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 핀 장식 원피스 질 샌더. 링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어릴 때부터 유학 생활을 한 것도 홀로 서고 싶어서였나요?
인과가 반대인데, 유학 생활을 한 덕분에 독립심이 자랐을 거예요. 고등학생 때였는데, 일주일 전에 아버지에게 통보를 받고 말레이시아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어요. 싫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죠. 영어도 못했으니까요.(웃음) 혼자 살아남기 위해 영어도 하고, 공부도 하고, 적응을 해나갔어요.
그렇죠? 얼마 전에 아버지랑 이 주제로 얘기를 했어요. 생각해보면 대단하지 않냐고요. 아빠가 하라는 거 싫다고 하면서도 결국엔 말 다 들은 것도 그렇고, 또 던져놨더니 알아서 뭔가 해낸 것도 그렇고요.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저는 다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런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이고요.
맞아요, 유교걸.(웃음) 해외 생활을 오래 했으니 자유분방함을 추구하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엄청나게 보수적이거든요. 하지만 누군가 저를 어떤 선 안에 가두려고 하면 또 튀어나가고 싶어 하고. 제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 있어서, 어찌 보면 모순 덩어리인 것 같기도 해요.
그건 아니었어요. 그 무렵엔 관심 분야가 다양하다 보니 고민이 정말 많았어요. 철학에도 관심이 있었고,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 나의 비즈니스를 직접 운영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경영을 선택한 건 가장 무난해 보여서였어요. 뭘 하든 경영과 연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거죠.
4개 국어를 한다고 들었는데, 어문 쪽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까 얘기한 잘못된 소문 중 하나군요. 이 기회에 좀 바로잡아주세요.(웃음) 신인 때 했던 인터뷰가 와전된 거예요. ‘어떤 언어를 배워봤느냐’는 질문을 받아서 솔직하게 말씀드렸죠. 영어는 당연히 배웠고, 중국어는 고등학생 때 제2외국어로 잠시 배웠으며, 일본어는 친구들이 있으니 잠깐 공부했고, 요즘 프랑스어에 관심이 생겨서 공부해볼까 싶다고요. 그런데 ‘4개 국어에 능통하다’는 식으로 기사가 나온 거예요. 전혀 아니고요, 여행 갔을 때 섞어 쓸 수 있는 정도예요. 언어에 대한 관심은 늘 있지만요.
대학 졸업 후 배우가 됐잖아요. 마음을 먹은 계기가 있었어요?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금융 쪽에서 일하거나 대학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던 와중에 배우 일을 제안받게 된 거예요. 어릴 때부터 워낙 영화를 좋아했고, 한번쯤 영화 속 인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어요. 취직이든 대학원이든 한 1~2년 후에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원래도 막연한 계획은 있었어요. 꼭 배우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이십대 중반에 내 모습을 남기는 작업을 한 번쯤은 하고 싶었거든요. 딱 그 마지노선인 시기에 데뷔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신기해요. 역시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건가 싶고요.
비교적 늦은 나이의 데뷔였는데, 고민한 부분은 없어요?
고민이 없진 않았지만, 더 늦으면 그 기회가 더 줄어들 테니까 그냥 뛰어들었어요. 안 해보고 후회할 바에는 해보고 후회하자는 그런 마음.
그렇게 계속 쉬지 않고 일하게 됐죠.(웃음) 사실 초반에는 결은 좀 다르지만 비슷한 점이 있는 ‘악녀’ 역할을 많이 맡았어요.
당시에는 이미지가 굳어질까 걱정이 많았어요. 저는 연기를 잘해서 데뷔한 케이스가 아니었잖아요. 연극영화과 출신도 아니고, 예쁘고 청순한 이미지로 얼굴을 알렸기 때문에 도회적인 캐릭터가 많이 들어왔죠. 청개구리 기질이 동하더라고요. ‘나 그런 사람 아닌데?’ 하는.(웃음) 그때는 스릴러든 회귀물이든 액션이든, 강렬한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런데 돌아보면, 그 시기밖에 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있었을 텐데 그 순간을 즐기지 않은 건 아쉬워요. 지금은 뭐든 좋아요. 어떤 역할이든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 하고요.
찍는 동안 가장 힘들었던 작품은 어떤 거예요?
〈키마이라〉. 단연 〈키마이라〉요.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촬영 기간 자체도 길었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주연을 맡은 작품이기도 해요. 연기 면에서도 처음 시도해본 게 많았어요. 김효경이라는 캐릭터를 맡았는데, 맨 마지막에 효경이가 가진 비밀이 드러나거든요. 다른 배우들은 마지막까지 몰랐고, 저는 작품 중후반부 촬영에 들어갈 때쯤에야 효경이의 비밀을 확실하게 알게 됐어요. 그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임했던 작품이다 보니, 제가 부족하다는 걸 많이 깨달았죠. 덕분에 많이 성장하게 해준 작품이기도 해요.
〈키마이라〉의 효경이는 확실히 ‘딥’한 인물이었죠.
