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씨 자체가 에너제틱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쾌한 사람, 재치 있는 사람이잖아요. 생각해보니 그간 그런 인물을 연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네요.
네, 없었어요. 그 이야기를 영화 관계자 분들한테도 되게 많이 들었어요. “조용하고 얌전한 캐릭터만 하지 말고 좀 색다른 걸 해봐라.” “코믹한 걸 시도해봐라.”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그래서 좀 더 다양한 시각으로 캐릭터를 선택해보려고 노력했고요. 그런데 사실 원래 제 성격이 있다고 해서 그걸 캐릭터로 녹여내는 건 또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저 자체가 에너지를 뿜어내려면 겁을 좀 내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다가 출발하는 경향도 있고요.
저도 모르게 자꾸 평범하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에너지를 쏟아본 경험이 거의 없으니까 ‘이 정도면 무난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하고 오만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자꾸 합리화하는 거예요. 〈서울대작전〉 촬영할 때도 감독님이 오셔서 “준기는 여기서 지금 더 분위기를 바꿔줘야 해” 하시면 그제야 깨닫곤 했죠. ‘아 내가 또 평범하게 가려고 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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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 대신 안정성을 택한다고 할 수도 있고, 냉철한 자기 객관화라고 볼 수도 있겠죠.
만약 더 똑똑하고 뛰어났다면, 더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캐릭터에 동화된 상태를 더 잘 갖고 갈 수도 있었겠죠. 그러면 제가 뭘 해도 그 캐릭터가 하는 행동이 됐을 거고요. 제가 애드리브를 잘 하지 못하게 된 이유도 대사와 대사 사이에 캐릭터가 아닌 순간이 계속 존재한다는 부분 때문인 것 같거든요. 정말 어려운 일이죠. 자칫하면 연기가 아닌 옹성우가 치는 드립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경험 많은 선배님들을 보면서 늘 놀라요. 어떤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그 캐릭터가 할 법한 것들이 되니까.
그렇다고 성우 씨가 소극적으로 연기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최근 출간된 〈커피 한잔 할까요?〉의 대본집만 봐도 느낄 수 있던데요. 작중 강고비(옹성우의 극 중 캐릭터)의 표현이 대본과 다른 지점들이 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마지막 화에서 고비가 아포가토를 먹고 났을 때의 반응도 그냥 ‘환하게 웃는다’고 쓰여 있는데, 성우 씨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표현했고요.
그랬죠. 처음 대본 리딩을 할 때부터 그 장면에서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저도 울컥했고, 고비도 그랬을 것 같았고요. 떨어져 보낸 긴 세월과 그리움이 그 한 잔에 담겨 있는 거잖아요. 커피의 맛뿐만이 아니라 가게 내부의 분위기, 사장님이 있고, 내가 처음 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던 순간의 기억까지 다 담겨 있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먼저 생각을 해버리면 잘 못 울어요. ‘이 장면은 울어야 할 것 같은데’ ‘울고 싶은데’ 하면 눈물이 잘 안 나요. 그런 걸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이 1순위가 되어버리니까. 이 장면을 이렇게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버리니까요.
그 장면을 받아들였던 솔직한 느낌이 어느새 표현에 대한 욕심이 되는 거군요.
그래서 오히려 그 전에, 10화를 찍을 때 좀 신기한 경험을 했죠. 고비가 사장님께 해고를 당하고 울잖아요. 사실 그 장면도 대본에는 그냥 충격을 먹고 서운해하는 정도로 표현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촬영을 하면서 사장님의 말을 듣는데, 갑자기 불쑥 눈물이 나는 거예요. 놀라서 참으려고 했는데도 그냥 흘러나왔어요. 제가 전에는 그래본 적이 없었거든요. 울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나는 게. ‘내가 들었구나’ 싶더라고요. ‘박호산 선배님의 대사를 내가 들었구나.’ 컷이 났는데도 어안이 벙벙했죠.
생각지도 못한 걸 했는데 그게 덜컥 오케이 컷이 됐으니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이 신에서 이렇게까지 감정 표현을 하는 건 좀 오버 아닐까?’ 그래서 감독님한테 가서 물어봤죠. 눈물까지 흘리는 건 좀 과하지 않느냐고. 그랬는데 감독님이 약간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보기에는.(웃음) 이대로 좋다고 하셨고, 그래서 기분이 되게 이상했어요. 이 경험은 뭘까? 어떻게 한 거지? 어떻게 해야 하지? 제가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마지막 화에서 좀 만족스럽지 않게 나온 걸 수도 있고요.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렁그렁 정도여서 좋았던 것 같은데요. 감독님도 그 연기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작품 전체에서 이례적인 호흡의 롱테이크로 편집한 게 아닐까 싶었고요.
