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여행지의 한 집에서 몇 주, 몇 달을 머물렀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pt.2

여행지의 한 집에서 몇 주, 몇 달을 머물러 보았다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도시와 여행과 삶이 어떤 형태로 엉켰을까? 집 안의 빛과 소리와 냄새는 그 도시의 인상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여섯 명의 여행 애호가에게서 한동안 머물렀던 이국의 집에 대한 원고를 받았다.

프로필 by 오성윤 2023.12.27
 
 
Brookline, USA
아침의 발소리, 저녁의 일몰 풍경
이성규(광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지난가을을 지낸 미국 브룩라인 처제 집의 거실.

지난가을을 지낸 미국 브룩라인 처제 집의 거실.

 
처제의 집으로 가는 길은 고단했다. 난생처음 시도하는 장기 여행이라는 흥분이 인천공항까지만 해도 분명 존재했으나, 14시간을 비행해 아내, 아이들, 장모님까지 네 식구와 함께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에 떨어지고 보니 서울 집 거실 소파가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공항에서 처제 집까지 이동하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다섯 식구와 그 다섯 식구가 몇 달을 머물 짐을 동서의 차에 우겨 넣는 것도, 그 상태로 30여 분을 달리는 것도. 다만 이상하게도 졸리지는 않았다. 차창 밖 풍경은 별세계라기보다는 차분한 쪽에 가까웠는데, 어쩐지 그들 하나하나가 흥미로웠다. 브룩라인은 보스턴 바로 옆에 위치한 도시로, 그 안에서도 처제의 집이 위치한 롱우드 애비뉴는 특히 고유의 분위기를 가진 지역이라 할 만했다. 여느 미국 교외 지역처럼 아늑한 분위기가 감도는데, 고택이 많아 마치 유럽에 온 듯한 착각도 들었고, 와중에 마라톤의 도시 보스턴 근교라 그런지 자유롭게 거리를 누비는 러너들이 눈에 띄었다.
 
여행의 시작을 알렸던 브룩라인 표지판

여행의 시작을 알렸던 브룩라인 표지판

 
동부 매사추세츠에 고택이 많은 건 보스턴과 그 인근의 도시들이 미국 독립혁명의 발원지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도시’여서. 그 풍부한 역사를 쉼 없이 기리고 기억해서일까? 보스턴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교육의 도시’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큰 이유 중 하나도, 아이들이 이런 환경과 만나면 어떤 가능성이 생겨날지를 보고 싶어서였다. ‘아이들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길러보면 어떨까?’ 그리고 오래도록 다니던 회사를 최근에 그만둔 내 삶의 방향도 거기에서부터 출발해 완전히 새롭게 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매일을 보낼 요량이었다. 그러니까 분명 그럴 예정이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브룩라인에 머무는 동안 현실적인 고민이란 걸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어색했던 도착 첫날을 제외하면 그 몇 달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처제의 집이 너무 아름다운 주방과 훌륭한 입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근방의 여느 집이 그렇듯 처제의 집도 고택이다. 동네 이름에서 따온 듯 거대한 나무 대문에서부터 간이 정원, 아기자기한 계단, 원목 바닥까지 모든 것이 독특한 형식이었고 동시에 모든 것이 아늑했다. 미국식 고택이라 원래 신발을 신고 생활하게끔 되어 있었으나 처제 부부는 현관에 신발장과 신발을 벗어놓을 곳을 만들어 한국식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발을 들여놓자 오래된 원목 바닥이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우리를 반겼다. 어릴 적 시골 할머니 집의 대청마루가 떠오르는 소리였다. 집은 현관문을 기준으로 우측에 방들과 부엌을 품고 있고, 좌측으로 우리가 생활했던 널찍한 거실을 품은 구조였다. 현관 오른쪽에도 따로 문이 있고 부엌에도 거실과 연결되는 문이 있어 두 가족이 완전히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북향인 거실은 다소 어두웠는데, 약간의 빛만 새어 들어와도 잠들지 못하는 내게는 그 어둠이 아늑함으로 다가왔다. 반면에 남향인 주방에서는 아침에는 해가 뜨는 것이 보였고 저녁에는 해가 지는 풍경이 보였다. 굉장히 분위기 있는 공간이었달까. 그곳에서 동서와 일몰을 보며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셨다. 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 위스키, 맥주, 심지어 소주까지 주종을 가리지 않고.
 
가을이 찾아온 간이 정원 풍경.

가을이 찾아온 간이 정원 풍경.

전형적인 미국 동부식 주방의 풍경.

전형적인 미국 동부식 주방의 풍경.

