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침공 전날, 키이우 외곽의 버려진 공장에서 민간인들이 교관들과 함께 훈련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온 봉사자들이 우크라이나 시민에 합류해 후방 지원에 큰 힘을 보탰다. © SERGEI SUPINSKY/AFP/GETTY IMAGES
공습경보 사이렌이 또 한 번 도시의 공기를 갈랐지만, 윌리엄 맥널티의 일과를 방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료용 지혈대와 방한복을 필요로 하는 우크라이나 파트너들과 회의하느라 키이우에서 긴 아침을 보낸 그는 오후가 되어서야 잠을 청했다. 호텔 방의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가을볕에 찬 바람을 불어넣었다. 회색 구름 사이에서 한 줄기 햇빛이 비췄다. 현지인들이 입을 모아 빈정대는 ‘우크라이나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기랄.’ 맥널티는 생각했다. 300만이 거주하는 도시에서 드론 공격을 받을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그는 시카고 출신의 미 해군 퇴역 군인이며, 이라크에서 복무했고 수많은 분쟁 및 자연재해 지역에서 인도주의 활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제 우크라이나 일상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빈번한 사이렌 소리에도 무덤덤했다. 작년 2월 러시아 침공 이후 그는 기차와 밴으로 우크라이나 전역을 돌아다니며 물자를 공급해왔다. 시골 마을부터 최전선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의 가장자리에서 싸우는 이들에게. 그가 속한 비영리단체 ‘오퍼레이션 화이트 스토크’는 오래도록 낯선 나라인 우크라이나를 도우면서도 자신들의 노고를 늘어놓는 법이 없었다. 맥널티는 혼란스러운 전쟁의 아픔과 그 안에서 길을 잃은 모호한 목적을 지겹도록 목격했다. ‘정당한 대의’는 몸소 행동하는 사람들이 늘 갈망하는 것이지만, 그는 그런 가치가 정말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극진한 이타주의자도 잠은 자야 했다. 그래서 45세의 맥널티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가능한 한 휴식에 집중했다. 사이렌보다 시끄럽고 거친 기계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소리는 공중에 뜬 거대한 잔디깎이처럼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냈고, 점점 가까워지더니 맥널티가 지내는 호텔 바로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 정도로도 내겐 충분했어요.” 그 며칠 후, 우리가 키이우와 훨씬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오데사를 잇는 가늘고 긴 먹빛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맥널티는 회상했다. 소음의 정체는 지난 몇 달 동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위협하는 데 사용한 수많은 무기 중 하나인 이란제 자폭 드론 ‘샤헤드’였다. 그는 소음이 희미해지고 오직 공습 사이렌 소리가 들릴 때만 움직였다. 맥널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10월 중순 그날 오후 키이우에 날아들었던 드론의 표적은 그가 머무는 호텔이 아닌 다른 건물이었다. “대피실로 내려갔다가 나와서 괜찮은 이탤리언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었죠.”
우크라이나 전쟁 동안 새롭게 정리된 전쟁 관련 표현으로 말하자면 맥널티는 “자원봉사자”다. 전 세계 사람들과 우크라이나인으로 이뤄진 무수한 자원봉사자들은 러시아군에 저항하는 세력에 힘을 보태는 데 전념한다. 역할은 다양하다. 맥널티처럼 인도주의 활동을 펼치는 사람부터 군부대를 위한 모금 활동을 펼치는 소셜 미디어 셀럽까지. 소란스러운 외국 지원병, 묵묵히 식량을 운반하는 운전자, 속내를 알기 어려운 총기 밀반입자, 동네 체육관에서 위장용 길리 슈트를 뜨개질하는 나이 지긋한 노부인도 있다. 일부는 ‘자원봉사’라는 표현 그대로 저금을 털어서 자금을 대기도 하고, 또 일부는 약소하지만 급료를 받기도 한다.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나라 한가운데에서 영리를 추구하는 데에 별달리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고 폭리를 취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기는 하다. 1월에는 영국인 봉사자 2명이 고령의 민간인을 대피시키려다가 사망했다. 자원봉사자의 유형이나 접근 방식은 가지각색이지만, ‘이 전쟁은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는, ‘우크라이나는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 아래 하나로 뭉친다.
나도 우연히 이 믿음에 동참하게 되었다. 2022년 2월 말, 우크라이나 서부의 르비우에서 참전 동료 2명과 합류했다. 우리는 민간인들에게 전투의 기본과 자기방어를 가르치며 2주를 보냈다. 두렵고 긴장감 넘치면서도 고무적인 경험이었고, 이후 전쟁이 진행되고 지속하는 동안 우리는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다른 이들은 계속 전진했다. 나는 마음속에 걱정과 관심, 약간의 질투심을 품고 우크라이나의 자원봉사자들이 여름을 지나 초가을에 이르기까지 힘을 합쳐서 체계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난가을, 결국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2월에 3주간 함께했던 또 다른 교관이자 퇴역 해병대원인 벤 부시의 팀에 합류했다. 우리는 자원봉사자 생태계가 어떻게 발생해 흘러왔는지 짚고, 이 일에 삶을 바친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도로를 달리는 오퍼레이션 화이트 스토크의 밴 안에서 맥널티가 몸을 돌려 나를 보았다. 확신에 찬 그의 파란 눈에는 움직임이 없었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대해 잘 아는 구호단체 직원으로서 그의 눈빛은 이따금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차량 뒤편에는 앞으로 며칠 동안 만날 우크라이나군과 영토 방어 부대에 전할 구급함이 넘쳤다. 감압 바늘, 체스트 실(흉부 외상 폐쇄용 드레싱), 튼튼한 삽이 가득 든 상자들 때문에 앉을자리도 비좁았다. 겨울 혹한기가 오기 전에 전선에 삽을 전달하는 일이 특히 중요했는데, 꽁꽁 언 땅에서 참호를 만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전쟁은 기이해요. 매주 상황이 바뀌죠. 하지만 ‘우리가 옳은 일을 하는 걸까?’라고 자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우리는 느긋한 고요에 빠져들었다. 밴은 부드럽게 달렸다. 해바라기, 밀, 옥수수를 수확한 들판이 옆에 펼쳐졌다. 지는 해가 맑은 빛을 내며 들판을 뒤쫓았다. 몇 분 동안이나마 그곳에서는 전쟁도 한숨 돌리는 것 같았다. 그 도로 위에서 보기에는 먼 곳의 전쟁조차도 평온해 보였다.
