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세계 곳곳에서 도착한 편지, '지금,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 | 에스콰이어코리아
LIFE

Part1. 세계 곳곳에서 도착한 편지, '지금,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

세계 곳곳에서 슬프고 끔찍한 뉴스가 날아드는 시대. 어떤 소식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귓가를 스쳐가는 건 우리 사정이 너무 급하기 때문일까, 바야흐로 ‘각자도생의 시대’이기 때문일까? 우크라이나 키이우부터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세계 각국의 필자들에게 ‘지금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써달라고 요청했다. 지구 반대편의 삶을 뺨으로 느끼고자. 우리가 ‘우리’로서 좀 더 연결되어 있고자.

오성윤 BY 오성윤 2022.12.03
 
01 KYIV, UKRAINE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공습 사이렌이다.
나탈리야 부치르스카(프리랜스 저널리스트)
 
공습경보 사이렌이 정적을 깬다. 도시 구석구석에서 사이렌이 위험의 조짐을 알린다. 휴대전화에도 갑자기 불이 들어오고, 목소리가 듣기 좋은, 그러나 매우 심각한 어조로 시내에 공습경보가 울리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공습 대피소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방송이 울려 퍼진다. 깜짝 놀란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사실 러시아군이 우리 도시들을 너무 자주 폭격하기에, 이런 신호에 이미 상당히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전쟁 초반이나 지금이나 이 소리에 마찬가지의 거대한 불안감을 느낀다. 불과 몇 분 안에 흑해나 카스피해에서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무시무시한 미사일이 평화로운 주민들의 아파트나 놀이터에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쟁의 본질이다. 잔인하고 무차별적이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이 운명을 믿기 시작하고, 두려움을 잃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 후, 내가 키이우에 돌아왔을 당시를 기억한다. 군사작전이 진행되고 있을 때 시내에 남았던 이웃을 만나 물었다. 공습경보가 울리면 지하실에 숨느냐고. 그는 태연하게 답했다. “뭐 하러? 나는 폭격 후 땅에 묻혀버리기보다는 내 방에서 담배를 문 채 평화롭게 죽고 싶어.” 그의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피할 수는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언젠가부터 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지하실에 숨는 것을 그만두었다. 키이우를 둘러싼 방공 시스템이 설치되어, 한동안은 키이우를 향해 날아오는 미사일이 국경을 넘기도 전에 솜씨 좋게 격추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로 옮겨 갔고, 우리에게는 키이우가 마치 적의 무기가 결코 뚫을 수 없는 갑옷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섣부른 것이었다. 어느 여름 토요일 오전, 창문이 흔들렸고 먼 곳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러시아 미사일이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주택가에 떨어진 것이다. 공습경보 메시지가 왔지만, 사람들과 아이들은 자기 아파트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물론 피해자가 발생했다.
전쟁과 매일 발생하는 민간인 사상자는 떼어놓을 수가 없다. 게다가 이 잔인한 전쟁은 피해자를 구분하지도 않는다. 사상자 중에는 아이들도 많다. 미사일 폭발 단 한 번으로 매일 수천 가족들의 삶이 파괴된다. 아이를 부모에게서, 또는 부모를 아이에게서 빼앗아간다. 최근에는 러시아 미사일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중심부를 타격하기도 했다. 키이우 시민들이 러시아워를 뚫고 분주히 출근하던 때였다. 다섯 살짜리 소년의 어머니를 포함해,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죽었다. 그녀는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서둘러 직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국립아동병원에서 일하던 소아암 전문의였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이 세상에 어떤 정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잃었다. 정의가 있었다면, 중병을 앓는 아이들의 생명을 매일같이 구하는 무고한 사람의 삶이 뚝 끊겨버리지도, 그녀의 어린 아들이 고아가 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아이의 아버지는 이미 1년 전에 세상을 떴고, 아이는 이제 완전한 고아가 되었다. 또 다른 날 아침에는 적의 미사일이 출산을 앞두고 있는 젊은 부부의 아파트에 떨어졌다. 배 속의 아이는 세상 구경을 영영 못 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정의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사람들은 러시아의 행태에 대해 반드시 처벌받아야 하는 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보면 그건 세상에 대한 인식이 너무 이상화되었기에 갖는 생각이다. 악이 언제나 응징받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모든 악을 벌할 수 있다 해도, 이미 죽어버린 수백, 수천의 무고한 이들을 되살릴 수 있을까?
