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숏폼은 디지털 시대의 바쿠스다

숏폼 중독을 알코올 중독처럼 다뤄야 하는 이유.

프로필 by 박세회 2025.01.29
오랜만에 떠나는 춘천 출장 강연. ITX를 타고 춘천으로 향하는 길, 약 20년 전 친구들과 ‘춘천 가는 기차’라는 노래에 반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역으로 향했던 추억이 생각나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간다. 기차라면 낭만, 낭만이라면 역시 독서. 평소엔 손이 잘 가지 않던 고전소설을 일부러 들고 와 펼쳐 들어보지만, 그것도 잠시, 5분도 채 못 가 울린 알림에 손이 다시 스마트 폰으로 향한다.
알림만 확인하고 다시 책을 읽어야 하는데, 어느새 얼굴도 모르는 인스타 친구의 새 사진 업데이트를 넘기다, 자연스럽게 짧은 동영상 플랫폼인 ‘릴스’ 페이지로 넘어간다. 예쁜 아기가 재롱 피우는 영상에서 대학 시절 묵찌빠를 전공했다던 뮤지컬 배우의 재치 있는 공연으로 넘어갔다가 에스파 카리나의 도발적인 직캠으로 이어지고, 다시 평소 때 내가 한 번 정도 쿠팡에서 검색해봤던 기계식 키보드의 리뷰로 넘어간다. 이런, 그러는 사이에 벌써 곧 있으면 남춘천이다. 슬슬 내릴 준비 해야지. 비어 있는 옆좌석에 덩그러니 놓인 <안나 카레니나>는 오늘도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을 비교하는 제사만 읽힌 채 다시 가방 속으로 사라진다.
평소 늘 갖고 싶어 하던 1시간의 텅 빈 자유는 결국 걸그룹과 남의 집 아기와 뮤지컬 장면 일부로 채워졌다. 지루했냐고? 전혀. 릴스를 넘길 때마다 내 뇌에는 마치 도파민이 사이다 탄산처럼 순간 자잘하게 차오른다. 이 도파민은 정말 사이다 탄산 거품과도 같이 금방 톡 쏘면서 나타났다가 몇 초 만에 사라져 그 3분의 동영상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다음으로 다음으로 손가락을 움직인다. 지루할 수가 없다. 손가락을 넘기는 것만으로 아무런 수고 없이, 심지어 집중할 필요도 없이 다음 도파민이 제공된다. 그러나 그 1시간의 경험은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 1시간 동안 뭘 봤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너의 인생의 1시간을 그런 식으로 채운 게 자랑스러웠냐고 물어보면 나는 더욱더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옥스퍼드대학 출판부는 2024년 ‘옥스퍼드 올해의 단어’로 ‘뇌 썩음(brain rot)’을 선정했다. 이 단어는 저품질 온라인 콘텐츠를 과도하게 소비하여 정신적, 인지적 상태가 저하되는 현상을 뜻한다. 옥스퍼드 사전을 펴내는 캐스퍼 그라스월 회장은 ‘뇌 썩음’을 디지털 환경에서 우리가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단어라 지칭했다. 내가 춘천 가는 기차에서 걸그룹과 남의 집 아기의 재롱과 짧은 뮤지컬 장면을 멍하게 탐닉하는 그 시간은 옥스퍼드 방식으로 말하면 ‘뇌가 썩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조금 석연치 않은 생각도 든다. 전 가정에 TV가 보급된 이후로 TV는 국민들의 레저에 많은 비중을 차지했고, 그 당시에도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이 TV로 보는 수동적인 경험만 하지 활자를 조금도 읽지 않는다고 혀를 끌끌 차시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상이라는 새로운 형식과 미디어라는 기기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꽃피웠다. 어른들이 기거하는 안방의 TV도 어른들이 잠들 때까지 꺼지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숏폼 중독에 대해 옥스퍼드가 걱정하는 것도 단지 새로운 기술에 대한 기성세대의 과도한 걱정에 불과할 뿐일까, 아니면 정말로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콘텐츠 소비가 우리의 사고와 감정, 심지어 인간성을 변형시키는 시대의 변곡점에 서 있는 것일까?