그렇죠. 이게 그런 거예요. 연기가,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내가 하는 게 1순위가 아니고… (혼잣말처럼)아, 어렵다.(웃음) 어쨌든 감독님과 시청자들이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한 거잖아요. 너무 내 욕심과 감정에 치우쳐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만약 제가 100% 만족할 만큼 표현을 했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렇게 못 느끼면 실패한 거니까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도 제가 생각을 잘 해봐야 하고 성장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아쉬운 부분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성장을 하면서 작품들을 다시 보게 되니까. ‘그 안에서 이런 걸 했어도 될 것 같은데’ ‘이 캐릭터라면 이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더 다양한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그래도 제가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아요. 예를 들어 〈열여덟의 순간〉에서 준우의 생일이 나온 적이 있는데, 팬들이 아직도 그날이 되면 준우 생일 축하한다고 글을 올려주거든요. 그럴 때면 너무 신기해요. 그 캐릭터가 진짜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것 같고. 제가 뭔가를 했다기보다 팬들이 계속 기억해주고 죽지 않게끔 유지시켜주는 거지만, 그럴 땐 신기하고 뿌듯하죠.
베이지 트러커 재킷, 화이트 니트 모두 에비너.
며칠 뒤에 팬미팅이 예정되어 있잖아요. 2년 만의 팬미팅인데, 기분이 어때요?
긴장되고, 설레고, 떨리고, 그렇습니다. 사실 팬미팅을 하기로 마음먹는 것도 쉽지 않았거든요. 워낙 변수가 많은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기를 걱정하는 것도 어쩌면 제가 겁을 먹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몇 년간 그런 기회가 없다 보니 무대에 올라서 만난다고 생각하면 좀 무섭기도 하고. 아이러니한 게, 너무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무서운 거죠. 지난 기다림의 시간을 충족시켜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그런데 그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요. 맞는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왜 휴가 나온 군인들 보면 유독 여자 친구랑 그렇게 어색해하잖아요.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에 더 긴장을 하게 되고, 변한 모습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걱정도 되고.
맞아요. 그런 마음이 없다면 두려움도 없겠죠. 내가 무대에서 어색하지 않을까, 부족하지 않을까, 틀리지 않을까, 이런 걱정들도. 제가 이번 팬미팅에서 솔로 앨범 〈LAYERS〉의 다섯 곡 중 네 곡을 선보이려고 하거든요. 팬들은 분명 저라는 사람에게서 춤과 노래를 보고 싶어 할 거고, 팬미팅은 팬들께 선물을 드리는 자리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계속 두려운 거예요. 일단 제가 앨범을 내고 한 번도 완곡으로 불러본 적이 없어요.
한창 앨범 활동 할 때도 ‘GUESS WHO’ 같은 노래가 굉장히 힘들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웃음) 맞아요. 그 한 곡도 너무 힘들었는데.
인터뷰 초반에 얘기했듯이 성우 씨는 계속 새로운 걸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이니까, 달라진 느낌을 어색해하지는 않을지 걱정도 되겠네요. 일단 활동 반경부터 많이 달라졌잖아요.
아, 맞는 말인 것 같아요. 변화가 많았죠. 어쩔 수 없는 변화도 있었고, 환경 변화에 따라오는 스스로에 대한 규제도 있었고요. 아이돌 활동은 팬들과 끊임없는 소통이 있잖아요. 앨범을 내면 거의 한두 달 동안 계속 공연도 다니고 콘서트도 하고, 팬사인회라든가 여러 형태의 만남의 자리도 생기고, 거의 매일매일 보는 거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혼자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됐죠. 팬들을 직접 만나는 자리는 정말 오랜만이고요.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한다는 게 사람들과 ‘커넥팅’되어 있는 상태에서 힘을 받을 수 있는 작업이라면, 연기는 자기 안에 침잠하고 집중해야 하는 작업일 것 같기도 하네요. 저는 짐작만 할 뿐이지만요.
그렇다기보다는… 연결 방식이 다른 것 같아요. 적어도 저는 늘 생각하고 있거든요. 예를 들어 연기 모니터링을 할 때도 뭘 잘 못한 것 같으면 ‘아 실망할 것 같은데’라는 식으로 생각을 하고, 또 만족스러우면 ‘이건 팬들이 정말 좋아하겠구나’ 생각하고요. 정말 일상에 스며들어 있죠. 말로는 제대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제가 어떤 식으로 해나가야 더 바른, 좋은 성장의 길을 걸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어떻게 더 만족과 자부심을 드릴 수 있을지, 그런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저의 강점은… (오래 고민하다가) 저라는 점인 것 같아요. 하하하하.
두 번째 인터뷰가 끝나가는데 저는 여전히 옹성우 씨를 잘 모르나 봐요. 이렇게 패기만만한 표현이 나올 줄이야.
(웃음) 자기애나 자존감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는데요. 옹성우의 장점은 옹성우인 것 같아요. 저는 저만의 느낌이 확실하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그걸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할 만큼 제가 성숙하지 못했고 아직 진해지지 못했을 뿐인 거죠. 하지만 바꿔 말하면 이제 시작됐고, 여전히 성장 과정에 있고, ‘이 친구가 더 배우고 더 성숙해지고 더 진해진다면 어떤 새로운 분위기와 느낌을 내게 될까?’ 그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도 장점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아직 옹성우가 많은 분께 확고한 이미지를 준 적이 없다는 것, 이제 보여줄 게 많다는 것, 그게 제 강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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