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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 시대의 야구

도파민 시대의 야구

프로필 by 박세회 2024.08.03
20대 회사 후배는 부산 출신이다. ‘찐’ 야구팬은 아니지만 가끔 야구를 보러 간다. 최근에도 주말 고척 스카이돔에서 하는 롯데 자이언츠 경기를 보러 갈까 했었다고 한다. 후배에게 왜 야구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작년부터 야구장 다시 가기 시작했는데 올해는 더 가는 것 같아요. 서울 온 지 9년 됐는데 야구장 가서 다 같이 롯데 응원하면 옛날 생각, 고향 생각도 나고 그래요. 도파민도 계속 나오고.”
그렇다. ‘도파민’이다. 예전에는 ‘아드레날린’이라고 한 듯한데, 요즘은 ‘도파민’으로 표현한다. 흥분되고, 자극되는 그 무엇. 도파민 시대에 프로야구만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도 없다. 야구장은 도파민이 꽤, 아주 많이, 필요 이상으로 넘쳐나는 곳이다. 한 경기에 한 골도 터지지 않곤 하는 축구, 정말 ‘역대급 경기’라고 해봐야 7골 정도가 한계 쾌락선인 축구와 야구는 전혀 다르다. 생각해보자. 야구장에선 안타 하나, 삼진 하나에 함성이 터진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수비할 때만 해도 최소 27번의 도파민 타임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다른 스포츠와 달리 1주일에 하루(월요일)를 뺀 6일 동안 경기를 치르고, 시즌이 6개월 이상 지속된다. 최대 인구 밀집 지역들에서 야구장으로 향하는 접근성도 좋다. 놀거리, 볼거리 적은 비수도권 지역에서 야구장은 이제 하나의 도파민 팟이다. 한 번 중독되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왜 하필 여성 야구팬만 유독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냐는 거다. 프로야구 티켓 판매 대행사인 인터파크티켓(두산 베어스·키움 히어로즈)과 티켓링크(롯데 자이언츠, NC 다이노스 제외 나머지 6개 구단·롯데 NC는 자체 발매)의 3시즌 통계(2022∼2024년 6월 16일)를 살펴보면, 인터파크티켓의 경우 3년 내내 여성 구매자 비중이 남성 구매자보다 높았다. 여성 구매자 중에서도 20대 비중이 42.3%→47.8%→47.9%로 점점 증가했다. 티켓링크에서도 여성 구매자 중 20대 여성 비중은 최근 3년간 비약적(36.4%→37.8%→41.4%)으로 늘었다.
‘2023년 프로스포츠 관람객 성향 조사 보고서’를 봐도 프로야구 고관여팬(관심 있는 리그의 지난 시즌 우승팀과 응원구단의 선수를 모두 알고 있고 유니폼을 보유한 응답자) 6316명 중 63.8%가 여성이었다. 여대 커뮤니티에 함께 야구 볼 이들을 찾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비수도권 응원 팀의 서울 원정 때 티켓 예매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LG 트윈스 연간 팬클럽(연회비 2만원·선예매권이 주어진다)에 가입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차명석 LG 단장은 20대 여성 팬이 늘어난 이유에 대해 “프로야구 중계가 네이버 등 포털에서 티빙으로 넘어가면서 2차 가공을 할 수 있게 된 게 가장 큰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프로야구는 10년 넘게 네이버, 다음, 아프리카 TV 등에서 무료 중계됐다. 그런데 몇 년간은 유튜브와 동영상 경쟁이 붙으면서 경기 2차 가공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KBO 사무국을 포함해 각 구단 자체 유튜브 채널에서도 경기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각 팀의 자체 카메라는 경기 모습은 생략한 채 더그아웃 선수들만 비춰줬다. 그라운드 실시간 상황이 그저 자막으로만 설명되니 당연히 재미는 반감됐다.
티빙은 연간 450억원에 가까운 중계권료를 내면서 2차 가공을 전면 허용했다. 팬들은 개인 SNS 등에 경기 영상을 자유롭게 올릴 수 있게 됐고, 이는 MZ세대의 온라인 놀이터인 SNS를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야구는 재밌다’라는 인식이 생기며, ‘야구장 한 번 가볼까’라는 호기심을 유발했다. 코로나19 거리두기로 집합 금지 등을 한동안 겪은 터라 보복 심리까지 섞이며 야구장 발길은 이어지게 됐다. 프로야구뿐만 아니라 프로축구, 프로농구, 프로배구까지 관중 수는 코로나 19 이전과 비교해 늘어났다. 마스크에서 해방된 기분을 경기장에서 마음껏 소리치는 것으로 표현하는 셈이다.
게다가 올해 야구가 재밌다. 프로야구의 경우 올해처럼 순위 싸움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는 시즌이 흔치 않다. 1위 팀도 안심할 수 없고, 10위 팀도 포기할 수 없다. 전력 평준화 속에 공인구(공식 경기 공) 반발계수가 높아지면서 홈런 등 장타가 많이 나와 공격 야구가 활발해져서 도파민 타이밍의 빈도도 늘었다. 6월 25일 열린 경기에서는 KIA 타이거즈가 14-1로 앞서다가 롯데에 따라잡혀 결국 연장 12회 끝에 15-15로 경기가 끝나기도 했다. 롯데 팬들은 이날 흡사 약물에 취한 듯한 기분으로 하루의 마지막을 보냈을 것이다. 스트라이크와 볼을 기계가 판정하는 자동볼판정시스템(ABS)이 전 세계 최초로 1군 경기에 도입되면서 경기가 좀 더 공정해진 면도 있다. 인간 심판이 아닌 로봇 심판이 기계적 판정을 내리면서 경기 전후로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잡음이 없어졌다.