평온은 신기루다. 평화와 같은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자폭 드론 공격이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곳에서 평온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파란 줄과 노란 줄이 교차된 우크라이나 국기가 산들바람에 나부낀다. 흐느끼는 한 여인의 손이 아들의 무덤에 놓인 자갈을 고르게 매만진다. 비석을 슬쩍 훔쳐본다. 사망은 3개월 전이다. 좀 더 나이 든 여성이 그녀를 붙잡고 일으켜 세우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비석 십자가에 기대어 놓은 액자 속 사진에서 귀가 크고 활기찬 청년이 잘생긴 로트바일러 품종 개를 끌어안고 있다. 전사한 미국 군인의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아들이 미소 짓는 모습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아들을 추모하며 그의 이름을 붙인 모든 벤치와 고속도로 구간을 맞바꿀 거라고 했다. 묏자리를 파는 사람과 사제가 근처에 머무른다.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4개의 구덩이가 다른 어머니들의 다른 아들들을 기다린다.
외국인들
지난봄, 우리가 그곳을 떠날 때에도 우크라이나는 이미 온갖 외국인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폴란드와 루마니아 국경을 따라 르비우 같은 서쪽 도시에 모였고, 맹공과 푸틴의 집착에 신음하는 수도 키이우까지 진작에 진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은 자신들의 신념을 향해 나아갔지만, 아닌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우크라이나 국민과 군에 중요한 기술과 자원을 전할 수 있었고, 누군가는 그러지 못했다.
“만약 당신이 계속 우크라이나에 머물렀다면 십중팔구 무언가 발견했을 겁니다.” 미 공군 퇴역 군인으로 ‘다크호스 얼라이즈’를 운영하는 제레미 피셔가 말했다. 다크호스 얼라이즈는 우크라이나 신병과 잠재적 징집병을 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춘 비영리단체다. 교관은 대개 퇴역한 나토군으로, 그중 몇 명은 이전 몇 달 동안 외국 군인으로 결성된 군부대 우크라이나 국제 여단과 함께 최전선에서 싸우기도 했다. “‘나는 군 교관이오’ 하고 떠들어대는 건달이 아주 많죠. 하지만 그들은 자기네가 뭘 하는지도 몰라요.”
이런 소모적인 과정에 관한 피셔의 설명은 조시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 4월에 도착한 미국인 조시는 국제 여단에서 복무 중이다.(그는 보안을 위해 성은 빼고 이름만 써달라고 요청했다.) 시리아에서도 복무한 바 있는 20대 중반의 퇴역 해병대원 조시는 작년 9월 말에 하르키우주 북동부 마을에서 전투를 치르던 중 러시아 포탄의 파편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나는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이 자국의 부대가 움직일 때 써먹을 수 있는 전쟁 경험을 쌓고자 우크라이나로 향한다는 우려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고, 그에 대해 조시에게 물었다. “그런 놈들은 금방 떨어져 나가요. 한둘쯤은 여기저기서 빈둥거리고 다녔을 수도 있지만, 이 전쟁의 참상을 진정으로 믿고 여기에 온 게 아니라면 현장에서야 뒤늦게 깨달았을 거예요. 어리석죠.”
모두가 저마다 사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모두의 이야기에서 비슷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더 많은 봉사자를 만날수록 정보 속에 일정한 특징과 패턴이 쌓였다. 대부분 남자지만, 여자도 있다. 젊은 층 다수는 테러와의 전쟁 말미에 복무했으며, 예상했거나 행여나 기대했을 전투 경험은 쌓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계속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고자 자기 삶의 터전인 사업체나 집을 팔기도 했다. 꽤 많은 이가 군인 연금이나 장애인 수당으로 생활한다. 이혼이나 별거 사례는 수를 세다가 그만두었다.
이 상황이 다소 슬프거나 애처롭다고 느낄 수도 있다. 혹은 그들이 우크라이나까지 간 게 용기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어쨌든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타인에게 선행을 베풀려 또 다른 전쟁터로 온 셈이다.
“아무리 마음이 간절하다고 해도 세상 모두가 자기 일을 그만두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돕겠다며 전쟁터로 올 수는 없어요. 저는 그랬지만요.” 딘이라는 이름의 다크호스 얼라이즈 교관이 말했다. 그는 54세이며 응급의료 대원 경력이 있는 뉴질랜드 퇴역 군인이다. 그리고 지금은 우크라이나 서부 숲에서 기본 훈련 과정을 지도하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게 계속해서 미국을 지키는 나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정확히 미국은 아닐지라도, 미국이 소중히 여기고 옹호해야 하는 가치에 대한 것이죠.” 오퍼레이션 화이트 스토크에서 맥널티를 돕는 맥스 코미어의 말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침착한 코미어는 28세이며 버지니아주 타이드워터 지역에서 육군 공수부대 보병 장교를 지냈다. 그는 자신들의 직접적인 인도주의 활동과 명료한 지시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밴을 무엇에도 충돌시키지 말 것, 물품을 전달할 것.’ 코미어는 우크라이나 영주권을 받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 더 오래 머물며 후방 지원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의미를 찾아서 여기까지 오는 사람이 많아요. 일부는 이미 그걸 찾았죠.”
우리는 잔잔하게 빛나는 파란 물 위로 황혼이 쏟아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데사의 해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해골과 X자형 뼈가 그려진 표지들이 풍경에 오점을 남겼다. 이곳 해변은 러시아 해군 보병대가 장악할 경우를 대비해 지뢰를 매설했다. 그런데도 끈질긴 지역 주민 몇 명은 여전히 한 치의 오차 없이 모래 위를 거닐었다. 전쟁도 그들의 일광욕은 막지 못한 것이다. 코미어가 전화를 확인했다. 다음 날 아침에 있을 의약품 수송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 동쪽으로 가기 전에 일과가 끝나면 틴더로 데이트 상대를 구해볼 수 있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전쟁도 틴더를 막을 수는 없다.
