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D
와인 생활자의 수기
와인 생활자의 수기
전체 페이지를 읽으시려면
회원가입 및 로그인을 해주세요!

지난 7월 초, 돔 페리뇽의 리벨라시옹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찾았을 때 이 수업의 중요도를 실감했다. ‘리벨라시옹’은 돔 페리뇽이 한 해에 한 번 전 세계 VIP들과 자신들의 커뮤니티 셰프들(각 국가를 대표하는 셰프들) 그리고 주류를 다루는 기자들을 한 도시에 불러 모아 그해에 출시하는 샴페인을 테이스팅하는 자리다. 엄청난 장소(종종 도시에서 가장 큰 사찰이나 유럽의 고성 등)에서 자못 엄숙하게 진행되는데, 그곳에 초대된 저널리스트 중 와인 전문지 소속 기자들은 하나같이 이 WSET 코스를 수료했다. 이 시험을 준비하며 배우는 과정이 세계 다수의 와인 애호가들이 사용하는 와인 평가의 메소드가 되고, 그 와인 평가에 사용하는 단어 표현의 기준이 되는 것만은 확연한 사실인 셈이다.
문제는 이 과정을 들으면서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안 그래도 와인을 좋아했던 터라, 이 과정을 듣다 보니 와인에 대한 생각들이 나의 영혼을 완전히 잠식한 나머지 어디에서나 와인 생각만 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나는 지난 7월 소맥을 마시자는 친구들을 이끌고 ‘안 비싸 안 비싸’를 외치며 어느 와인바에 가서 알바리뇨(스페인의 화이트 와인 품종)를 시켰다. 알바리뇨? 알바리뇨라면 할 말이 한가득이었다.
“스페인은 포도나무가 정말 자라기 힘든 환경이야. 리오하(직사각형 모양인 스페인의 국토 중 북부 거의 정중앙에 있다)의 강우량은 연간 400mm 정도인데 그렇게 비가 안 온다는 부르고뉴도 600~700mm는 오거든. 스페인의 최고 프리미엄 산지로 불리는 프리오랏은 연간 강우량이 200mm 정도지. 게다가 높은 산에 있는 계단식 논이 대부분이라 물을 끌어다가 관개를 할 수도 없어. 포도나무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긴 하는데 키가 60cm 정도야.”
친구 중 하나가 말했다.
“아니, 뭐야 와인 하나 설명하는데, 스페인 기후가 왜 나와?”
워낙 성미가 급한 친구다. 빨리 짠이나 하고 마시고 싶었겠지만, 내겐 해야 할 설명이 남았다. ‘다 필요한 얘기’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다. 기자 혹은 에디터로 불리는 우리는, 워낙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그런 에디터들 중에서도 나는 꽤 악명 높은 중증 설명증 환자로 심지어 기자들이 각종 행사에서 내 옆자리에 앉기를 피할 정도다. 그런데 와인 수업까지 들었으니, 그리고 하필 친구들을 만나기 바로 전 주에 스페인 와인을 공부했으니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정말 스페인에는 포도나무가 자라기 힘든 지역이 너무도 많다. 그런 것도 모르고 마시기엔 와인이 아깝지 않은가? 스페인의 기후에 대해 아주 잠시 얘기해주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급기야 나는 서버에게 팬을 빌려 냅킨에 스페인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요기 요기. 스페인에서도 우리가 보통 ‘메세타 센트럴’이라고 묶어 이야기하는 마드리드가 있는 이 지역, 리베라 델 두에로와 루에다가 있는 여기가 아마 생존의 조건으로 따지면 가장 가혹할 거야. 해발 1000m에 달하는 고원 지대라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연중 강우량은 극도로 적거든. 그런 곳에서 와인을 기르는 게 대단하지 않아?” 여기까지 얘기하자 다른 친구가 대거리를 해준다. “힘든 조건에서 자라야 포도가 더 맛있다는 얘기 하려는 거 아냐?” 설명증 환자에게 누군가가 던져준 질문은 마치 투플러스 등심 한판에서 아무도 모르게 잘라낸 새우살이나, 잘 차려 나온 감성돔 접시에서 빛나는 뱃살 같은 것이다. 항상 반갑고 소중하다.
“그치 그치! 그래서 스페인의 포도나무들은 키가 작아. 포도나무는 물이 풍부하고, 온도가 높고 햇살이 따가우면 과실이 아닌 줄기와 이파리를 키우지. 그런데 물이 너무 없고 햇살은 강한데 온도는 낮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더 맛있는 포도를 만들어. 더 달고 시큼하고 먹음직해 보이는 열매를 주렁주렁 만드는 거지. 그래야 동물들이 그 열매를 먹고 다른 곳에 배변을 할 테니까.”
