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부커상 더블 롱리스트, 안톤 허가 겸손을 거부하는 이유
번역가의 일에 대한 안톤 허의 에세이집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는 온갖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부커상 쇼트리스트 후보에 오른 안톤 허라서,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기엔 어렵기에 ‘의도적’으로 털어놔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체 페이지를 읽으시려면
회원가입 및 로그인을 해주세요!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어크로스)를 읽으면서 정말 엄청나게 웃었지만, 뒷부분에선 그러지 못했어요. 번역계에 만연한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이고, 출판계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폭로이며, ‘더는 겸손하지 않겠다’라는 개인적인 선언이기도 하더군요.
뒷부분에 들어간 3개의 글은 각각 프린스턴대학교, 옥스퍼드대학교 그리고 미들버리 칼리지에서 한 강연문을 번역해 넣은 거예요. 실은, 분량을 채우려는 목적이었죠. 마감을 늦추기 위한 핑계이기도 했고요. ‘다음 달에 미들버리 칼리지 강연이 있는데 그 강연 내용도 넣고 싶어요. 그때까지만 늦추죠’라는 식으로요. 강연문을 책에 넣은 건 배우자의 아이디어였어요. “이미 써놓은 걸 왜 책에 안 넣느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써둔 걸 활용해라”라고 말하더군요. 근데 막상 책이 나오고 나니 다들 마지막 3개 챕터가 제일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혀가 갈라진 뱀을 바이링구얼로 묘사하고 이브를 최초의 번역가로 해석한 부분이 너무 좋았어요. 토익을 주관하는 ETS의 본진이 있는 프린스턴에서 ETS 욕을 한 얘기도 흥미로웠습니다.
(웃음)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을 때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프린스턴이면 아이비리그 중에서도 아이비리그잖아요. 그런 대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프린스턴대학교가 위치한 뉴저지주의 프린스턴시에는 (토익과 토플로 영어 약자들의 돈을 갈취하는) ETS 본사가 있거든요. 그 기회에 ETS 욕이라도 하자고 마음먹었죠. “ETS가 불타버린다 해도 슬퍼하거나 애도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을 것 같진 않다”라고 하면서도 “저는 테러리즘을 권장하지 않으니 여러분더러 ETS를 불태우라는 말 따위는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단서를 꼭 달았지요. 혹시라도 다음번 미국에 입국할 때 문제가 될까 걱정했거든요.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어크로스)에는 번역가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작은 차별의 이야기들이 나오지요. 예를 들면 번역원에서 생활장학금까지 받는 학생들은 전부 외국인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그건 지금도 그래요. 번역원이 원하는 건 한국문학을 번역해줄 외국인 영어 네이티브 스피커인 거죠. 그 기준에 따르면 저는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한국인인 셈이고요.
한국계인 카피 에디터가 안톤 허가 번역한 한국 소설의 원고를 다 고치는 에피소드도 나오지요. 원문에 따옴표가 없는데 대화라는 이유로 전부 따옴표 안에 넣고, 원문에 있는 한 줄 띄어쓰기를 도로 다 붙여놨다는 한국계 카피 에디터의 얘기를 듣고는 소름이 돋았어요. 대화체에 따옴표를 안 쓰는 건 소설가로서는 아주 큰 의도를 품은 행위거든요. 노란 머리 외국인을 선호하는 번역원의 태도와 한국인 번역가에게 이상한 갑질을 한 한국계 카피 에디터의 행동이 매우 비슷한 정서에서 기인한다는 생각도 했고요.
