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 음식에 얽힌 러브스토리
우리가 청국장과 사워도우, 검게 익은 바나나와 신김치에 열광하는 이유.
전체 페이지를 읽으시려면
회원가입 및 로그인을 해주세요!
Astro Crusto A, Wolfgang Tillmans 2012Selbstturm, Dieter Roth, NY TIMES
썩음은 실패였고, 발효는 문명이었다
냉장고 가장 안쪽에는 잊혀진 김치통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먼저 꺼내지 않는, 너무 익었다고 여겨진 김치. 신맛이 강해져 손이 가지 않던 그것은 이상하게도 찌개 냄비에 들어가는 순간 가장 강력한 재료가 되었다. 어린 나는 그걸 보며 처음 알았다. 어떤 음식은 지나쳐야 제맛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숫자를 확인한다. 유통기한, 소비기한, 제조일자. 현대인은 날짜를 기준으로 음식을 판단한다. 하루가 지나면 불안해지고, 며칠이 지나면 버릴 준비를 한다. 하지만 인류의 대부분 역사에서 음식은 날짜가 아니라 시간과의 협상이었다. 냉장고도, 진공포장도, 배송 시스템도 없던 시대 사람들은 늘 같은 질문 앞에 놓였다. '오늘 만든 음식을 내일까지 어떻게 살릴 것인가.' '썩기 전에, 더 나은 음식으로 바꿀 수는 없는가.' 그 질문에 대한 수천 년의 답이 바로 발효, 숙성, 건조, 염장, 절임이었다. 유통기한 이후의 미학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인류가 가장 오래전부터 실천해온 생존 기술의 다른 이름이다.
Ancient Egyptian Painting found in the Tomb of Menna
고대의 맥주, 중세의 치즈
인류의 식탁은 불(火)에서 시작됐지만, 그것만으로 완성되지는 않았다. 음식의 역사는 요리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장의 역사다. 냉장고도 포장 기술도 없던 시대, 사람들은 늘 같은 문제와 마주했다. 오늘의 식량을 내일까지 어떻게 남길 것인가. 쉽게 상하는 재료를 어떻게 더 오래, 더 맛있게 만들 것인가. 기원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이미 곡물을 발효시켜 빵과 맥주를 만들었다. 맥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비교적 안전한 수분 공급원이었고, 노동자들의 중요한 식량이었다. 고대 로마는 생선 내장을 소금에 절여 햇볕 아래 숙성시킨 가룸(Garum) 을 거의 모든 음식에 사용했다. 오늘날 액젓이나 피시소스 느억맘의 조상 격으로 불리는 이 소스는, 쉽게 상하는 생선을 가장 오래가는 조미료로 바꾼 결과였다. 도시는 저장 기술 위에 세워졌고, 잉여 식량이 있어야 제국이 유지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중세 유럽에 이르러 발효와 숙성 기술은 더욱 정교해졌다. 수도원은 맥주를 빚고, 치즈를 만들고, 와인을 저장했다. 우유는 하루면 상하지만 치즈는 수개월, 수년을 간다. 포도는 금세 무르지만 와인은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오른다. 부패하기 쉬운 재료를 시간이 지날수록 귀해지는 식품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오래된 식품 과학이었다. 인간은 시간을 피하는 대신, 오래전부터 그것을 먹는 법부터 배웠다.
장독대 , biroso.net 웹 발췌
시간을 담그던 항아리, 시간을 멈춘 냉장고
어릴 적 할머니 집 마당에는 커다란 장독대가 있었다. 그때는 왜 먹을 것을 굳이 밖에 두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비를 맞고 바람을 맞는 항아리가 어째서 부엌보다 중요한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항아리들은 단순한 저장 용기가 아니라, 시간을 넣어두는 그릇이었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 계절이 지나가며 된장과 간장을 만들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식문화는 오래전부터 시간을 재료로 써왔다. 한국의 된장, 간장, 고추장, 김치. 일본의 미소와 사케. 중국의 흑초와 발효 두부. 동남아시아의 피시소스까지. 계절과 온도, 공기 흐름, 미생물과 기다림이 함께 맛을 만들었다. 오늘날 주방 가전이 담당하는 역할을, 옛사람들은 흙과 계절로 해결했다. 냉장고 대신 장독대가 있었고, 온도 조절기 대신 바람의 방향을 읽었다. 그러나 20세기 냉장 기술이 보급되며 음식은 ‘멈춘 상태’로 보관되기 시작했다. 썩는 속도는 늦어졌고, 사람들은 신선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 방금 수확한 것, 오늘 만든 것, 즉시 배송 된 것이 좋은 음식의 기준이 되었다. 물론 신선함은 중요하다. 다만 그 순간부터 우리는 시간이 만드는 맛을 조금씩 잊기 시작했다. 김치는 익어가는 음식이고, 치즈는 늙어가는 음식이며, 반죽은 숙성되는 음식이다. 가장 새것만 찾는 시대에, 가장 깊은 맛은 여전히 느리게 온다.