그러나 내가 키이우에서 보는 것이 절망만은 아니다. 전쟁은 인간 본질의 다른 면, 즉 강함과 용기를 드러내기도 한다. 키이우에 폭격이 쏟아져 자다 깬 주민 수천 명이 지하철 플랫폼에 숨어야 했던 날이 있었다. 남녀노소 수천 명이 5시간 동안 바글바글 모여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그들이 한 것은 우크라이나 민요를 부르는 일이었다! 최악의 재앙이 닥친 순간에도 사람들은 공포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정말 중요하다.
공포와 낙관주의는 둘 다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서 뭔가를 하게 만드는, 전쟁 중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그게 없다면 사람들은 무감각해지거나 우울에 빠질 수 있다. 전쟁이 시작되고 한 달 동안 내 뇌는 극단적인 충격 상태를 겪었다. 당시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고만 싶었다. 이 끔찍함이 끝날 때까지 깨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실 때문에 나는 또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어쨌든 나는 어머니고 당시엔 그 어느 때보다 내 아들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려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며칠 전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동료와 나는 시내 중심가를 걷고 있었다. 날씨가 아주 춥고 울적했다. 2월이었지만 눈이 녹아 있었고 땅은 새까맸다. 어두운 색의 나무에 까마귀들이 앉아 요란하게 울어대며 이미 무겁고 짓누르는 듯한 분위기에 불안감을 더했다. 우리는 전면전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동료는 전쟁이 터질 거라고 확신했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그랬을 것이다. 결국 틀린 것은 우리였지만.
전쟁에 대비할 수는 있지만, 진정으로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다. 나는 꽤 선견지명이 있는 편이었던 것 같다. 먹을 것과 차량 연료를 사서 비축해놓고 카드로 현금을 인출해두었다. 그 덕에 도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가게에 남은 먹거리를 쓸어가고 차에 기름을 넣으려다 실패했던 전쟁 초기의 패닉 상태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전쟁’이 벌어지자, 내가 전쟁의 참모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나쁜 일들은 전부 밤에 일어난다. 우리가 모두 자고 있을 때 러시아 미사일이 우크라이나 도시들에 날아왔다. 러시아군은 이미 키이우 근처 비행장에 착륙하고 있었다. 창밖의 폭발, 키이우 교외의 연속 포격은 공포와 불확실함을 자아냈다. 그날 아침 처음으로 사이렌 소리를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비상사태 예방 훈련 차원에서 매년 한 번씩 시험 삼아 울리던 소리와 같았다. 하지만 그때는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진짜 경고 신호처럼 들렸다. 전쟁이 우리 모두의 집에 찾아왔다. 정말 비극적인 일이었다.
결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연속적으로 폭발이 일어나는 가운데 지하실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우리는 집과 고향을 떠나기로 했다. 당시 나는 내게 아들의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힘들 때면 가까운 사람들이 우릴 돕는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걱정했던 약한 지인들도 우리를 도왔다. 우리는 슈트케이스에 옷을 채워 차 안에 던져 넣었다. 우리의 인생 전체가 가방 하나에 들어갔다. 그 이상은 들고 갈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소중함을 느끼는 물건들, 개인적인 물건들은 집에 남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그 공간에서 보낸 행복한 세월이었다. 이 불공평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것들. 안타깝게도 이제 모든 우크라이나인의 삶은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일상을 즐기고, 생일과 결혼식을 축하하고, 여행을 다니던 행복한 시간. 그리고 전쟁, 끝난다 해도 이기고 살아나가기 힘들 트라우마.
우리는 전쟁 속에서 살고 있다. 직접적인 군사 행동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다고 해도, 위협의 감각은 어디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최근에는 미사일이 작은 마을의 민간인 주택에 떨어졌다. 두 아이를 둔 젊은 여성과 그녀의 어머니가 파괴된 집의 잔해 아래에서 사망했다. 구조대는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집의 반려견을 보았다. 개는 집의 잔해 위에 앉아 구슬피 울부짖었다.
가끔 나는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한다. 동물들조차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통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데, 인간이라고 오죽할까. 고도의 기술과 발전을 위한 엄청난 기회가 산재한 시대에 누군가 이런 전쟁을 일으킨다는 게 믿기 힘들다. 무분별하고 비이성적이다. 하지만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들을 억누르려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우리의 승리와 우리 아이들을 위한 평화로운 삶을 앞당기려면 내가 뭘 할 수 있지?”