 
보스턴 커먼부터 보스턴 퍼블릭 라이브러리, 차이나타운, 파인아트 보스턴 박물관, 보스턴 칼리지, 펜웨이 파크, 하버드, MIT까지 보스턴 인근의 명소는 대부분 집에서 걸어서 이동할 수 있었다. 비교적 치안이 좋아 매일 아침 조깅이나 산책도 했다. 매일 갈 곳이 있었고, 때로는 보스턴을 벗어나, 혹은 아예 다른 주까지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사실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바로 이곳, 집이었다. 맨 먼저 일어난 사람의 발소리와 마룻바닥 삐걱거리는 소리의 협연에 잠을 깨고, 저녁에는 일몰 볕과 술기운에 물들어 곯아떨어지면서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지 곳곳 그리 열심히 사진과 영상을 남기면서도 이 집의 사진은 몇 장 남기지 못했다. 아마도 우리가 스스로가 나고 자란 익숙한 집의 사진은 잘 찍어놓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여행은 늘 적응이 될 때쯤 끝이 나고, 이 여행도 여느 여행의 말미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미친 듯이 짐을 싸서 떠나며 마무리되었다. 그간 우리를 품어준 그 집에 제대로 작별을 고할 새도 없이. 15시간 비행을 마치고 돌아와 드디어 서울의 반가운 우리 집에 들어서자마자 뻗어버리고 말았는데, 마룻바닥 삐걱거리는 환청에 깨는 통에 그리 오래 잠들지는 못했다.
 
 

 
 
Paris, France
삶이 가득한 동네로서의 몽마르트르
김정옥(출판사 대표)
 
나탈리의 침실 바깥으로 보이던 프랑스 특유의 청회색 지붕과 주황 굴뚝.

나탈리의 침실 바깥으로 보이던 프랑스 특유의 청회색 지붕과 주황 굴뚝.

 
“사브리나가 일을 잘해요.” 뒤늦게 도착한 집주인 나탈리는 문 앞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 네 켤레를 보며 덩달아 신발을 벗었다. 맨발로 다녀도 될 만큼 실내 바닥이 깨끗하다고, 집 청소를 맡고 있는 사브리나가 아주 성실하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 네 식구는 사실 맨발이 아니라 실내 슬리퍼를 신고 있었지만 그녀의 설명에는 자연스레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사브리나가 얼마나 완벽하게 일을 해내는 사람인지는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숙소 곳곳에 크고 작은 액자들이 걸려 있고 장롱에는 침구류가 가득 쌓여 있었는데, 액자와 가구 어느 구석에서도 먼지 한 톨 발견할 수가 없었다. 100년도 더 돼 보이는 장롱에서는 심지어 침구류마다 막 빨래한 냄새가 났다. 행운이었다. 우리는 그 집에서 여느 여행자처럼 잠시 머무는 게 아니라 3주를 보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측면, 바슐레가에 위치한 그 집에는 누가 봐도 나탈리로 보이는 여인의 대형 초상화 두 점이 걸려 있었다. 하나는 붉은색, 하나는 녹색을 배경으로 한 유화였는데, 두 액자가 침대 위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다음으로 큰 액자는 거실 바닥에 세워진 사진이었다. 나탈리가 정말 좋아한다는 콜롬비아 사진작가의 작품이었다. 그녀는 사진을 설명하며, 그 작가 역시 나탈리의 집에서 며칠 머문 적이 있었다고 했다. 자기 작품이 커다랗게 자리한 남의 집에서 지내는 작가는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침대 옆 책꽂이에는 예술 작품집이 모여 있었다. 나는 나탈리가 대체 왜 1962년 파리 세르누치미술관에서 열린 <한국보물전>의 아주 두꺼운 도록까지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미처 묻지는 못했다. 이후로는 그를 만나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거실에서 침실로 이어지는 좁은 복도에는 나탈리의 아들이 어릴 때 그렸다는 비교적 귀여운 그림들이 잇따라 걸려 있었다. 사크레쾨르 성당을 그린 그림들이었다. 몽마르트르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그 앞에 서면 파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으로 유명한 성당. 이 집으로 이어지는 길 끝에 바로 그 성당의 진입로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파리의 명물로 이름난 곳이며 나탈리의 아들은 자라는 동안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건축물이었을 텐데도, 자꾸만 그리고 싶을 만큼 그곳이 좋았던 걸까?
 
