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 비엔날레 불가리 파빌리온에 대한 모든 것
불가리 그룹이 역사상 최초로 베니스 비엔날레와 익스클루시브 스폰서십을 체결했고, 자르디니 안에 브랜드로는 처음으로 파빌리온을 지어 로터스 강의 전시로 채웠다. 이 역사적인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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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노출에 고정되지 않은 채 빛에 반응하는 로터스 강의 대형 감광 필름들이 불가리 파빌리온을 채우고 있다. © Andrea Rossett
자르디니 정문에서 센트럴 파빌리온 쪽을 향해 가다가 스털링 도서관을 끼고 돌면 그리스식 기둥들 사이를 유리로 가득 채운 번쩍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몇 번이나 와본 이곳에서 처음 보는 낯선 건물. 자르디니 안에 생긴 이 첫 브랜드 파빌리온의 주인공은 불가리다. 그리고 불가리가 선택한 작가는 캐나다 출신의 한국계 작가 로터스 강(Lotus L. Kang). 토론토 태생으로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녀의 작업은 늘 완성되거나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것에서 저것으로 움직이거나 변화한다. 전시장에 늘어진 것들은 화학 처리를 하지 않은 대형 필름이다. 그녀의 뉴욕주 데니슨 힐(Denniston Hill)에서 그녀의 의도에 따라 감광 처리된 이 필름들은 어떤 것은 거대한 원형 환기통의 모양으로, 또 어떤 것은 물방울의 모양으로 실체를 투과한 빛의 묘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대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폐막하는 11월 22일까지 이 파빌리온에 들이치는 햇빛에 따라 변할 것이다. 창문에는 가느다란 35mm 필름 스트립이 줄지어 붙어 있는데, 조간대(潮間帶)의 풍경과 새소리의 스펙트로그램 이미지가 담겨 있다. 공간 곳곳에 놓인 49개의 술병은 불교에서 영혼이 죽음과 재생 사이를 떠도는 49일을 상징한다. 이 불가리의 파빌리온은 그 전체가 마치 감광되어 움직이는 정체성의 장기들로 가득한 하나의 유기체 혹은 세포 또는 객체로 살아 있는 듯하다. 전시 제목 <The face of desire is loss>는 시인 라라 미모사 몬테스의 시집에서 가져온 것으로, 비어 있음과 결핍을 생성적 공간으로 바라본다.
불가리 파빌리온은 카타르관과 스털링 도서관 건너편에 있다. © Andrea Rossett
산 마르코 광장으로 발길을 돌리면, 또 다른 불가리가 있다. 불가리 재단의 첫 번째 공식 전시가 열린 마르치아나 국립도서관은 나폴레옹이 탐내 책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기고 왕실 연회장으로 썼던 역사적 공간이다. 이탈리아 작가 라라 파바레토는 살로네 산소비노에 ‘Momentary Monument – The Library’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챕터를 펼쳐놓았다. 대학, 아카이브, 개인 컬렉션에서 수집한 수천 권의 책이 책장을 채우고, 각 권에는 작가의 아카이브에서 무작위로 선택된 이미지 한 장이 삽입되어 있다. 관람객은 책을 꺼내 읽을 수 있고, 마음에 들면 가져갈 수도 있다. 책장이 조금씩 비어가는 과정 자체가 작품이다. 2012년 뉴욕 모마 PS1에서 시작된 이 시리즈가 진짜 도서관에서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처럼 느껴진다. 전실에서는 튀니지-이탈리아계 작가 모니아 벤 하무다의 ‘Fragments of Fire Worship’이 관람객을 맞는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서예에서 출발한 두 개의 네온 조각은 해독 불가능한 빛의 문자로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읽히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강렬하게 존재하는 언어. 책으로 가득 찬 도서관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읽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마르치아나 국립도서관의 살로네 산소비노에 전시된 라라 파라베레토로의 작품 ‘Momentary Monument - The Library’의 전시 전경. © T-Space
Conversation
with Lotus Kang
」불가리 파빌리온의 비엔날레 첫 전시에서 공간과 시간의 대화를 감광으로 기록하는 로터스 강과의 대화.
베니스 비엔날레 역사상 첫 브랜드 파빌리온인 불가리 파빌리온의 작가 로터스 강의 모습. © Carolyne Loreé
개인적으로 전시 제목 <The face of desire is loss>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진공이 생각났어요. 어딘가가 비어 있어야 그곳을 향해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고 뭔가가 채워지듯이, 상실이 있어야 욕망도 생긴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 결이 맞아요. 제목은 시인 라라 미모사 몬테스(Lara Mimosa Montes)의 표현에서 빌려온 거예요. 그녀가 기꺼이 그렇게 쓰라고 축복해줬고, 살짝 바꿔서 썼어요. 전 욕망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혼돈으로 가득 차 있는 무형(formless)이라고 생각해요. 내 밖에 있는 무언가를 향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욕망은 늘 내 밖에 있는 타자(他者)를 인식하는 행위인데, 그 대상에 닿는 순간 사라져버리죠. 태생적으로 공허함이나 상실과 연결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전시 공간이 이 혼돈의 충만함, 여러 시간과 공간이 켜켜이 쌓인 경계적 공간(liminal space)의 모습을 담아내길 바랐어요. 뭔가가 막 일어나려는 직전, 그 순간의 느낌으로요.