이를 고찰하려면, 우리가 무언가를 ‘추구하는’ 과정이 뇌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인간과 동물의 감정 시스템에 대해 연구한 야크 판크세프(Jaak Panksepp)라는 신경과학자가 있다. 그는 동물도 고통스러우면 도망가고,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는 등 인간과 같은 감정의 맥락을 보이는 것에 주목하여 모든 포유류가 세상에 대하여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공통의 방식인 ‘회로’에 대한 이론을 주장했다. 한마디로 그 세세한 대상은 다를지언정 모든 포유류는 이 ‘회로’에 따라 어느 정도의 공통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뇌의 원초적인 감정 시스템 중 하나로 ‘추구(seeking) 회로’를 제시했다.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본능적으로 존재하는 신경 네트워크인 이 ‘추구 회로’가 자극이 되면 우리는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무언가를 탐색하고, 배우고, 새로운 자극을 찾는 강렬한 동기를 느끼고, 그 목표가 이루어졌을 때 쾌감을 느낀다. 이 쾌감은 우리의 행동을 지속시키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쾌감은 단지 그 순간의 짜릿하고 좋은 느낌만을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기대’라는 개념도 포함된다. 추구 회로는 실제로 보상을 얻기 전, 즉 ‘기대’ 상태에서 활발하게 작동한다. 새로운 것을 추구할 때 느끼는 설렘과 흥미가 바로 이 회로의 작동 결과인 것이다. 우리에겐 새로운 것을 원하는 강렬한 ‘욕구’가 있고, 그것을 탐색하면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라는 좋은 감정을 느끼고, 목표를 달성하면 ‘쾌감’이라는 짜릿한 보상을 얻는다.
그러나 세상에는 종종 노력에 비해 지나치게 큰 쾌감을 주는 물질이나 행위가 있다. 익히 알려져 있는 알코올이나 마약과 같은 중독물질이 그것이다. 이러한 물질들은 전혀 다른 노력 없이 섭취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보상 회로를 만족시킨다. 사실 회로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회로 자체를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회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이 하는 행동을 얻기 위해서다. 좀 더 쉽게 얘기하면, 인간을 생존케 하는 것은 ‘오르가슴’이 주는 쾌감이 아니라 그 오르가슴을 얻기 위해 신체를 단련하고,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교육받고, 사교 기술을 발전시키는 등의 목표에 이르기 위한 과정에서 생겨난 중간 부산물들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중독물질들은 쾌감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중간 부산물들을 전부 생략하고 회로를 자극시킨다. 오르가슴을 바로 제공하는 스위치가 있다면 모든 인간은 섹스를 위해 매력적인 개체가 되기 위해 힘쓰기를 중단하고, 대신 방 안에서 퇴화된 형태로 그 스위치만을 계속 누르고 있을 것이다. 종종 미디어에 회자되는 ‘음란물 중독’이 그와 매우 비슷한 예다.
이야기를 다시 춘천 가는 기차로 돌려보자. 이 숏폼 동영상을 보는 행위를 통해 내가 잃은 것과 얻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내가 선택한 <안나 카레니나>를 천천히 읽으며, 안나의 어리석고도 인간적인 운명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 있었다. 톨스토이가 유려하게 풀어내는 내러티브 기법과 플롯의 연결을 감상하고, 그로 인해 증폭된 아름답고 처절한 이야기의 맥락을 느끼며 이를 나의 사고와 삶의 경험에 녹여낼 수 있었다. 심지어 나는 그 과정에서 긴 서사가 주는 강렬한 쾌감과 책을 읽기 전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었다는 도덕적 충족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감상은 톨스토이가 제공한 콘텐츠를 소비하는 소비자 입장의 수동적인 경험이면서 동시에 내가 받아들인 정보들을 나의 뇌 속에서 재창조하는 창조자적 표현의 경험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안나 카레니나를 외면했다. 그 대신 나는 공급자들이 조금이라도 나를 인스타그램 앱에 오래 잡아두기 위해 설계한 알고리즘에 따라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했다. 나를 잡아두기 위해 전력으로 최적화되어 있는 시스템이었기에 그 안에는 어떠한 맥락도, 이야기의 시작도 끝도 읽어낼 수 없었다. 아예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콘텐츠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로 그들이 주는 ‘무언가를 얻었다’라는 탄산 거품과 같은 느낌에 취해 있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그것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소비했던’ 것이다.