모든 우크라이나인은 승리를 믿고 있다. 우리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땅을 위해 싸우고 있다. 믿음과 용기가 우리로 하여금 굳건히 맞서며 적들을 우리 땅에서 한 발짝씩 밀어내는 것을 돕는다고 여긴다. 모든 영웅적인 사건과 작은 성공 뒤에는 평범한 이들의 거대한 노력이 있다. 친한 친구들이 지금 전선에 있다. 그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언론인, 관리자, 뮤지션, TV 관계자… 그들은 이제 모두 고향의 수호자라는 직업을 공유하게 되었다. 나는 매일 소셜 미디어에서 그들의 페이지를 찾아 언제 마지막으로 온라인 상태였는지 확인한다. 그건 이젠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접속했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이다.
최근 키이우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더 잦아졌다. 사이렌이 울리고 나면 곧 폭발음이 뒤따른다. 적은 민간인 인프라를 타격하고 있다. 키이우와 우크라이나 전체의 전력 시스템이 상당히 파괴되어 전기, 수도, 인터넷이 끊기는 일이 계속 일어난다. 현대인에게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은 심각한 불편을 초래한다. 일상생활과 근무 일정을 전기와 인터넷이 연결되는 짧은 기간에 맞춰 조절해야 한다는 것은 전쟁 발발 이후에 익숙해져야 하는 또 하나의 어려움이었다. 때로는 이 상황에 주체 못할 만큼 화가 치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곧 나를 지켜준 친구들, 8개월 이상 참호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떠올린다. 그 친구들이 따뜻한 차 한 잔조차 마시지 못할 때가 자주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 내 안의 분노가 사라진다. 우리의 적은 우리가 겁먹고 분노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강인하게,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사이렌 소리와 두려움이 수시로 찾아오지만 그 모든 것을 결국 극복하며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내 친구들이 나를 위해 매일 목숨을 걸고 있는데, 어떻게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02 PARIS, FRANCE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마르탱 쿨롱(프리랜스 에디터)
 
나는 평화로운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 가족은 파리 근교에 안락한 집이 있으며, 아이들은 공립학교에 다닌다.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 엄청나게 많고, 매일 좋아하는 놀이를 실컷 하며 하루를 보낸다. 나는 20년 넘게 저널리즘 분야에 애정을 쏟고 있다. 내 인생에 하나뿐인 여자와 결혼을 했고, 우리 가족은 모두 건강하다. 다시 말해, ‘메이드 인 프랑스’인 이 따뜻한 생명체들(가족들)로 구축된 삶 안에서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최근 몇 년간 나를 두렵게 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다. 이 기묘한 발상이 나온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내가 두려움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 말해야 한다. 내 안에서는 두려움이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첫 번째 두려움은 반사적 공포, 혹은 동물적 두려움이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삶에 도움이 된다. 늘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대신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 전의 적절한 시기에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하고, 본능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드니까. 심지어 나는 이 두려운 감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르포르타주 기사를 쓰는 순간에, 두려움은 나를 활기차게 하고, 더 발전할 수 있도록 해주며,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왜 그것을 하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반면 두 번째 종류의 두려움은 늘 나를 괴롭힌다. 맞닥뜨린 상황에 근거한 두려움이 아닌, 현실에 대한 상상을 근간으로 한 두려움. 이런 두려움은 보다 더 복잡하고, 교활하고, 어두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예를 들어 최근 몇 년간 프랑스에서는 위험 지역들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파리 및 그 교외 지역만 해도 위험한 지역들이 계속 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이 도시를 그저 목가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밤에 찾아가는 것을 최대한 자제해야 하는 곳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들을 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곳도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나는 프랑스 내에서 이런 종류의 견해가 그 누구에게도 저지받지 않은 채로 수년씩 커져간다는 것이 우려스럽다. 마치 두려움의 지렛대처럼. 이런 분위기의 가장 큰 문제는 실제 세상을 구성하는 복잡한 사실들을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모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논쟁, 환경 관련 문제를 찬성 또는 반대, 백인 또는 흑인, 선 또는 악으로 치환한다.
