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그 여행지에 절대로 가지 않을 이유 part.1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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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 여행지에 절대로 가지 않을 이유 part.1

당신은 이곳들에 가지 않을 것이다. 팬데믹 때문만은 아니다. 일찍이 그곳에 다녀온 자들은 이름부터 생소한 이곳들을 아무에게나 추천하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 개인의 여행으로 곱씹을 뿐.

오성윤 BY 오성윤 2022.04.09
 
 
Batanes, Philippines 
태풍을 찾아가는 사람들, 태풍과 사는 사람들
최갑수(여행작가)
바타네스를 찾은 건 15년 전. TV 여행 프로그램 촬영 때문이었다. 세부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이제 그곳으로 간다고 했을 때, 나를 바라보던 가이드의 이상한 눈빛을 지금도 기억한다. ‘도대체 거길 왜… 가는 거야?’ 필리핀 사람들도 좀처럼 가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마닐라에서 홍콩이나 싱가포르를 여행하는 것보다 3배 정도 비용이 더 드는 데다 너무 오지였기 때문이다.
바타네스는 루손섬과 대만 사이에 위치한 1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제도다. 당시 섬에는 1만8000명 정도가 살았는데, 아마 지금도 인구가 크게 늘지는 않았을 것이다. 취재를 하며 알게 된 건 이 지역 사람들이 2000년대 초반까지 자급자족했다는 것. 사람들은 물물교환을 하며 살았고 시장이 생긴 건 2005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갔을 때 시장이 처음 생긴 것이다. 그정도로 벽지다.
바타네스를 찾은 가장 큰 이유는 태풍이었다. 태풍이라니. ‘여행 작가가 왜 태풍 때문에 지독한 오지로 가는 거야?’ 하고 의문을 품는 분들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출연자가 지독한 고생을 해야 여행 프로그램 시청률이 그럭저럭 나오는 시절이었다. 근래의 예능 프로그램처럼 여행지의 방과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먹방을 보여주던 때가 아니었다. 나는 담당 PD에게 “PD님, 저도 미술관과 박물관을 아주 좋아한답니다” 하고 어필했지만 그는 기어코 나를 바타네스로 끌고 갔다.
태풍이 태풍이지 뭐, 하고 생각하며 그를 따랐지만 바타네스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섬이었다. 섬의 별명이 아예 ‘태풍의 섬’이다. 필리핀 기상관측 기준으로 슈퍼 태풍에 해당하는 초강력 태풍이 1년에 열 차례 이상 통과한다고 했다. 섬에는 ‘레이더 투콘’이라 불리는 레이더 기지가 있는데, 미군이 그곳에 대형 파라볼라 안테나를 세우려 했지만 강한 태풍이 불어 레이더가 통째로 날아가버렸고, 이후 미군은 레이더 설치를 아예 포기해버렸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바타네스에 머무는 동안 실제로 태풍이 왔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창문을 꼭꼭 걸어 잠갔지만 나와 PD와 카메라 감독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야 했다. “여러분, 제가 드디어 이곳 태풍의 섬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태풍을 만났습니다. 바람이 너무 세서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드네요”라는, 기상 캐스터도 아닌 여행작가도 아닌 멘트를 날리기 위해서. 아무튼 그날은 내가 사는 동안 경험한 가장 무시무시한 날 중 하나였다. 밤새 하늘이 울부짖는 듯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미리 사둔 산 미구엘 맥주를 홀짝이며 이 작은 섬이 태풍에 쓸려 나가지 않기를 비는 것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거짓말처럼 태풍이 사라졌다. 창문 밖으로 비질하는 소리와 아이들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났다. 거리로 나가보니 부러진 나뭇가지와 나뭇잎, 쓰레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커다란 가방을 메고 아침 빵을 팔러 골목을 뛰어다녔다. 아주머니 아저씨 들은 지극히 평화로운 표정으로 빗자루로 거리를 쓸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앞의 나무 전봇대는 반으로 부러져 있었고, 심지어 불이 붙어 활활 타고 있었는데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내 앞을 자전거 탄 아이들이 지나며 ‘굿모닝’ 하고 인사했다. 그래 굿모닝이다, 인마.