당신의 욕망은 무엇이고, 그 욕망을 만들어낸 상실은 무엇인가요?
예술을 만드는 행위 자체가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작품이나 전시를 만들 때 우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쫓아가잖아요. 전 그게 본질적으로 에로틱한 에너지에서 근원한다고 생각해요. 아직 보이지도, 알 수도, 손에 쥘 수도 없는 것에 이끌린다는 의미에서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저한테 작품의 공간이란 그 도달점보다는 ‘추적하는 과정, 욕망하는 상태’에 가까워요. 물질적으로 봐도 이번 전시는 사진이나 필름 등 부식되거나 변형되거나 죽어가는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에요. 간직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동시에 놓아주어야 하는 것들이죠. 개인적으로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시기에 오랜 연애가 갑자기 끝났어요. 그런데, 그 상실이 거대한 열림으로 이어졌어요. 작가는 항상 개인적인 공간에서 작업하거든요. 의식하든 안 하든 우리의 주관성과 경험이 작품에 스며드는데, 저는 특히 다공질(porous)인 사람이라 그게 작품의 집중도로 나타났어요. 공간에 여유를 주기보다 오히려 약간 숨막힐 것 같은 층위를 만들고 싶어졌지요.
개펄 영상을 찍은 필름들이 파빌리온의 창에 마치 커튼처럼 걸려 있지요. 햇살이 비추면 그 잔상들이 파빌리온의 안쪽으로 어른거리고요.
파빌리온이 어떻게 지어질지를 알아야 했기에 렌더링을 참고했어요. (불가리는 이번 전시를 위해 베니스 비엔날레 자르디니 공원에 파빌리온을 지었다.) 유리가 엄청나게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 안에 무엇을 놓든지 빛이 공간 안에서 시간감과 현존감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라는 걸 직감했어요.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비 오는 날과 해가 뜨는 날이 다를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어요. 빛을 투과하는 매체 자체가 중립적이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공간과 신체의 다공성, 투과성을 생각하면서, 전시장 유리의 면적과 정확히 같은 길이의 필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시간이 약간 안 되는 길이더군요. 2023년에 한국에 가서 제가 찍어 둔 개펄 필름이 있었어요. 그걸 8mm로 촬영한 뒤에 디지털 스캔을 거쳐 35mm 양화 필름으로 출력했지요. 생각해보면 정말 번역의 연속이죠.
개펄이 왜 그렇게 매력적이었나요?
처음에는 형식적인 차원에서 ‘수평성’에 관심이 생겼어요. 수직이 기념비적이고 공격적이며 의도를 단호하게 드러내는 제스처라면, 수평은 항복이자 수용에 가까운 방향이었고, 개펄은 수직성을 거부하는 공간이거든요. 사회적·정치적으로도 개펄이 품고 있는 역사를 생각했어요. 이주, 수탈의 역사요. 일제강점기에는 채취한 소금 등을 착취당했고, 그 뒤로도 (무분별한 어획 등으로) 훼손의 우려가 있어 지금은 유네스코 보호지역이 됐죠. 또 개펄은 과학적인 용어로는 '에코톤(ecotone)'이에요. 두 개의 서로 다른 생태계가 만나 겹치는 지점이죠. 개펄은 또 철새들의 중간 기착지예요. 장소와 장소 사이의 쉬어가는 곳. 어딘가에서 근원한다는 소속감보다 '사이에 속한 존재'에 대해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하는 개인전에 등장했던 형상들이 이번 전시에도 반복됩니다. 새뿐 아니라 멸치도 있지요.
어떤 의도로 작품에 들이는 게 아니라, 제 삶에 가까이 있어서 다루게 된 뒤에 의미가 부여되는 경우가 있어요. 멸치 역시 그랬어요. 제가 사는 곳 주변에 늘 있는 물고기였고, 작은데 자세히 보면 있을 것은 다 있어서 흥미로웠고, 제 문화적 뿌리, 제가 자란 가정과 음식, 제 몸의 대사 과정 여러 면들과 연결되기 시작했죠. 이 작업들은 ‘Tract’라는 진행형 시리즈예요. 장내 트랙(intestinal tract)을 가리키는데, 동시에 뇌의 신경 다발도 트랙이라고 해요. 감각과 기억, 몸 안에서 화학적으로 변환되며 전달되는 것들이죠. 한국 사람들이 보면 멸치 작업에서 극도의 구체성을 읽어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보면서 보편성을 느껴요. 그 두 가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극도의 구체성과 광범위한 열림을 같은 제스처로 보여주는 것. 저는 그 선 위를 계속 걷고 있어요.