종교가 좋은 예다. 원론적으로 프랑스에서는 모든 종교가 허용되며, 공화국의 기초를 존중하는 한 누구나 어떤 종류의 예배든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움은 종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재편하기 시작했고, 특히 최근 들어 이슬람교에 커다란 낙인을 찍었다. 무슬림 프랑스인들은 다양한 사회적 문제의 원흉으로 지적받는다. 이런 편견은 너무 자주 등장하게 되었고, 아니 어쩌면 이제는 늘 존재하게 되었고, 편협함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두려움은 특정 주제의 미묘한 부분을 가볍게 무시하고 단순화해 모든 논쟁의 결과를 손쉽게 결정지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설득하고 있다. 조국에 대한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찬 독이랄까.
나는 늘 프랑스에 갈림길이 있다고 믿는다. 프랑스는 망명의 땅, 혼합의 장소, 다른 문화와 대화를 통해 건설되고 발전한 국가다. 나는 다양한 사회적 배경과 제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친구들과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내 아이들 역시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과 다양한 종교를 가진 친구들이 있고, 외국 출신 유모의 케어를 받고 있다. 아이들은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지식에 흥미를 느끼기에 자연스럽게 유모의 종교와 종교적 관습이 무엇인지 묻곤 한다. 나는 아이들이 유모의 삶의 일부인 종교적 관습, 그 나라에서 열리는 축제들을 배우고, 원한다면 함께 해볼 수 있다는 사실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인다. 나는 정문 위에 ‘자유-평등-박애’라는 글자가 새겨진 학교를 다니며 컸고, 늘 그것들을 배우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건 프랑스의 국가 신조이며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항목이다. 나는 여전히 그것이야말로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기반이자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토대라고 믿는다.
하지만 오늘날, 서로 다른 견해로 대치하고 있는 프랑스를 보고 있으면 이런 믿음을 유지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가장 실질적인 문제는 이런 막연한 두려움과 지식의 부족함이 결국 투표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극단적인 생각(좌파든 우파든)이 더 많은 관심을 끌고, 선거 후에 더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온건파 시민인 나에게는 2002년 이후 세 차례나 극우정당의 대선 2차 투표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내 견해로는, 극우나 극좌 정당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들은 세상을 단순화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선동을 하거나 최악의 경우 많은 이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주장을 내놓는다. 프랑스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비극(2015~2016년에 일어난 테러 사건들)에서 시작된 두려움은 이제 프랑스가 추구하는 근본적 가치에 반하는 프랑스를 말하고 있다. 타자, 나와 타자의 차이, 심지어는 그들과의 분열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논의가 아닌 분열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지금 프랑스인들을 서로 대항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원론적인 불신이다. 점점 번져나가는 ‘두 번째 두려움’은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 차이 심지어 그것의 근원에까지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가장 최악인 점은 그럴수록 더 온건하고, 더 원칙적이고, 덜 독단적인 방향을 택해야 할 정당들도 점점 현실 세계를 단순화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는 점이다.
불과 며칠 전에도 국회 한복판에서 극우파 의원이 회기 중간에 인종차별적 모욕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정치권 전체가 해당 행동에 충격을 받고 비판을 했지만, 가해자는 충분한 처벌을 받지는 못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마치 그런 종류의 발언이 이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상위의 토론장인 국회 깊은 곳부터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프랑스에 깊은 상처를 냈다. 코로나19로 프랑스는 백신 찬성론자와 반대론자로 다시 한번 분열되었다. 나는 TV로 명성 있는 과학자들이 백신 반대론자들과 터무니없는 논쟁을 벌이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백신 반대론자들은 대개 최소한의 논리적 근거 없이 그저 그들 자신의 믿음에 기반해 수년간의 과학적 연구를 의심하는 광신도들이었다. 그러니 그런 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때면 지식이란 것이 허공에 뱉은 한없이 가벼운 단어들만도 못한 것이 된 느낌이 든다.
에너지 가격을 급등시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전쟁으로 인한 득과 실을 계산하기 어려운 평범한 사람들에게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 와중에 파업이 터졌고, 특히 파리 지역에서는 자동차에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 앞에 긴 줄을 서야 하기도 했다.
세계 모든 나라가 그렇듯 프랑스의 미래 역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반대 의견을 밀어내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들을 해결해낼 수 있을까? 도전 정신이 두려움에 잡아먹히게 둔다면 우리는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 비윤리적인 리얼리티 방송에서 전파되는 거짓 정보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바라본다면 명확하고 올곧은 견해를 지닐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나는 내 자신조차도 그런 잘못된 두려움을 기반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이것이 내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사고방식이 아님을 확신한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세상이 지나치게 단순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프랑스는 다문화로 가득한 국가이고 그 때문에 역사는 아주 파란만장하게 요동쳤다. 다채로움은 다름에서 나오는 것이다. 섬세한 생각과 말은 타인을 이해하면서 나오는 것이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두려움의 존재를 자각할수록, 발현된 두려움과 싸울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프랑스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고, 내가 아이들에게 꼭 물려주고 싶은 가치다.
