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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그룹이여, 그럴 바에는 차라리 '샤샤샤'를 하라

프로필 by 김현유 2022.12.29
 
그건 분명 디스였다. 나는 그렇게 주장할 생각이다. 블랙핑크의 ‘Pink Venom’ 이야기다. 문제의 가사를 다시 읊어보자. “Kick in the door, waving the coco’/ 팝콘이나 챙겨 껴들 생각 말고/ I talk that talk, runways I walk-walk/ 눈 감고 Pop-pop 안 봐도 척”. ‘Pink Venom’이 나오기 직전 트와이스는 ‘Talk That Talk’이라는 노래를 내놓았다. 트와이스 멤버 나연은 ‘Pop’이라는 노래로 솔로 데뷔를 했다. ‘Pink Venom’은 “우리가 짱”이라고 외치는 전형적인 힙합 넘버다. 가사를 한 문장으로 줄이자면 ‘여왕이 컴백했으니 다 찌그러져’다. 찌그러질 대상은 누구인가. 당연히 다른 걸그룹이다.
왜 굳이 트와이스여야만 했냐고? 블랙핑크와 트와이스는 3세대를 대표하는 걸그룹이다. YG와 JYP라는 대형 기획사를 상징하는 걸그룹이기도 하다. 당연히 두 그룹은 라이벌 관계다. 음악적으로도 상극이다. 블랙핑크가 이른바 ‘걸크러시’의 상징이라면 트와이스는 (2세대 걸그룹이 잘하던) 가상의 여자친구 이미지에 가깝다. 블랙핑크가 “모든 남자의 코피가 팡팡팡”이라고 노래할 때 트와이스는 “여자가 쉽게 마음을 주면 안 돼 샤샤샤”라고 노래했다. 팡팡팡과 샤샤샤는 다르다.
많은 팬은 걸그룹 사이 디스전이 일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팬들은 두 그룹 멤버들이 친하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행복한 케이팝 천국이라는 환상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노력은 노력이고 디스는 디스다. ‘Pink Venom’의 가사가 트와이스를 디스한 것이 아니라고 믿기에는 모든 암시가 명백하다. 타이밍도 완벽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당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나는 이게 걸그룹 사이의 첫 번째 디스전이었다고 굳게 믿을 생각이다.
블랙핑크가 그들 역사상 가장 힙합에 가까운 앨범을 발매하며 세계를 점령하는 동안 4세대 걸그룹의 시대가 시작됐다. 아이브, 뉴진스, 르세라핌, (여자)아이들이 거의 동시에 데뷔를 했다. 2022년은 아마도 한국 아이돌 산업 역사상 걸그룹이 가장 뜨겁게 차트를 점령했던 해로 기록될 것이다. 어쩌면 걸그룹이 사랑 노래를 버리기 시작한 해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물론 걸그룹은 여전히 사랑 노래를 부른다. 아이브와 뉴진스가 그렇다. 다만 그들이 부르는 사랑 노래에 더는 ‘샤샤샤(라고 쓰고 ‘애교’라고 읽는다)’가 없다는 사실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아이브와 뉴진스의 사랑 노래는 수동적인 데가 거의 없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르세라핌과 (여자)아이들은 사랑 노래를 버리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 르세라핌의 ‘Fearless’와 ‘Antifragile’에는 아예 사랑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아이들의 ‘Tomboy’와 ‘Nxde’는 분명한 페미니스트 송가다. 이전 세대의 걸그룹도 사랑이 아닌 무언가에 대해 노래를 하긴 했다. 이를테면 걸스데이의 ‘여자 대통령’. 물론 농담이다. 혁신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걸스데이의 ‘여자 대통령’은 결국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걸스데이가 이 노래를 부른 것을 매우 민망해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물론 2NE1이 있었다. 그들은 아마도 사랑이 아닌 것을 스웨그를 담아 노래한 한국의 첫 번째 걸그룹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당대에 통상적인 걸그룹의 영역을 한참 벗어난 그룹으로 받아들여졌다. 흐름을 대표하지 못하는 이레귤러였다는 뜻이다. 블랙핑크는 2NE1의 자산을 더욱 ‘예쁘게’ 발전시킨 그룹에 가깝다. 2NE1과 블랙핑크가 보통의 걸그룹과 조금 다른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된 건 확실히 YG 출신이기 때문이다. YG는 SM, JYP보다 더욱 본격적으로 힙합이라는 장르에 기반한 노래를 생산한다. 애교는 없다. 대신 스웨그가 있다. 스웨그를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아닌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 필요하다. 각각의 멤버들이 품고 있는 개인적인 서사를 가사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2022년 걸그룹 트렌드는 그런 변화가 YG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흥미롭다. 