포도나무는 실제로 가혹한 환경 속에서 자라야 성생식에 전력을 다해 맛과 향이 농축된 좋은 열매를 맺는다. 스페인의 유명 산지들인 리베라 델 두에로, 리오하, 프리오랏 등의 유명 산지들은 모두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의 가장 북서쪽 꼭짓점, 대서양에 바짝 붙어 있는 갈리시아 지역의 산지인 오늘의 주인공, 알바리뇨의 산지 ‘리아스 바이샤스’는 다르다. 이곳은 강우량이 1500mm나 된다. 그래서 오히려 습기 때문에 포도에 곰팡이가 필 것을 걱정해야 한다. 프리오랏 지역의 포도나무가 50cm밖에 되지 않는 고목들이었다면, 이곳의 포도나무들은 한국의 등나무처럼 초록 줄기 상태로 쑥쑥 자란다. 주로 ‘알바리뇨’ 품종을 기르는 농부들은 심지어 포도나무가 쑥쑥 자라라고 ‘퍼걸러’(Pergolas)를 설치해준다. 퍼걸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장치다. 아주 오래전 놀이터나 노인정 옆에 있던 벤치 위에는 등나무 줄기가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둔 시멘트, 혹은 철재 뼈대들이 있었다. 바로 그렇게 포도나무 덩굴이 타고 올라가 열매를 아래쪽으로 떨어뜨리며 자랄 수 있게 만들어준 장치가 퍼걸러다.
“그 왜 있잖아. 놀이터에 가면 파이프를 구름다리처럼 세워둔 등나무 벤치들 말야. 그렇게 키워서 알코올 도수도 낮고 상큼하고 가볍고 쉽게 마실 수 있게 양조한 와인이 바로 이 리아스 바이샤스의 알바리뇨야.”
여기까지 설명하자, 참고 잘 들어주던 마지막 친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우리가 시킨 와인이 어떤 와인인지 물었는데, 스페인 기후부터 시작해서 포골라? 퍼걸라? 그거까지 가는 건 무슨 경우야?”
그런데 어떻게 하나. 스페인 전체의 기후를 설명하지 않으면 대서양 연안에 있는 서늘하고 습한 리아스 바이샤스 기후의 특이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아직 나의 설명은 다 끝나지 않았다. “근데 있잖아 정말 재밌게도, 이 알바리뇨를 포르투갈에서도 키우거든? 그것도 리아스 바이샤스랑 딱 붙어 있는 비뉴 베르데라는 와인 산지에서.”
나는 다시 냅킨에 그린 지도를 꺼냈다. 그러니까 리아스 바이샤스 지역 바로 남쪽에 붙어 있는 포르투갈의 최북단인 비뉴 베르데에서도 알바리뇨 품종으로 화이트를 만들기는 한다. 그러나 두 와인의 특성은 완연하게 다르다. 비뉴 베르데는 알바리뇨를 덩굴 지지대로 캐노피처럼 띄워 기르는 퍼걸러 방식이 아니라 포도송이를 빼고는 모든 가지를 수직으로 다 쳐버리는 ‘단과지 가지치기’ 방식으로 키운다. 쉽게 얘기하면 포도나무의 생장에 관여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이렇게 기른 알바리뇨는 리아스 바이샤스의 그것보다 훨씬 풍부한 미네랄과 향미 물질을 품은 풀보디의 화이트 와인으로 탄생한다. 게다가 산미도 높아서 알코올 농도가 최대 14%에 달하고 와인을 뽑아내도 밸런스가 깨지지 않는다.
“기가 막히지? 와인 산지가 남북으로 붙어 있고 기후도 비슷하고 품종도 같은데, 이렇게 다른 스타일의 와인이 나온다는 게 너무 재밌지 않아?”
그런데 그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비뉴 베르덴가? 그게 그…뭐냐…그린 와인 아닌가? 그린 와인은 병이 약간 초록색이던데.”
아…비뉴 베르데(Vinho Verde)를 그대로 번역해 그린 와인이라 부르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그린 와인의 병이 초록색이라는 얘기까지 참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와인 생산지로서의 비뉴 베르데와 그 이름의 연원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분이 풀릴 만큼 설명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친구들은 마치 교회 다니는 이모가 새벽 예배에서 방언하는 모습을 처음 본 조카처럼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와, 재밌다.”
모두 입으로는 재밌다며 공감해주는 척했지만, 눈은 전혀 재밌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친구들은 이내 미국 대선과 한국 주식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주 살짝, 진심으로 내게 질려버린 것 같았다. 친구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척하면서도 머릿속에는 수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건 마치 외톨이가 된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 같은 상황이 아닌가? 와인 생활자의 수기라도 써야 하나?’ 그렇게 이 글의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두서 없이 기나 긴 내 와인 얘기에 아주 약간 질려버렸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저 두서 없이 떠들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살짝 내 눈을 피하려는 친구들과 몇 번 기싸움을 하다가, 결국 나는 카드를 들고 뛰어가 계산을 해버렸다. 모르는 척 다 보고 있던 친구들은 내가 돌아가자 다시 화기애애하게 나를 맞아줬다. 소맥을 먹고 싶어 하는 친구들을 끌고 와인바에 갔다면 당연한 예의고 해피 엔딩과 사회 상규를 위한 콜래트럴 데미지다. 내 설명을 들어준 값은 내가 치르는 것. 그것이 설명증 환자가 지켜야 할 도리다. 그런데 혹시 당신이 이 설명증 환자의 와인 이야기가 영 재미없었던 것만은 아니라면? 당신도 어쩌면 우리 쪽에 가까운 사람일지 모르니 일단 와인 수업을 들어보기를 권유한다.
박세회은 <에스콰이어> 코리아의 피처 디렉터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노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다이닝, 와인, 위스키, 아트 및 문화 전반을 다룬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박세회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CELEBRITY
#리노, #이진욱, #정채연, #박보검, #추영우, #아이딧, #비아이, #키스오브라이프, #나띠, #하늘, #옥택연, #서현
이 기사도 흥미로우실 거예요!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에스콰이어의 최신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