메주, 경북기록문화연구원 사진아카이브
사워도우가 힙하다면, 청국장은 대선배다
우유는 하루면 변했고, 생선은 금세 냄새가 났으며, 고기는 계절에 따라 하루도 버티지 못했다. 음식은 늘 부패를 향해 움직였다. 인류는 여기서 두 가지 길을 발견했다. 통제되지 않은 변화는 썩음, 통제된 변화는 발효. 둘 다 미생물이 개입하지만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하나는 폐기물이 되고, 다른 하나는 치즈와 김치, 맥주와 된장이 된다. 어린 시절 처음 맡은 청국장 냄새는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상한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 냄새를 맡고 군침을 삼켰다. 누군가에겐 부패의 냄새가, 누군가에겐 집의 냄새라는 걸 그때 처음 배웠다. 음식의 맛은 혀보다 기억에서 먼저 결정된다는 것도. 시간이 흘러 나는 군복무 시절 짧은 휴가를 나왔을 때도, 유학 시절 한국에 잠시 들어왔을 때도 청국장을 가장 먼저 찾는 어른이 되었다. 진한 냄새 속에 익숙한 부엌과 식탁의 기억이 함께 들어 있었기 때문일까. 청국장을 만들 때 흔히 메주를 띄운다고 말한다. 여기서 ‘띄운다’는 메주에 균을 띄우고 곰팡이를 피워 발효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콩 덩어리 하나에 시간을 입히는 표현인 셈이다. 서울에서 청국장을 찾는다면 나리의집, 성북동청국장 두 곳을 추천하고 싶다.
Jeju South Korea ,Martin Parr , 2007 - Magnum Photos
유통기한 이후에 시작되는 맛
많은 사람들이 유통기한을 ‘먹으면 안 되는 날’로 생각한다. 하지만 유통기한은 본래 판매자가 품질을 보장하는 기간이다. 최근 확대되고 있는 소비기한은 실제 섭취 가능성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즉 날짜는 판결문이 아니라 참고서라는 뜻. 숫자는 말해주지만, 최종 결정권자는 아니다. 한 번은 유통기한이 하루 지난 우유를 앞에 두고 한참 망설인 적이 있다. 숫자는 끝났다고 말했지만 냄새도 맛도 멀쩡했다. 결국 그날 내가 마신 것은 우유라기보다 날짜를 절대적으로 믿어온 습관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안전은 중요하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 육류와 생선, 팽창한 캔 제품, 곰팡이 핀 조리식품, 점액이 생긴 가공식품은 미련 없이 보내줘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날짜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는 음식도 분명 있다는 사실이다. 검게 변한 바나나가 대표적이다. 멀쩡할 때보다 더 달고 풍부해진다. 시든 채소는 구우면 단맛이 농축되고, 눅눅해진 빵은 크루통이 된다. 너무 익은 김치는 찌개 냄비 안에서 비로소 전성기를 맞는다. 냉장고 구석에서 외면 받던 재료들이, 팬과 오븐 앞에서는 스타가 되는 셈이다. 음식에는 두 개의 시간이 있다. 하나는 공장에서 찍힌 날짜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재료가 스스로 흘려보내는 생물학적 시간이다. 우리는 첫 번째 시간만 믿으며 살아왔지만, 두 번째 시간을 이해하는 순간 음식은 폐기물이 아니라 가능성이 된다.