태풍이 지나가고 바타네스는 다시 느긋해졌다. 이후로도 나는 일주일을 더 머물렀는데, 주민들과 어울려 아이들 장난감처럼 생긴 그물로 낚시를 하거나, 얌이라는 고구마 비슷하게 생긴 뿌리작물을 캐거나, 말보로 힐이라고 불리는 울퉁불퉁하게 생긴 언덕에서 소 치는 아이들과 놀거나, 오토바이를 빌려 섬을 몇 바퀴 빙빙 돌거나, 스쿠버다이빙을 하면서 놀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는 모르겠다 하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놀았던 것 같다. 바타네스에서는 내가 그렇게 논다고 해도 비난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PD에게 좀 놀자고 말할 수 있는 자격도 있었다. 난 태풍도 경험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바타네스는 그런 섬 같다. 세상 사람 가운데 ‘바타네스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 손들어봐’ 해서 1만8000명의 인원을 모아놓은 섬. 아무튼 나는 바타네스는 절대 다시 가지 않을 것이다. 그곳의 풍경은 내가 갔을 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다시 가봐야 태풍이나 만나고 스쿠버 다이빙이나 하겠지 뭐.
아 참, 바타네스 현지 가이드는 내가 바타네스를 찾은 두 번째 한국인이라고 했다. 첫 번째 한국인은 ‘송’이라는 소설가인데, 그 역시 태풍을 경험하기 위해 바타네스를 찾았다고 했다. 세상에는 이상한 곳이 있고, 이상한 곳을 찾아다니는 이상한 사람도 있다.
 
Garzê, Sichuan, China
두터워져만 가는 어느 첩첩산중에 대하여
오성윤(〈에스콰이어〉 에디터)
언젠가 인터뷰했던 네덜란드 포토그래퍼에게 이렇게 물었었다. “티베트까지는 어쩐 일로 갔었나?” 그리고 그 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니, 이런 메일이 돌아왔다. “나는 티베트에 간 적이 없다.” 일반인이 티베트를 여행하는 건 극히 어려운 일이고, 그가 촬영한 사진들은 티베트의 동쪽에 위치한 장족(티베트인) 자치주들, 일명 ‘동티베트(East Tibet)’ 풍경이라는 것이었다. “그쪽은 상대적으로 여행하기가 쉽거든.” 그러니까 내가 동티베트에 다녀온 건 순전히 그 말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었다. ‘쉽다’는 단어보다 ‘상대적’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해서. 새로운 여행이라는 강렬한 영감 앞에 판단력이 흐려지는 바람에.
동티베트 안에서도 간쯔는 쓰촨 청두에서 버스로 13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지역이다. 여행을 준비하던 때의 나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보고 7시간이면 도착한다고 믿었는지 모르겠는데, 물론 터미널 매표원의 말이 정확했다. 딱 13시간이 걸렸다. 사실 버스 좌석에 몸을 파묻을 때만 해도 나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합리화했다. 잠이 필요했으니까. 휴가 전까지 업무를 마무리하려 며칠 밤을 새웠고, 경유편 비행기는 한밤중에야 청두에 도착했으며, 온라인 예매를 제공하지 않는 청두 버스 터미널에서 하루 한 대만 운영하는 간쯔행 버스를 타기 위해 단 2시간 자고 나온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피곤한 누구라도 이 행로에 깊이 잠들 수는 없을 테다. 청두에서 간쯔로 가는 길은 평균 고도가 해발 4000m가 넘는 천장북로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새 터질 듯이 부푼 튜브형 목베개 때문에 잠에서 깼고, 한번 깨고 나니 다시 잠들기는 어려웠다. 속이 울렁거리고 가슴이 두방망이질 쳐서. 맞은편 여인은 버스가 달리는 내내 계속 쓰레기통을 부여잡고 구토를 해댔다. 그녀의 생김새는 아무리 봐도 장족이었기에, 나는 나도 몰래 잠깐 그녀의 삶에 대해 상상하고 걱정했다. 그녀가 구토를 할 때마다 품에 안긴 어린아이가 울어댔다.
