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여행기자가 팬데믹이 끝나자마자 스코틀랜드 북부로 차박 여행을 떠난 이유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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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여행기자가 팬데믹이 끝나자마자 스코틀랜드 북부로 차박 여행을 떠난 이유

세계지도 위 지구 끝자락의, 마치 문명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한 대지. 오랜 시간 아무도 찾지 않았던 척박한 곳, 그래서 더 비현실적인 자연의 경이와 조우할 수 있는 곳. 디스커버리에 루프톱 텐트를 싣고 그곳, 하일랜드의 북단을 향해 꿈같은 로드 트립을 떠났다.

오성윤 BY 오성윤 2022.07.27
 
 
우리의 스몰 토크 단골 주제이던 ‘올해 휴가 어디로 갈 거냐’는 질문은 어느새 이런 형태로 바뀌었다. “코로나가 끝나면 가장 먼저 어디로 떠날 거예요?” 나도 언젠가부터 주변인들에게 늘 그런 걸 묻고 있었다. 커리어의 8할을 여행 잡지 에디터로 채운 탓에, 내 주변인의 8할도 여행 업계 어딘가에 발을 담근 이들로 채워졌다. 나를 포함한 그들은 업계와 자의 반 타의 반 거리를 두며 각자도생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들과 만날 때면 지난 여행의 추억을 곱씹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러다 종종 어색한 침묵이 찾아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모든 게 끝나면 어디로 갈 거냐’는 말은 그런 순간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분위기를 부여잡기 좋은 질문이었다. 팜스프링스, 멕시코시티, 샹파뉴, 카나리아 제도…. 해외 곳곳을 누비던 이들이었기에 그들이 일순위로 꼽은 장소들 역시 유별났고, 그 이름들만큼이나 사유 또한 구구절절했다. 물론 내게도 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질문이 역으로 돌아올 때면 나는 잠깐의 주저도 없이 답했다. “스코틀랜드!” 오랜 팬데믹 기간 동안, 혼자 고요히 침잠할 때마다 그곳의 풍경을 그리곤 했으니까.
스코틀랜드에는 딱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코로나19 이전 시대에. 위스키 애호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몰트위스키의 성지 스페이사이드(Speyside) 지역을 잡지 취재차 일주일가량 훑는 일정이었다. 당시 나는 위스키에 막연한 호기심 정도만 품은 기자였는데, 그 취재 이후로 스카치 몰트위스키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됐다. 그때의 인연이 묘하게 흘러 여행 잡지사를 그만두고 서촌에 작업실 겸 위스키 시음 공간을 겁도 없이 열었다. 주종 역시 오로지 스카치 몰트위스키. 올봄에는 그곳에서 지인이 촬영한 스코틀랜드 하일랜드 사진으로 작은 전시를 기획하기도 했는데, 보름 넘게 하일랜드의 풍광을 넋 놓고 감상하다 보니 어떤 감응이 일었다. 전시는 흥행에 참패했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는 점에서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전시가 끝나갈 무렵, 나는 사진 속 하일랜드로 절실히 떠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홀린 듯 서랍 속에 2년 넘게 잠자고 있던 여권을 끄집어내 스코틀랜드행 항공권을 예약했다. 그러곤 여행 에디터 시절 종종 손발을 맞추던 사진가에게 연락했다. “우리 다음 달에 스코틀랜드 안 갈래요? 출장은 아니고, 렌터카로 하일랜드 일대를 돌아볼 거예요. 캠핑도 하면서요.” 급작스레 캠핑이라는 코드를 끼워 넣은 건 일종의 미끼였다. 그는 아웃도어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열성적이었고, 아웃도어에 열성적인 사람이라면 ‘스코틀랜드에서의 캠핑’이란 참기 힘든 미끼일 테니까. 스코틀랜드 물가는 유럽에서도 악명 높으니 내게는 숙박 비용을 절약한다는 매력도 있었고. 사진가는 하루 만에 흔쾌히 수락 의사를 보냈고, 그렇게 스코틀랜드 로드 트립이 성사됐다.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방목해 기르는 양.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방목해 기르는 양.