가장 오래된 맛이 가장 새롭다
한동안 음식의 미덕은 늘 ‘신선함’에 있었다. 막 수확한 채소, 오늘 만든 디저트, 당일 생산된 재료가 최고의 가치처럼 여겨졌다. 빠를수록 좋고, 새로울수록 믿을 만하다는 감각이 식탁을 지배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미식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다. 지금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오히려 시간을 견딘 음식들이다. 발효와 숙성을 거친, 느리게 완성된 맛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사워도우다. 천연 발효종으로 반죽을 천천히 부풀리는 이 빵은 공장에서 빠르게 생산되는 식빵과는 완전히 다른 리듬을 가진다. 긴 발효 시간 동안 생기는 은은한 산미, 깊은 곡물향, 쫄깃한 조직감은 기다림이 만든 풍미에 가깝다. 사워도우 전문 베이커리가 늘어나는 이유도 단순히 유행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빵에서도 ‘과정의 맛’을 느끼고 싶어 한다. 내추럴 와인 역시 같은 흐름에 있다. 인위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포도와 효모가 가진 자연스러운 발효에 맡기는 방식. 병마다 미세하게 다르고, 해마다 표정이 다르며, 때로는 예상 밖의 향을 내기도 한다. 완벽하게 통제된 제품보다 살아 있는 음료에 가깝다. 이 외에도 콤부차, 미소, 김치, 템페, 발사믹 식초 같은 발효 음식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도 이유지만, 더 큰 이유는 ‘시간이 만든 맛’에 대한 재발견이다. 발효는 단순한 조리법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먹는 방식이다. 빠르게 복제되기도 어렵다. 기다림과 환경, 미생물, 손맛, 계절이 모두 개입해야 한다. 효율과 속도가 모든 기준이 된 시대를 지나며 사람들은 오히려 느린 것에 가치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완성되는 음식보다 며칠, 몇 주, 몇 달이 걸린 음식에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다.
Be Bold with Bananas, Martin Parr, 2015
파인애플 통조림보다 바나나 브레드
한때 끝났다고 생각한 관계를 다시 만나는 일은,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검게 익은 바나나를 발견하는 순간과 닮아 있다. 겉은 무르고 껍질은 얼룩졌으며, 한때의 단단함은 이미 지나갔다. 처음 봤을 때는 괜히 버려야 할 것 같다. 너무 늦었고, 타이밍도 지났다고. 오래전 멀어진 사람과 우연히 다시 마주쳤을 때 우리는 약간의 후회와 약간의 애틋함으로 시간을 돌이켜본다. 왜 끝났는지, 왜 연락하지 않았는지, 왜 그때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이미 유통기한은 한참 지나버렸다. 그래서 왕가위 감독 영화 중경삼림 속 금성무는 5월 1일 유통기한의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조리 사 모은다.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날짜로 마음을 붙들어 두며. 큰 결심으로 검게 익은 바나나를 집어 든다. 한 입 깨물어보면 노란색의 바나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달다. 생으로 먹기엔 지나쳐 보여도, 으깨서 반죽에 넣고 오븐에 구우면 가장 진한 향을 낸다. 멀쩡할 때보다 더 깊고, 더 부드럽고, 더 풍부한 맛이 된다. 바나나 브레드는 지나간 시간을 실패가 아니라 풍미로 번역하는 기술이다. 어쩌면 관계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의 서툼과 미숙함, 타이밍의 어긋남. 그때는 끝의 이유였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는 다른 형태의 이해가 된다. 예전 같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해지는 대화도 있다. 젊은 날의 자존심은 물러지고, 설명하지 못했던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면서. 물론 모든 관계가 다시 구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이미 너무 멀리 갔고, 어떤 것은 꺼내지 않는 편이 나은 기억으로 남는다. 하지만 몇몇 관계는 끝난 것이 아니라 단지 식어 있었을 뿐이다. 다시 데우면 향이 돌아오는 것들처럼. 사랑의 유통기한을 세던 시절보다, 지나간 감정을 구워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Credit
- WRITER 류경진 jinjonjam
MONTHLY CELEB
#장원영, #플레어유, #김남길, #손종원, #남주혁, #에스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