맞아요. 그건 그 카피 에디터가 한국계였고, 제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어요. 그야말로 ‘코리안스 플레이닝’이었지요. 그 카피 에디터는 교포였는데, 저보다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더 잘 안다고 생각했던 거죠. 저는 진짜 한국적인 사람이거든요. ‘코리아’ 유니버시티(고려대학교)를 나왔고, 군대에서 다쳐서 국가유공자가 된 사람이에요. 심지어 저희 아버지도 국가유공자이시니까 2대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셈이죠. 대한민국 법학사를 딴 사람이고 한국문학 전문 번역가인데 저보다 한국적인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도 저한테 코리안스 플레이닝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까요. 한국계 교포로서 자신의 한국성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그게 내재화되어 이상한 인종주의로 표출된 거죠. 저희 번역가들에게 큰 도움을 주시는 교포 출신 미국 작가분들이 참 많아요. 다들 너무도 훌륭하신 분들이죠. 그래서 그 카피 에디터 얘기를 하면서 교포라는 점을 얘기하는 게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다시는 그런 경우가 생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책에 썼지요. 그리고 여기저기서 얘기를 하고 다녀요. 이 사건에 대해서. 왜냐하면 다시는 그 사람과 프로페셔널한 세계에서 만나고 싶지 않거든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저라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따옴표 문제는 정말 그 골이 깊어요. 마침 어제 하버드 출신이고 데이비슨 칼리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정새벽 번역가 님이 따옴표에 대한 얘기를 꺼냈어요. 캐나다의 한 문화를 다루는 매체에서 최근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이 인용부호를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쓴 기사가 있었어요. 정 작가님이 그 기사의 트윗을 인용하며 “수십 년 동안 따옴표를 달지 않았던 한국문학과 그것들을 번역할 때마다 굳이 따옴표를 붙였던 나의 미국인 에디터들을 떠올려본다”라고 올렸지요. 전 또다시 정 작가님의 트윗을 인용하며 그간 미국의 에디터들에게 작가가 따옴표를 의도적으로 쓰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항변하며 치러 온 전투에 대한 회상을 털어놨고요. 생각해보세요. 영미권의 모더니스트들, 제임스 조이스니 버지니아 울프 등도 그랬고, 남미의 작가들도 다 그렇게 썼단 말이죠. 이게 무슨 대단히 전복적이거나 획기적인 움직임이 아닌데, 마치 “동양의 작가들은 아직 문명적인 글쓰기에 익숙지 않으니 우리가 따옴표를 다시 넣어주자”라는 태도로 고치려 든단 말이죠. 번역가들은 이런 걸 가지고 계속 싸워야 해요.
이 책을 통해 번역가의 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소설을 영어로 출판하려면, 일단 샘플 번역을 할 수 있는 샘플번역권을 한국 출판사에 요청하고 그걸 마치 에이전시처럼 들고 다니며 해외의 출판사들을 찾아야 한다는 거죠? 그건 영업사원이 있고 마케팅 부서가 있는 버젓한 회사가 해야 할 일처럼 들렸어요.
이상하죠? 그런데 그 모든 일을 한영 번역가는 해내야 해요. 일단 공짜로 당신의 책을 해외 출판사에 팔아주겠다는데도 거기에 대한 허락을 받아야 돼요. 그게 샘플번역권이죠. 이해는 되죠. 누군가 내 책을 말도 안 하고 번역해서 팔면 기분이 나쁘잖아요. 싫다고 거절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거절하는 회사도 있어요. 하여튼 그걸 가지고 해외 출판사 여러 곳에 책을 내달라고 팔러 다녀야 하는 거죠.
번역가이지만 사실 실제 번역을 하는 과정은 그리 큰 파트가 아니고, 번역을 하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번역 호소인의 일이 더 많은 셈이군요.
(웃음) 그게 제 직업이에요. 번역은 사실 제 일의 20~30% 정도를 차지하고 나머지 70~80%는 이메일 쓰기, 피칭하기, 네트워킹 하기죠. 그런 번역 외의 일들을 훨씬 더 많이 해요. 그런데 저는 그 일을 잘하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저만큼 번역하는 사람은 찾아보면 좀 있겠죠. 그런데 저는 성격이 정말 외향적이거든요. 출판 콘퍼런스 같은 데 가면 저는 “헬로,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문학 번역하는 안톤 허라고 해요. 사실 제가 영어로 번역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책을 마침 하나 맡았는데요. 출판사를 찾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돌아다녀요.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렇게 짧게 피칭하는 걸 ‘엘리베이터 피치’라고 해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같이 있을 만큼 짧은 시간 안에 내가 내 책을 PR할 수 있는 문구를 딱 정해두고 외웠다가 열심히 팔지요. 그런 걸 할 줄 알아야 되고 해야 돼요. 그걸 다 마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그때부터 진짜 일인 번역이 시작되지요. 요즘은 예전보다 조기유학을 다녀온 사람도 많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래서 제 번역을 보고 ‘이 정도 번역은 나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저도 알아요. 그리고 전 믿어요. 그분들이 저만큼 할 수 있다는 걸요. 문제는 그게 아녜요. 번역 외의 다른 모든 일을 지금 제가 하는 것처럼 해낼 수 있느냐, 그게 관건이에요.
