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후원금의 90%를 운영비로 사용하는 구호단체에 분노하는 나, 비윤리적인가요?

없던 윤리가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에스콰이어 코리아>는 지금까지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 최첨단 윤리의 쟁점을 철학자와 함께 고민해보려 한다.

BYESQUIRE2021.07.08
 
 

Ethics on the Edge

 
Q. 20대 여성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제3세계 사람들을 돕는다는 모 기관에 지속적으로 후원을 해 왔어요. 제가 낸 돈  1만원, 3만원이 힘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죠. 그런데 제가 내는 후원금 중 5~10% 정도만 진짜 후원에 쓰이고, 나머지는 그 기관 직원들의 월급으로 돌아간다는 기사를 보게 됐어요. 아이들이 고통받는 영상을 앞세워 후원을 받으면서 정작 그 돈이 전부 후원금으로 쓰이지 않는다고 해 충격을 받았고, 해당 기관들의 행동이 위선으로 느껴졌어요. 누군가는 ‘비영리기관의 직원도 먹고는 살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행정비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비참을 극대화하며 TV 홍보에 비용을 쏟는 자칭 비영리단체들에게 어쩔 수 없는 분노를 느껴요. 이렇게 분노하는 저는 과연 윤리적으로 잘못된 걸까요?
 
A. 제3세계 가난한 어린이를 돕는다는 구호단체들이 후원금을 받아 5% 정도만 그들을 돕는 데 쓰고, 나머지는 자신들을 위해 쓴다면? 실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분노할 만합니다. 도덕적인 일을 한다는 사람들의 위선에 분노하는 건 윤리적으로도 필요한 일이지요.
 
구호단체의 위선과 부패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 그 행태도 다양합니다. 아동구호단체인 ‘세이브 더 칠드런’은 이미 지난 2008년에 인도주의 단체 직원들과 평화유지군 등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성폭행과 성매매, 아동 포르노 제작 등 범죄를 저질렀다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영국의 국제구호단체인 옥스팜 직원들이 아이티에서 지진 구호활동을 벌이던 와중에 집단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성매매 사실이 밝혀진 이후 영국과 스웨덴 정부는 지원을 끊었고, 7000여 명 정도의 정기 기부자가 후원을 중단했습니다. 국내에서도 위안부 피해 여성 지원단체인 ‘정의기억연대’가 후원금과 기부금을 남용했다는 고발이 있었고, 해당 사건은 아직도 재판 중입니다.
 
비영리기관의 직원들 역시 먹고는 살아야 하겠지요. 또 조직이 움직이고 활동하려면 일정 정도의 운영비와 사업비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여야 적당하다는 일반적인 규정을 정하긴 쉽지 않겠지만, 약자와 가난한 자들을 돕는다는 기관이 영리기관과 비슷한 수준으로 자신들을 위해 지원금을 지출하거나 심지어 더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겁니다. 급여를 받는 직원들의 숫자도 가능하면 적어야 할 것이고, 급여도 최소한 일반 영리기업보다는 적어야 할 겁니다.
 
이는 단순히 인건비나 운영비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들은 사업을 위해 특히 광고를 자주 활용하는데, 그 광고는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의 가난과 비참함을 과도하게 연출하곤 합니다. 구호의 대상을 더 불쌍하고 비참하게 보이도록 말이죠. 극적으로 연출할수록 사람들이 혹하기 쉬울 것이고, 후원금이나 기부금도 많이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과도한 연출을 통해 후원금이나 기부금을 동원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불편을 넘어 거부감을 야기합니다. 이런 연출은 ‘착한 시늉’을 하는 데 그치는 위선을 넘어, 나쁘고 사악한 일입니다. 자신의 선함을 내보이는 일이 그 자체로 나쁜 일을 내포하게 되는 겁니다.
 
자선단체의 위선과 비리에 대한 분노는 그러므로 정당합니다. 다만, 가난과 비참을 구호해야 한다는 어려운 문제는 남습니다. 우선 그 조직들이 여러 형태로 받은 지원금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해야 하겠지요. 자발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은 낮기 때문에, 제도적인 차원에서 보완이 필요합니다. 비영리기관에 대한 회계감사와 사업평가 강화 등도 이뤄져야 하겠지요. 하지만 정책과 제도적 보완만으로 충분한 일은 아닙니다. 비영리기관을 감독하는 기관 역시 조직 구조가 동반하는 나쁜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이렇듯 정책과 제도를 강화하는 것만으로 구호사업의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의 비참함을 구호하는 기관의 문제가 남고, 그 기관을 돈으로 돕는 일의 문제도 계속 남게 되는 겁니다.
 
구호사업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일부의 위선으로 생기는 건 아닙니다. 그 이전에,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선한 행위 자체가 사업이 되고 권력이 되는 과정이 문제일 겁니다. 구호사업 조직은 누군가의 비참함을 연출하는 동시에 자신의 선함을 보여줍니다. 그로 인해 일종의 권력을 얻지요. 결국 선한 행위로 사업을 하며 권력을 유지하는 조직의 존재가 문제일 것입니다. 또 자신의 선함을 연출하는 행위도 문제로 남겠지요.
 
누군가는 공공적 정책과 제도를 통한 개선을 믿고 다시 후원에 나설지도 모릅니다. 이를 통해 자신과 세상의 선함을 믿으며 위안을 얻을 수 있겠지요. 또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못하고 기부를 꺼릴 수도 있습니다. 내 친구 한 명도 공익기관들을 믿지 않고, 후원을 통해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자신과 세상의 선함을 믿으며 여전히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는 아내의 후원을 막지 않습니다.
 
고통에 빠진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돕고자 하는 조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들을 돕는 개인들이 있습니다. 돈으로 누군가를 돕는 일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돈으로만 누군가를 도우려고 한다면 반드시 사달이 날 겁니다.
 

 
 
Who's the writer?
김진석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인하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회비평〉 편집주간, 〈인물과 사상〉과 〈황해문화〉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초월에서 포월로〉, 〈기우뚱한 균형〉,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더러운 철학〉, 〈우충좌돌 중도의 재발견〉, 〈소외되기 소내되기 소내하기〉, 〈강한 인공지능과 인간〉 등의 저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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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OR 김현유
  • WRITER 김진석
  • Illustrator 양승희
  • DIGITAL DESIGNER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