오퍼레이션 화이트 스토크는 지난봄부터 2만2000세트 이상의 최신 구급함을 전달했다. 오데사부터 므콜라이우와 헤르손에 이르기까지 남해안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신식 구급함으로 대체되기를 기다리는 소련 시절 구급상자 몇 개를 보았다. 그중 하나에는 1988년이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그걸 들고 있던 군인보다 열한 살이나 많았다.
note 2. 포딜 구역, 우안(右岸), 키이우
교차로마다 위장용 페인트로 칠을 하고 마력을 높인 사륜구동이 덜컹거리며 지나간다. 레슬러이자 배우인 더 록을 앞세운 거대한 광고판이 언더아머 제품을 사라고 권하며 건물에 걸려 있다. 감금된 마리우폴 포로들의 자유를 요구하는 현수막도 가까이 보인다. 하늘 어딘가에는 달도 있겠지만, 누구도 육안으로 볼 수는 없다.
우리 일행은 호텔에 있는 술집으로 향한다. 잭콕을 홀짝이던 윌슨이 말을 걸어온다. 그는 매일 밤 이런 식이다. 군인이었던 윌슨은 이제 직업 엔지니어로 팀을 꾸리고 있다. 이직에 대한 자세한 이유를 설명하는 건 거북해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블랙 피트도 윌슨의 팀원 중 한 명이다. 화이트 피트라는 이름의 영국인과 구별하려고 스스로 그런 별명을 붙였다고 하는데, 사실 블랙 피트도 백인이다. “스스로를 블랙 피트라고 부르는 건 웃기는 일이죠.” 그는 이미 잔뜩 취해서 바 종업원을 귀찮게 하고 있다. 좀 더 시간이 흐르고, 한 여인이 피트의 옆자리에 합류한다. 성매매 종사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피트는 우리에게 계속 그녀를 ‘동료’라고 부르라고 주문한다.
통역이자 가이드를 맡은 나자르는 이 상황이 우크라이나인을 위해 좋은 장면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그는 곧 아내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자리를 뜬다.
부상당한 외국인 병사 하나가 자리에 합류한다. 격식을 차릴 겨를도 없이 그는 자기 스웨터를 들어 올리고, 우리는 상처를 응시하면서 전쟁 이야기를 듣는다. 젊은 군인과 나이 든 군인이 반드시 함께해야 하는 일이다. 나무랄 데 없는, 진실한 전쟁 이야기. 그에게 술 한잔을 사고 그의 용기에 건배한다. 다들 집중에 방해될 정도로 소란스러운 블랙 피트와 그의 ‘동료’를 무시하려고 무척 애쓰고 있다. 내 친구 벤은 구석에서 윌슨과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산타클로스 같은 수염을 기른 어느 쾌활한 호주인에게 다가가자 그는 대뜸 이렇게 말한다. “총알은 날아다니고, 여자들은 숨 막히게 아름답죠. 이건 꿈이에요.”
전쟁 중인 나라를 관통하는 여정
지난가을, 매트 갤러거는 3주에 걸쳐 동료 퇴역 군인인 벤저민 부시, 통역 나자르와 함께 우크라이나 전역을 이동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 기사를 썼다. 그들은 전장이 러시아 침략군의 교착 같은 전쟁의 특정 측면을 부각하는 동시에, 다른 면을 덮어버린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바로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우크라이나 전체가 자유를 되찾기 위한 싸움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크라이나인들
명백한 선(善). 분명한 목적. 현장의 우크라이나인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의 가치. 자원봉사자와 함께하는 회의에서는 계속 이런 표현들을 생각하게 된다. ‘월드 센트럴 키친’이나 ‘유니세프’ 같은 대규모 조직이 이곳에 탄탄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하지만 굳건한 자원봉사자 네트워크는 대개 훨씬 더 작은 단체들로 구성되며,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이다. 개인 간의 소개와 느슨한 병참 협력 관계에 의존하며,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고 이어진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다.
봉사자가 그룹을 찾는 경우도 있고 그룹이 봉사자를 찾기도 한다. 지난 4월, 도시가 러시아의 점령에서 해방된 직후 키이우 근처의 부차 지역으로 간 르비우의 중년 남성 이호르를 예로 들자면, 그는 밴에 발전기와 연료를 싣고 대혼란 속으로 직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가 목격한 것, 강간 피해자들과 개들에게 뜯어 먹힌 시신들은 그로 하여금 일을 그만두고 여러 자선단체에 물품을 나르는 운전 기사로 전향하도록 이끌었다. “전에는 가본 적도 없는 우크라이나의 구석구석을 봤죠. 이제는 전쟁이 책에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끔찍하다는 걸 압니다.”
하르키우에서 피트니스 디렉터로 일했던 예카테리나도 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피난을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으며, 지금은 수리한 차량이나 신형 차량을 최전방 부대로 수송하는 일을 감독하고 있다. 알레나도 있다. 그녀는 키이우 교외의 신록이 우거진 상류층 주거지, 지난봄에 침략군이 후퇴한 이르핀에서 왔다. 그녀는 화력 지원 대위로 전투에 참여했으며, 두 가지 덕분에 우크라이나군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나날을 이겨냈다고 했다. 키이우에서 끝없이 지원되었던 대포들과 ‘총을 잡고 전쟁에 나선 공동체의 보통 사람들’이다.
우크라이나 남부의 므콜라이우는 그간 돌아다닌 곳 중 전쟁이 피부로 느껴지는 첫 번째 방문지였다. 가까운 곳에서 대포 소리가 울렸고, 사람들은 누구랄 것 없이 모두 초조해하며 긴장했다. 최전선은 므콜라이우 시내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밖에 있었다. 전선은 동쪽으로 2시간 거리인 헤르손을 향해 느리지만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2주 정도 지나면 헤르손도 해방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에 대해 기뻐하기보다는 러시아가 헤르손을 우크라이나에게 다시 넘겨주느니 댐을 폭파해 침수시킨다거나 전술핵, 스페츠나츠(러시아 특수부대), 체첸의 자살특공대를 배치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곱씹었다.
