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리브리스 톱 가격 미정 디젤. 권투 글로브 에디터 소장품.
손대현
4년 전 막 타투이스트로 독립할 무렵, 허전한 왼쪽 팔에 피타/@pitta_kkm의 타투를 새기기로 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한국적인 디테일과 완벽한 스킬, 나를 타투의 세계로 이끈 사람. 언젠가 꼭 그와 같은 타투이스트가 되길 바라며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아픔도 견뎌냈다. 이 타투를 완성하기 위해 숍에는 열한 번 방문했고 마지막 한 방울을 채우기까지 무려 1년이 걸렸다. 정말이지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듯한 풀 커버 타투. 해외에 나가면 하루에도 몇 번씩 ‘so gorgeous’라는 칭찬을 듣는다. 아팠던 기억도 잊게 만드는 묘한 뿌듯함이 차오른다.

니트 집업, 셔츠, 슬링백 슈즈 모두 가격 미정 미우미우.
키메
노부, 나나, 신, 쿠미. 내게는 네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저마다 다른 생김새와 성격이 만화 나나에 나오는 캐릭터와 닮아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 쿠미는 최근 우리 가족이 됐다. 세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지낸 지 10년 되던 날, 지인이 보내준 사진 속 검은색 고양이를 보고 첫눈에 반해 곧장 데려왔다. 방금 길에서 구조한 고양이라고 했다. 쿠미가 들어온 뒤로 우리 가족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사고뭉치인 쿠미 덕에 나는 조금 더 바빠졌으며, 덕분에 집에는 항상 따스한 생기가 돈다. 세 마리의 노묘와 내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막둥이 쿠미. 비로소 완성된 것 같은 우리 가족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빈 곳에 조금씩 새기고 있다. 가장 예쁜 모습으로.

니트 집업, 셔츠, 슬링백 슈즈 모두 가격 미정 미우미우.

쇼츠 81만9000원 이자벨 마랑 옴므. 로퍼 154만원, 삭스 29만원 모두 구찌.
오다길
벌써 14년 전의 이야기다. 두 번째 직업으로 막 타투를 시작했던 2009년, 당시 한국의 타투 신은 지금보다 훨씬 폐쇄적인 데다 종류도 다양하지 않았다. 투박한 모양새와 알록달록한 질감에 반해 올드스쿨 타투를 흉내 내던 시기, 올드스쿨 작가로서 색깔을 명확히 하고 싶어 무작정 보스턴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제대로 된 올드스쿨 타투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이 타투는 떨리는 마음을 안고 처음 들어선 보스턴 올드스쿨 숍에서 멕시칸계 타투이스트 마르티네스에게 받은 것이다. 바다에 나서기 전 악운을 막기 위해 타투를 새기던 선원의 마음으로. 그렇게 왼쪽 종아리에 자리 잡은 상어의 기백은 나의 부적이 되었다. 용기가 필요한 순간에는 이 상어를 어루만지며 힘을 얻는다.

병만
모델과 타투이스트 활동을 병행하는 일은 어렵다. 여전히 타투에 호의적이지 않은 한국에서는 더더욱. 훌륭한 타투이스트라면 다양한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좋은 도화지인 내 몸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니 연습 기회도 늘 부족하다. 도안을 다 완성하고도 캐스팅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괜한 걱정에 그만두기를 수십 번. 최근 큰 결심으로 왼쪽 어깨 끄트머리에 트위티 한 마리를 직접 새겼다. 단순한 도형과 선으로 이루어진 타투 위에 나를 닮은 노란색 트위티가 한 마리 있으면 귀엽겠다 싶어서. 거울을 볼 때면 삐약삐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웃음이 지어진다. 허전하던 왼쪽 어깨가 비로소 완성된 것 같다.

호보백 370만원대 알렉산더 맥퀸.
침화사
6년 전 손등에 직접 새긴 ‘문화’. 일제강점기에도 문화를 지키는 일이 곧 민족정신을 지키는 일이라 말하던 위창 오세창의 좌우명 ‘文化保國(문화보국)’ 붓글씨의 일부다. 우리가 지금에 와서 수많은 문화재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전부 그의 덕이다. 좀처럼 의미를 가진 타투를 새기지 않음에도 이 두 글자만큼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새겼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문화에 대한 충성심과 공예가의 예술 정신을 닮고 싶어서. 언제 어디서든 상기할 수 있도록. 놀 때도, 일할 때도 내 시야에 걸리게. 나머지 두 글자인 ‘보국’은 미처 새기지 못했다. 언젠가 부끄럼 없는 장인정신을 갖추게 되었을 때를 위해 남겨두었다. 아주 멋있는 곳에, 멋있게 새기려고.

슬리브리스 톱 가격 미정 디젤. 팬츠 180만원대 알렉산더 맥퀸.
미래
꽃과 나비, 철조망이 무분별하게 자리 잡은 나의 왼쪽 모습을 좋아한다. 재미있는 아티스트의 작업물을 발견하면 컬렉터의 마음으로 기꺼이 왼팔을 내주었고, 게스트 타투이스트로 해외를 다녀올 때마다 기념품 대신 새로운 타투를 새겼다. 그렇게 하나둘 모은 타투가 어느새 귀부터 어깨를 타고 손끝까지 가득 메워졌다. 인종도, 성별도, 국적도 각기 다른 타투이스트의 작업이 내 왼팔에서 꽤나 잘 어우러진다. 아티스트의 작업물을 몸에 새기는 컬렉팅의 정점. 내가 타투를 사랑하는 이유다. 군데군데 비어 있는 공간을 또 어떤 타투로 채울지 고민하며 여름을 준비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