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탈 잔에 깃든 사랑 | 에스콰이어코리아
LIFE

크리스탈 잔에 깃든 사랑

수줍게 고백하듯 꺼내놓은 6개의 크리스털 러브 스토리.

박호준 BY 박호준 2022.12.07
 
“파리의 바카라 박물관에서 본 잔이 여기에 있다니, 놀랍네요.” 바인하우스에서 종종 술잔을 기울이는 바카라 코리아 대표가 이 잔을 보고 한 말이다. 빈티지 제품만 취급하는 파리의 어느 가게에서 10년 전 구입한 엠파이어 스타일의 이 잔은 1919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당시 발행된 바카라 카탈로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종이처럼 얇은 잔 위에 그림을 그리듯 새긴 금 장식을 보고 있으면 뛰어난 기술력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 마저 든다. 어찌나 마음에 들었는지 보자마자 가격도 묻지 않고 덜컥 사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크리스털 잔의 매력에 본격적으로 빠진 계기는 약 20년 전 일본의 바 문화를 접했을 무렵이었다. 술도 술이지만, 미적인 아름다움과 깊은 역사를 지닌 여러 크리스털 잔이 찬장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언젠가 바를 운영하게 된다면 나만의 잔을 모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하나둘 모은 잔이 벌써 수십 개지만, 스스로를 컬렉터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잔을 관상용이 아니라 도구로서 모으기 때문이다. 파손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손님들에게 잔을 내어놓는 이유다. 깨진다면 그것 또한 이 잔의 역사가 될 테니 말이다.
김병건(바인하우스 대표 겸 바텐더) 
 
할머니 옷장을 좋아했다. 뒤질수록 신기한 물건들이 나와서 그랬던 것 같다. 꼬리털 목도리, 악어 모양 가방, 신기한 컬러의 짜임 코트까지. 할머니 옷장은 동화나라 보물섬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유독 빈티지 제품을 좋아한다. 새로 산 그릇처럼 광이 나지도 않고 작은 스크래치가 여기저기 있는 그릇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 잔은 늘씬한 실루엣의 여느 크리스털 잔과 달리 투박하고 작달막한 게 매력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어머니는 방방곡곡에서 모은 잔을 내가 처음 집에서 나올 때 선물처럼 물려줬다. “네 집은 좁으니까 다는 아니고 몇 개만 줄게”라는 말과 함께. 브랜드도 가격도 모르지만 물려받았다는 것만으로 이미 큰 보물이다. 6개가 한 세트라 똑같은 잔만 6개를 가지고 있는데 행여 깨질까 무서워 1개만 꺼내어 쓰고 나머지 5개는 고이 모셔뒀다. 어릴 적 아이스크림이나 딸기를 담아 먹었던 잔에 와인과 위스키를 따라 마실 땐 기분이 묘하다. 마치 20년 전 옛날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든다. 어쩐지 술에서 아이스크림과 딸기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애리(매그피알 PR 매니저) 
 
잔을 살펴보는 게 일이자 취미다. 일본에 종류와 물량이 많아 라쿠텐을 자주 살피는데 특히 도쿄 아사쿠사에 있는 소키치라는 유리공방이 나의 참새 방앗간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 잔 역시 일본 브랜드 ‘기무라’의 제품이다. 형형색색 화려한 잔들을 두고 굳이 이 잔을 집어 든 건 일반적인 샴페인 잔의 형태를 깨부수는 파격 때문이었다. 샴페인의 경우 탄산이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어 가로가 넓은 잔이 아니라 세로로 긴 잔을 주로 사용한다. 이 잔은 볼, 스템, 베이스로 구분되는 전형적인 디자인 대신 볼이 베이스까지 이어지도록 해 볼의 깊이를 극대화했다. 립에서 시작된 잔의 측면 라인이 역삼각형으로 예리하게 떨어져 적당한 긴장감을 만드는 것도 매력적이다. 기능과 멋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잔은 의외로 흔치 않다. 칵테일을 담을 경우 층위를 만들어 서로 다른 색깔로 연출하는 것도 가능해 독특한 걸 찾는 손님에게 내어놓으면 반응이 좋다. 가끔 폭이 좁은 아랫부분까진 어떻게 세척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잔에 맞는 전용 솔을 사용하면 된다.
서홍주(포어포어포어 대표 겸 소믈리에) 
 