“지금은 전기가 있어서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전기가 완전히 끊겼을 땐 나를 지키느라 삽을 들고 다녔죠.” 올렉산드라 블린초바가 자신이 태어난 도시에 관해 이야기했다. 38세 블린초바는 러시아 침공 이후에 만들어진 비영리 지역 단체 ‘히어로즈 포 우크라이나’의 자원봉사자다. 그녀는 민간인을 위한 의료 훈련을 조직한다. 응급처치와 전투 의학을 교육하러 이곳을 찾아온 퇴역 군인을 위해 통역과 보조 강사 일도 한다. 므콜라이우 체스트넛 스퀘어를 함께 거닐던 블린초바는 순항 미사일이 광장 안쪽에 남긴 폐허를 가리켰다.
그녀는 지역 주민들이 잔해를 모스크바 외교 학교의 선물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우린 앞으로도 언제나 그걸 비웃을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억누를 수 없죠.”
공습 첫날이었던 2월 24일 밤, 므콜라이우는 심한 포격에 휩싸였다. 남편이 이미 군대에 동원된 블린초바는 직접 어린 두 아이와 어머니, 연로한 이웃을 데리고 대피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수백 명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침착함과 본성을 되찾고자 몇몇 사람과 함께 낡은 티셔츠와 담요로 위장막을 만들기 시작했다. 반항심에서 나온 작은 행동은 순식간에 명민한 행동이 되었다. 베개와 부츠 깔창으로 위장막을 짠 다음 길리 슈트를 만들었다. 어느 노부인은 지역 투사들을 위해 능숙하게 손으로 담배를 말았다.
그 후 몇 주 동안 러시아군은 므콜라이우 외곽을 돌파했으며 정찰대 일부는 시 중심가까지 침투했다. 그렇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4월 중순경에는 모든 러시아 지상 병력이 공격에서 퇴각했다. 하지만 전쟁은 여전히 몇 킬로미터 밖에서 진행 중이다. 블린초바의 남편처럼 므콜라이우의 많은 남자가 지금도 싸우고 있다. 그렇기에 보급 본부는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고, 집에서 만든 담배도 마찬가지다.
블린초바는 자기 친구가 교장으로 있는 인근 학교에 우리를 데리고 갔다. 학생 대부분은 원격 수업을 받지만, 몇 개 교실에는 아이들이 있기도 했다. 다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책상에 앉아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매일 세 단어를 말합니다. 평화, 조국, 승리예요.” 교장의 설명이다.
많은 국제정치 전문가가 푸틴이 몇 년에 걸쳐 이번 침공을 작정했다고 믿는다. 나는 학교를 돌아보며, 만약 푸틴이 우크라이나의 뿌리 깊은 국민적 자부심과 정체성을 눈치챘다면 침공을 재고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남편은 자기가 러시아와 싸우고 있으니 우리 아들들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해요.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죠. 저도 그러길 바라고요. 하지만 언젠가 우리 아들들이 싸워야 한다면 그 아이들은 그렇게 할 겁니다. 아들들의 아들도 그럴 거고요. 그들은 우크라이나인이니까요.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인의 것이에요.” 학교를 나서며 블린초바가 말했다.
note 3. 이르핀, 키이우주, 우크라이나의 히어로 시티
"우크라이나의 마지막 국경 검문소가 ‘지래프(giraffe, 기린) 몰’ 옆 바로 저기예요. 우스꽝스러운 이름이죠. 여기가 바로 러시아군이 가장 멀리 도달한 지점이랍니다.”
나는 서방의 싱크탱크와 국가 안보 전문가들을 위한 가이드 투어를 따라가는 중이다. 점령과 살인으로 악명 높은 이르핀과 부차. 공항으로 차를 타고 간다. 배우고, 동의하고, 생각하기 위해서다. 용기, 파멸, 무익, 전쟁의 여파가 있다고 증언하기 위해서. 내 속에는 여전히 이 모든 게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는 까칠한 군인이 있다. 실제 전쟁은 우리에게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는 ‘그들이 정말 왔었다’고 생각한다. 그 패거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감히 에어컨이 딸린 사무실을 떠나고 싶었겠는가? 누군가 ‘죽음의 거리’가 어디냐고 묻는다. 가이드가 몸서리를 친다. 그리고 일련의 파괴된 아파트 뒤편의 블록을 가리키며 “여러분이 원한다면 거기에도 갈 수 있어요” 하고 말한다. 몇 달 전 그녀는 이르핀에서 싸웠고, 불에 그을린 차들과 시체들이 죽음의 거리를 메웠던 때를 안다. “하지만 저는 가지 않을 겁니다.”
“안 가도 될 것 같네요.” 누군가 말하고,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다. 전투에 참여했다는 걸 몸소 증명하는 여성이 남성의 자아로 똘똘 뭉친 무리에 균열을 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흥미롭다.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차와 카라반으로 돌아간다.


간단하게 얘기해보자. 이국 전쟁터에서 자원봉사라니,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다. 1930년대 스페인 정부군을 위해 싸운 미국인들이 있었으나, 그 활동을 두고 후에 ‘성급한 반파시스트’라는 꼬리표(그들은 자부심의 증표로 받아들인 용어지만)가 붙었다. 진주만 공격 후에도 제2차 세계대전에 자발적으로 참전한 미국 병력은 39% 미만이다. 61% 이상은 징집되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모든 외국인이 구제받지 못한 영혼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몇몇은 그랬다. 어떤 이는 이웃과 바람난 아내를 목격한 다음 날 폴란드행 편도 항공권을 끊은 이야기를 아주 상세히 털어놓기도 했다. 비록 익명을 요구했지만 말이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가장 자유로운 기분이었어요.”
구원 여행의 형태는 참으로 다양하다.
45세 샘 쿡은 2018년부터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이라크에서 기갑부대를 지휘했으며, 기술 회사를 운영하려고 처음 동유럽에 왔다. 그때부터 역사 재단 ‘보더랜드’를 시작했으며 지금은 키이우대학교에서 전쟁과 스토리텔링 과정을 가르친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국인이 그가 사랑하는 이 나라에 눈을 뜨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일종의 시간 왜곡’ 같다고 했다. 침공 전에 그는 우크라이나인 아내와 키이우에서 가족을 꾸릴 계획이었다. 최근에 미사일이 그들의 아파트에서 600m 떨어진 시 공원을 타격했지만, 그 생각은 여전히 그대로라고 했다. “옛날 서부 개척 시대 같아요. 사람들은 당신이 누구였는지 개의치 않아요. 그저 지금 당신이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는지에 신경 쓸 뿐이죠.”