너무 바빠서 어떻게 살아요. 에이전시라도 써야 되는 거 아녜요?
에이전트하고도 일을 하긴 해요. 근데 그 일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을 가진 이중언어 사용자가 거의 없어요. 원문을 읽을 정도로 한국어를 잘해야 되고, 그러면서 외국인한테 그 책을 팔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잘해야 되는데, 힘들죠. 영어를 조금 하는 한국어 사용자 에이전트와 한국어를 조금 하는 영어 네이티브 에이전트가 같이하면 가능하긴 한데, 그러자면 두 명의 수수료를 감당할 만큼 수익성이 뛰어난지를 따져봐야 되는 경우가 많죠.
아까 잠깐 샘플번역권 얘기를 하면서 이상하게 거절하는 회사가 있다고 했잖아요. 저는 일단 영어로 번역을 해서 내준다는데 거절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되고요. 그걸 이상하게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방식으로 거절한다는 것 자체도 안 믿겨요. 큰 회사 사원들에게 체화된 일종의 갑질 같은 걸까요?
그러니까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갑질 비슷한 태도를 보이더라고요. 제가 인터뷰에 응하기 시작한 이유도 그런 경험과 상관이 있어요. 전 영문 번역가잖아요. 그래서 한국에서의 인터뷰는 응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번역한 책을 한국 독자들이 사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런 몇 번의 갑질 사건들을 거치면서, ‘국내에서 인지도가 없으면 내가 저작권을 못 따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 내 저작권을 내가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죠. 갑질이 너무 심하니까 ‘클라우트(clout)’, 다른 사람들한테 영향을 줄 수 있는 힘을 내가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난 너희가 쉽게 갑질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라는 걸 드러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2년 전 <채널 예스>와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어요.
번역가고 소설가고 아티스트고, 자기 할 일만 잘할 게 아니라 그냥 다 유명해져야 되는 세상이 온 것 같아요. 게다가 곧 작가님이 쓴 영문 소설이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잖아요. 그러면 유명세가 더욱 중요하지요.
그렇죠. 이제는 더 중요하죠.
이번에 나오는 소설 데뷔작 제목은 뭔가요?
<Toward Eternity>예요. 한국어로는 번역하고 싶지 않아요.(웃음) 에밀리 디킨슨의 ‘Because I could not stop for death’라는 시가 있어요. ‘내가 죽음을 위해 멈출 수 없었기에, 그가 친절하게도 나를 위해 멈추었다’로 시작하지요. 그 시의 마지막 두 단어에서 따왔어요. 내용은 이번 에세이에 써둔 내용 그대로예요. 그런데 제가 번역만 할 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대외적인 어떤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영미권에서는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다든지 북클럽 게스트 요청이 들어오면 항상 응했어요. 전 독자들과 가까이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누가 한국어 출발의 영어 번역 문학을 읽겠어요. 사실 한국문학이 인기가 많지는 않거든요. 그러니 독자 하나하나가 소중하지요.



국외에서 인기가 없나요?
없어요. 영미권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도서 판매 순위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예요. 거기에 등극한 첫 소설이 2011년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였던 것 같아요. 그 뒤로는 BTS의 <Beyond the Story>가 1위를 차지한 게 처음이에요. 둘 다 하드 커버 순위였고, 그사이에 다른 책은 이 순위에 단 한 번도 진입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전 아주 가끔 누군가가 ‘K -리터러처’ ‘K-북’ ’문학 한류’ 같은 애기를 하면 “그딴 거 없습니다”라고 답해줘요. 케이는 드라마나 팝에만 통용되는 말이거든요.
작가님이 번역한 백세희 작가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는요?
그 책은 작년하고 올해 많이 팔리긴 했어요. 그런데 그 책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는 아니에요. 영국의 출판사에서 나와서 영국에선 좀 많이 팔렸죠. 한강의 <채식주의자>도 심지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는 아니었어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빌보드 HOT 100 같은 공신력 있는 기준인가 봐요.
그렇죠. 왜 빌보드도 노래 단위로 집계하는 ‘HOT 100’이랑 앨범 단위로 집계하는 ‘빌보드 200’만 중요하지 컨트리 뮤직이니 에스닉이니 하는 서브 장르는 안 중요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예를 들면 아마존도 ‘No. 1 Books’ 같은 카테고리만 중요하지 ‘No.1 in Science’ 같은 건 안 중요해요.