동티베트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가장 걱정했던 게 바로 고도였다. 고산병은 나이나 건강 상태와 별로 상관이 없는 ‘복불복’ 증세라 했고, 나 역시 이뇨제까지 챙겨 갔지만 결국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어느 밤에 심각한 병증을 겪기도 했다. 다만 이 원고에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늘어놓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내가 ‘당신은 동티베트에 가지 않을 것’이라 호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13시간을 달려온 버스가 간쯔에 서자마자 나는 또 승합차로 갈아타고 몇 시간, 어두운 산길을 달렸다. 티베트 불교의 총본산이라 불리는 오명불학원에 가기 위해서였다. 중국 정부는 언젠가부터 오명불학원이나 야칭스 같은 티베트 불교 명승지에 외국인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길을 막고 선 공안이 신분증을 확인하고 차를 돌리라고 하면 돌려야 할 뿐. 지역을 폐쇄해놓고 그 안에서 안전을 빌미로 시설을 조금씩 철거하거나 관광지로 바꾸는 중이라는 소문만이 떠돌았다. 그래서 나는 한밤을 기해, 승합차 기사에게 10만원이 넘는 거금을 지불하고,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차로 산길을 달려 오명불학원으로 향한 것이다. 숙소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 아무 대책도 없이. 다행히 승합차에 함께 탄 승려가 흔쾌히 자기 집 한편을 내주어 쪽잠을 잘 수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승려는 마침 다음 날이 오명불학원의 큰 행삿날이라고 했다. 실제로 동틀 녘이 되자 승려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산을 올랐다. 일종의 야외 사원 개념인 타르초를 향해. 다닥다닥 붙은 붉은 판자촌에서 붉은 천을 두른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한 길로 오르는 광경은 그 자체로 장관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광경, 그건 타르초로 향하는 길목 어디에서나 굽어보이는 산에 새겨진 거대한 한자 글귀였다. ‘同心共筑中国梦(한마음 한뜻으로 하나의 중국이라는 꿈을 이루자).’ 신실한 걸음으로 타르초를 향하는 승려들, 그들의 등 너머로 그런 글귀를 보는 아이러니라니. 나는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문득 이 여행의 시작점을 떠올렸다. 비자 발급을 위해 방문했던 주한중국대사관. 직원은 종이 하나를 내밀며 사인을 강요했는데, 내용인즉 일종의 경고였다. “이 지역에 대한 사진이나 글을 올리면 추후 중국 입국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쯔를 여행하는 가장 큰 장벽은 천장북로가 아니라 그 사이를 지키고 선 이런 완고한 태도라고 해야 할 테다.
 
Kohima, Nagaland, India
당신이 코히마에 가지 않을 몇 가지 이유
강화송(〈트래비〉 기자)
당신은 코히마에 가지 않을 것이다. 코히마는 인도인도 잘 모르는 인도다. 인도인이 없는 인도이기도 하다. 몰라서 못 갈 거라는 추측이 아니고, 알아도 안 갈 거라는 확신이다.
코히마는 인도 북동부에 위치한 나갈랜드의 주도다. 나갈랜드의 일부 부족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정령을 숭배했다. 싸움이 일어나면 적의 머리를 베어다가 집 대문을 장식하는 용도로 걸어놓곤 했는데(물론 직접 본 건 아니다), 영국 선교사들에 의해 인구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하며 사람 머리를 잘라 전시 보관하는 풍습은 사라졌다. 다만 몇몇 가정집 대문에는 소나 돼지 대가리 뼈가 곶감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긴 하다. 바람이 불면 대가리 뼈가 서로 부딪히는데, 파격적이고 공허한 달그락거림이다. 헤드헌팅은 일부 부족에게만 전해져왔던 풍습이며 물론 2022년의 여행자가 걱정할 거리는 전혀 아니다. 다만 그냥 그랬었다고 알려주는 것뿐이다. 원고를 쓰다 보니 요즘 코히마에서는 조심할 게 딱히 없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근방에서 활동하는 무장단체만 조심한다면 신변의 위협을 받지 않고 코히마를 여행할 수도 있겠다. 나갈랜드는 미얀마, 방글라데시, 중국, 네팔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접경지역에서 활동 상태로 분류되는 무장단체만 최소 5개 이상이다(직접 본 건 아니다). 인도 북동부 전체로 넓혀보면 수십 개의 무장단체가 분포해 있다고 한다. 외교부는 코로나 이전부터 꾸준히 나갈랜드를 황색경보(여행 자제)로 지정해왔고, 나갈랜드와 접경한 미얀마, 방글라데시의 일부 도시는 적색경보(여행 철수)를 유지 중이다. 어쨌든 코히마는 자제의 영역이란 결론이다. 설마 정말 만날까 싶기도 하고, 만나더라도 죽이기야 하겠나 싶기도 하고…. 뭐 여행이라는 게 늘 어느 정도 위험은 도사리는 것 아니겠나.