촬영을 다 마친 후에도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어요. 거의 1년여를 잠식당했죠. 혜정이처럼 긍정적인 영향을 주면 좋은데, 효경이는 상당히 힘들었어요.
곧 방영 예정인 〈진짜가 나타났다!〉의 장세진은 어떤 캐릭터인가요?
아주 깔끔하고 담백한 인물이에요. 아주 잘 자라서 적당한 자신감을 갖춘, 세련되고 쿨한 여성.
주영 씨와의 싱크로율은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해요?
아, 저렇게 설명해놓고 이렇게 말씀드리면 웃길지도 모르겠지만.(웃음) 제 모습을 많이 넣고 있어요. 많은 지점이 닮았다고 봐요.
〈더 글로리〉 이후 차기작으로 50부작 주말 드라마를 선택했어요. 지금껏 이렇게 호흡이 긴 작품은 해본 적이 없었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저에겐 새로운 도전이에요. 제가 겨우겨우 쌓아온 커리어의 밑천이 만천하에 드러날 수도 있어요.(웃음) 그럼에도 이런 긴 호흡의 작품을 할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 제 역량을 확인해보고 싶었어요. 또 여태껏 사연이 있어서 마지막에 터트리는 역할을 많이 맡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분량은 적고, 한 신으로 모든 걸 다 보여줘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죠. 이렇게 호흡이 긴 작품에서는 고루 분포된 분량을 통해 제가 이런저런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돼요.
그렇게 쉼 없이 달리면서 다양한 장르와 역할을 가리지 않고 해왔는데, 진한 멜로는 없더라고요.
맞아요. 아쉬워요. 멜로 감독님들께서 저를 가져다 써주시면 좋겠어요.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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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혜정이 이상으로 망가지는, 코믹한 역할도 안 해봤죠.
아, 그것도 너무 하고 싶어요. 완전히 망가지는 코미디 연기요. 진짜로 그런 얘기 자주 하거든요. 저한테 거적때기만 입혀놓고 밖에서 굴려주면 좋겠다고요. 생생하게 망가진 모습, 마음껏 보여드릴 수 있어요. 연락 주세요.(웃음)
일 얘기에 이렇게 눈을 빛내는 걸 보면, 워커홀릭인 게 확실하네요.
저는 스스로 타고난 한량이라고 생각했는데, 바쁘게 지내다가 일이 없으면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아직은 열심히 에너지를 끌어 써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항상 일이 고프죠. 대신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안 되는 건 빨리 포기하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려 해요. 예전에는 어쩔 수 없는 부분까지 쥐어 싸매고 전전긍긍했거든요.
놓을 부분은 과감하게 놓을 줄 알게 됐어요. 책임은 다하되,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연기에 임할 수 있는 방법을 익힌 거죠. 제가 하겠다고 한 일은 직접 제 손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성격이긴 해요. 그런 점이 스스로를 괴롭힐 때도 있었고요. 이제는 많이 편해졌어요. 익숙해지기도 했을 거고요.
처음 배우가 됐을 때와 지금, 일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전혀요. 초심 그대로라고 생각해요. 추가된 것도 없고 빠진 것도 없고, 처음부터 그 생각이었어요. 오랫동안, 다양한 역할을 잘하고 싶다. 그 이상 대단히 무언가가 되거나 얻기를 바라진 않아요. 세월이 많이 지나도 그 생각은 변하진 않을 거고요.
확실히 주영 씨는 아까 말한 대로, 전반적으로 무던한 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유지 가능할 정도의 목표를 잡고, 10년 가까이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요.
정말요? 저 지금 굉장히 들떠 있는데….(웃음) 사실 궁극적인 바람은, 먼 훗날 스스로 돌아봐도 재미있는 작품을 남기는 거예요. 쑥스럽지 않고,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이요. 누구에게나 ‘인생 영화’가 있잖아요. 제 인생 영화가 제가 출연한 작품이 될 수 있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거예요.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곧 오겠죠. 올 수 있겠죠. 데뷔 이후 가장 이름을 많이 알렸는데, 지금 이 순간이 앞으로 어떤 시간으로 남을 것 같아요?
너무… 소중하죠. 음, 울컥하네요. 아, 이런. 왜 눈물이….
아이고, 주영 씨. 괜찮아요? 무던한 사람이 눈물을 보이면 정말 큰일인데.(웃음)
아까 말했듯 성격과 직업이 맞지 않아 힘든 때가 있었는데, 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어요. 그 모든 경험이 쌓여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얻게 된 거니까, 앞으로도 잊지 않고 열심히 연기해야죠.
차주영이라는 배우의 지금까지의 커리어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 정도 될 것 같아요?
70점. 잘 버텨왔고, 이제야 비로소 이 직업과 나의 역할을 조금 찾아가는 것 같고, 자신감과 용기를 얻었으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재미있게 활동해왔다는 점에서 점수를 줬어요. 남은 30점은 아마 더 끈질기게 버틴 후에야 채울 수 있겠죠.
그렇죠. 지치지 않고. 눈물은 그치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