 
최초의 한국인 여행자들
목적지부터 덜컥 정해놓았으나 어떤 식으로 떠날지는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일단 국내에 스코틀랜드 로드 트립이나 캠핑을 다룬 가이드북이나 여행 콘텐츠가 거의 전무했다. 유튜브 검색창에 ‘스코틀랜드 캠핑’을 입력하니 베어 그릴스의 추종자처럼 보이는 해외 오지 여행가들의 호기로운 생존 브이로그가 펼쳐졌다. 그러던 중 한 렌터카 업체의 광고가 알고리즘으로 등장했다. 오로지 랜드로버의 사륜구동 차종만 보유하고 있다는 와일드트랙스(WildTrax) 스코틀랜드의 광고였다. 루프톱 텐트를 장착한 구형 디펜더를 타고 하일랜드의 대자연을 질주하는 영상은 나와 사진가를 순식간에 매혹시켰다. 다만 아쉽게도 구형 디펜더는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고, 디스커버리 차량 1대만 남아 있었다. 어차피 수동 기어인 구형 디펜더를 무탈하게 운전할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위안을 삼으며 남은 차량을 예약했다.  
하일랜드는 스코틀랜드 북부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그중 노스코스트 500 루트(North Coast 500 Route)는 영국 본 섬 최북단, 즉 하일랜드 지역 인버네스 위쪽으로 해안선을 포함한 500마일(약 830km)가량의 일주로를 뜻한다. 2015년 하일랜드 북부의 관광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기존 도로들을 연결한 일종의 경관도로인데, 자동차 여행가로부터 ‘스코틀랜드의 루트 66’으로 칭송받으며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우리의 로드 트립은 바로 그 노스코스트 500 루트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일주하는 동선으로 결정했다. 하일랜드의 중심이자 영국 최고봉인 벤 네비스(Ben Nevis)가 있는 글렌코(Glencoe) 지역을 살짝 우회하는 구간도 포함시켰다. 5일간 대략 1000km를 달리는 계획. 도중에 캠핑과 하이킹을 즐기고, 증류소에서 위스키도 시음하는 느긋한 여행을 계획했다. 차량을 예약한 와일드트랙스에서는 캠핑에 필요한 거의 모든 장비를 대여해주기에 챙겨 갈 짐도 한결 가벼웠다.
 
노스코스트 500 루트를 질주하는 여행자.

노스코스트 500 루트를 질주하는 여행자.

하일랜드의 황량한 풍광을 기록하는 노인.

하일랜드의 황량한 풍광을 기록하는 노인.

 
노스코스트 500 로드 트립의 출발지는 하일랜드의 수도라 일컫는 인버네스(Inverness)다. 와일드트랙스의 차고 역시 인버네스 공항 부근에 위치했다. 와일드트랙스의 매니저 셰리 더턴(Cheries Dutton)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한국인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녀는 사무실 한쪽 벽면을 채운 스코틀랜드 지도를 가리키며 우리의 계획을 더듬었다. “동선이 아주 좋아요. 그런데 이동 거리가 좀 빡빡하네요. 구글맵에서 안내하는 이동 시간을 절대로 믿으면 안 돼요. 길이 매우 좁은 데다, 시간이 지체될 게 뻔하니까요. 아마 가는 동안 수없이 차에서 내리고 싶어 안달 날 걸요.” 여행을 모두 마친 지금 시점에서 곱씹기에, 그녀의 조언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야겠다. 우리는 그 빡빡한 일정에도 인버네스를 벗어나 곧장 노스코스트 500 루트로 진입하지 않았다. 네스호(Loch Ness)에 들렀다. 하일랜드 관광 필수 코스를 그냥 지나치긴 아쉬웠기에. 다만 그렇게 직접 마주한 네스호는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 북한강 어딘가와 비슷한 풍경이었달까. 강처럼 길게 이어진 호수는 미동도 없이 잔잔했다. 괴물을 봤다고 주장하는 이는 아마도 이런 따분한 풍경에 지친 나머지 상상력을 발휘한 걸까? 아니면 앞에 펼쳐진 기나긴 모험 때문에 붕 뜬 내 마음 탓이었을까? 관광객을 뒤로하고 하일랜드 북서쪽 방면으로 내달리니 노란 가시금작화가 흐드러진 구릉지대가 펼쳐졌다. 들판 안에는 하얀 점들이 솜처럼 박혀 있었다. 새까만 얼굴을 내민 하일랜드 양이었다. 언뜻 “스코틀랜드에는 사람보다 양이 더 많다”는 말이 떠올라 재빨리 검색해봤더니, 사실이었다. 2021년 기준 스코틀랜드에는 약 673만 마리의 양이 서식하는 반면, 인구는 551만 명에 불과했다. 여행 초기에야 사진가도 양 떼가 보일 때마다 차를 길 한쪽에 세우고 촬영에 몰두했는데, 그런 장면을 무시로 마주치면서 어느 순간부터 심드렁해졌다.
 