나탈리의 집. 침실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좁다란 복도에는 그림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나탈리의 집. 침실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좁다란 복도에는 그림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바슐레가는 조용한 동네였다. 관광지 근처의 한적한 주택가라는 것이 새삼스러운 경험은 아니었다. 서울의 우리 집 역시 홍대입구역에서 연남동 동진시장을 거쳐 이어지는 조용한 아파트 단지니까. 미로 같은 연남동 골목골목을 수십 번 오가며 다른 이들에게는 데이트 장소나 관광지인 곳을 생활의 터전으로 만들었듯, 3주 동안 꼼꼼히 몽마르트르의 골목들을 익혔다. 사크레쾨르성당에서 라마르크가로 넘어가면 관광객은 약속이라도 한 듯 사라졌다. 한 손엔 유모차를 밀며 다른 한 손으로는 담배를 쥔 프랑스인 가족이나 개를 산책시키는 파리 시민들이 있을 뿐이었다. 성당에서 걸어 내려오면 왼편에서 만나게 되는 생피에르아트센터의 뒷골목은 온통 포목점이었고, 성당 뒤쪽 본느가로 넘어가면 조용한 부촌이 나타났다.
몽마르트르를 소개하지 않는 프랑스 여행책은 없다. 그리고 그 소개글에 경고나 주의사항을 품지 않은 경우도 찾기가 힘들다. 대부분 관광객의 손목에 몰래 팔찌를 둘러놓고 구매를 강요하는 상인이나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식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매일같이 몽마르트르를 누비면서도 한 번도 팔찌 상인을 보지 못했고,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사람들에게 휴대폰을 맡기고도 매번 안전하게 돌려받았다. 그러고 보면 ‘프랑스 여행 정보’라고 하는 것들의 많은 부분이 허상 같기도 했다. 레스토랑 직원들은 늘 우리를 환대했다. 발 디딜 틈 없이 바쁜 시간대에도 다른 손님들의 자리를 옮겨가며 우리 일행 여섯이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고, 곁에 앉은 손님들도 불평 하나 없이 오직 가벼운 미소를 보내주었다.
파리라는 도시를 전혀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파리에 방문한 건 그때가 네 번째였다. 하지만 아이들과 남편 모두 함께 찾은 건 처음이었고, 이렇게 오래 머문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조건들은 나를 특별한 것을 보고자 찾아 헤매는 여행자가 아니라 세상 어디에서든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생활자가 되도록 했던 것 같다. 창밖으로 청회색 지붕과 주황색 굴뚝들이 펼쳐지는 나탈리의 집 침실에 머무는 동안, 몽마르트르의 그와 서울 연희동의 내가 닮거나 다른 점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의 집에서 나를 좀 더 알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크레쾨르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

사크레쾨르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

 
 

 
 
Weligama, Sri Lanka
부도 국가의 해변 마을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
양보연(콘텐츠 디렉터)
 
우리가 지내던 숙소를 관리하던 이름 모를 노인이자 비슐래의 아빠, 미샨티의 할아버지.

우리가 지내던 숙소를 관리하던 이름 모를 노인이자 비슐래의 아빠, 미샨티의 할아버지.

 
좋은 파도를 만나러 가겠어, 온통 그 생각뿐. 우리가 스리랑카로 향한 이유는 단순했다. 거기엔 국내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좋은 파도가 매일 있다. 특히 싱글핀 롱보드를 타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맵시 좋은 파도가 있다. 그것 외에 다른 건 고려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퍼니까.
비행기에 올랐다. 직항으로 7시간 거리지만, 직항 비행기가 드물어 경유 포함 12시간을 날아갔다. 이동 시간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공항에서 밴을 타고 4시간을 더 이동해야 했다. 고속도로를 제외하면 아스팔트가 제대로 깔린 도로가 거의 없어 이동 시간 대부분 밴은 탈곡기처럼 덜컹거거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웰리가마(Weligama)라는 곳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우리 앞에 펼쳐진 건 휴양지가 아닌, 짓다 만 건물과 폐가가 지천에 널린 그야말로 빈민촌이었다. 세련되거나 목가적인 바나 식당은커녕 이걸 먹어도 안전한 건지 의심이 드는 음식을 파는 가게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스리랑카가 국가채무만 70억 달러가 넘는 부도 국가라는 걸 그때 알았다. 물가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었다. 여행객을 보면 무작정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가게도 더러 있었다. 아무렴 어떤가. 웰리가마에는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파도가 있다. 내일부터는 그 좋은 파도를 온몸으로 누릴 수 있다.
 
숙소 청소를 맡은 비슐래의 아들 미샨티.

숙소 청소를 맡은 비슐래의 아들 미샨티.