하이브의 르세라핌은 시작부터 멤버 개인의 서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데뷔곡 ‘Fearless’의 “관심없어 과거에 모두가 알고 있는 그 트러블에”와 “욕심을 숨기라는 네 말들은 이상해/겸손한 연기 같은 건 더 이상 안 해”는 명확하게 멤버 허윤진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48>에서 센터가 되고 싶은 욕심을 보였다고 대중에게 두들겨 맞고 미국으로 돌아갔던 허윤진의 서사 없이 이 노래는 출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Antifragile’은 더 의미심장하다. 모두가 내 추락을 기도하지만 그 불길 속에서 다시 날겠다는 이 노래의 가사는 후반부로 갈수록 더 구체적이다. 발레리나 출신 카즈하는 “잊지 마 내가 두고 온 토슈즈/무슨 말이 더 필요해”라고 노래한다. 그룹 아이즈원 출신인 사쿠라와 김채원은 “무시 마 내가 걸어온 커리어”라고 노래한다. 르세라핌의 뒤에는 분명 그들의 앨범을 프로듀싱한 방시혁의 존재가 있다. YG와 비슷하게도 하이브 역시 힙합이라는 장르를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기획사다. 힙합은 가사가 중요한 장르다. 뮤지션의 개인적 서사 없이 이 장르는 완성될 수 없다.
(여자)아이들 역시 힙합이 그들 음악의 근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전소연이 있다.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에 참가했던 전소연은 결국 데뷔조에 들지 못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장점인 랩을 살려 <언프리티 랩스타 3>에 출연했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프로듀스 101> 시절 외모에 대한 악플을 너무 많이 받아 상실했던 자신감을 회복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모든 전소연의 개인적 서사는 (여자)아이들의 근원이 됐다. 나는 (여자)아이들의 진정한 데뷔가 2018년이 아니라 2022년이라고 생각한다. 멤버 서수진이 학폭 논란으로 탈퇴하자 (여자)아이들은 이제 사랑 노래 따위는 부르지 않겠다는 결기로 ‘Tomboy’와 ‘Nxde’를 차례로 내놓았다. 확실한 힙합의 애티튜드다.
힙합은 장르면서 애티튜드다. 20세기에 록이 그랬듯 힙합은 리듬과 멜로디와 사운드스케이프를 넘어 어떤 스타일과 태도를 대변한다. 르세라핌과 (여자)아이들은 확실히 한국 걸그룹이 다른 시기로 넘어가고 있다는 어떤 증거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음악의 장르가 힙합은 아닐지라도 애티튜드는 분명한 힙합이다. 전자가 하이브의 전략이라면 후자는 전소연의 전략이다. 그리고 그 전략은 좋은 시기를 맞이했다. 최근 아이돌계의 인상적인 움직임 중 하나는 걸그룹 팬층의 변화다. 여성 팬들이 남돌이 아닌 여돌에게 투항하고 있다. 사랑 노래만 불러서 통할 시기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여성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4세대 걸그룹의 가사와 태도가 변하고 있는 것은 팬들이 걸그룹을 소비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블랙핑크 이후 수많은 ‘걸크러시’ 걸그룹이 튀어나왔지만 4세대 걸그룹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제대로 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만들어진 걸크러시는 통하지 않는다. 잇지의 전략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잇지는 남들과 다르고 당당하다고 노래하지만 그들의 메시지가 멤버 개인의 서사와는 딱히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어딘가 좀 공허한 데가 있다. 굳이 이런 지적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이유는 앞으로 수많은 기획사들이 ‘샤샤샤’를 멈추고 ‘팡팡팡’을 내세우는 걸그룹을 양산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멤버 개인의 진솔한 서사 없이 진정한 걸크러시는 완성될 수 없다. 그럴 바에는 계속 샤샤샤를 하라. 샤샤샤를 원하는 팬들도 어딘가에는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 샤샤샤도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할 것이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 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redit

  • EDITOR 김현유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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