고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이들은 어떨까?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오직 2명만이 생활에 흔들림이 없다고 했다. 기부금으로 조성한 군사훈련 조직 ‘모차르트 그룹’의 최고 운영 책임자 마틴 베테라우어와 터전을 빼앗긴 우크라이나 고아를 돕는 데 특화된 자선단체 ‘뉴 호라이즌 포 칠드런’에서 일하는 스테파니 윌리스가 그들이다.
베테라우어는 해병대 장교로 오래 복무했던 덕분에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중동, 아프리카, 보스니아 등에 파병되었을 때보다 키이우에서 지내면서 집에 더 자주 전화한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집에도 훨씬 자주 가는 것 같았다. 2월 초 소문에 따르면 모차르트 그룹은 잘못된 재정 관리로 와해했다.) 윌리스는 4주에서 6주마다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그런 복지에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전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 사람이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고요.”
내가 만난 또 다른 미국인도 고아를 돕고 있는데, 봉사자보다는 독지가에 가깝다. 51세의 아메드 칸은 자신이 믿는 대의를 찾아서 분쟁으로 파괴된 이 나라의 구석구석을 누빈다. 우크라이나를 도는 동안 그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인 중 한 사람”이라는 설명을 몇 번 들었는데, 비단 그의 재정적 원조를 바라는 사람만 그렇게 말한 게 아니었다. 러시아가 칸에게 현상금을 걸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에 관해 물었을 때 칸은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소문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에요. 보통과 악의 문제죠. 말 그대로 자유 수호예요.” 클린턴 행정부의 베테랑이었던 칸은 민간 국제 투자 회사를 설립해서 대성공을 거뒀다. 2011년에는 앤디 워홀의 유명한 ‘마오’ 시리즈 중 배우 데니스 호퍼가 총으로 쏴서 구멍이 난 작품을 거금 30만2500달러에 구매하기도 했다. 그는 대규모 인도주의 사업의 느릿느릿한 관료주의를 무척 싫어한다. 그래서 직접 나가서 전달하는 것이다.
“스스로 독지가라고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해야 할 일이죠.” 그는 자신이 부추겨서 전쟁 구호 활동에 기부한 부유하고 유명한 지인들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칸이 묵고 있던 오데사의 고급 호텔에서 그를 만났는데, 러시아의 포격으로 파괴된 고아원 수리를 위해 일하고 난 후 거기서 며칠 머무는 중이었다. 몇 주 전에는 최근에 해방된 쿠피안스크에서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을 물으며 시간을 보냈다. 거기서 버려진 저먼셰퍼드를 만났는데,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그곳의 누구도 개를 데려갈 처지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동물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잭 칸’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 개는 이제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지낸다.
칸의 웃음과 자기 비하는 염세적이다. 그는 부유한 보통의 은행가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왔다. 오래되고 잘 드러나지 않는 이상주의도 순간순간 번쩍인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시리아, 이라크, 르완다 난민에게 거처를 제공했으며, 2021년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의 손아귀에 떨어지기 전에 주민 수천 명을 탈출시켰다. “군산 복합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건 누군가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집단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고요.”
자금과 연줄 덕분에 칸은 우크라이나의 다른 외국인과 자신을 차별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자선 활동을 펼치는 데 걸림돌이 될 만한 배우자나 자녀가 고향에 없다는 점이다. “가족이 있는데 이런 짓을 하고 다닌다면 멍청이죠.”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사회라고 부르는 게 있어요. 무엇도 그보다 크지 않죠. 내가 자랐고, 그리워하는 미국을 떠올리게 해요.”
그렇지만 우크라이나의 모든 외국인이 고아를 도우러 온 건 아니다.
note 4. 드네프로강과 부크강 하구, 흑해 북부 해안
드론 사냥꾼들과 함께 물 위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우리에게는 나토 레이저와 미제 야간 투시경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들을 쓰지 않으면 더 잘하죠. 전화로 레이더를 받아서 듣고 총을 쏘는 거예요.” 팀원 하나가 말하면서 자기 귀를 톡톡 친다.
주먹구구식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좋은 성적표를 두고 말다툼하는 건 쉽지 않다. 12명으로 구성된 이 영토 방어팀은 지난주에 러시아 드론 3대를 격추했다고 한다. 그들은 소총 10자루, 권총 2자루, 픽업트럭 뒤에 고정한 브라우닝 기관총으로 무장했다.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다. 그들은 ‘충분한 무기’가 아니라, ‘많은 보급품’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떤 종류요?” “모든 종류요.” 그들도 내게 물을 게 있다. “제니퍼 로렌스를 만나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일론 머스크는 살짝 돌았나요? (아마도요.)” “미국 정치판에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
그리고 한 사람이 새까만 어둠을 뚫고 말한다. “우리 대통령은 유대인이고 주지사는 부분적으로 한국인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나치가 될 수 있겠어요? 속아 넘어온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몇 분? 몇 시간? 암흑 속에서 그걸 누가 알겠는가? 대위가 상스러운 우크라이나어로 외친다. 드론 사냥꾼들은 파도처럼 자기 위치로 흩어지고 총과 귀는 하늘을 향한다.
샤헤드가 오고 있다.
적막 속에 몇 초가 지났다. 공기가 쌀쌀한 바다를 때린다. 누군가 방탄복에 달린 끈을 만지작거린다. 다른 누군가는 소총을 장전했고, 총의 흑마술이 눈앞을 가른다. ‘다시 한번, ‘명확한 목적’이 보이는구나’ 생각한다.




전쟁은 다면적이다. 극악무도한 비극이기도 하고, 때로는 무기의 성능을 실험하는 장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사업이다.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돈을 벌기도 하고 돈벌이 수단을 찾기도 한다. 전쟁은 흰색, 회색, 그리고 회색 너머의 색으로 이루어진 다층적인 사건이다. 모든 것에 돈이 연관되어 있다.
‘하이마스’를 예로 들어보자. 우크라이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 다연장 로켓 발사 시스템이 지난여름에 도착하고 나서 전쟁의 향방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보더랜드의 설립자 쿡의 말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에게 이길 수도 있다는 희망을 줬고, 그래서 순교 정신이 사라졌”다.) 하이마스를 제공한 건 미국 정부지만, 무기를 만든 건 록히드 마틴이며 그건 그저 친절한 마음의 발로인 것만은 아니다.
