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상한 나라의 월드컵

이번 월드컵이 역대급으로 기괴한 대회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

프로필 by 박세회 2026.04.28

축구가 세계 평화에 기여한 사례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좋은 소재다. 제 1차 세계대전 중 잠시나마 참호전을 멈추고 영국군과 독일군이 축구를 즐겼다는 '크리스마스 휴전', 디디에 드로그바의 호소에 코트디부아르 내전이 종식됐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유명하다. 아쉽게도 이번 월드컵은 경우가 달라 보인다. 월드컵을 두 달 앞둔 4월 초, 본선 진출국 이란과 개최국 미국은 전쟁 중이다. 파행을 막으려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눈물겨운 노력이 성공한다면 이란 대표팀은 LA와 시애틀에서 열리는 월드컵 조별리그를 치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이란 응원단까지 미국으로 날아오는 건 불가능하다. 미국이 비자 발급을 불허한 19개 국가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즉 이란은 자국에서 온 응원단 없이 경기를 치러야 한다. 또한 여행자가 미국에 눌러앉는 걸 꺼리는 반이민 기조에 따라 알제리 등 5개 참가국 국민은 최대 1만5000달러의 보증금을 예치해야 미국 비자가 나온다. 통장에 그만한 돈이 없는 사람은 미국 여행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대통령이 적대하거나 깔보는 일부 국가만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훨씬 광범위한 나라의 축구팬들이 미국의 변덕과 보수성 때문에 월드컵을 즐기기 힘들어진다. 이번 대회 개최지는 미국이 아니라 캐나다, 멕시코를 포함한 북중미 3개국이다. 응원하는 팀의 행보에 따라 미국과 옆 나라를 오가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예를 들어 코트디부아르는 필라델피아, 토론토, 다시 필라델피아 순으로 조별리그를 치른다. 문제는 미국이 불법체류자를 근절하겠다며 다수 국가에 1회만 입국을 허가하는 단수 비자만 준다는 것이다. 현재 정책대로면 코트디부아르 관중은 토론토에 들렀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 새로 비자를 받아야 한다. 새롭게 비자를 받기 위해 수고를 들이며 써야 하는 수백 달러는 덤이다. 한국인 응원단들 역시 멕시코에 머무르다가 미국으로 이동해야 할 가능성이 높은데, 미국과 무비자 협정국이라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바로 지난 대회가 카타르 도하라는 한 도시에서 진행됐기에 편하게 경기장 사이를 돌아다녔던 축구팬들에게 도시가 아니라 국가를 넘나들어야 하는 북중미 대회의 불친절함은 너무나 급격한 변화다. 이런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FIFA는 어떤 노력을 했을까. 사실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미국에 살다시피 하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다녔다. 백악관만 간 게 아니라 연방수사국(FBI), 국토안보부(DHS), 법무부, 교통부와 계속 미팅을 가졌다. 개최국 행정부처의 수장을 FIFA 회장이 일일이 만나고 다니는 건 이례적인데, 이 기관들의 공통점은 '국경 혹은 미국 영토 안에서 축구팬을 잡아다 구금할 수 있는 기관'이라는 점이다. 더 큰 분쟁으로 까맣게 잊혔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트럼프가 캐나다, 멕시코와 으르렁거리는 꼴이 월드컵 개최의 큰 걸림돌이었다. FIFA는 제발 대회 기간만이라도 3개의 개최국들 사이를 축구 팬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기를 바라며 움직였던 것이다.

인판티노는 최선을 다했다. 트럼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말이다. 지난해 12월 워싱턴에서 월드컵 조 추첨식을 진행하기 직전 FIFA 평화상이라는 게 신설됐다. 수상자는 행사장에서 당일 발표한다고 했다. 누구나 예상했듯, 초대 FIFA 평화상 수상자로 호명된 이는 트럼프였다. 노벨 평화상을 받지 못해 잔뜩 심통이 난 트럼프에게 나름 국제기구인 FIFA가 평화상을 안기며 알랑방귀를 뀌었다는 건, 농담이 아니었다. 그건 가장 현실적인 전략이었다. 심지어 트럼프의 최애 가수인 빌리지 피플을 불러다 공연까지 시켰다. 그러나 트럼프는 한낱 축구 정치가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다. 지난해 여름 백악관에 유벤투스 선수단을 보내 잘 보이려 했더니 “너희 팀에 여자도 뛸 수 있냐? 여자 뽑아야지?”라며 당시 화제였던 트랜스젠더 선수의 스포츠 참가를 비아냥거렸다. 올해엔 인터 마이애미 주장 자격으로 리오넬 메시가 찾아가자 그를 뒤에 세운 채 “이란, 저항한다면 죽음뿐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국제 정세 때문에 미국 입국이 난해해지고, 미국 내 테러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그렇다면 한국이 주로 머무는 멕시코 과달라하라 지역은 어떨까. 여기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멕시코 주요 도시를 마약 카르텔이 장악했다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월드컵에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다. 지역경제를 좌우하는 수준으로 뿌리내린 카르텔 입장에서 관광 특수는 한몫 잡을 기회다. 그런데 멕시코 정부는 2월 과달라하라 지역 카르텔의 수장 네메시오 오세게라 세르반테스를 사살하는 특수작전을 폈다. 이후 총격전과 폭동이 일어났다. 6월 즈음에는 잠잠해질 가능성이 높긴 하나 정부가 굳이 치안을 악화시킨 꼴이다. 이 작전 역시 미국의 압력 때문에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는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에게 카르텔 소탕 작전에 나서라고 공개적으로 압박을 넣곤 했다.