야구 인기가 올라가면서 KBO리그는 전반기 마지막 날인 7월 4일 600만 관중을 넘어섰다. 전반기에 600만 관중을 돌파한 것은 역대 처음이다. 순위 싸움이 계속되면서 10개 팀 모든 팬이 가을야구에 대한 포기 없이 야구장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KBO리그 역대 최다 관중은 2017년 기록한 840만688명. KBO는 900만 관중을 넘어 1000만 관중까지도 겨냥하고 있다. 더불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야구장 갈 때는 응원 저지’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유니폼 판매 또한 사상 최대치에 이르고 있다. 각종 굿즈 또한 내놓는 즉시 팔린다. 덕질에는 지갑 열기를 주저하지 않는 20대 여성 팬층의 화력은 대단하다. 구단 모두 올해 역대 상품 매출 최고치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유사 이래 처음은 없으니, 돌아보면 1970년대 고교야구 흥행 시절에도 여성 팬은 꽤 많았다. ‘박노준 오빠’ ‘류중일 오빠’가 있던 시기였다. 1980년대 전후로 고등학교를 다닌 한 신문사 여성 선배는 “국내 아이돌이 없던 때라 당시 중고교 여학생들은 레이프 개릿 같은 외국 가수를 덕질하거나 스포츠 스타를 좋아하거나 두 부류였다. 1981년 봉황대기 결승전 때 박노준(당시 선린상고)이 슬라이딩을 하다가 발목을 다쳐 병원에 실려갔는데 저녁 9시 메인 뉴스에도 나오고 여학생들이 병원 앞으로 몰려가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라고 귀띔했다.
1990년대 중반 프로야구 인기몰이를 한 이들도 여중·고생이었다. 야구장 안팎으로 교복 입은 여학생이 넘쳐났다. 생소했던 관중석 플래카드가 전면에 등장한 것도 이때쯤으로 파악된다. <한국야구사>(KBO 편찬)는 당시를 이렇게 묘사한다.
“1994시즌 프로야구판에 불어닥친 ‘X세대’의 돌풍은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LG 신인 3총사(김재현, 유지현, 서용빈)와 롯데의 주형광, 한화의 박지상 등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들은 3할대 고감도 타격(서용빈, 박지상)과 신인 최초의 ‘20-20 클럽’ 가입(김재현), 최연소 완투-완봉승(주형광) 등 뛰어난 성적을 올리면서 스탠드에 ‘오빠 동아리’를 불러모았다. 솔직한 자기표현과 철저한 자기 관리, 신세대다운 신선한 용모로 젊은 팬들을 열광시키며 올 시즌 전국을 자신의 무대로 만들었다.”
‘오빠 동아리’에 지분이 있는 김재현 현 SSG 랜더스 단장에게 물어보니 당시 1주일 동안 그에게 날아온 팬레터만 마대 자루 한가득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 극성 여고 팬들이 선수단 숙소까지 잠입하는 일도 있었다.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지 않던 시대에 그들의 ‘우상’은 스포츠 선수들이었던 셈이다. 프로야구가 1995년 최초로 관중 500만 시대를 열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여성 스포츠 팬들이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1990년대에는 X세대가, 2020년대에는 MZ세대가 야구선수를 덕질하고 있다. 다만 ‘재현 오빠’가 아니라 ‘우리 동희’로 호칭이 바뀌었고, 플래카드와 함께 대포 카메라가 등장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프로야구 인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여대생 조카만 봐도 그렇다. 조카는 한때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의 열성 팬이었다. 중학생 때는 월요일마다 혼자서 2군 경기가 있는 고척돔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히어로즈 선수들이 불미스러운 일로 피소를 당한 뒤 야구장 발길을 완전히 끊었다. 회사 후배 한 명은 롯데 자이언츠의 일부 선수들이 경기 전날 치어리더 등과 단체로 술을 마셨다는 사실에 엄청난 실망감을 느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특히 롯데 선발투수 나균안이 선발 등판일 새벽까지 술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에는 분노를 쏟아냈다. 실망과 분노가 쌓이면 팬들이 야구와 멀어질 것은 자명하다. ‘빠’가 ‘까’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남성 팬보다 여성 팬이 도덕적 잣대에 더 엄격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팬데믹 이후의 버블에 잠시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가 유행할 때 사람들은 ‘밖’을 갈구했다. 사회적 거리 강요로 ‘함께’하는 것에 대한 갈망도 컸다. 고약한 바이러스 시대는 종식됐고, 살아남았음을 느낄 수 있는 해방 공간으로 탁 트인 야구장만 한 곳도 없을 터. 모두 다 같이 “무적 LG”를 외치면 ‘무적’이 될 것 같고, “최강 한화”를 외치면 ‘최강’이 될 것 같은 도파민 과다의 기분을 어디서 느껴보겠는가. 2024년, 20대 여성의 ‘야’심으로 그라운드가 불타오른다. 하지만 그 ‘야’심이 버블로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기 위해서는 경기력 향상도 동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팬들은 결국 본연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선수의 모습에 응원을 보내기 때문이다. 물 들어왔을 때 야구를 좀 더 잘해보란 말이다.

김양희는 <한겨레> 스포츠 팀장이다. <대충 봐도 머리에 남는 어린이 야구 상식>, <인생 뭐, 야구>를 썼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양희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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