초여름의 하일랜드에는 구릉지대 곳곳에 노란 가시금작화가 만개해 색채를 더한다.

초여름의 하일랜드에는 구릉지대 곳곳에 노란 가시금작화가 만개해 색채를 더한다.

 
스코틀랜드 최북단 마을 서소(Thurso)에 이르는 길. 투덜거리고 비아냥거리는 것으로만 여행기 한 권을 뚝딱 써내는 작가, 빌 브라이슨은 이 여정을 제법 덤덤하게 묘사했다. “창밖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농가도 가축도 보이지 않았다. 수십 마일 동안 펼쳐지는 위대한 스코틀랜드의 진공 속을 영원과도 같은 시간 동안 달려가야 했다.” 빌 브라이슨은 아마도 던컨스비 헤드(Duncansby Head)를 깜박하고 놓친 게 분명했다. 스코틀랜드 북서단 땅끝에 해당하는 이곳은 깎아지른 절벽과 북해가 장엄하게 대비를 이룬 곳이다. 그 또한 ‘위대한 스코틀랜드의 진공’ 중 하나라면 어쩔 도리가 없지만.  
그간 취재와 여행을 구실로 세계의 이름난 드라이브 루트를 지나갈 기회가 많았다. 캘리포니아 해안선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1번 국도, 이탈리아 아말피의 아찔한 해안도로, 오스트리아의 그로스글로크너 하이 알파인 로드, 노르웨이의 피오르를 따라 이어진 국립 경관 루트…. 그럼에도 하일랜드의 노스코스트 500은 좀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로드 트립 코스였다. 핸들과 차선이 반대인 데다 서소부터는 사실상 왕복 1차선 도로로 뒤바뀌기 때문이다. 처음 그 길을 접하면 적잖이 당황하기 마련인데, 차량의 왕래가 적어 그리 위험하지는 않다. 하일랜드의 적막한 외딴 도로를 나 홀로 달리는 상황을 직면할 때면 지구 끝 어딘가를 부유하는 기묘한 해방감도 들었다. 설혹 반대편에서 차량이 오더라도 나름의 불문율만 지키면 된다. 둘 중 하나가 비켜갈 수 있도록 조성된 가변도로에 차를 세우면 상대편 차는 그대로 지나가야 한다. 간혹 눈치 없이 상대 차와 마주치는 상황을 연출한 이들은 십중팔구 쌍방 외국인 운전자일 확률이 높다. 나 역시 몇 번의 실수 끝에 요령을 터득해 멀찍이 차량 실루엣이 보이면 일단 정차부터 했다. 반대편 운전자가 지나가는 타이밍에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여유도 잊지 않고서.
 

 
 
글렌코의 호수와 면한 인버코 캐러밴 앤 캠핑 파크 (Invercoe Caravan & Camping Park).

글렌코의 호수와 면한 인버코 캐러밴 앤 캠핑 파크 (Invercoe Caravan & Camping Park).

 
그 풍경 속에서 잠든다는 것
팬데믹을 거치며 여행 업계가 고사 직전으로 위축됐다고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해외여행에 한한 이야기다. 국내 여행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분명 성장했다. 특히 차박 문화 같은 여행 콘텐츠는 트렌드로까지 떠올랐다. 비대면 여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분명 경쟁력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유행은 짧게 타오르다 이내 꺼져버렸다. 한국은 차박에 그다지 적합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일단 차를 세워두고 자연을 즐길 만한 정박 포인트가 턱없이 부족하다. 노지 캠핑은 그 자체로 불법으로 몰린다. 누군가 괜찮은 포인트를 발견하면 이내 SNS에 소문이 나 치열한 쟁탈전을 각오해야 한다. 스코틀랜드는 정확히 그런 지점에서 ‘차박의 요람’이라 추켜세울 만하다. 원칙적으로 사유지가 아닌 어느 땅에서든 노지 캠핑이 가능하니까. 단, 조건이 뒤따른다. 스코틀랜드 야외 출입 규정(The Scottish Outdoor Access Code)을 준수하는 것. 지속 가능한 자연을 존중하며 머문 자리를 원상태로 보존하는 규칙만 따른다면 차박은 기꺼이 허용된다. 루프톱 텐트를 장착한 랜드로버 역시 차박을 위해 고안된 것이기도 하고.
 