이익 추구와 자유 우크라이나를 위한 진정한 지원은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없다. 그래도 도덕적 경계와 법적 경계는 존재한다. 미국의 국제 무기 거래 규정은 명백하지만, 어떤 상황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달려 있다.
54세 스티븐 무어는 자원봉사자 그룹과 전쟁 사업계 양쪽에서 활동한다. 전직 비밀 정치 요원으로서 어느 공화당 하원의원의 수석 보좌관이었던 그는 러시아가 침공했을 당시 직업도 없었고 아내와는 별거 상태였다. 우크라이나에 친구들이 있었기에 돕고 싶었다. 5일 후, 탈출하는 민간인을 위해서 루마니아 국경을 따라 안전 가옥을 지었다. 안전 가옥은 삽시간에 보급 운영 단체가 되었고, 이제 무어는 비영리단체 ‘우크라이나 프리덤 프로젝트’를 이끈다. 키이우의 크리미안 타타르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며 대화하는 동안, 단체의 초점은 하르키우주와 도네츠크주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 분량은 자그마치 200톤 이상이었다.
“여기 머물고 싶어요. 변화를 만들고 있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무어가 말했다. 그가 일하는 방법의 하나는 로비다. 친구의 친구가 르비우에서 운영하고 있는 방탄복 제조 업체가 스웨덴의 철강 공급 업체와 문제가 생겼을 때, 그는 워싱턴까지 날아갔다. “철강 회사를 위해 일할 로비스트와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그녀가 꼭 필요한 사람들과 나를 연결해주었죠. 이제 친구는 철강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있어요.”
무어는 독일 기반의 스타트업 ‘하이캣’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다. 하이캣은 군수품을 실은 무장 차량과 대포를 공중에서 공격하려고 계획된 전투 드론을 시험 중인(마케팅도 하고 있다) 회사다. “나는 자금을 찾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신사화를 신고 하프 윈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매고서 운영하는 전쟁 기업은 뿌듯한 전통이다.
무어와 대화 중에 며칠 전 헤르손 근처의 파괴된 마을에서 우크라이나 군인이 해준 얘기가 떠올랐다. “전쟁은 수학이에요. 러시아인이 더 많이 죽을수록 더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살아남죠.”
정직한 활동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동부의 어느 저명한 외국 교관은 지역 부대 내에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는 노획한 러시아 장비와 훈련을 맞바꾸는데, 러시아 장비는 판매할 수 있는 신형 서구 장비와 교환된다. 이 모든 것이 우크라이나든 서방이든 정부의 공식 제재 없이 일어난다. 어떤 바보가 스스로 신고하겠는가? 그리고 또 다른 이유를 대자면, 이런 이득은 거대한 체계 속에서 푼돈에 불과하다.
외국인 거주자가 모이는 르비우의 한 아이리시 펍에서, 여러 민병대를 위해 무기를 수송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그룹의 소속원을 만났다. 인터뷰에 끌어들이려고 애썼더니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우호적인 웃음은 아니었지만, 화해의 선물로 내게 값비싼 위스키를 샀다.
“내가 낼게요. 기자보다는 많이 버니까요.” 그가 바 맞은편에서 윙크하며 말했다.


10월에 로버트 F. 케네디의 28세 손자 코너 케네디가 국제 여단과 함께 우크라이나에서 싸우며 여름을 보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경험담을 올렸다. “군인이 된 게 좋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랬다. 무서웠지만, 삶은 단순하다. 게다가 용기를 찾고 좋은 일을 한 것에 대한 보답은 상당하다.”
러시아는 여단에 참가한 사람들이 돈만 밝히는 용병이라고 비방한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그들에게 보수를 지급한다. 그건 사실이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기본급은 월 630달러 정도로 우크라이나 병사와 거의 같은 수준이며, 제네바협약에 따라 전쟁포로 자격이 있다. 외인부대 조직은 대부분 우크라이나 장교가 지휘한다. 전쟁 초기에 부대가 걸핏하면 싸우려 들고 체계가 잡히지 않아 갖가지 사고를 일으킨 후 얻게 된 뼈아픈 교훈 덕분이다.
우크라이나 외무부 장관은 지난 3월, 50개국 이상에서 거의 2만 명에 이르는 외국 군인이 여단에 합류하고자 자발적으로 입국했다고 밝혔다. 당시에는 그 수치가 정확했을지도 모르나, 이제는 급격히 증가한 외인 병사들이 우크라이나 군인이 오갈 수 없는 곳을 드나든다.
반(半)독립적인 민병대 조직이 뒤엉켜 지역에 거주하기도 한다. 어떤 조직은 우크라이나인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외국인으로만 구성된 곳, 두 부류가 섞인 곳도 있다. 하지만 모두 우크라이나 군사령관에 따라 조직적으로 과업에 집중한다고 들었다. 미국인 몇백 명도 직접 행동에 나서기 위해 자원했다는데, 짐작하는 바에 따르면 아마 그보다 많을 것이다. 기사 인쇄 시점 기준으로 최소한 11명이 사망했다고 보도되었다. 〈롤링스톤〉지에 따르면 퇴역한 미 육군 스티븐 자비엘스키는 ‘울버린’이라는 그룹 소속으로 싸우다가 사망했다. 또 다른 육군 퇴역 군인 조슈아 존스는 여단과 캐나다인이 지휘하는 ‘노르만 브리게이드’라고 알려진 민병대에서 싸우다가 8월에 살해당했다. (부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일은 외인 전투원에게 흔하다.) 다른 미국 퇴역 군인 알렉산더 드루크와 앤디 휜은 6월에 ‘태스크 포스 바게트’라고 알려진 외인부대와 함께 싸우다가 러시아군에게 붙잡혔으나, 9월에 포로 교환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실제 전쟁터에는 혼란이 가득하다.
“러시아군이 역겨운 놈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전멸했을 겁니다.” 30대 초반으로 미 육군 보병에서 퇴역한 에릭이 말했다.(에릭은 보안을 위해 성은 빼고 이름만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9월에 해방된 우크라이나 북동부의 소도시 쿠피안스크 동쪽에서 수행한 작전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주었다. 우리가 만났을 때 에릭과 퇴역한 해병대원으로서 20대 중반인 그의 친구 조시는 키이우에서 입은 부상에서 회복 중이었다.