그럼 영국 출판 시장에선 어떤 차트가 중요해요?
확실치는 않지만, 영국은 웬만한 차트는 다 돈 내면 올려주는 것 같아요. 그런 차트의 객관성에 대한 규제가 없어서 전 잘 모르겠어요. 돈 내고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있거든요.
한국에서도 소소한 조작은 많지요. 여행 에세이를 낸 작가의 엄마가 그 책을 한 1000권쯤 사버리면, 바로 해당 분야에서 베스트셀러에 등극하는 거거든요.
아, 우리 엄마는 그러지 않으셨어요.(웃음) 그런데 그런 관행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져요. 공화당 정치인이 책을 내면 공화당 지지자들이 수십 권씩 사서 친구들한테 주며 순위를 올리죠. 제가 말하는 영국 출판계의 잘못된 관행이라는 건 진짜로 돈을 주고 조작하는 것 같다는 점이에요.
책에 운 얘기가 꽤 나와요. 자주 우나 봐요?
자주 울어요. 너무 자주 울어요. 책에 제가 울음을 터뜨리는 부분이 하도 많이 나와서, 책이 너무 우울해지는 것도 같고, 제가 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같아서 많이 뺀 게 그 정도예요.
정신 나가 보이지 않아요. 한국 남자의 남성성을 생각하면 너무 귀엽던데요.
아녜요. 오히려 이렇게 우는 게 한국 남자스러운 거예요. 한국 ‘아재’에겐 ‘내가 하고 싶은 건 당연히 다 할 수 있다’는 마인드 세트가 있어요. 아까 말했듯, 전 고대 법대를 나온 국가유공자인 한국 아재이기 때문에, ‘내가 울고 싶은데 당연히 울어야지’라고 생각해서 그냥 울어버리는 거죠. 전 제 감정에, 그 순간에 굉장히 솔직해요. 감정을 확 터뜨리고 불과 10분만 지나도 ‘내가 왜 울었지?’라고 생각할 정도죠. 전 제 그런 솔직함이 그냥 ‘한남으로서의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웃음) 아저씨가 되면 눈물이 많아진다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아저씨라 울 수 있는 거였어요.
샌드라 오 아시죠? 한국계 캐나다 배우.
예, 제일 좋아하는 배우 중 하나입니다.
너무 멋있죠. 샌드라 오가 봉준호 감독을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근데 샌드라 오는 봉준호 감독이 너무 신기했대요. 봉 감독은 그냥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다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다 말하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그런 말을 나중에 한 적이 있어요. 그걸 보고 웹에서 사람들이 “그건 한국 남자라서, 한국의 아저씨라서 그런 거다”라고 댓글을 달았어요. 여기서 드러나는 게 교포와 한국 아저씨의 차이죠. 교포분들은 인종주의가 만연한 미국 사회의 수많은 제약 속에서 살거든요. 그들은 눈치를 봐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며 살 수는 없어요. 한국에서 한국 사람으로 살며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미국 사회의 동아시아인은 누릴 수가 없어요. 그러니 봉준호 감독이 우리 아저씨들 중에 특별한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포 출신인 샌드라 오의 눈에는 ‘남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으로 보인 거예요. 저도 정말 많이 느껴요. 제 배우자는 뉴욕에서 자라난 아시아계 미국인이에요. 배우자와 저는 정말 달라요. 배우자는 전혀 조심스러워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굉장히 조심스러워하고, 대외적인 자리에선 목소리의 톤이 달라져요. 연애 초기에는 엄청 싸웠어요. 제가 무슨 말을 하면 제 배우자가 “어떻게 사람들 있는 데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며 따졌고, 저는 “내가 뭐! 내가 말하고 싶은데 뭐가 문제야”라고 반박했죠.
하하하. 저희 부부의 싸움과 매우 비슷하네요.
아니 그 사람이 내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Why should I care? 미국이 엄청 자유로운 사회 같지만, 서로 정말 조심하면서 지내요. 왜냐하면 미국에선 남 기분 신경 안 썼다가는 길에서 총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특히 미국에서 아시아계 남자는 거의 지워지다시피 하죠. 미국 드라마를 봐도 그렇잖아요. 아시아계 남성은 대사가 없거나, 잘 안 보이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거세당해요.
섹슈얼리티로 따지면 아시아 남성은 인종의 사다리 제일 밑에 있지요.