다시마 매듭 조각은 왜 천장 위에 숨겨둔 건가요?
오! 그걸 봤군요. 파빌리온 천장 높이가 낮아서이기도 하고, 제가 ‘존재하지만 완전히 보이지는 않는’ 상태를 좋아해서이기도 해요. 개펄처럼요. (만조가 되면) 개펄은 그곳에 있다는 건 알지만, 볼 수는 없는 상태가 되지요. 천장 바로 아래 숨겨둔 흰 파이버글라스 소재의 조각은 다시마 매듭을 확대한 형태인데, 정확히 제 키와 같은 크기예요. 다시마는 뿌리 없이 사는 식물이에요. 뿌리와 비슷한 ‘홀드패스트(holdfast)’라는 기관으로 바위에서 바위로 옮겨 붙어가며 살아가죠. 뿌리 없음, 이동하는 뿌리. 그리고 다시마는 필터예요. (주변의 물이 다시마로 들어가 정화된다는 점에서) 자기 자체보다 주변을 더 많이 담고 있는, 환경의 총체적 인덱스랄까요. 그 점은 로터스 루트(연근)와도 비슷해요. 한편 완전한 뿌리내림의 상징인 로터스와 뿌리 없음의 상징인 다시마를 나란히 두면서 그 긴장감과 극성(polarity)을 만들어내고 싶었어요.
이번 전시에서 필름과 빛, 유리가 만나 안과 밖이 연결되는 느낌이 지금 한국 전시에서 아기 새가 전시된 국제갤러리 한옥의 중정을 떠올리게 했어요.
그런 의미가 맞아요. 조각을 위에 올려두는 것만으로도 위와 아래, 안과 밖의 개념이 뒤집혀요. (보통은 골조로 쓰이는) 산업용 조이스트가 공간 안에 공간을 만들도록 한 것도 비슷한 개념이지요. 저희 파빌리온은 태생적으로 임시 구조물이에요. 고정되지 않은 곳. 그 자체가 안팎인 동시에 안에 존재하는 마당, 즉 한옥의 내정과 비슷한 구조일 수밖에 없어요. 제 가까운 친구이자 큐레이터인 전민선은 이 공간을 무덤이자 자궁(tomb and womb)’이라고도 묘사했는데, 저 역시 동의해요. 매장의 장소이자 탄생 또는 잉태의 장소. 생과 사의 두 순환이 공존하는 곳이지요.
이번 전시에서 번역한 음악 얘기를 하고 싶어요.
전시 자체에는 사운드가 없어요. 이번에 제가 협업한 음악가는 뉴욕의 뮤직 컬렉티브 ‘SLINK’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에나예트(Enayet)예요. 저는 굉장히 추상적인 방식으로 협업할 수 있는 뮤지션을 찾고 있었어요. 일대일 번역이 아니라, 번역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파괴와 변환 속에서 연속성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요. 저는 그를 만나서 제가 준 아기 새들의 울음소리를 오디오 피스로 만들되, 필름과 함께 루프될 수 있게 4단계의 비리드미컬한 형태로 만들어달라는 느슨한 디렉션을 줬어요. 그가 작업을 하던 중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는데, 모든 종의 아기 새들이 그 초기 발달 단계에서는 거의 같은 소리를 낸다는 거였어요. 어떤 발달의 경계, 즉 (보호를 받지 않으면 죽는) 가장 처절한 단계에 있는 시기에는 다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게 흥미로웠죠. 그 아기 새들의 울음소리와 개펄에 서식하는 철새인 ‘넓적부리도요(Spoon-billed Sandpiper)’의 소리를 결합해 오디오 피스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사운드 피스를 스펙트로그램(spectrogram, 파형 이미지)으로 전환했고, 이를 다시 35mm 필름 안에 넣었죠. 작품 속에서 보라색 파장으로 보이는 부분이 바로 그거예요. 번역의 번역의 번역인 셈이죠.
예술 형식 간 번역에서 잃는 것과 얻는 것은 뭘까요?
제 실천 전체가 일종의 번역으로 볼 수 있어요. 저는 번역을 되새김질(regurgitation)로 생각해요. 번역은 기본적으로 파괴예요. 그래서 일대일로 대응될 수 없고, 항상 달라지죠. 삶이 죽음을 수반하듯,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 무언가를 섭취하는 것은 모두 해체를 수반하죠. 제 작업도 그런 방식으로 작동해요.
혹시 가장 마지막에 바꾼 디테일이 있나요?