스코틀랜드 캠핑에서 빠질 수 없는 위스키 타임.

스코틀랜드 캠핑에서 빠질 수 없는 위스키 타임.

하일랜드 서부의 샌즈 캐러밴 앤 캠핑(Sands Caravan & Camping)은 자연 그대로의 노지로 이루어져 있다.

하일랜드 서부의 샌즈 캐러밴 앤 캠핑(Sands Caravan & Camping)은 자연 그대로의 노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여정에서 우리는 노지 캠핑 대신 캠핑장을 선택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스코틀랜드 현지 캠핑 문화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총 3곳의 캠핑장을 이용했는데, 유형은 크게 둘로 갈리는 듯했다. 우선 자연 그대로의 대지에 조성된 노지 캠핑장. 캠핑카와 일반 텐트를 설치할 수 있는 구역 정도로만 영역이 나뉘고, 사이트는 일절 구획되어 있지 않다. 상대 텐트와의 거리만 대략 10m 정도로 떨어뜨려 알아서 자리를 잡으면 그만이다. 다른 하나는 캐러밴 파크다. 기본적으로 캐러밴 정박이 가능하도록 반듯하게 사이트가 정비되어 있는 곳으로, 한국의 오토캠핑장과 유사한 형식이다. 넉넉한 사이트 간격이나 그 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자연의 스케일은 확연히 다르지만. 저녁 식사 시간 이후에 맞춰 핑크빛 아이스크림 버스가 찾아오는 것도 이곳 캠핑장만의 문화다.
스코틀랜드의 캠핑장에서 가장 생경한 풍경 중 하나는 식사 장면이었다. 야외에서 굽고 끓이고 볶아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네 캠핑장과 달리 스코틀랜드 현지인들의 식사는 놀라우리만큼 간소했다. 캠핑장 내 갖춰진 취사 구역 혹은 텐트나 캐러밴 실내에서 샌드위치나 수프 등 간편식을 먹는 게 일반적이었다. 아예 캠핑장 밖에서 해결하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저는 보통 캠핑을 할 때면 저녁이나 이른 아침에 인근 지역으로 하이킹을 떠나요. 식사는 되도록 근처 식당을 이용하고요.” 스코틀랜드 남부에서 홀로 피아트를 끌고 단출한 솔로 캠핑을 즐기러 온 사니타(Sanita)도 그런 부류다. 그런 태도는 되도록 간소한 형태로 자연에 다가서는 캠핑 본연의 정신에 가까워 보이기도 헸지만, 아마 변화무쌍한 날씨도 한몫했을 듯했다. 연중 강수량이 고르게 분포되는 스코틀랜드에서는 불시에 폭풍우가 몰아치니까. 야외에서 느긋하게 조리도 하고 식사를 즐기는 건, 그들의 시선에서는 상당수 운과 용기가 따라야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몰랐던 우리는, 다행히도 여행 내내 썩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처음으로 이용해본 루프톱 텐트(차량 위에 펼치는 텐트)도 의외로 꽤나 흡족했다. 일단 텐트를 일일이 피칭하는 수고가 덜한데, 널찍하고 천고가 높아 아늑하기로는 웬만한 돔 텐트 저리 가라였다. 아래에는 푹신한 매트리스가 깔린 것은 물론, 침낭도 여행 기간 내내 그냥 펼쳐두면 되었다. 하지만 루프톱 텐트라는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뷰다. 루프톱이기에 가능한 전망. 우리가 챙긴 루프톱 텐트는 좌우 전면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는 형태였고, 아침에 눈을 뜨면 두 눈 가득 캠핑장 너머 하일랜드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하일랜드를 여행하다 더네스에 정착한 악기 수리공 루도 반 뮈센.

