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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밤 11시까지 술을 마실 수 있는 기본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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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by 박세회 2025.04.07

얼마 전 창원에서 후배 작가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후배는 일 때문에 거제에 거주하고 있던 차였다. 이야기는 꽤나 재미나게 이어졌고, 잘 먹던 후배는 7시가 넘어가자 계속 긴장하며 주문한 메뉴가 언제 나오냐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말을 걸어도 몇 번인가 대꾸가 없었다. 그러다 7시 반이 넘어가자 해탈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술을 털어 넣으며 말했다. “차 끊겼습니다. 어차피 택시 타고 가야 해요.” “막차가 몇 시인데?” “8시인데, 여기서 빨리 가도 8시에는 터미널 못 가요.” 택시비를 머릿속으로 어림셈해도 10만원에 육박할 것이다. 할 말이 궁했지만, 비싼 거 먹으니까 그냥 퉁치자고 했다. 후배는 모처럼 ‘도시’ 구경해서 좋다고 괘념치 말라고 말했다. 식사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는데, 카톡이 왔다. “생각보다 안 나오네요. 7만원.” 식당부터 거제도 집까지 70km 정도를 가야 한다. 그나마 지역 요금이 저렴하다고 서로 좋아했다. 서울이었으면 대충 20만원은 족히 넘었을 거리. 그래도 맛있는 거 먹고 뒷맛이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간신히 버스를 탔더라도 직행 차편이 없어서 경남 진동, 고성, 통영을 다 찍고 돌아 간신히 거제도 끝으로 향한다. 자차로 가면 1시간이 걸릴 거리를 버스로 가면 2시간이 넘는다. 1시간을 줄이기 위해 운전자는 1만원의 거가대교 통행료를 내야 한다. 후배가 낸 택시비 7만원엔, 통행료 1만원이 추가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 어느 낙도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인구 100만의 특례시(창원)에서 인구 25만의 중도시(거제)로 이동하는 일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인구 350만 광역시 부산에서 특례시 창원까지 가는 일은 앞선 사례보다는 수월하지만, 이 역시 등거리인 서울역에서 파주 운정역까지 GTX-A를 타고 가는 일에 비교하면 답답하긴 매한가지다. 부산역에서 창원중앙역까지는 자차 기준 1시간에 톨게이트비를 포함해 약 2만원의 비용이 들고, 서울역에서 파주 운정역까지는 GTX-A 기준 22분에 4450원이 든다. 물론 경남에서 15년 가까이 살다 보니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근데 그러려니 하기 위한 조건이 있다. 바로 자가용이다. 전국 단위 뉴스에서 지방의 교통 이야기가 주로 명절이나 휴가철 도로의 교통체증으로만, 잘 정비되지 않은 도로로만 표현되는 것은 지방에서 살려면 당연히 차가 있어야 한다는 암묵적 전제가 깔려서 가능하다.

저출생 고령화의 지리적 표현의 지방 소멸도 교통 사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차가 있는 기성세대에겐 ‘그러려니’의 문제로 다가오는 것들이, 청년들에게는 불편함을 넘어 고립감을 주고 지방을 탈출할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타 지역에서 진학하는 학생들 중 다수는 경남의 ‘맛집’을 잘 모른다. 부산에 비교하면 맛집이 부족할지 몰라도 창원에도 좀 넓게 보면 옛날 근대도시가 형성되며 일본인들이나 부자들이 먹었던 로컬 스타일 산해진미를 가성비 좋게 만들어 파는 ‘노포’들이 즐비한데, 학생들은 잘 모른다. 다니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데, 반경 20km를 넘어 시계를 벗어나면 저녁을 먹다가 막차를 놓치기 때문이다. 맛집이 있는 지역들은 시내버스의 배차 간격도 1시간을 넘기는 지역들이 대부분이다. 학생들 중에 학교에서 10km가 채 떨어지지 않는 진해의 군항제(벚꽃 축제)에 한 번을 안 가보고 졸업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중산층 이상의 부모가 차를 사준 선후배나 동기가 있으면 그 차를 타고 근교를 돌아다니는 게 운이 좋은 경우다. 광역과 기초를 포함, 모든 지자체가 청년들을 유치하겠다고 안달이지만, 수도권과 부산 정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청년들은 지역 내 이동을 하기도 만만치가 않다. 그런데도 이슈가 되지 않는 이유는 지방이 자가용을 가지고 있는 기성세대에 맞춰서 움직이고 있어서다. 이는 우리가 지방 소멸 문제를 풀 계획이 없거나 여력이 없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래서 나는 20대 후반~30대 초반 미혼 남녀가 밤 11시까지 술을 마시고 대중교통으로 귀가할 수 있는 이동 거리를 통해 특정 지역 광역권의 활력을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서울 홍대-연남동-신촌, 남영동-서울역-퇴계로-을지로, 강남역-신사-압구정에서 술자리를 가졌을 경우 일산, 송도, 파주, 분당, 수원에 사는 청년들은 모두 밤 11시에 광역버스, 지하철, GTX를 활용해 귀가가 가능하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호남으로 가보자. 국제공항이 있는 전남 무안에서 권역의 중심지 광주까지 거리는 터미널 기준 47km인데, 공항에서 광주로 가는 차편을 제외하면 막차는 오후 8시 20분이다. 서울과 수원 사이의 거리만큼 떨어졌을 뿐인데, 차가 없으면 무안에서 저녁만 먹고 일어나야 한다. 술이라도 마시려면 버스터미널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서 1차만 가능하다. 나주혁신도시도 광주로부터 25km 떨어졌을 따름인데, 나주에서 광주로 향하는 막차는 오후 6시 10분이라 광주의 연인은 저녁도 못 먹고 나주에서 일어나야 한다. 물론 기차를 탈 수는 있지만, 기차를 타러 가는 시내버스가 9시면 끊긴다. 이마저도 지역의 거점인 광주와 연결했을 때의 이야기다. 나주랑 무안의 남녀가 만나려면 자차 말고는 답이 없다. 내게 익숙한 창원-거제처럼 광역 내, 권역 내 중소도시 간 연결의 경우에는 막차 시간이 3~4시간이 당겨지고 배차 간격이 늘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심각하게 인지되지 않는 것은 모든 교통정책의 중심이 ‘자가용 보유자’를 중심으로 굴러가기 때문이다.

