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xsomnia
」
“너 깬 거야?”
“음… 응.”
잠시 머뭇대는 듯하더니,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욕구가 가득한 목소리다. 이어 그는 삽입을 시도했다.
“잠깐만.”
그녀는 똑바로 앉더니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본다. 그의 입가에서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사라졌다. 동시에 그의 눈동자 뒤쪽, 깊은 공간이 밝아져 왔다. 그가 물러나고 내가 의식의 조종간을 다시 차지한다. 헐크가 사라진 자리에 배너가 돌아왔다.
“정신이 들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하려면 조금 복잡하다. 일단 이곳은 내 집 침실이고, 지금은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3시다. 낡은 에어컨이 털털거리며 돌아가고 있다. 우리는 두 시간 전에 잠들었지만, 방금 내가 섹스를 하려고 그녀를 깨웠다. 사실 섹스를 거의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삽입만 빼고 모든 걸 다 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었다. 그녀가 모든 행동을 멈추고 나를 빤히 바라보기 전까지, 나는 그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내 육체를 조종한 건 다른 사람이다.
나는 섹솜니아(Sexsomnia) 증상이 있다. 섹스와 잠을 의미하는 영어의 어근 ‘솜니(somni)’를 합친 이 단어는, 잠든 상태에서 섹스를 시도하는 수면장애다. 몽유병과 흡사하지만, 걷거나 말하는 대신… 섹스를 한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의 다섯 번째 개정판(DSM-5)에서는 비렘(NREM, non-rapid eye movement) 수면각성장애로 분류한다. 즉 꿈도 꾸지 않고 가장 깊게 잠든 상태에서 드러나는 증상인 셈이다.
완전히 잠든 상태에서 파트너를 애무하고, 오럴 섹스를 하고, 심지어 삽입하고 오르가슴을 느끼기도 하는 게 주요 증상으로 여성에 비해 남성에서 세 배 정도 더 흔하게 나타난다. 내 경우에는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잠이 부족하거나 술을 마셨을 때 이 증상이 나온다. 스트레스가 심한데 잠을 못 자고 술을 마신 날이면 증상은 더욱 심해진다. 사실 섹솜니아를 앓는 이들에겐 흔한 일이다. 이런 장애에 이름이 있다는 것조차 나는 최근에 알았다. 그전까지 나는 밤마다 내 안에 억눌러둔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그’와 함께 지냈다. 그의 존재를 처음 인식한 건 사춘기 무렵, 학창 시절 살던 집에서였다. 새벽녘에 눈을 떴더니, 모든 게 아스라이 멀게 느껴지는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분출을 향한 원초적이고 엄청난 욕구만이 생생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그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를 제대로 알게 된 건 대학을 졸업한 이후였다. 당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 시절의 여자 친구와 나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같은 침대를 썼다.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연애를 시작한 지 두세 달이 지난 무렵부터 그가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분명 잠들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땐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거나 삽입을 한 상태이기도 했다. 가면을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의식은 간간이 천장 위에서 그런 그의 모습을 흘끗 내려다볼 뿐이었다.
나의 이런 수면장애가 그 연애 관계에 미친 영향은 더욱 묘했다. 나는 그녀가 그를 결코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그녀에게 그의 등장은 ‘깜짝 선물’과도 같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깨어 있는 내게서는 느낄 수 없는 강렬함이 잠든 나의 육체를 지배한 그에게서 느껴진다고 말했다. 보통의 나는 섹스를 할 때 모든 걸 맞춰주는 편이었지만, 그는 주도적이었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좋아할지 파악하려 노력했기에 그녀에게 주도권을 넘겼지만,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했다. 내 모습을 한 그는 나와 전혀 달랐고, 그녀는 평소와 다른 나의 그 모습을 좋아했다. 그녀는 나를 좋아했지만 그도 좋아했던 것이다. 궁금해졌다. 잠들어 있는 내 안에서 그런 욕구가 터져 나온 셈인데, 그럼 가면을 쓴 사람은 과연 나일까, 그일까?
그의 존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환영받지 못하게 됐다. 이틀, 사흘, 심지어 나흘 연속으로 등장해 그녀를 더듬었기 때문이다. 그가 된 상태에서 그녀를 오르가슴으로 이끌다가 나로 돌아와버리는 바람에 멍한 상태로 동작을 멈추는 일도 가끔 생겼다. 간밤에 코를 고는 것 이상으로 격렬한 행위를 한 기억이 전혀 없는데도, 아침이 되면 그녀에게 “어젯밤에 굉장했어”라는 말을 듣는 경험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 같은 나날이었다. 나는 자기 전에 음식을 먹지 않도록, 특히 술을 마시지 않도록 노력했다. 눈에 띄게 피곤하거나, 잠이 부족하거나, 취했다고 느낄 때마다 혼자 있으려 했다. 점점 나는 다른 사람들 옆에서 잠자는 것이 무서워졌다. 내가 사랑하는 여성 옆에서 자는 것도 물론 두려웠지만, 친구들과 떠난 여행지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잠자리에 드는 상황이 걱정스러웠다. 혹시나 게스트하우스에 갑자기 등장한 ‘그’가 모두가 잠든 사이 옆 침대의 낯선 여성에게 접근하기라도 한다면? 여행을 줄였고, 그 덕에 내 친구들은 아직까지 발정 난 내 도플갱어를 만난 적은 없다.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 고민 글을 게시해봤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바보냐? 같은 침대에서 안 자면 되잖아.” 또는 “그냥 헤어져!” 같은 무심한 댓글만이 달렸다. 댓글이 쓸모가 없었다면, 기사는 나를 겁나게 했다. 검색엔진에 ‘섹솜니아’를 미처 다 입력하기도 전에 연관 검색어로 ‘형사 사건’이 뜬 것이다. “’잠든 사이에’ 전 여자 친구를 강간한 20대 남성”, “’섹솜니아’ 증상을 주장한 강간 피의자”라는 제목의 기사들을 보며 나는 분열 상태에 빠졌다.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침대보가 구겨져 있었고 침 자국이 나 있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것, 그건 사람을 미치게 하는 일이었다. 매일 아침 필름이 끊긴 다음 날의 공포와 같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했다.