두 사람은 지난 4월 우크라이나에 왔다. 그들은 곧 더 큰 우크라이나 부대에 속한 외인 퇴역 군인 무리에 합류했다. 몇 달간 지원 작전을 펼친 조시는 “우리가 부대에게 돈벌이가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라고 했다. “부대에 외국인이 많을수록 투자자나 기자들에게 그 점을 내세울 수 있죠. ‘이런 이유로 이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 장비를 쓸 수 있는 부대원들이 있으니까요’라는 식이에요.”
그룹은 전투 임무를 부여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여단 사령관을 찾을 때까지 단일체로서 스스로 홍보하며 걸어갔다. 그리고 지난여름 하르키우 인근에서 원하던 바를 얻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시리아에서 경험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교전이었다. 제압 사격을 위한 로켓탄 같은 무기가 굉장히 중요했다. 대포와 공중 지원이 양방향에서 날아들었다. 분대원 12명 전체가 야간 투시경 하나를 쓰는 야간 정찰은 특히나 흥미로웠다. 여단에 유능한 전사가 몇이나 있었는지 물었다. 낮은 수치를 예상했지만, 그래도 10%는 아니었다. “난장판이에요. 우리는 좋은 일을 했지만, 그래도 현실을 파악해야 해요. 우리는 민간 차량을 운전하는 보병이었죠.”
9월의 동부 역공세는 여단의 정규 대대가 우크라이나의 상급 지휘관에게 자신들의 능력을 입증할 기회를 주었다. 조시와 에릭을 쿠피안스크와 페트로파울리우카라는 작은 마을로 이끈 것도 그 반격이었다.
걸어 다니면서 마을에서 사람들을 내보내다가 단층 건물에 러시아인 몇을 가둬놓은 우크라이나 정찰대를 만났다. 에릭은 우크라이나인 동료와 정문을 부수고 수류탄 몇 개를 던져 넣은 다음 건물에 들어섰다. 답례로 수류탄 2개가 에릭을 맞이했고 온몸에 파편이 튀었다. 캐나다 병사가 그를 입구 근처에 있던 화장실로 끌고 갔다. 그곳이라면 건물의 각도 덕에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른 분대원들이 그들을 꺼낼 방법을 궁리하는 동안 캐나다 병사는 에릭의 다리와 팔에 지혈대를 댔다.
러시아의 122mm 대포 한 방이 모두의 딜레마를 해결했다. 대포가 건물 근처에 떨어지자 소형 화기 총격전이 잠시 멈췄다. “그 여파에서 2명이 날 끌고 나오는 동안 분대장이 출입구에서부터 엄호했죠.” 에릭이 직접 설명했다. 포격으로 파편이 건물 측면을 따라 요란하게 튀었고, 조시의 팀은 “대포를 먹은 꼴이 되었다.” 그 시점에서 조시는 “손가락으로 몸을 찔러봤더니 피가 솟구치는 구멍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갇혀 있던 러시아인들은 포격에 살아남았을지라도 곧 우크라이나 전차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결국 건물 잔해에서 적군의 시신 7구를 끌어냈다. 에릭과 조시는 둘 다 공중 수송되었다. 조시는 즉시 간과 폐에서 파편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에릭은 여전히 다리와 등에 파편이 있다고 했다. 둘은 총격전과 대피에 관한 사소한 팩트들(누가, 언제, 어디서)을 놓고 언쟁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휴대전화에 담긴 전투 장면을 보면서 문제를 매듭짓기로 했다. 알고 보니 드론이 그 사건을 대부분 기록해두고 있었다.
“꿈에서 자기 자신을 보는 거랑 비슷해요.” 조시는 그렇게 말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
note 5. 프리덤 스퀘어, 하르키우
동쪽으로 운전해서 가는 동안 통역 나자르가 아내의 임신 소식을 전한다. 폐허 가운데의 기쁨이다. 그는 여느 초보 아빠들처럼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했으며, 준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순간, 납치되어서 러시아로 보내지고 강제로 입양되는 우크라이나 아이들을 생각한 사람이 차에서 나 한 명은 아니었을 것이다.
밤에 하르키우에 도착한 우리는 먹을 곳을 찾아 거리를 거닐었다. 도시 전체가 암흑에 잠겨 있었고 다니는 차가 드물었다. 야간 통행금지 시각이 가까워짐에 따라 감시당한다는 느낌이 든다.
음울한 도시에 햇빛이 비치자 절반만 남은 건물들과 폐허가 만든 포르노가 보인다. 거의 비어 있는 프리덤 스퀘어를 찾아서 한때 레닌의 거대한 동상이 어디 있었을지 추측해본다. 시위대는 9년 전에 동상을 끌어내렸다.
차로 돌아와서 주변을 돌아본다. 포탄은 식료품점과 의기양양한 작은 주택들에 구멍을 냈다. 노부인이 갈퀴로 잎사귀를 그러모으고 있다. 차를 멈춰 세우고, 벤이 사진 몇 장을 찍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아간다. 움푹 팬 구멍들이 커지면서 그 충격도 배가된다.


하르키우 북동쪽, 러시아 국경에서 약 13km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 치르쿠니에 들어서자 나무를 때리는 망치 소리가 울렸다. 복구가 진행 중이지만 지역 주민들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조차 몰라 했다. 흙먼지로 뒤덮인 도로를 따라 방어 진지가 있고, 깊은 구덩이들이 잿빛 풍경에 오점을 더했다. 훼손되지 않은 모양새의 가옥도 몇 채 있었지만 어떤 집들은 마치 실성한 신이 내려와서 아무렇게나 찢어발긴 듯한 모습이었다. 육중한 포탄 소리가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오는데, 심장 박동처럼 일정했다. 점령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은 채였다.
침공 후에 치르쿠니는 하르키우로 진격하려는 러시아 부대가 전열을 가다듬는 곳이 되었다. 러시아군은 치르쿠니가 해방된 5월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8월 내내 양쪽에서 집중포화가 이어졌고, 산발적인 포격은 우리가 방문했을 때까지도 여전했다. 아직 적막하지만 그래도 최악은 지나갔다.