 
03 TOKYO, JAPAN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금리에 관한 모든 종류의 뉴스다.
요시노 다이치로(신문 기자)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금리’다. 급속히 진행되는 엔저와 물가 상승에도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는 금융 당국의 선택이 낳을 결과가 두렵다. 하지만 동시에 제발 금리가 오르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이런 자기모순에 가까운 고민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지난 9월, 나는 한국에서의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일본에 귀국했다. 한국에서 지내는 7개월간 엄청난 물가고에 시달렸던 나에게는 오랜만에 돌아온 도쿄가 천국 같았다. 집 근처에 사시미 3팩을 1만엔(약 9500원)에 파는 집이 있다. 2000엔(약 19000원)만 내면 괜찮은 와인이나 사케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일본도 물가가 상승세이기는 하지만 5%를 넘은 한국의 물가상승률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아니, 이렇게 많이 샀는데 이 정도밖에 안 나와?” 뭔가를 살 때마다 마음속으로 경탄하면서, 나는 얼마간 ‘디스카운트 재팬’의 매력을 흠뻑 맛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찬물을 끼얹듯 은행에서 우편물 하나가 도착했다. 주택 구입 대출의 금리 우대 기간 종료와 내달부터 시작되는 금리 인상을 알리는 통지였다. 새로운 금리는 변동금리 0.775%, 고정금리 1.45%부터였다. 그동안 3년 고정 0.45%로 대출을 받아온 나에게는 ‘금리가 인상된다’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고, 우편물을 읽는 순간 마치 하늘에 구멍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9년 전에 지방 근무를 마치고 도쿄에 돌아온 나는(일본 신문기자는 지방 전근이 많다) 도쿄의 한 주택가에 작은 집을 샀고 은행에서 5000만 엔을 대출받았다. 아베노믹스라는 금융 완화 정책이 시작된 지 1년도 안 되었던 그 무렵, 일본은 심각한 경기침체에 빠져 있었고 주택 가격도 지금 돌이켜보면 바닥이었다. 그 당시 변동금리는 0.75%. 은행 담당자는 “앞으로도 저금리가 계속될 전망이기 때문에 변동금리로 길게 빌리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설명해줬고 나도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아버지께서 격분하셨다. 일본에서 주택 대출 금리가 9%를 넘은 1980년대 말의 ‘버블 경제’ 때 살림집을 마련한 아버지는 아직도 은행에 박힌 깊은 불신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은행 직원이란 모두 다 사기꾼이니 그들의 말을 믿지 말아야 한다. 일본 경제는 곧 도래할 파탄을 피할 수 없고 반드시 금리 급등 시대가 온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절대로 변동금리로 빌려서는 안 된다. 끝까지 고정금리로 빌려라.” 거의 협박에 가까운 ‘조언’이었다. 참고로 아버지가 주신 건 그저 조언뿐이었고 경제적 지원은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와 지금은 시대 상황이 전혀 다른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아버지의 전망과 반대로 그 후 일본은 기나긴 초저금리 시대에 돌입했다. 아베노믹스가 계속되자 주가가 올랐는데, 국민 대부분이 경기회복을 실감하지는 못했고, 특히 나 같은 주택 구입자는 계속 저금리 혜택을 누렸다. 물론 변동금리로 빌렸더라면 이자가 더 쌌을 것이다. 하지만 고정금리로도 그렇게 손해를 봤다는 느낌은 받지 못할 정도였다. 그건 틀림없이 일본의 초저금리 정책의 덕분이었다.
