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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업일치를 이룬 밀덕이 <고려거란전쟁>을 고증해봤다

프로필 by 김현유 2024.01.01
 
소위 말하는 ‘90년대생’으로서, 이전 세대보다는 다양한 놀거리와 볼거리를 누리며 자라왔다고 생각한다. 펜티엄 컴퓨터가 보급되고 멀티플렉스 극장이 등장한 시기에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 세대가 어린 시절에 누릴 수 있던 문화적 혜택은 게임이나 영화에 국한되지 않았다. <용의 눈물>(1996)부터 <태조 왕건>(2000)까지, 대하 사극의 황금기가 이어진 덕분이었다. 견훤이 큰 통나무를 휘두르며 용맹을 떨치는 장면에서는 희열을 느꼈고, 궁예가 비장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부터였을까, 내가 밀덕(밀리터리 덕후)이자 역덕(역사 덕후)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유년기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사극의 영향으로, 나는 역사고고학을 전공하고 ‘학예사’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탓에 나는 유년 시절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사극을 즐길 수는 없게 되기도 했다. 부정적인 면이 두드러져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 변화를 준 것은 극 중 허용이라고 넘길 수도 있지만, 진형도 없이 막싸움을 벌이는 전투 장면이나 시종일관 삼지창만 들고 다니는 병사들의 모습은 밀덕이자 역덕인 내게 실망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일례로 <연개소문>(2006)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연개소문이 던진 칼은 마치 드론처럼 자유자재로 날아 스스로 적들을 처치했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어검술’을 묘사한 모양이었는데, 어설픈 연출과 어우러져 실소를 금하기 어려웠다. 건물 모양으로 프린팅한 합판으로 대문을 처리한 장면은 언급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다행히 이후 <추노>(2009), <정도전>(2014), <남한산성>(2018)과 같은 웰메이드 사극이 제작된 점은 고무적이었으나, 오히려 2020년대의 사극들은 역덕이자 밀덕인 나를 더욱 참담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이 로맨스물에 사극의 탈을 입힌 작품이라, 고증보다는 영상미에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와중에 제2·3차 여요전쟁을 주제로 한 전쟁 사극이 큰 제작비를 들여 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기대감을 품기 충분했던 이 작품의 정체가 바로 <고려거란전쟁>(2023)이다.
워낙 역사적으로도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다룬 작품은 이전에도 많았다. 대표적인 작품이 <천추태후>(2009)였는데,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묘사한 방식이나 전투 장면, 무구의 고증 등 모든 면에서 나쁜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곰을 풀어 공격하는 거란군이나 직접 무장한 태후가 수많은 정예병을 제압하는 광경, 뜬금없이 등장한 신라 부흥 세력, 국적 불명의 갑옷까지… 너무나 크게 낙담한 나머지 <고려거란전쟁>에 걸 기대마저 모두 사라진 후였다. 270억원이라는 제작비 소식에도 상심한 채로 부디 <연개소문>보다 낫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 <고려거란전쟁>이 2020년대에 들어 이어져온, 사극의 고증에 대한 나의 갈증을 말끔히 해결해줄 수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가장 눈에 띄었던 장면은 전쟁에 앞서 군수물자를 마련하고자 관료, 즉 실무진들이 백방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었다. 이전의 사극에선 “출정하시오!”라는 장군의 명령 한 마디에 대번에 수만의 대병이 만들어지곤 했고 이는 비현실적이었다. <고려거란전쟁>에선 전쟁을 준비할 때 30만이라는 구체적인 목표 숫자를 산정하고, 중앙집권 체제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지방 호장층을 압박해 징집했으며, 그들을 3개월간 먹이기 위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 뒤 동원령을 내렸다. 이 모든 장면이 내 안의 역사적 상상력을 상쾌하게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6화에서 그려진 홍화진에서의 전투는 기존 전쟁 사극의 문법을 모두 깨버렸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야말로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이전의 사극에서 엑스트라들은 맥없이 날아오는 유시(流矢)를 맞고 픽픽 쓰러지곤 했다. 그러나 <고려거란전쟁>에서는 맞으면 두개골이 깨질 것처럼 빠르고 맹렬하게 날아다니는 화살들을 치열하게 그려냈다. 그중에서도 밀덕들이 가슴을 부여 쥐며 감동한 장면은 극 중 양규(지승현 분)가 활을 쏘는 멋들어진 자세였다. 