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내믹하고 어메이징하며 파워풀한 도시 슬로건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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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지난 몇 년간 좀 편하긴 했다. 부산이 어떤 도시냐고 물으면 나는 “다이내믹해”라고 답했다. 2003년 부산시가 선정한 슬로건이 ‘다이나믹 부산’이었기 때문이다. 다이내믹하다는 단어는 어디에나 갖다 붙일 수가 있다. 부산만 다이내믹하냐, 서울도 다이내믹하다. 사실 전 세계의 웬만한 대도시는 다 다이내믹하다. 특징이 없는 단어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단어는 부산과 아주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부산시는 “다이내믹이라는 단어의 활력과 역동성이 시민들의 기질과 잘 맞는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역동적인 시민들 때문에 고생이 심한 부산시의 고민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부산시는 얼마 전 도시 슬로건을 바꿨다. ‘부산 이즈 굿(Busan is Good)’이다. 부산시는 슬로건 제작에 총 8억원을 투입했다. 최종 3개 안 중 선택되지 않은 슬로건은 ‘Bridge for all, Busan(모두를 연결하는 부산)’, ‘True Place, Busan(진정한 도시 부산)’이다. 그나마 ‘부산 이즈 굿’이 선정된 게 다행이다. 맞다. 부산은 굿이다. 한국에서 가장 시끄러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부산의 시장에 갔다가 생선 파는 아주머니들이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걸 본 적이 있으신가? 그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구경거리로서, 부산 사는 사람이 아니면 평생 볼 일 없는 이벤트다. 그러니 부산은 굿이다. 잠깐. 그 굿이 그 굿이 아닌 것 같다고? 지금 당신은 한국의 두 번째 대도시가 ‘부산은 좋다’ 따위의 슬로건을 8억을 들여 제작했다고 믿는 건가? 부산시에 문의를 넣어보시라. 분명히 그것은 ‘부산은 굿이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서울도 슬로건을 바꿨다. 나는 여기에는 조금 기대가 있었다. 고 박원순 시장 시절 만든 ‘아이 서울 유’가 거슬렸던 탓이다. 너를 서울하겠다니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 나는 그 슬로건을 볼 때마다 ‘서울 생활 벌써 20년. 이 도시가 나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엿 먹여온 걸 생각하면 아주 적절한 슬로건이군’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아이 서울 유에서 누가 ‘아이 러브 유’를 떠올리겠는가. 어떻게 봐도 그건 ‘아 윌 파인드 유 앤 아 윌 킬 유’에 가까운 뉘앙스다. 여하튼 오세훈 시장이 슬로건을 교체하겠다고 하니 정치적 지지 여부를 떠나 필요한 일이긴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지. 현재 서울시는 슬로건 후보를 네 개로 정해놓고 시민을 대상으로 선호도 조사를 하고 있다. 후보는 ‘Seoul for you’, ‘Amazing Seoul’, ‘Seoul, my soul’, ‘Make it happen, Seoul’이다. 그렇다. 만약 당신이 <에스콰이어>의 오랜 교양 있는 독자라면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널 위한 서울? 이건 그냥 생각이 없는 소리다. 어메이징 서울? 자기 입으로 ‘어메이징 서울’이라는 말을 외국인에게 할 만큼 뻔뻔하게 이 도시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의 대범함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Make it happen, Seoul’은 듣는 순간 머라이어 캐리의 1992년 히트곡 ‘Make it happen’ 선율이 떠오른다는 점에서 나 같은 머라이어 캐리 팬에게는 나쁘지 않다.
내 선택은 ‘Seoul, my soul’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미 soul이라는 단어는 서울의 도시 슬로건에 쓰인 적이 있다. 서울을 브랜딩하겠다고 처음 시도한 사람은 이명박이었다. 서울시장 시절 그는 2002년 월드컵 개최를 맞이하여 ‘Hi Seoul’이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다음 시장이 된 오세훈은 2006년 ‘Soul of Asia’라는 서브 슬로건을 거기에 추가했다. 정치적 지지 여부에 관계없이, 잠깐만. 나는 왜 자꾸 ‘정치적 지지 여부에 관계없이’라는 쓸모없는 문장을 계속해서 보태고 있는가. 맞다. 이건 다 정치병 환자로 가득한 세상에 살면서 글쟁이로 어떻게든 살아남아보려는 수작이다. 정치적으로 사맛디 아니하면 뭘 하든 다 까는 세상이란 얼마나 피곤한 곳인가 말이다. 어쨌거나 계속 이야기를 해보자면, 오세훈이 2006년도에 만든 ‘Soul of Asia’는 꽤 괜찮았다. 그걸 굳이 ‘아이 서울 유’로 바꿨다가 다시 ‘Seoul, my soul’로 돌아오게 생겼다. 20년 동안 슬로건을 세 번 바꾸느라 서울시가 들인 예산은 수백억 원이다.