막판에 전시 전경 촬영을 위해 공간을 정리한 날이었죠. 저와 2018년부터 함께한 큐레이터 매튜 하일랜스와 처음으로 전시를 천천히 제대로 돌아봤는데 둘 다 “뭔가 아직 덜 됐다”라는 데 뜻이 통어요. 일주일 만에 몇 가지를 추가하고 미세하게 조정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닥에 놓인 관(coffin) 형태의 피스예요. 원래는 투웨이 미러가 올려진 빈 구조물이었는데, 거기에 영상을 투사하기로 했어요. 지금 국제갤러리 서울에서의 전시 <코라>(Corah)에 투사된 것과 같은 영상이죠.
공명이군요!
맞아요. 마지막 순간에 두 시공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방법을 찾은 거예요.
Conversation
with Matteo Morbidi
」불가리 재단의 디렉터이자 불가리 그룹의 헤리티지 앤 필란트로피 디렉터인 마테오 모르비디와의 대화.
불가리 재단의 이사이자 불가리 그룹의 헤리티지 앤 필란트로피 디렉터인 마테오 모르비디의 모습.
불가리 재단이 브랜드 최초로 자르디니에 파빌리온을 세울 만큼 엄청난 스폰서십 계약을 맺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엄밀히 말하면 베니스 비엔날레를 후원하고 자르디니 안에 불가리 파빌리온을 지은 것은 불가리 그룹(‘메종 불가리’)이고, 장외 전시인 국립 마르치아나 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라라 파바레토와 모니아 벤 하무다의 전시는 불가리 재단(‘폰다치오네 불가리’)에서 주최한 전시입니다. 저는 불가리 재단의 매니징 디렉터이면서 동시에 불가리 그룹의 ‘헤리티지 앤 필란트로피 디렉터’라는 두 개의 직책을 맡고 있어요. 사실 불가리 재단은 그룹이 오래전부터 계속해오던 예술 후원, 자선 활동 등 다양한 활동들을 포괄적으로 모으기 위해 2년 전에 설립되었지요. 즉, 재단이 세워진 것은 최근이지만, 그 모든 활동들은 브랜드가 20년 전부터 해왔던 일들이라는 얘기죠. 스폰서십과 관련해서는 매우 빠르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어요. 인류의 예술 활동과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지라는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으니까요.
첫 작가로 로터스 강을 선택한 이유는요?
2년 전인 2024년, 불가리가 메인 스폰서로 후원한 첫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그곳에 출품된 로터스의 설치 작품을 발견했지요. 저희는 그 작품에 완전히 매료됐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녀는 공간과 시간의 변환, 빛과 필름의 반응과 상호작용, 그리고 반사 등을 통해 주제를 드러내지요. 이는 변화와 시간에 대한 불가리의 가치관과 부합하기도 합니다.
아시아계 젊은 여성이라는 데 어떤 메시지가 있는 줄 알았어요.
그녀가 한국계라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였어요. 의도적인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재능을 지원하고, 여성을 지지하며, 젊은 재능을 발굴하고자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요.
지금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곳 국립 마르치아나 도서관에서는 불가리 재단이 주최하는 라라 파바레토와 모니아 벤 하무다의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보고 나니 꼭 그곳에서 열려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Momentary Monument - The Library’를 전시 중인 살로네 산소비노는 마르치아나 국립도서관의 중심으로 나폴레옹 이전에는 실제로 장서를 보관하는 열람실이었어요. 라라의 전시는 아시다시피 대학 도서관, 아카데미, 개인 컬렉션에서 수집하고 엄선한 2700권의 책에 2700개의 아카이브 이미지를 끼워두고 관객들이 한 권씩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전시예요. 지식의 이동 혹은 유통을 보여주지요. 나폴레옹이 왕실 접견실로 사용하기 전까지 도서관이었던 이곳, 개념상으로는 원래 책이 있어야 할 장소에 다시 책을 되돌려 놓는 셈이라는 점에서 장소특정적 의미가 깊어요. 부친이 서예가였던 모니아 벤 하무다의 작품은 이슬람 서예를 추상화한 것입니다. 그녀는 서예에서 의미 요소를 배제하고, 그 추상적 형태만 차용해 불을 표현했죠. 서예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이면서, 읽을 수는 없는데 그 색과 형상은 불이죠. 이는 이슬람 조형 전통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슬람 조형 예술에서 불은 중요한 것을 보호하는 상징입니다. 이 작품이 살로네 산소비노로 향하는 전실을 채우고 있어요. 매우 장소특정적이지요.
모니아 벤 하무다의 마치 불타는 듯한 네온 캘리그래피. © Matteo Gebbia
Credit
- EDITOR 박세회
- PHOTO Courtesy of the artist
- Bvlgari
- Commonwealth and Council
- Franz Kaka
- Kukje Gallery and Esther Schipper Berlin/Paris/Seoul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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