어느 날은 일어났더니 침대보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핏자국이 있었다. 혹시 내가, 아니 그가 어떤 폭력적인 짓이라도 저질렀을까 겁에 질렸던 나는 여자 친구가 생리 중이었다는 사실을 안 후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날에는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었더니 내 가슴팍에 손톱으로 긁은 게 분명한, 새빨갛고 날카로운 자국이 세 줄 나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기는 더욱 힘들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날 그녀는 술에 취해 있었기에 간밤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건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가 없는 문제였다. 내가 가진 장애였으니까.
나는 어쩌다 섹스에 미친 하이드와 살게 된 것일까? 나는 정색하는 법, 감정 기복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유년 시절부터 내가 만난 남성 어른들은 내게 ‘착한 사람이 될 것’, ‘남들에게 잘 맞춰주는 사람이 될 것’을 강조했다. 동시에 좋지 못한 진심을 표현하거나 변동이 심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자제하도록 했다. 나는 또래 아이들과 달리 차분한 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 고등학생 때는 성격이 급한 아이들을 딱하게 여기기까지 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자제력을 잃었던 것 같다. 깨어 있는 내내 차분한 사람으로 보이려 애썼지만, 그러는 동안 무엇인가-혹은 누군가가-내 안에서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밤에는 각성과 격렬함이 터져 나왔고, 낮에는 드러내지 못한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는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 점점 크게 자라났다. 나는 패닉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내 안에 억눌린 무언가가 있긴 했어도 누군가를 해치거나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기에,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밤이 되면 슬그머니 일어나는 그를 억누르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큰 수확은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결국 나는 새로 만나게 되는 연인이나 파트너에게 그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가장 낫다는 판단을 했다. 참고로 이건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에 대해 잘 알게 해준 첫 번째 연인과는 섹솜니아와는 무관한 이유로 헤어졌다.
여러 차례의 경험 후에, 그가 무너뜨리려 하는 건 나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누구에게도 섹스를 강제한 적이 없었다. 정말 그랬다. 상대방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그는 멍청한 미소를 지은 채 돌아누워 나와 함께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한밤중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변태적인 범죄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그의 존재를 환영해주는 다른 곳을 찾게 되었다. 정신 상담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상담자를 만나 편안하게 치료용 침대에 드러누우면 한밤중의 모습과 다른 모습의 그가 나타났다.
그는 내 입을 통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내면에서는 분노의 물결이 거칠게 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분노만 느끼지 않았고, 섹스만 필요로 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기쁨이었다. 그는 기쁨을 간절히 원했다. 상담자는 나에게 ‘육욕적 분노’, ‘육욕적 에너지’라는 표현을 가르쳐줬다. 상담자는 리비도를 육욕이자 단순한 성적 각성 이상의 무언가라고 생각하라고 권했다. 리비도는 삶을 이끌어가는 생명력이기도 했다. 욕망, 흥분, 놀라움, 사랑, 소망, 필요, 섹스, 떡치기, 소리지르기-그 모든 걸 포함하는 것이었다. 내겐 리비도가 가득했다. 의식적으로 피했던 리비도는 무의식의 삶으로 흘러넘쳤고, 꺼져 있어야 할 때조차 스스로 전원 스위치를 켜버릴 정도로 많았다. 그렇게 나의 리비도는 그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열정이자 갈망, 슬픔이었다. 그와 나, 우리 둘 다 간절히 바라던 기쁨이기도 했다.
그는 정말 많은 것을 갈구했다. 결혼식장에서 춤을 추고, 실패나 거부를 마주했을 때 소리를 지르며 감정을 표현하고, 사랑을 나누며 기절할 듯 황홀해하고, 주저하지 않고 눈물을 터트리고, 연인으로부터 무한한 애정을 받고 싶어 했다. 해서는 안 된다고 금지돼 있던 일들, 남자에게 금기시되어 있던 일들을 갈구했다. 나는 마침내 정체를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의 모습, 또 다른 나의 자아이자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그를 제대로 알게 됐다. 그는 성인이 아니었다. 그는 어린애였다. 살아 있다는 데서 오는 수많은 감정을 느끼고 싶었을 뿐인 민감한 어린 소년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를 받아들였다.
지금 그는 나와 함께 있다. 더 이상 내가 없는 밤에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제는 그 역시 햇빛을 마주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