이런 고민을 한국 사람들이 들으면 황당해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지금 우리는 대출 금리가 5%를 넘어 난리가 났는데 1%도 안 되면서 앓는 소리냐’ 하고. 맞는 말이다. 이럴 때 우리 일본인이 저금리가 계속되는 ‘냉동 상태’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다는 것을 실감한다. 초저금리 시대의 혜택을 누린다는 것은 경기침체를 기뻐하면서 사는 자기모순이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금리가 계속 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은, 사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경기가 계속 회복되지 않기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누군가에게 들킬까 다소 민망한 마음이다. 경기가 회복되어 월급이 오르면 좋겠으나 사실 내 급여 수준은 그동안 계속 내려가기만 했다. 신문사라는 저물어가는 업계의 특성상 상승을 요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경제 전망은 갈수록 어두워져가는 상황 속에서, 은행의 통지서를 보며 ‘이게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일본 파탄의 발걸음 소리인가’ 공포를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느낀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무려 1026조 엔(약 9750조원. 2023년 3월 시점 예상)에 달하는, 선진국 중 최악의 상황이라는 일본 국가 채무에 있다. 금리를 올리면 앞으로 발행될 국채에 대해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이자가 증가하고, 이자는 국가 재정을 조금씩 압박해나갈 것이다. 산더미처럼 쌓여버린 빚은 꼼꼼히 갚아나갈 수밖에 없겠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채무 중 대부분이 사회보장비용이라는 점이다. 이는 급속히 진행되는 사회의 고령화에서 기인한 것이니 앞으로도 눈덩이처럼 늘어날 예정이며 끝이 보이지도 않는다. 한국은행이 금리 인상을 주저하지 않고 가계 지출 부담을 대폭 확대시키는 것과 대조적으로, 천문학적인 정부 부채를 안고 있는 일본은 그런 결정이 쉽지 않다. 아베노믹스의 원조인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마이너스 0.1% 금리라는 사상 초유의 금융 완화 정책이 계속되는 건 그런 이유다.
물론 일본 내 전문가나 매체들도 이제 금리를 올려야 할 때라고 지적하고 있다. 환율이 폭락하고 전기요금이나 수입 식료품 등의 가격이 급등하는 것은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은행이 환율 급락에 대응해 이른바 ‘자이언트 스텝’을 거듭하면서 대응하는 모습을 보아온 나에게는 바다 건너의 일본 은행이 너무 대조적으로, 마치 이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도 사실이다.
끝을 모르고 내려가는 엔/달러 환율을 보면 역사의 시곗바늘이 되돌아가는 느낌마저 든다. 그동안 120엔대로 간신히 유지해온 엔/달러 환율이 130엔대를 넘어 140엔 선까지 기록한 게 지난 9월. 24년 만의 일이었다. 10월 20일에는 150엔 선이 붕괴됐는데 이건 무려 32년 전, 1990년대 초반 수준이다. 일본에 귀국하기 직전 서울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들은 하나같이 일본에 놀러 오겠다며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20년 전만 해도 일본 가면 물가가 비싸서 절약하면서 힘들게 여행했는데, 이젠 쇼핑도 마음껏 해야지.” 그 말을 들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갑자기 오래된 일본 가요 ‘동경의 하와이 항로(憧れのハワイ航路)’가 흘렀다. 그리고 좀 슬픈 기분에 빠져들었다.
하와이로 향하는 여객선을 타고 모두의 축하를 받으면서 항구를 출발하는 자랑스러움을 표현한 해당 노래는 1948년에 크게 유행했다. 1달러를 사는 데 360엔이나 내야 하는 시대였다. 이제 일본인에게 해외여행이란 하와이 여행이 그저 꿈이었던 그때처럼 다시 그림의 떡이 되어버릴까? 물론 지금과 75년 전 상황은 전반적으로 다르겠지만, 실제로 미국 내 일본 유학생들이 한 장의 휴지를 반으로 나눠 아껴 쓰고 있다는 눈물겨운 언론 보도도 나오고 있다. 경제 성장으로 그동안 열심히 키워온 대외 구매력이 일본 금융 당국의 선택으로 물거품이 되는 듯한, 허무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 금리를 올려서 엔저를 안 막으면 경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니, 절대 올리면 안 된다. 금리를 올려도 별 효과는 없다.” 오늘도 내 머릿속에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답이 나오는 건 아마도 내년 4월, 아베노믹스의 수호자를 자임해온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의 임기가 만료되는 시점일 것이다. 새로운 총재는 어느 길을 택하고 그 결과 일본은 어디로 갈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앞으로도 경기회복을 기다리면서 초저금리의 냉동고 속에서 완만한 죽음에 도달할 것인가? 기가 막힐 금액의 정부 채무라는 시한폭탄을 안은 비행기를 연착륙시킬 방법이 있을까? 그건 아마도 비슷한 경제구조와 고령화라는 동일한 과제를 가진 한국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선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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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오성윤
    TRANSLATOR 이원열(영어)/김연지(프랑스어)/황세정(프랑스어)
    PHOTO 게티이미지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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