분명 합리적인 대중교통편이 있다. 각 지방과 서울로 연결되는 교통편이다. 어지간한 작은 도시도 서울로 가는 교통편은 가장 일찍 그리고 가장 늦게까지 존재한다. 교통망 관점에서 어쩌면 경북-충남의 중소도시라면 서울을 중간 거점으로 선택해 기차로 이동하는 게 가장 편할지도 모른다. 아산과 구미의 남녀가 저녁을 먹으며 술을 마시려면 차라리 서울에서 만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청년들은 ‘짜치게’ 지역의 방방곡곡을 살펴보기보단, ‘통 크게’ 서울행을 선택한다. 애향심이 큰 청년들은 취업만 하면 곧장 차부터 산다. 이들이 차량 유지비를 탕진하며 저축이나 투자를 등한시하고, 때로는 날마다 CO2를 배출하며 지구를 괴롭히는 선택은 ‘팔자 좋은 지방 청년’이라는 주홍글씨를 받는다. 팔자 좋은 지방 청년이 아니라 차가 없으면 생활이 너무도 힘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서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얼마 전 영국 매체 <파이낸셜 타임스>에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이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뉴스 자체보다는 그 기사를 실어 나르는 국내 매체들의 반응이 호들갑스러워 재밌었다. 국내 언론이 ‘인구 재앙’ ‘영국 매체도 경고한 한국 제2의 도시’라며 헤드라인을 크게 뽑아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남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오지랖은 우습다. 전남은 이미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부산의 인구는 326만 명인데, 전남 전체의 인구가 170만 명이다. 140만의 광주광역시를 합해도 부산시 하나의 인구보다 작다. 강원도는 광역시도 없어 에누리 없이 150만 명이다. 경상북도를 두고 ‘깡시골’이라고 하지만 대구 경북의 인구는 500만이 넘는다. 서울·경기·인천권역의 인구가 2600만으로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어선 지 오래다. 이런 인구 집중을 해결하기 위해 밤 11시까지 광역권의 중심 지역에서 술을 마시고 대중교통으로 귀가할 수 있는지로 측정되는 활력 요소에 대한 고려가 시급하다.

지방에서는 지자체가 교외의 값싼 땅에 ‘반값’ 혹은 ‘공짜’ 청년주택을 지어도 청년들이 가질 않고, 산업도시에 멀쩡한 제조 대기업 사업장이 있는데도 수도권의 청년들이 도통 입사를 기피하고, 산통이 시작된 임신부가 산부인과 전문의가 있는 응급실을 찾지 못해 헤매는 일. 이것들은 각자 개별의 사건들이 아니라 모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을 타개해보겠다고 더 싸게 주택을 공급하거나, 제조 대기업이 서울에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거나, 지방 공공의료를 강화하겠다고 의대 정원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하니 문제가 풀릴 턱이 없다. 이동권, 사회적으로 교류할 권리부터 출발해 기본권 자체가 지리적 그리고 공간적으로 제약되는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 없이 ‘그러려니’에서 출발해 덧대는 정책들은 괴로워 떠나려는 청년들에게 연고는커녕 반창고 역할조차 못 하는 것이다. 일단 어디에 살아도 적어도 밤 11시까지는 차 없이도 귀가와 다음 날 출근·통학을 걱정하지 않고 교류하고 놀 수 있도록 하게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양승훈은 경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거주지인 서울과 동남권(부산·울산·경남)을 오가며 강의하고, 엔지니어와 도시를 연구한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를 썼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양승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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