과거 TV 시청은 비교적 한정된 프로그램과 정해진 시간대에 따라 이루어졌고, 그 안에서도 특정한 내러티브나 맥락이 존재했다. 책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조차도 특정한 이야기를 따라가며 독자나 시청자로 하여금 몰입과 사고를 요구했다. 반면 지금의 숏폼 콘텐츠는 그 반대다. 그것은 맥락을 요구하지 않으며, 이야기의 시작과 끝조차 희미하다. 단지 자극적인 이미지와 소리로 순간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는 능동적인 참여자가 아닌, 수동적인 ‘스와이퍼’가 된다. 무엇을 볼지 선택하는 것도 더 이상 우리의 몫이 아니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고, 우리의 눈길을 잡아챈다. 중독의 본질이 어떠한 것을 갈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외의 삶의 다른 부분을 지워버린다는 점에 대해서 숏폼 콘텐츠는 충실한 하나의 ‘중독물질’이다. 그 어떠한 것도 새로이 창조해내지 못하고, 심지어 고통조차도 잊어버리게 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는 물질. 술이 그렇듯이, 우리가 그것들을 소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소비되는 것은 우리다.
숏폼 콘텐츠는 때로는 영감을 줄 수도 있다. 예쁜 아기의 웃음소리는 하루의 피로를 덜어줄 수 있고, 뮤지컬 배우의 공연은 새로운 취미를 찾아보게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영감이 ‘지속적인’ 사고나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술을 마시는 쾌감에 중독된 사람이 마라톤의 쾌감에 접근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자극적이고 짧은 콘텐츠를 탐닉하는 데 중독된 사람은 긴 호흡의 경험을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넘기지 못한 나처럼, 우리의 사고도 점점 더 깊이와 길이를 잃어간다.
결국 뇌과학적 입장에서 숏폼 콘텐츠는 새로운 시대의 ‘술’이다. 알코올이 단기간의 쾌감을 주지만 과도한 소비는 중독과 자아 상실로 이어지듯, 숏폼 콘텐츠 역시 즉각적인 도파민 보상을 통해 순간의 만족을 제공하면서도, 우리의 깊이 있는 사고와 창조적 에너지를 점차 잠식시킨다.
고대 로마 신화에서 알코올을 관장하는 신 ‘바쿠스(Bacchus)’는 쾌락과 열정, 그리고 도취의 상징이었다. 그의 축제는 인간에게 현실의 고통과 책임을 잠시 잊게 하고, 본능적인 욕망과 흥을 해방시키는 자리였다. 그러나 바쿠스의 축제가 지나치게 과열되면서 무질서와 혼돈을 불러왔고, 이는 파멸로 이어지기도 했다. 현대의 숏폼 콘텐츠는 마치 디지털 시대의 바쿠스와 같다. 우리를 끊임없이 도취 상태로 몰아가지만, 과잉 소비할수록 사고의 중심을 잃고, 삶의 깊이를 잊게 한다.
판크세프의 추구 회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을 통해 성장하며, 그 과정에서 쾌감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숏폼 콘텐츠는 이 회로를 단순 자극의 반복과 즉각적인 보상에 묶어놓는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점점 피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마치 바쿠스의 축제가 무절제한 도취로 끝나듯, 우리의 추구 회로는 본래의 목적을 잃고 순간의 자극 속에 갇혀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디지털 시대의 바쿠스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뇌 썩음’이라는 말이 단지 과장된 표현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숏폼이 당신을 허비하게 두지 말고 당신이 능동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를 선택해야 한다. 기차에서 짧은 동영상을 넘기는 대신 책에 쓰인 문장을 음미하거나, 창밖의 풍경을 보며 사색에 잠겨보는 것이 좋겠다. 그 문장이 지루하고, 그 풍경이 새롭지 않아도 일단 그렇게 시작해보는 것이다. 너무 판에 박힌 말 같지만, 그것밖에는 답이 없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술을 끊는 것 말고는 다른 답이 없지 않은가.

권순재는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및 치매전문센터장을 거쳐 현재는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의 원장이다.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와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를 발간했고, AI 기반 심리검사센터인 ‘브레인맵 심리검사센터 강남점’을 운영 중이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권순재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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