그렇죠. 보통 그렇게 보죠. 아니면 여성이나 게이들의 페티시 대상이 되든지요.
이번에 정보라 작가의 <Cursed Bunny>가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선정됐지요. 사실 정보라 작가는 지난번 부커상 롱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 전까지는 잘 안 알려진 작가였어요. 해외 출판사에 어떻게 그 책을 영업하셨나요?
너무 안 알려져서 부커상 후보에 올랐을 때 한 신문사는 ‘무명 작가’라고 표현했을 정도였죠. 단행본은 3~4권 냈고, 당시 사이언스픽션 연대의 회장이었는데도요. 그 책을 낸 ‘혼포드 스타’(Honford Star)는 앤서니 버드와 테일러 브래들리라는 두 대표가 운영하는 출판사예요. 그 둘과는 친분이 있고,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지요. <Cursed Bunny>를 번역하기 전에, 류성 작가로부터 혼포드가 한국 SF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당시 저는 정보라 작가님의 작품이 있었고, 번역가 소제(SOJE) 님은 최진영 작가의 <해가 지는 곳으로>가 있었고, 류성 작가님은 배명훈 작가의 <타워>가 있었거든요. 우리 셋 다 피치해보자고 약속하고 피칭을 했지요. 소제 번역가님이 바이링구얼을 위한 한국문학 낭독회를 열었고, 당시 한국에 있었던 테일러가 그 자리에 왔어요. 테일러가 ‘요새 무슨 원고 팔러 다녀?’라고 물어보길래 바로 ‘정보라라고 있는데, 영어는 물론 어떤 언어로도 번역된 적이 없는데, 엄청나게 재밌어. 샘플 보내줄까? 블라블라’ 말했죠.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테일러가 그 샘플을 읽자마자 “우리 이 작가 잡아야 해. 놓치면 후회할 거야”라고 앤서니한테 계속 얘기했대요. 정말 샘플 보낸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테일러로부터 이메일이 온 걸 보면 진짜인 것 같아요.
전 일부러 <저주 토끼>가 아니라 <Cursed Bunny>로 먼저 읽어봤어요.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고골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찾아봤더니 러시아 문학 전공이시더군요.
(웃음) 고골 맞아요. 또 정 작가님은 소비에트 시대에 숙청당한 러시안 포멀리스트들의 문학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싫어하는 반어법과 역설법을 많이 쓰지요. 영미권에선 제인 오스틴이나 셰익스피어처럼 아이러니컬한 유머를 구사하는 전통이 있어서 오히려 정보라 작가의 소설은 영어로 옮기기 쉬웠어요.
이 책에서 큰 울림을 주는 말 중 하나는 ‘번역가는 왜 겸손해야 하나’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일단 제가 이 ‘불타는 쓰레기 수거통’ 속에서 느낀 것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중 하나가 ‘아무도 번역가를 챙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아무도 ‘어머 번역가한테도 말해줘야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어머 이건 번역가의 권리잖아’라며 챙겨주지도 않아요. 번역가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번역가를 도와주지 않아요. 저희는 출판 서열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어요. 그래서 내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말을 하고 다녀야겠다. 내가 불평을 하고 다녀야겠다. 왜냐하면 내가 그러지 않으면, 안톤 허가 그러지 않으면, 지금 번역가 지망생들이 미래의 번역가들을 볼 낯이 없을 것 같아요. 전 제 위 세대인 한영 번역가들을 존경하지 않아요. 프랑스어로 하시는 최미경 번역가님 등 몇몇 존경하는 선배님들이 있긴 하지만, 다른 분들과는 사이가 좀 안 좋아요. 왜냐하면 그런 관행, 번역가가 출판계의 가장 아래층에서 견뎌내야 하는 관행을 고치지 않은 사람들이니까요. 10년 후에 제가 그렇게 후배들에게 욕을 먹고 싶지 않다면, 지금 고쳐야죠. 한국문학번역원의 이상한 관행들에 대해 얘기해야 해요.
Credit
- EDITOR 박세회
- PHOTOGRAPHER 김성룡
- PHOTO Anton Hur
- ASSISTANT 송채연
- ART DESIGNER 주정화
JEWELLERY
#부쉐론, #다미아니, #티파니, #타사키, #프레드, #그라프, #발렌티노가라바니, #까르띠에, #쇼파드, #루이비통
이 기사도 흥미로우실 거예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에스콰이어의 최신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