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매튜 데이 잭슨이라는 영매의 세계
그를 지나간 아이디어와 이미지들은 회화라고도 할 수 없고 조각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기괴한 형태로 바뀌어 포스트 아포칼립틱한 모습으로 고정된다. 그러나 그는 아이디어도 이미지도 그의 것이 아니며 자신은 그저 매개체일 뿐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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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데이 잭슨. ⓒ Matthew Day Jackson. 매튜 데이 잭슨의 전시 <Counter Earth>는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7월 7일부터 8월 19일까지 열린다.
전시장 안에 있는 풍경들을 보게 되면 ‘뭔가 어긋나 있다. 뭔가가 맞지 않는다’라는 느낌, 언세틀링(unsettling)한 감각을 받게 되는데 <Against Nature>, <Counter Earth>라는 제목 역시 그런 감각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두 전시 모두 더 오래 전부터 이어왔던 작업 실천의 연장이기도 해요. 전 자연과 환경에 거리를 두면서도 여전히 그 주제의식과 연결되고, 장소성을 다루면서도 비장소성을 동시에 다루는 미묘한 관계를 보여주려 해왔습니다. 프레임을 다르게 가져갈 뿐이죠. 이번엔 풍경화의 프레임을 차용했고, 다음 번에는 아르누보라는 프레임을 활용할 예정이에요. 아직 제목은 못 정했지만요.
굉장히 기대되네요. 아르누보라니요!
아르누보라는 것 자체가 콜로니얼리즘과도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어떻게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자연 등이 재현되어 왔는지 와도 관련 있는 주제가 펼쳐질 것 같아요.
쉬지 않고 작업하는군요.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나 형식 같은 것들이 계속 떠올라요. 멈출 수가 없지요. 그런 게 떠오르면 이 세상에 반드시 끄집어 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Matthew Day Jackson, Frozen Sea(after CDF), 2023.
어제 기자 간담회가 끝나고 점심을 먹으면서 잠시 당신이 그리는 달에 대해 얘기했었죠. 당신이 그린 그림의 달은 매우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나사가 찍은 달의 뒷면을 모델로 했기 때문이라고요. 집에 가며 생각해보니 참 재밌었어요. 달의 뒷면과 전시 제목인 <Counter Earth>가 잘 어울려요. 넷플릭스의 시리즈인 <Stranger Things>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저는 올해로 49세이거든요. <Stranger Things>와 같은 작품들은 1980년대 문화를 레퍼런스로 삼고 있지요. 전 아이가 있는 중년인데, 제 아이들과 함께 이 시리즈를 볼 때면 제가 지금 저희 애들 나이였을 때의 기억과 감정이 그 드라마를 통해 교류되는 듯한 긴장을 느껴요. 그 드라마는 정말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환상에 맥락을 너무도 기교 넘치게 부여해냈지요.
뉴욕 전시 때는 리셉션 데스크에 네 권의 책을 놓아뒀다면서요.
그보다 많았어요. 르네 도말의 <마운트 아날로그>,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의 <어게인스트 네이처>, 레베카 솔닛의 <리버 오브 섀도우즈>, 알버트 비어스타트의 작품집 그리고 던전스 앤 드래곤스의 <몬스터 매뉴얼> 등이었죠.
당신의 작품에 레퍼런스로 차용했다는 알버트 비어스타트의 그림도 찾아봤어요. 사실 그는 풍경을 그린다고 그렸지만, 그 그림에는 미국을 감싸고 있는 정조 혹은 어떤 비밀이 표현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알버트 비어스타트의 그림은 디즈니랜드에 있는 모형 산이나 가짜 나무 같은 조형물 짜 맞춰서 연출한 환상 같은 거죠. 그림에서 어떤 것들이 의도적으로 삭제되어 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이를테면, 요세미티에서 수백 년 동안 살아온 인디언 부족들은 그의 대부분의 그림에선 삭제되어 있어요. 그의 그림은 (그가 생각하기에) 조금이라도 더러운 것들을 완벽하게 수거한 깨끗한 풍경, 미화된 풍경이지요. ‘미화된’(cleansed)이라는 이 표현 안에는 뭔가 무서운 것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지요.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들을 외부로 밀어내 버리는 그런 태도, 너무나도 평범하게 보이는 그림도 미화라는 이름의 폭력이 내재되어 있는 미국의 풍경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제게 그런 풍경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일종의 덤프 트럭이나 다름 없어요. 정치적인 이야기, 문화적인 이야기 심지어 자연 친화적인 내용들까지 다 담겨져 있는 정말 풍요로운 콘텍스트지요.
Matthew Day Jackson, Two Moons(after Bierstadt), 2023.
당신의 이번 전시 작품들은 무척 방대한 콘텍스트를 차용하지요.
맞아요. 사실 모든 작품들이 특정한 미술사의 레퍼런스를 차용한 것이거나 특별한 연유가 있는 실제 장소들이죠. 전 관객들이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며 봐 왔던 미국 풍경화나 실제 장소의 경관들의 인식이 다르게 보여지기를 바랐습니다. 이 그림 안에서 그것들이 의도적으로 다르게 그려져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좀 더 시간을 들여서 바라보기를 바랐죠.