여전히 코히마 여행을 고민하는 당신을 위해 몇 자 더 적어보자면, 코히마에 도달하는 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 마니푸르주 임팔 공항에 내려 중공군이 타고 다녔을 법한 4인승 지프에 타는 게 가장 일반적인 경로다. 코히마까지는 서울에서 부산 가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서울에서 부산은 대략 400km 거리고 임팔 공항에서 코히마는 대략 150km 거리라는 점이다. 그러나 똑같이 4시간이 걸린다. 코히마는 해발 2000m에 자리한 고산도시이며 대부분의 도로가 비포장 상태다. 덜덜거리며 끊임없이 오르기만 하는 지프에 앉아 있으면, 할 수만 있다면 내장 기능을 잠깐 멈추고 싶어진다. 화장실을 기대할 수 없는 풍경이 흙먼지 너머로 덜컹거리기 때문이다. 여행용 휴지를 집어 들고 지프에서 내린다면 향할 곳은 바위와 풀뿐이다.
코히마에 도착하면 그들의 일상에 녹아드는 것 말곤 딱히 할 게 없다. 아침에는 호텔 직원이 데워서 가져다주는 물로 샤워를 한다. 아무도 모를 인도 고산도시에서 보일러를 기대했던 내 자신을 다시 책망한다. 왜 계속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일까, 부족함 없이 자란 지난날이 후회스럽다. 호텔 직원은 과중한 업무 탓인지 약속과는 전혀 다른 시간에 불쑥불쑥 온수를 들고 나타났다. 모든 식사에는 고추를 잘게 빻거나 생으로 먹거나, 둘 중 하나의 방식을 무조건 곁들여야 했다. 그들만의 미식 문화일까 싶었지만, 겪고 보니 고추는 일종의 보일러였다. 땀이 나고 속이 쓰리다. 춥지도 않고 더 이상 음식이 고프지도 않다. 코히마가 가진 불편의 대응책은 원초적인 방법들뿐이다. 옷은 흙먼지로 더러워질 테니 세탁이 딱히 필요 없어지게 되고, 생각해보니 몸뚱이도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텐데… 졸지에 온수를 데우느라 고생하는 호텔 직원을 착취하는 못된 여행자가 되어버리고 마는 도시다.
흙먼지는 코히마 사람들의 농밀한 삶만큼 진하고 독하다. 그렇다고 또 하늘이 맑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동네의 야트막한 언덕이라도 오르는 날에는 고산지대 공기의 청아함이 대뇌의 전두엽까지 밀려 전해진다. 멍하니 앉아 뿌연 코히마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나름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연이 빼어나서 그래도 자극이 있는 곳이네. 이 풍경만 보고 살면 행복해지겠는데…’ 고리타분한 생각의 나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을 찾아 여행했다는 칼럼니스트 에릭 와이너는 저서 〈행복의 지도〉에서 행복해지는 법을 찾아다녀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코히마에서 찾은 행복은 사실 행복이 아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불행한 것일까. 코히마의 언덕은 적막이 전부라서 끊임없이 사색하게 된다. 코히마에서 4일쯤 머물면 머리가 배탈이라도 난 것처럼 담아둔 것을 비워내기 시작하고, 그 공백 속에서 곧 잊고 있던 사람도, 숨기고 싶던 해프닝도, 체념했던 꿈도 살아난다. 술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나갈랜드는 인도에서 금주를 법으로 명시한 주다. 그래서 당신은 코히마에 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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