서울과 부산만 이 모양인 건 아니라 좀 다행이다. 대구도 슬로건을 바꿨다. 지난해 홍준표 시장은 취임과 동시에 슬로건을 ‘컬러풀 대구’에서 ‘파워풀 대구’로 바꾸었다. 이건 납득이 간다. 아니, 좋아서 납득이 간다는 소리가 아니라 홍준표 시장이 원하는 게 뭔지 뻔해서 납득이 간다는 이야기다. 한국 보수는 파워를 좋아한다. 어떻게 파워풀해질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파워풀하고 싶은 홍준표 시장의 정념이 가득한 슬로건이 아닐 수 없다. 솔직히 나에게 대구는 음식 맛이 파워풀하게 없는 도시이긴 한데, 어차피 대구에 사는 분들도 맹물에 고춧가루랑 생선만 집어넣고 끓이는 천한 항구도시 놈들이 음식에 대해 뭘 아냐고 생각하실 테니 결국 쌤쌤이다.
슬로건을 내세우는 도시는 빈약하다. 자랑할 게 별로 없기 때문에 기어이 슬로건이라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지자체장들이 이럴 때마다 내세우는 샘플이 하나 있다. 1977년 밀턴 글레이저가 만든 뉴욕의 ‘I♥NY’다. 근데 이건 뉴욕을 홍보하려고 만든 슬로건이 아니다. 뉴욕시는 이미 전 세계적인 브랜드였다. 대신 뉴욕주의 다른 지역들은 좀 낙후된 상태였다. 그러니 이 역사적인 슬로건은 ‘뉴욕주의 다른 지역들’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슬로건이다. 애초에 한국 도시들의 슬로건과는 의미 자체가 다른 것이다. 그 외 어떤 해외의 대도시들이 슬로건을 만들고, 그걸 지자체장이 바뀔 때마다 바꾸고, 그걸 자랑스럽게 도시 곳곳에 전시하는가. 나에게 단 하나의 사례라도 말해주시길 부탁드린다.
공식적인 슬로건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도시 슬로건이 하나 있기는 하다. 베를린의 전 시장 클라우스 보베라이트가 제창한 ‘Poor but sexy’다. 베를린은 수도지만 독일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 중 하나였다. 대신 집값과 물가가 워낙 쌌던 덕에 전 유럽의 수많은 가난하고 젊은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지금은 아니다. 이미 베를린은 비싸진 지 오래다).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 이것만큼 섹시한 슬로건이 어디 있겠는가. 이 슬로건이 멋진 이유는 스스로의 약점을 정직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뻥튀기지 않고 자신을 홍보하는 것이야말로 고수다.
그러니 나도 여기서 한국 대도시를 위한 슬로건들을 좀 제안하고자 한다. 서울은 알아서 할 일이고 부산과 대구에는 딱 맞는 슬로건이 있다. 부산과 대구는 2019년 1인당 지역 총생산이 17개 시도 가운데 나란히 16위와 17위를 차지한 가난한 동네다. 그러니 베를린 슬로건을 흉내 내도 괜찮을 것이다. 부산은 바다라도 있으니 ‘Poor but cool’로, 대구는 여름이 견딜 수 없이 뜨거우니 ‘Poor but hot’으로 가면 된다. 외국인은 cool과 hot을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할 테니 더 좋다. 나는 이 슬로건에 대해 어떠한 저작권도 내세울 생각이 없다. 마음껏 가져다 쓰시라.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 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redit
- EDITOR 김현유
- WRITER 김도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MONTHLY CEL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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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도 흥미로우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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