치안 문제가 대두되기 전에도 이번 월드컵은 풀어야 할 숙제 투성이였다. 역대 가장 더운 월드컵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넓은 나라인 만큼 주별 기후가 천차만별인데, 월드컵은 더운 서부와 남부에서 더 많이 열린다. 1994 미국 월드컵 때 독일 선수들이 40도 더위에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한국이 거의 이길 뻔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그 경기를 통해 댈러스가 얼마나 더운지를 학습했다. 이후 32년 동안 온난화로 미국 연평균 기온이 1.7도 상승했다. 2년 전에는 코파 아메리카가 미국에서 열렸기 때문에 캔자스와 플로리다가 6월에 얼마나 더운지 간접 체감할 수 있었다. 캐나다 대 페루 경기 부심이 탈수로 실신하고, 우루과이 선수 로날드 아라우호가 현기증을 호소하며 교체되기도 했다. 심지어 올해엔 엘니뇨까지 겹칠 가능성도 크다. “기후변화는 사기”라고 외치는 트럼프 행정부 시기지만 실무자들은 엄연히 현실인 기온 상승과 싸우고 있다.

더위에 대처하기 위해 4년 전 카타르는 대부분 경기장에 에어컨을 설치한 바 있다. 이번에 FIFA는 발상을 완전히 바꿨다. 더운 경기에서 제한적으로 시행했던 휴식 시간을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라는 이름으로 정례화하고 전반 22분과 후반 22분에 각각 3분씩 편성하기로 했다. 선수 보호가 명분이지만, 사실은 광고 시간이다. 이건 사실 축구를 4쿼터제로 바꾸는 것이나 다름 없다. 3분 중 얼마나 광고를 할 수 있는지, 광고의 종류는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각국 중계 방송사에 브리핑도 했다. ‘미국 4대 스포츠가 수시로 끊기는 것과 달리 축구는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광고를 삽입하기 어렵다’는 광고주들의 오랜 불만에 마침내 화답한 것이다. 아울러 각국 감독은 일종의 작전타임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하이드레이션 브레이크를 잘 준비해야 한다. 미국의 더위와 상업성이 결합해 축구 경기의 풍경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월드컵은 국경을 넘어 벌어지는 자본의 이벤트다. 국제 이벤트가 늘 그렇듯 문제의 발단도 돈, 해결책도 돈이다. 북중미 개최와 더불어 이번 대회의 가장 큰 화두는 참가팀을 기존 32개에서 48개로 1.5배 늘렸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총 경기가 64경기에서 104경기로 확대됐다. FIFA는 역대 중계권 수익 중 최고액인 39억2000만 달러를 챙길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22년 대회가 11월에 열려 중계하기 불편했다는 방송사들의 항의를 받아들여 이번에는 대회 단가를 동결한 대신, 경기를 늘리는 방식으로 수익을 증대했다. 여기에 미국 스포츠 특유의 ‘시가’ 관중석 가격제를 도입했다. 인기 있는 경기는 입장권 가격이 무한정 오른다. 올해 초 ‘결승전 티켓이 620만 원이나 된다. 카타르 월드컵보다 7배나 비싸다’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런데 4월에 일반인 대상 예매 사이트가 열렸을 때는 1600만원으로 치솟았다.

이쯤 되면 인판티노 회장이 백악관에서 트럼프에게 갖은 치욕을 당하며, 축구팬들로부터 온갖 조롱을 받으면서까지 무리한 대회를 밀어붙이는 이유가 분명히 보인다. 그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부지런히 미국을 돌아다니는 이유는 수조 원이 걸린 사업을 더 크게 확장하기 위해서다. 무리수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2030년 대회는 남미, 아프리카, 유럽을 잇는 3개 대륙에서 개최된다. 대륙 간 순환 개최의 속도를 확 높인 덕분에 2034년 대회를 사우디아라비아에 안겨줄 수 있었다. 2022년 카타르에 이어 단 12년 만에 중동 국가가 또 월드컵을 유치하게 됐으니, 오일 머니가 작용하고 있다는 걸 삼척동자도 짐작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인 축구를 위해 축구 사랑과 애국심으로 뭉친 사람들이 미국에 간다. 이들이 지출하는 막대한 돈은 미국만 살찌게 하지 않는다. 이 돈은 FIFA의 덩치를 키우고, 월드컵의 상업화를 가속화하는 연료가 될 것이다.


김정용은 축구 전문 매체 '풋볼리스트'의 취재팀장이다. 축구에 대한 책 <프란체스코 토티> <데이비드 베컴> 등을 썼다. 유로, 월드컵, 클럽월드컵, AFC와 UEFA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현장 취재했다.

Credit

  • EDITOR 박세회
  • WRITER 김정용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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