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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코어와 나의 유니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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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경기 당일이 되자 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오랜 친구들을 만날 예정이었다. 축구팬이 아닌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유니폼을 입고 가기에는 다소 쑥스러웠다. 여긴 레스터나 선덜랜드가 아니라 강릉이니까. 문제는 내가 서울에서 가져온 여름옷이라곤 유니폼뿐이었다는 것이다. 하필 강릉은 10월 초답지 않게 쨍쨍하고 화창한 늦여름 날씨였다. 역시 오랜만에 축구장에 간다는 사실에 신이 난 아빠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요즘 젊은 애들 유니폼 같은 옷 많이 입던데? 그냥 입고 가”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그는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지금 옷 묶은 게 뉴진스 따라 한 거 아니었어?”
억울했다. 전혀 아니었다. 나는 뉴진스가 데뷔하기도 한참 전부터 이러고 경기장엘 다녔다. 무려 멤버 혜인이 태어나던 2008년에도 그랬다.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은 그사이 변한 모양이었다. 사실 그의 말은 어느 정도 맞긴 했다. 유니폼을 패셔너블하게 소화하는 것으로 알려진 ‘블록코어’는 팬데믹 이후 y2k 스타일과 함께 떠오른 대표적인 트렌드 중 하나다. 블록을 쌓는 것과는 아무 관계 없는 이 단어는 한국어로 ‘짜식’ 정도 의미인 영국 속어 블록(bloke)에서 왔다. 축구 종가를 자처하는 영국의 청소년이라면 애정하는 팀의 유니폼을 하나 이상 갖기 마련이다. 길거리에서도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니는 청소년을 쉽게 볼 수 있다. 강릉에서도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니는 애들의 스타일이 유행하다 못해 우리 아빠가 알 정도니, 놈코어, 고프코어 이후의 트렌드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숫자로 드러나는 블록코어의 유행도 심상치 않다. 스포츠 의류만 판매하는 무신사 플레이어에 따르면 올해 3월 판매된 축구 유니폼 거래액은 전월 대비 63%, 야구 유니폼은 51% 증가했다. 물론 3월이면 프로 축구 및 야구가 개막하는 때고, 무신사 플레이어는 일부 구단들의 유니폼을 단독으로 판매하고 있으니 이 수치가 블록코어의 인기만을 반영한 것으로 보긴 어렵다. 블록코어의 인기는 다른 방향에서 살펴봐야 더 정확하게 보인다. 의류 쇼핑 앱 ‘에이블리’의 검색량 분석에 따르면, ‘유니폼’에 대한 올해 3월의 검색량은 전년 동기 대비 375% 늘었다고 한다. 에이블리에서는 국적과 종목을 불문하고 구단의 유니폼도 저지도 판매하지 않는다. 온전히 패션 의류로서 ‘유니폼’을 찾은 이들이 올해 들어 급격히 늘어났다는 방증이다.
블록코어에는 나름의 조건이 있다. 블록코어 룩으로 5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한 틱톡커 ‘스트링빈보이13(@stringbeanboy13)’의 영상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자연스러운 청바지나 카고 팬츠 같은 평범한 하의를 매칭해야 한다. 또 타이트한 핏보다는 박시한 쪽이 스타일리시하다. 결정적으로, 명백하게 한 국가나 팀의 유니폼이라고 드러난 옷보다는 축구 유니폼처럼 생겼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저지 소재로 된 심플한 옷이 좋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이 조건에 따르면 그날 내가 입은 패션은 블록코어가 아니다. 내 유니폼의 가슴엔 강원FC의 메인 스폰서인 ‘하이원 리조트’가, 왼팔엔 ‘양구사과’가, 등짝엔 ‘강원한우’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다. 블록코어 스타일을 일부러 하겠다고 나선 적은 없지만, 블록코어 스타일로는 실격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빴다. 0고백 1실연의 느낌. 블록코어로 구글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잇지의 예지도, 블랙핑크의 제니도, 에스파의 카리나도 스폰서의 이름이 붙은 진짜 ‘유니폼’은 입지 않았다. 괜히 크롭트 스타일로 묶은 매듭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블록코어라는 유행이 없을 때부터 나는 경기장에 갈 때마다 이렇게 입었는데, 갑자기 어쭙잖게 트렌드를 따라 하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을까? ‘저 아줌마 뉴진스 따라 한 거야? 하려면 제대로 하지 양구사과 뭐야’라고 누군가 수군대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뉴진스가 입은 블록코어 룩도 어느 특정 국가나 팀의 유니폼이 아니었다. 포털 사이트에 ‘블록코어’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의류들 역시 엄밀히 따지면 진짜 ‘유니폼’이 아니다. <바이스>나 <엘르> 등 여러 매체가 블록코어의 대표적인 예시로 언급한 옷들은 발렌시아가와 아디다스가 협업해 만든 ‘유니폼 스타일’의 오버사이즈 티셔츠 및 한국 브랜드 기준(Kijun)과 시눈(Sinoon)의 ‘풋볼 티셔츠’다. 모두 스포티한 느낌을 살리면서도 무척 심플한, ‘패션 의류’라는 공통점이 있다. 유니폼 스타일과 진짜 유니폼 사이에는 제법 큰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 블록코어의 핵심은 유니폼이 아니라 ‘유니폼 스타일’이다. 애초에 유니폼은 멋지게 입기 극도로 어려운 옷이다. 지저분한 스폰서 이름이 여기저기 박힌 유니폼을 멋스럽게 소화하는 건 문자를 잊어버리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양구사과의 벽을 넘어서면 강원한우의 벽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문자를 읽어버리는 순간 스타일이 사라진다. 사실 ‘블록코어’라는 단어는 전혀 멋스럽지 않은 유니폼을 패션과 상관없이 언제나 입고 다니는 영국의 ‘블록’과 ‘라드’(lad, 어린애)들을 놀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 프로축구 샬럿FC의 열혈 팬인 브랜든 헌틀리(Brandon Huntley)는 2021년 여름, 유니폼과 어정쩡한 청바지 그리고 낡은 운동화를 신은 채 찍은 영상에 “2022년 최고 유행: 블록코어”라는 자막을 달아 틱톡에 올렸다. 이전에 게시한 유니폼을 입은 자신의 영상에 ‘짜식(bloke)’이라는 댓글이 달린 것을 보고, 당시 유행을 표현하는 단어로 자주 쓰이던 놈코어의 말장난으로 농담 삼아 만든 영상이었다. 우리로 치면 이정후 이름을 새긴 키움 히어로즈 유니폼에 대강 청바지를 걸친, 맵시라곤 1도 모르는 듯한 청년을 찍은 영상에 대강 ‘짜식룩’이라고 이름을 붙였더니 진짜 이듬해 ‘Jjasik Look’이 전 세계를 강타한 트렌드가 된 셈이다. 상당히 초현실적인 일이다. 축구밖에 모르는 상남자 헌틀리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가족들과 본 경기는 무승부로 끝났다. 이기지 못했다는 것에 기분이 상해 옷을 갈아입는 것을 깜빡한 채 친구들을 만났다. 한 친구는 우리 아빠와 비슷하게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라며 아는 척을 했고, 또 다른 친구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트레져의 멤버 최현석이 얼마 전 FC서울 유니폼을 입고 라이브 방송을 한 걸 봤다며, 확실히 유니폼 패션이 인기라고 했다. 진짜 유니폼과 패션 유니폼을 구별하지 못하는 마음 편한 친구들의 칭찬을 들으며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김현유는 <에스콰이어 코리아> 피처 에디터다.
Credit
- EDITOR 김현유
- WRITER 김현유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JEWE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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