋은 분류 방식인데 오늘 책장을 돌아보며 하나 가슴 아픈 걸 봤어요. 이별이 생겨요. 예를 들면, 김수영의 산문과 시 전집이 분류로 나뉘어 따로 있더라고요.
약간 그렇긴 해요. 예를 들어 전집을 모으려고 한다면 한 작가의 작품이 무리에서 떨어져 이별하는 순간도 생기죠. 근데 또 어떤 경우엔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하면 그 사람의 모든 걸 같이 모아둬요. 예를 들면 제가 좋아하는 이승우 작가는 소설가지만 에세이도 쓰거든요. 그럴 경우엔 이승우 작가의 책은 대분류를 나누지 않고 한 30권 정도를 저기 위에 모아뒀어요.
 
책 정리하는 방법을 들을 때면 항상 재밌더라고요.
지금 저도 인터뷰가 재밌는데요,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예요.
 
덕후지만, 그냥 덕후는 아니었고, 이제는 덕질의 대상이 됐어요. 덕질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덕후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죠. 저 자신이 뼛속 깊이까지 덕후니까요. 그런데 저는 누군가를 덕질한다고 해서 덕질의 대상을 신성시하진 않아요. 제 평생 가장 깊게 덕질한 사람이 핑크 플로이드의 로저 워터스인데요. 그렇다고 해서 그를 신성화하진 않거든요. 또 가끔 덕질하는 사람을 보고 ‘(네가) 이렇게까지 덕질을 한다는 것은 그 마음속에 끝없는 구멍과 동굴이 있기 때문이고 수집은 그걸 허겁지겁 채우려는 행위야’라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덕후 입장에서는 ‘너넨 이 맛도 모르고 인생을 사니?’라는 마음도 있거든요. 덕질이라는 것이, 반드시 갖춰야 할 만한 인생의 어떤 덕목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또 비웃음을 당할 만큼 쉽게 말할 수 있는 특성은 아니거든요.
 
다 중요하지만, ‘신성시하지 않는다’라는 점이 정말 중요하죠.
덕질을 많이 하다 보면, 점점 더 쉽게 얘기하면 나중엔 덕질의 대상에게 뭔가를 바라게 되기도 해요. 로저 워터스를 너무나 좋아하는 영국의 음악평론가를 상정해보세요.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을 수 있단 말이에요. 이게 구체적으로 발전을 하게 돼요. 처음엔 로저 워터스의 앨범에 사인만 받아도 황홀하죠. 그다음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로저 워터스랑 차 한잔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져요. 그다음엔 로저 워터스 집 근처로 이사를 가요. 이런 식으로 점점 덕질의 대상에게 뭔가를 바라게 될 수 있단 말이죠. 심하면 결국 스토킹이 되기도 하고요. 덕질의 감정은 기본적으로 순수한 감정이에요. 하지만 감정에는 굉장히 난폭한 측면이 있어요. 그걸 덕질하는 입장에서도 덕질의 대상인 입장에서도 경계하는 편이에요.
 
영화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요. 개중에는 모든 예술을 뒤로하고 영화를 무조건 신성시하는 케이스도 있죠.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그런 면에서 선을 참 잘 지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믿기도 하고요.
여기에 관해서는 책 한 권을 쓸 수도 있을 텐데요. 그게 말하자면 일원론자 같은 얘기예요. 영화가 너무 소중하지만 “세상에서 영화가 가장 소중하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순간, 영화폭력주의자가 될 수도 있는 거죠. 저는 세상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이유가 (다양한 영역의) 근본주의자들 탓이라고 생각해요. 종교에 대한 근본주의자든, 정치에 관한 근본주의자든, 아니면 사랑에 관한 근본주의자든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단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다”라고 말했고, 막스 뮐러는 “하나를 아는 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자이다”라는 말을 남겼죠. 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비교에서 오는 것인데, 하나만 아는 사람은 비교 대상이 없고 맥락이란 게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거예요. 근데 하나만 알고 이것이 전부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폭력이 시작되는 거죠. 자기 마음속에서든, 바깥을 향해서든.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해서 죄송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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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박세회
  • PHOTOGRAPHER 송시영
  • ASSISTANT 윤승현
  • DIGITAL DESIGNER 이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