 
우리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수영장이 딸린 70평에 달하는 저택 같은 숙소를 빌려뒀기 때문이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수영장에 몸을 던졌다. 나와 친구들은 깔깔 웃으며 한참을 물장구치며 놀았다. “그래도 숙소는 좋네.” 친구가 안심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아직 멀리서 본 탓에 생긴 오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미줄이 팔에 걸렸다. 화장실과 침대 아래에는 바퀴벌레가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전갈처럼 생긴 손바닥만 한 크기의 곤충도 등장했다. 모기들은 황희찬보다 더 저돌적이었고 웬만한 스타디움의 관중보다 많은 것 같았다. 숙소 주인에게 항의하자 “이 동네에서 벌레가 없는 숙소는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웰리가마는 제대로 된 호텔도 없는 동네였다. 매일 한 시간씩 정전도 있었다. 망해서 가난한 동네란, 필리핀이나 베트남 등 몇몇 동남아 국가에서 겪었던, 발전이 더디다거나 발전을 약간 양보하는 대신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데에서 오는 불편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꼼짝없이 보름을 보낼 예정이었다.
긴 이동 시간의 피로함이 벌레에 대한 공포를 이겨냈는지 우리는 곤히 잠들었다. 그렇게 동이 텄고, 일출을 출발 신호로 바다로 향해 지칠 때까지 서핑을 즐겼다. 점심에 들어와서는 수영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점심을 먹었다. 이후 낮잠 한판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일몰 즈음 다시 서프보드와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고, 저녁 식사 후엔 잠에 들었다. 꿈꾸던 비치 라이프에 비하면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좋은 파도를 매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만족했다.
 
스윔 팬츠와 티셔츠, 수건을 제외하면 빨랫감이 없는 비치 라이프.

스윔 팬츠와 티셔츠, 수건을 제외하면 빨랫감이 없는 비치 라이프.

 
예약할 당시에는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청소와 설거지를 비롯한 집안일을 도맡는 도우미 비슐래가 매일 숙소에 출근한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를 혼자 두고 올 수 없던 엄마의 마음인지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도 매일 동행했다. 처음에는 꼬마가 우리를 경계하는 듯 보였다. 쳐다보면 숨었고, 간단한 인사 외의 교류는 전혀 없었다. 나중에 듣기로, 꼬마가 북동 아시아인을 본 것은 우리가 난생처음이었던 탓에 막연히 무서웠다고 했다.
금방 새까맣게 탄 피부처럼 비치 라이프도 며칠 지나지 않아 익숙해졌다. 꼭두새벽부터 서핑을 하고 돌아오면 맥주 한 캔과 함께 수영을 하는 건 그냥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꼬마가 쭈뼛거리며 우리 곁에 온 건 닷새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말이 통하진 않았지만, 그는 수영을 가르쳐달라고 온몸으로 말했다. 웰리가마의 해변은 파도가 매서워 수영을 해본 적 없다고 했고, 수영장을 궁금해하는 듯했다. 왓츠 유어 네임? “미샨티.” 하우 올드 아 유? “세븐.” 두 유 워너 스윔? “(끄덕끄덕. 하지만 이내 할 줄은 모른다며 양손으로 X 모양을 만든다.)” 그렇게 미샨티는 우리에게 매일 한 시간씩 수영을 배웠다. 우리는 물에 몸을 띄우는 방법, 양발을 휘저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 등을 알려주었고, 미샨티는 곧잘 따라 했다. 강한 햇볕 때문에 늘 찡그린 얼굴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가 그 시간을 좋아한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됐다. 우리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는 그에게 동네 문방구에서 산 크레파스를 선물해줬고, 그는 엄마가 일하는 동안 선베드에 누운 나와 친구 사이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2주가 흐르고, 마지막 날이 되었다. 우리는 웰리가마에서 내내 그랬던 것처럼 오전 서핑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 미샨티가 우리에게 왔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직접 그린 그림을 보여줬다. 비슐래는 미샨티가 우리가 석양 아래서 서핑하는 풍경을 상상하며 크레파스로 그린 거라 설명했다. 노란색 하늘보다 푸른 바다의 비중이 더 많은 그림이었고, 해변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황홀한 시간을 담은 그림이었다. “땡큐, 브라더스.” 인사 외에 미샨티가 처음으로 우리에게 건넨 말이었다. 그는 떠나는 우리에게 선물이라며 그 그림을 돌돌 말아 건넸다. 우리는 그를 꼭 안아주었고, 그 그림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우리는 공항으로 가는 내내 미샨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수영 실력이 얼마나 일취월장했는지, 어떻게 웃는지, 우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낮잠을 잘 때는 얼마나 귀여웠던지에 대해서. 고개를 돌리자 차창 밖으로 폐가가 줄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 지역을 처음 봤을 때만큼 삭막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미샨티가 우리에게 준 선물은 이 도시를 아름답게 보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
 
숙소에 자리한, 멋대로 자라고 있던 식물.

숙소에 자리한, 멋대로 자라고 있던 식물.

Credit

  • EDITOR 오성윤
  • ART DESIGNER 김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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