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아트테이너를 비판하는 비평가에 대한 비평

‘아트테이너’라는 말은 왠지 부끄럽다. 왜일까?

BYESQUIRE2021.05.28
 
 

아트테이너를 비판하는 비평가에 대한 비평

 
인스타그램 피드에 추상화 작품 사진이 뜬다. 추천수가 많은 게시물이다. 작가 이름은 솔비. ‘가수이자 배우이자 화가’라는 설명이 보인다. 이런 사례가 솔비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구혜선, 송민호, 하정우, 하지원까지 미술가로 활동하며 개인전을 열었다. 〈슈퍼스타K〉 출신으로 위너의 멤버로 활동하는 강승윤은 사진가로도 활동 중이고, 하정우는 책도 썼다. 생각해보니 가수 조영남도 화가로 활동 중이다. 이런 사람들을 ‘아트테이너’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아트테이너’라는 말은 왠지 부끄럽다. 왜일까? 알다시피 이건 아티스트와 엔터테이너를 결합한 신조어인데, 아무래도 내 머릿속에서는 아티스트와 엔터테이너가 개념적으로 위계를 따르기 때문이다. 위에 ‘아티스트’, 아래에 ‘엔터테이너’. 이 둘의 경계를 없애려고 애쓰고 있지만, 은연중에 위계적으로 가치 판단을 하게 된다. 어쩌면 밸런스 문제이기도 하겠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나만 이런 건 아닌 것 같다. 이런 ‘연예인’들의 ‘예술’ 활동에 비판적인 의견도 많다. 대표적으로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해서 비전문 영역에서 개인적 이득을 취한다’는 관점이다. 특히 미술 분야는 대중적인 시장은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시장이고, 취향이 아니라 자신만의 관점과 훈련된 안목이 필요하다. 그저 돈이 많다고, 단지 예쁜 걸 좋아한다고 즐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작품을 소비하는 쪽에도 이런 훈련이 필요한데, 그림을 그리거나 작품을 만드는 쪽은 말할 것도 없다. 중학교부터 전문학교가 존재하고, 예술고등학교와 예술학부, 석사와 박사 과정까지 체계화되어 있다. 게다가 누구나 알다시피, 예술을 전공한다는 것은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진로를 모색하기 위한 10대 시절의 기회비용을 포기하고 한 분야에 ‘올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예술적 가치가 ‘압도적이고 천재적인 영감’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예술적 가치란 이런 구조적인 체계, 엘리트 교육 시스템에서 기인한다. 물론 내 생각이다.
 
이렇다 보니 ‘연예인’의 ‘예술’ 활동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혹은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무임승차처럼 보이고, 자격이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작품에 대해 낮은 평가를 내리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작품성과 정체성은 얼마나 연관되어 있을까? 또한 훈련을 받은 전문성이 작품의 질과 가치를 판단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사실 나는 오랫동안 이런 문제를 고민했다. 대중음악계야말로 다른 영역을 오가는 사람들 천지였기 때문이다.
 
존 레넌은 작가이기도 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배우였다. 브라이언 이노는 철학가이기도 했고, 조동진과 정태춘은 시인이기도 했다. 언니네이발관의 이석원은 작가, 〈삼진그룹토익영어반〉과 〈모범택시〉에 악당으로 출연한 백현진은 화가이기도 하다. 3호선버터플라이의 멤버였던 성기완은 시인이기도 하다. 미미시스터즈의 작은미미는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하다. 이 외에 영화감독, 디자이너, 건축가 등등 겸업하는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하다.
 
우리는 대체로 한 사람이 하나의 정체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소설가는 소설가, 교사는 교사, 화가는 화가 혹은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라고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정체성은 입체적이고 탄력적이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다. 이미 많은 사회학자들이 정체성에 대해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증명했다. 주디스 버틀러, 레베카 솔닛, 수전 손태그 같은 연구자들은 현대사회가 개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조적으로 고정시키고 그로부터 제도적 억압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이론을 구체화하면서 스스로 다층적인 존재가 되기도 했다.
 
이걸 받아들이는 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누구나 여러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면, 연예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아트테이너’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 구분될 수는 있다. 비전문가의 입장에서는 가수가 미술 활동을 하는 것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기자가 소설가로 데뷔할 수도 있고, 배우가 감독이 되기도 하는 일은 사실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전혀 없기도 하다. 가수가 화가로 활동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일이다.
 
하지만 전문가 입장에서는 조금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을 하는 입장이라면, 아트테이너의 존재를 규정하는 건 매우 도전적인 이슈가 된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이들을 ‘대중적 인기에 편승한 무임승차자’로 규정하는 건 그중 가장 쉽고 게으른 판단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솔비의 그림이 높은 가격에 판매되는 것이나 송민호의 그림이 영국의 유명 갤러리에 전시된다는 소식이 전문가에게 모종의 불편함을 주었다면, 전문가는 그 불편함의 원인을 탐구해야 하지 않을까?
 
비평의 존재 이유는 역할이 아니라 위치에 좌우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한때 작품의 숨은 의미를 해석하는 일로 여겨진 예술 비평은, 미디어가 대중에서 개인으로 분산되면서 전면에 드러난 개별적인 목소리들로 인해 다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해석보다 예술적 성취를 온전히 감각하는 일, 그 감각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일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평가나 전문가는 의미보다 질문을 찾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의미가 아닌 질문을 찾자면, 그 방향은 예술가와 작품을 향하기보다는 그 결과물이 놓이는 사회적 위치와 맥락, 무엇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내면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아트테이너에게서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그 불편함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 자체를 탐구해야 한다. 전문가인 내가 아트테이너를 바라볼 때 느끼는 불편함은 어디서 오는가? 그 불편함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불편함을 느끼는 나는 수년 전 로스쿨 설립을 반대했던 법조인들, 권력으로 작동하는 등단 체계를 옹호한 문단인들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내는 과정은 아트테이너를 ‘대중적 인기에 편승한 무임승차자’로 규정하는 것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일 것임은 분명하다.
 
적어도 나는 이 방향을 잃지 않는 것, 그로부터 자기 자신의 감각을 쪼개고 설명해내는 일이야말로 연예인, 상업전시, 미디어, 팬덤, 파인아트, 권력구조 등이 얽힌 여러 문제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성찰하는 비평가의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아트테이너’에 대해 뭘 이렇게까지 파고들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그게 결국 소소하게나마 지키고 싶은 나의 직업 윤리라서 어쩔 수 없다.
 

 
Who's the writer?
차우진은 듣고 읽고 쓰는 사람이다. 주로 대중음악, 라이프스타일 분야를 다루면서 팬덤, 미디어, 인터넷과 산업구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