하일랜드를 여행하다 더네스에 정착한 악기 수리공 루도 반 뮈센.

 
삶, 여행자, 그리고 술
전통적으로 하일랜드에 거주하는 이들을 하일랜더(highlander)라 지칭한다. 실상 이번 여행 중에 순수한 하일랜더를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다. 노스코스트 500 루트는 사람이 거주하는 마을보다 방치된 대자연을 많이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비율로. 멈춰 서는 마을에서 만난 몇몇 현지인들 역시 대부분이 타지에서 건너온 이들이었다. 오랜 기간 사람이 정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척박한 땅. 그 빈 자리를 이제 각지에서 모여든 여행자가 채우고 있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노스코스트 500을 완주하려는 라이더부터 올드 디펜더를 손수 개조해 스코틀랜드 전역을 떠도는 부부, 파도를 좇아 해변에서 캠핑을 하는 서퍼, 그리고 사진 몇 장을 발단으로 이곳까지 온 나와 사진가까지.
 
영화 〈하일랜더〉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에일린 도난 성(Eilean Donan Castle).

영화 〈하일랜더〉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에일린 도난 성(Eilean Donan Castle).

 
이들 여행자들이 한데 모이는 곳 중에는 더네스(Durness)가 빠질 수 없다. 인버네스를 기점으로 노스코스트 500 루트의 딱 절반 지점에 위치한 마을인데, 기름을 넣을 수 있는 주유소가 있고(주유구가  2개뿐이라 경쟁이 치열하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코코아 마운틴(Cocoa Mountain)이 있었다. 노스코스트 500 루트를 안내하는 거의 모든 가이드북에 소개된 것은 물론, 렌터카 매니저 역시 강력 추천했던 카페. 하지만 정작 당도한 코코아 마운틴의 현관 유리문에는 “직원을 구할 수 없어 잠시 쉬어갑니다”라는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한 세계적 구인난이 외딴 하일랜드의 마을에까지 불어닥친 모양이었다. 대신 마을의 또 다른 카페인 밋앤잇(Meet and Eat)이 수혜를 본 듯 몰려드는 여행자를 기꺼이 환대했다. 더네스에는 몇몇 수공예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인 더 위 갤러리(The Wee Gallery) 역시 그림과 우드 카빙 제품을 취급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워크숍을 여는 운영자 루도 반 뮈센(Ludo Van Muysen)은 하일랜드 서부의 거의 유일한 악기 수리공이기도 하다고 했다. “저도 원래 여행객이었어요. 40년 전에 이곳에 여행을 왔다가 고즈넉한 분위기에 이끌려 정착한 거죠.” 벨기에 출신인 그는 화가인 아내와 함께 갤러리를 운영하며, 틈틈이 하일랜드 산골 학생들의 금관악기를 수리하러 떠난다고 했다.  
더네스를 지나자 본격적으로 하일랜드 서부 해안의 스펙터클한 경관이 펼쳐졌다. 하일랜드 주제의 여행 가이드북 표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풍경들. 3000피트(914.4m) 이상의 봉우리를 스코틀랜드게일어로 먼로(munro)라 부르는데, 잿빛 봉우리가 굽어보고 글렌(glen, 협곡)과 로크(loch,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 속에 빨려 들어가듯 도로가 구불구불하게 이어진다. 와일드트랙스 매니저의 예언처럼 우리는 감탄사를 내지르며 차를 무수히 정차하기에 바빴다. 별다른 안내 표시는 없었지만 앞선 차가 멈춰 선 곳이 곧 포토 스폿이었다. 시시각각 바뀌는 날씨 탓에 마주치는 풍경 또한 매번 달랐다. 먼 곳에서는 비를 흩뿌리는 먹구름이 잔뜩 깔려 있는가 하면, 그 반대편에는 무지개가 구릉 사이에 걸려 있었다. 하일랜드 소 또한 서부 지역에서 만날 수 있는 볼거리다. 수북하게 눈을 가리는 털과 우직하게 솟은 뿔이 트레이드마크인 하일랜드 소는 이곳의 척박한 자연과 기후에 적응하도록 오랜 진화를 거친 생명체이기에 하일랜드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에는 약 800개의 섬이 흩어져 있다. 울라풀(Ullapool)은 그 섬들을 잇는 기착지 중 하나다. 항구에서 육중한 카 페리에 차를 싣고 좀 더 야생의 기운이 꿈틀대는 헤브리디스(Hebrides) 제도로 건너갈 수 있다. 대형 마트 또한 갖추고 있어 하일랜드 서부에서의 캠핑을 계획한 이라면 필히 거쳐가는 마을이기도 하다. 5월부터 스코틀랜드는 본격적으로 백야 시즌이 시작된다. 해가 10시가 넘도록 지지 않고, 새벽 4시가 되기 이전부터 동이 튼다. 다만 캠퍼에게는 이런 백야의 존재가 반갑다. 마을 상점가는 5시면 문을 닫고, 저녁에 딱히 할 거리를 찾기 힘든 외딴 하일랜드에서 한낮처럼 밝은 긴 저녁은 하일랜드의 자연을 누릴 시간을 연장시켜주니까. 간혹 문을 연 마을 펍을 찾아가거나 캠핑장에서 위스키를 홀짝이며 한밤의 석양을 감상해도 시간이 넉넉하다.
 