양궁이 아닌 국궁의 전통 사법에 따라 시위를 당기고 깍지를 낀 손으로 시위를 돌려 잡고 쏘는 장면에선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효시(嚆矢, 소리를 내는 화살)로 집중사격 위치를 지정해주는 장면이나, 투석기의 사정거리를 조절해가며 발사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이 정도로 고증이 잘된 사극이 있었나? 놀라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투석기만으로 성을 함락하지 못하는 점을 보여주며 산성이 가진 무시무시한 방어력을 묘사한 부분도 탁월했다. 양규가 낀 깍지에 거란군이 쏜 투석기의 화염이 비치는 연출에는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무구의 고증에도 신경을 쓴 것이 느껴졌다. <근초고왕>(2010)에 등장한 고구려군의 찰갑을 기본 베이스로, 송나라 양식의 투구를 씌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찰갑이라는 갑옷은 삼국시대 이후 큰 변화가 없었다. 때문에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지만, 삼국시대의 갑옷 형태를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 아주 적절한 고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창과 유사한 창이 등장한 점도 흥미로웠다. 말을 타며 쇠뇌를 쏘는 모습도 신선했다.
도검의 고증은 아쉬웠다. 경상북도 예천군에 위치한 개심사지 오층석탑에 있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의 사례처럼, 고려시대 전기의 환두대도에는 검사의 손등을 보호하기 위한 코등이가 있다. 찰갑과 달리 도검은 시대에 따른 변화상이 뚜렷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보완돼야 할 부분이다. 다만 고려시대에 사용된 도검류는 극히 일부만 실존하고 있고, 이 칼들은 같은 KBS 대하드라마 전작인 <근초고왕>이나 <대왕의 꿈>(2012) 등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대거 제작되었을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재활용해야 하는 등의 사연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삼국시대에 사용되었던 충각부주나 종장판주를 착용한 고려 병사들의 모습도 눈에 띄긴 했다. 종장판주는 삼국시대에 널리 쓰였으니 그렇다손치더라도, 충각부주는 많은 병사가 쓸 정도로 흔한 투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내용이 <고려거란전쟁>이라는 사극의 퀄리티를 낮춘다고 보지는 않는다. <주몽>(2006), <선덕여왕>(2009), <천추태후>에 등장한 국적 불명의 ‘판타지 갑옷’이 등장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의 시각적 만족감이 매우 높았다. 현재까지 공개된 내용을 기준으로 종합하자면, <고려거란전쟁>의 무구 고증은 아주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전의 사극처럼 허탈함을 안겨주는 수준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해 최대한의 고증을 적용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사실 전쟁 사극이 역덕과 밀덕을 완전히 만족시키기란 불가능하다. 그쯤 되면 ‘사극’이 아닌 ‘다큐멘터리’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영리가 목적이 되는 영상물의 특성상, 사극은 고증과 재미 사이 절묘한 절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고려거란전쟁>은 이 균형을 잘 이루며 극을 이끌어왔다. 32부작까지 이어질 <고려거란전쟁>의 클라이맥스는 귀주대첩이 될 것이다. 벌써부터 귀주대첩이 어떻게 전개되고 그려질지 두근거린다. 귀주대첩은 한반도 역사에서 극히 드문 대규모 회전으로, 1만이 넘는 중장기병과 대규모 검차부대의 활약으로 적을 포위 섬멸한 전투였다. 동북아시아 최강의 군대와 맞붙게 된 절체절명의 순간, 마치 <반지의 제왕>(2004)의 로한 기병대처럼 적의 후방에서 등장해 섬멸에 나서는 고려군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이 밀려온다.
이쯤 됐으니 잠시 자기 프로모션의 시간을 허락해주시길. <고려거란전쟁>의 고증도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역덕들과 밀덕들의 마음을 흔들 만한 다른 콘텐츠도 있다. 고려가 아닌 조선을 배경으로 국립진주박물관이 준비한 유튜브 콘텐츠 ‘화력조선’이 바로 그것이다. 화약 무기와 전쟁사 연구 성과를 반영한 <화력조선> 시리즈를 비롯해 단편영화 <사르후>와 <정주성>까지, 고증에 집중하면서도 재미도 챙기고자 노력했다. 총 조회수가 900만 회에 육박하는 등 국립문화기관에서 전례가 없는 기록도 세우고 있으며, <고려거란전쟁>만큼 웬만한 밀덕과 역덕들 사이 ‘맛집’으로 불리고 있다. 밀리터리와 역사를 사랑한다면 큰 관심 부탁드린다. ‘덕업일치’를 이룬 밀덕이자 역덕이 보장한다.
 
김명훈은 국립진주박물관의 학예연구사다. <화력조선>을 기획했다. 

Credit

  • EDITOR 김현유
  • WRITER 김명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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