도쿄 오오이 경마장의 주차장에선 주말마다 꽤 큰 플리마켓이 선다.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플리마켓에 들르는 게 나름의 루틴인데 전문적인 중고 판매상들이 즐비한 유럽의 플리마켓과는 달리 주차한 차 앞에 좌판을 깐 가족 단위 판매자가 많아 정겨웠다. 이 잔과의 인연은 그 정겨운 장터에서 시작됐다. 빈티지 바카라와 생 루이가 멋지다는 사실은 크리스털 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래서 빈티지 장터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잔들 역시 바카라와 생 루이다. 이 ‘호야’의 잔은 남들이 다 갖고 싶어 하는 물건에는 별 흥미가 없는 내 천성에 딱 들어맞았다. 생산이 끝난 모델인 데다가 국내에 정식 수입된 적이 없다는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적당한 퀄리티 역시 내 취향이었다. 크리스털 잔은 투명하고 맑을수록 귀하고 비싸게 쳐준다. 그러나 나는 이 잔이 너무 투명하지도 너무 탁하지도 않아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무슨 대중 없는 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내 취향이 그렇다. 지나치게 잘 차려입은 사람을 보면 부담스러운 것과 같은 이치다. 비밀이지만, 이 잔은 아내와 단둘이 있을 때만 쓴다. 이 잔에 입술을 댈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오직 두 명뿐이라는 이야기다. 어지간해선 남에게 잘 보여주지도 않는다.
임성은(헬카페 대표) 
 
태어난 해의 빈티지 와인, 소위 ‘생년 빈티지’ 돌리베이라스 마데이라를 선물 받았을 때였다. 귀한 술을 평범한 잔에 마시면 안 될 것 같아 근사한 잔을 찾아 나섰다. 수많은 잔 사이에서 유독 눈길이 가는 물건이 있었다. ‘바카라 낭시(nancy)’였다. 기존에 알고 있던 바카라 크리스털 웨어의 이미지와 달랐다. 화려하고 섬세한 다른 바카라와 달리 굵은 커팅으로 잔 표면을 수직으로 거칠게 교차하도록 장식한 모습이 신선했다. 단순한 형태에서 박력을 느꼈다고 표현하면 과장일까? 그 잔을 시작으로 낭시 라인업을 찾아 헤맸다. 잔 바닥에 바카라 로고 각인이 새겨지기 시작한 1936년 이전 제품이 타깃이었다. 이 잔이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 가늘고 긴 형태가 샴페인용 플뤼트 특유의 패턴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빈티지 바카라 잔을 지인에게 선물한 적도 있는데 이 잔만큼은 쭉 소장할 작정이다. 콩깍지가 씌었을 수도 있지만, 20세기 초, 파리를 휩쓸었던 벨 에포크 특유의 평화롭고 풍족한 분위기가 잔에 묻어 있는 것만 같다.
오태경(변호사 겸 번역가) 
 
술과 음식을 다루는 에디터로 일하다 보니 술이 좋아졌다. 술을 좋아하다 보니 잔이 좋아졌다. 즐기는 술이 늘어날수록 잔의 개수도 덩달아 늘었다. 각종 술잔으로 커다란 찬장 두 개를 꽉 채웠을 때 아니, 이사하는 날 그 많은 잔을 옮기느라 손목이 삐끗했을 때 처분을 결심했다. 혹독한 ‘잔 다이어트’를 겪고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잔이 바로 이 녀석이다. 생존 비결은 애매함과 적당함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크기에 있다. 작은 잔들 중 큰 잔에 속하는 이 잔에 다양한 종류의 술을 한 잔씩 부어 마시고 자는 게 나만의 라이프스타일이다. 큰 잔으로 마시면 취할 것 같고 작은 잔으로 마시기엔 감질날 때 제격이다. 어떤 술을 담아도 괜찮다. 와인, 위스키, 막걸리, 소주 할 것 없이 마구 따라 마신다. 한 뼘도 되지 않는 크기지만 형태가 안정적이고 야무지다. 볼과 스템을 연결하는 부분도 투박하지 않고 날렵하다.  언제 어디서 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지만 소파에 기대어 잔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술과 여행의 교집합이 주는 행복이 몽글몽글 떠올라 술을 마시지 않아도 기분이 들뜨고 만다.
손기은(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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