그곳이 각양각색의 자원봉사자가 갖가지 일을 하는 길의 끝이며, 모든 구호 활동이 변화를 가져올 곳이었다. 어떤 활동은 이미 변화를 이끌어냈다. 주민들은 음식, 담요, 발전기가 전해졌다고 했다. (찾아온 단체의 이름을 정확히 쓰지 않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침공 당시 47세였던 빅토르와 44세였던 나탈리아는 치르쿠니에서 평생을 보내며 두 아들을 길렀다. 우리는 나탈리아의 어머니 한나와 함께 안뜰에 있던 부부를 발견했다. 셋은 겨울을 대비하여 널찍한 정원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는데, 그 밖에 다른 많은 일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치르쿠니에 러시아인들이 처음 도달했을 때 부부는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 며칠 만에 차 한 대를 도난당했고, 집이 수색되었다. 지역 분리주의자들이 와서는 사제 총기를 찾아냈다. 이웃집에서는 컴퓨터가 실려 나갔고 휴대전화를 압수당했으며 심 카드도 제거되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다가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른 자동차에 짐을 꾸리고 위험을 무릅써서 도시로 이어지는 시골길을 달렸다.
그렇게 그들은 탈출에 성공했지만 모두가 그러지는 못했다. 나탈리아의 사촌 한 사람은 지난 봄 점령군에 잡혀간 이후로 여태 아무 소식도 들을 수가 없다.
빅토르와 나탈리아는 5월에 마을로 돌아와 엉망진창이 된 집을 보았다. 창문과 거울은 모두 깨졌고 남아 있던 가전제품과 귀중품은 약탈당했으며 인분이 방 하나의 바닥을 온통 뒤덮은 채였다. 지하실에 저장해둔 감자마저 싹 사라졌다.
그렇지만 가족에게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상실에 비하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침공 5일째 되던 날, 25세이던 큰아들 알렉산데르가 국경 수비대 임무 도중 사망했다.
“우리는 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어요. 전쟁 전에는 그런 걸 모두 피했어요.” 나탈리아가 말했다. 우리와 함께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녀는 남편의 의견을 따랐다.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앞에 나서서 깊은 분노와 슬픔을 드러냈다. 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은 불분명하지만, 나탈리아가 러시아에 책임을 돌리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우리는 러시아인을 증오해요. 절대 그걸 극복할 수 없어요. 그들은 우리 삶을 파괴했어요.”
빅토르는 가스 회사에서 일하고, 나탈리아는 봄이 오면 집에서 하던 화훼업을 계속하길 바란다고 했다. 우리가 마을을 둘러보는 동안 빅토르는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형편이 더 낫다는 점을 강조하며, 스스로 다행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의 신앙은 시험에 들었으나, 지금은 아들이 신과 함께 있다는 걸 안다고 했다. 그 점이 그들에게는 중요했다.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작은아들은 17세이며, 역사 교사가 되려고 하르키우에서 공부 중이다. “작은아들마저 징집된다면요?” 나는 물었다. “그 아이는 역사 선생님이 될 겁니다.” 빅토르의 대답이다.
마을에는 여전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며 주민들은 겨우내 전기가 전혀 없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빅토르는 우리가 자기 뒤를 정확히 따라와야 한다고 고집했다. 마당에서 지뢰를 찾았고 길 건너 이웃이 자기 집 부엌을 청소하다가 러시아군이 설치한 부비트랩에 한쪽 눈을 잃었다고 했다. 세탁기 한 대가 코에 난 여드름처럼 눈에 확 띄는 자태로 먼지투성이 메인 도로에 있었는데, 어느 집에서 노략질했다가 당황한 러시아군이 5월에 떠나면서 두고 간 것이다. 빅토르의 말로는 누구도 주인이라고 나서지 않았다고 했다. 아직 모두가 돌아온 것은 아니니까.
한나가 단검처럼 생긴 파편 한 줌을 들고 벤에게 다가왔다. 벽과 문에서 비틀어 빼낸 것이었다. 정원 뒤편에는 대포 구멍이 남긴 흔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한나의 말은 러시아가 민간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는 거다. “이걸 가져가서 그들에게 보여줘요.”
빅토르와 나탈리아는 최선을 다해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중이다. 매일 아침을 새로이 시작하는 것은 선택이다. 그들은 알렉산데르의 어린 아들인 손자와 함께 삶의 감정적인 측면도 다시 만들고 있다. 집이 다 수리되면 손자가 지낼 방에 들일 아기 침대도 이미 마련했다.
처음에 부부는 성을 밝히지 않으려 했다. 흔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떠나기 전에 부부가 함께 와서는 이름이 알려지길 바란다고 했다. 아들의 온전한 이름이 실리기를 원한다고, 아들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들의 이름은 알렉산데르 스말코다. 아들이자 남편이었으며 아버지였던 그는 침략자로부터 우크라이나를 지키다가 사망했다.
note 6. 올드타운, 르비우
우크라이나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이곳과 안전한 나토 영공을 이어주는 열차가 있다. 매일의 루틴은 중요하기 때문에 아이리시 펍에 가서 맥주 1파인트를 주문한다.
젊은 미국인과 팔이 하나뿐인 영국인이 가까이에 앉는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다. 숨기는 일에 진절머리가 나서 사실대로 말해준다. “와, 나도 그 근처에서 왔어요.” 미국 청년이 말한다. 알고 보니 옛 친구의 아주 어린 남동생이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이다. 한편으로는 아니기도 하다. 특정한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에 온다. 지금쯤이라면 그 점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 청년을 소년으로 기억한다. 그는 이제 성인이자 퇴역 군인이며 의료 훈련을 지휘하려고 이곳에 왔다. 그는 더 나은 보급 물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도와줄 만한 사람들을 좀 알고 있노라고 말해주었다.
그가 여기 온 까닭은 독특하면서도 보편적이다. 그의 동료가 마리우폴에서 복무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미 벌어진 전투와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토론하며 그날 저녁을 보냈다. “여기서 얼마나 머물 거야?”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이제야 그 질문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안다.
Who’s the writer?
매트 갤러거는 미 육군에서 퇴역했으며 소설 〈엠파이어 시티〉(2020)와 〈영블러드〉(2016), 이라크 회고록 〈카붐〉(2010)의 저자다. 지금은 가족과 함께 미국 털사에 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