노스코스트500 루트는 로드 트립 내내 산과 호수, 계곡이 어우러진 숭고한 경관을 쉼 없이 마주칠 수 있다.

노스코스트500 루트는 로드 트립 내내 산과 호수, 계곡이 어우러진 숭고한 경관을 쉼 없이 마주칠 수 있다.

 
하일랜드 중부 지역에 이르자 드문드문 고성이 보였다. 스코틀랜드 왕국이 영위하던 땅에 당도한 셈이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아웃랜더〉를 본 이라면 이 지역의 풍광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하일랜드 곳곳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고 하는데, 세트 촬영은 필요가 없었을 듯했다.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일랜드는 자연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니까. 스러진 영주의 고성 장면 일부는 CG의 힘을 빌려 복원해야 했겠지만 말이다.
하일랜드 지도 한복판에 위치한 글렌코는 자칭 하일랜드 아웃도어의 수도다. 최고봉 벤 네베스(1345m)를 포함해 유명한 먼로가 이 일대에 전부 모여 있다. 글렌코 부근에서 가장 큰 마을인 포트 윌리엄(Fort William)에는 커다란 배낭을 어깨에 멘 하이커들이 득실거렸다. 우리는 그들을 지나 벤 네비스 증류소로 향했다. 실제 벤 네비스의 봉우리가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담한 시골 증류소에 들어서자 아웃도어에는 전혀 흥미가 없어 보이는 위스키 애호가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테이스팅 바에는 노련한 바텐더가 인심 좋게 잔을 채워주고 사람들은 위스키 향을 맡으며 저마다의 테이스팅 노트를 진지하게 논했다. 위스키 증류소의 테이스팅 룸은 스코틀랜드 어디든 분위기가 비슷해 보였다. 진중하게 토론을 하다가도 몇 모금을 넘긴 뒤에는 붉어진 얼굴로 유쾌하게 대화를 나누는, 그 분위기 측면에서 특히나. 단, 몇몇 희생자들은 제외해야 한다. 하일랜드에서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던 그날, 나는 사진가에게 시음을 양보하고 운전을 도맡았다. 이 머나먼 곳까지 여행에 동행해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나름의 배려였달까.
5일간의 노스코스트 500 루트 로드 트립을 마치고 경유지인 런던에 며칠 머물렀다. 인버네스에서 비행기로 고작 1시간 남짓 떨어진, 같은 그레이트브리튼 섬에 위치한 영국의 수도. 하지만 두 지역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극명했다. 마침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70주년을 맞아 런던 거리 곳곳은 유니언잭 깃발이 나부끼고 온통 축제 준비로 들떠 있었다. 하일랜드에서는 짐작도 못 할 일이었다. 밤에 찾아간 숙소 근처의 펍에는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들이 지역별로 구비되어 있었다. 위스키를 한 모금 넘기며 지난 여행을 더듬었다. 고작 하루 전에 머물던 하일랜드에서의 기억과 감각이 파편처럼 희미했다. 아직 여행이 끝나지 않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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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오성윤
    WRITER 고현
    PHOTOGRAPHER 오작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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