한국의 관객들 중엔 꽤나 특이한 반응도 있었죠.
제 작품을 보고 동양의 산수화가 떠오른다든지, 한국의 국립 박물관에 있는 특정한 작품을 참조한 게 아니냐고 물어보는 분들이 있었어요. 전 그것 또한 괜찮다고 생각해요. 흥미로운 지점들을 찾아냈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 볼까요? 당신은 작품 안에서 아티스트를 특정하는 표현 혹은 제스처를 최대한 지우려 노력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전 제 작업이 결국은 나라는 사람에 대한 것으로 귀결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제가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 생각들, 경험들을 좀 더 보편적으로 저보다 넓은 차원에서 공유하고 싶어요. 어떤 하나의 틀에 갇혀서 나의 정체성이나 저자성을 획득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 또 내가 다루는 주제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 모두를 놓치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린 어제 미술에서의 ‘제스처’라는 개념과 추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지요.
정확하게는 추상 표현주의에 대한 이야기였죠. 제가 추상 표현주의 시기에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애드 라인하르트입니다. 라인하르트는 모마(MoMA)에서 열리는 추상표현주의 전시에 자신의 작품이 포함되어선 안된다며 시위를 했던 작가죠. 자신의 작품과 추상 표현주의는 전혀 다른 작품이라는 이유였어요. 전 애드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작품 안에서 사라지려고 했다고 생각해요. 그는 자기 참조를 하지 않고, 역사를 창조하지 않는 회화, 창작자가 보이지 않고 물성이 사라진 작업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전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저 역시 그런 데서 영향을 받았죠.
전 이번 작품에서 나무로 나무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가장 흥미로운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캔버스에다가 나무를 그리고 그걸 나무라고 인지를 하지만 사실은 그 물성으로 따지자면, 천 조각 위에 염료가 묻어 있는 것뿐이죠. 그런데 당신은 회화의 형태로 나무를 나무로 그렸고, 우리는 그걸 나무로 인식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면, 왜 이 모든 걸 다 잘라내는 식으로 만들었는지, 즉 3D 모델링 방식으로 쌓지 않고 깎아내는 방식으로 만들었는지를 설명해야 해요. 제 모든 작업은 외곽선을 따서 커팅하고 이를 채색해 중첩하는 방식으로 아주 복잡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각각의 절개한 조각들을 합칠 때 어떤 개념적인 전환이 일어나요. A라는 재료 옆에 B라는 재료를 배치하면 그 관계가 바뀌거든요. 예를 들면 어떤 명사 한에 형용사를 배치하면 명사의 성질이 바뀌는 것처럼요. 제 작품 안에 있는 나무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나무의 표면을 본 따서 만든 것들이죠. 실재하는 나무의 표면들이 상상의 풍경 안에 있기 때문에 이는 어찌 보면 추상화된 나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Matthew Day Jackson, Tree (after CDF), 2022.
작가를 없앤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만, 전 개인적으로 산문으로 쓴 모든 것들은 논픽션이라고 해도 픽션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얘기했듯이 애드 라인하르트처럼 작품 속에서 작가를 지우는 건 원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아무리 논픽션이라고 해도 선택의 과정에서 저자의 해석이 아예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저만의 방식으로 시도를 해보고 있는 거죠. 예를 들어 이 전시장에 걸려 있는 작업만을 통해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을 거예요. 전 이게 아트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진실되고 싶다’라는 마음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미국 대통령을 지낸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요. 미국 대통령 재임까지 끝낸 말년에 그랜트 장군은 빚을 너무 많이 져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죽고 살아남을 가족들을 위해 자서전을 집필해야 했지요. 그가 죽고난 뒤 출판된 이 자서전에는 특징이 있는데, 형용사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군인들이 굶어 죽었다’, ‘배가 고파 신발을 먹었다’, ‘포탄이 없어서 포탄 대신 돌멩이를 넣고 포를 쐈다’ 같은 문장들로 책이 구성되어 있었던 거죠. 기자님이 ‘논픽션은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기는 절대적인 객관성은 불가능하다는 얘기겠지요. 그러나 비물질적인 작업을 실제로는 만들 수 없었던 애드 라인하르트나, 형용사를 전혀 쓰지 않은 그랜트 장군처럼 적어도 시도는 할 수 있겠지요. 전 제 방식으로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미지나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그걸 세상에 끄집어 내는 과정을 비유할 때 보통 뮤즈의 방문을 받는 시인으로 자주 비유하지요. 그런데 당신은 변수가 많아 매우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함수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많은 작가들이 자신을 어떤 미디엄이나 영매 혹은 매개체로 여기지요. 제가 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제가 찾아오는 것들(이미지나 아이디어) 중에 그 무엇도 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제스처를 만들어서 작업이나 작가를 브랜드화 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자면, 제겐 그 행위 자체가 내가 만든 것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전 어떤 아이디어들이 제게 오고 나에게서 나와 무언가로 만들어지지만, 저를 통과해서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MONTHLY CEL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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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도 흥미로우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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