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Gaja]라는 거대한 파인 와인 왕국의 이야기
가야라는 이름에서 바르바레스코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가야가 만들어가고 있는 왕국은 그보다 훨씬 넓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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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레스코에 있는 안젤로 가야의 와이너리 저장고의 모습.
1. 바르바레스코에서 시작된 왕국
가야(GAJA)의 이야기의 원류를 따지자면, 1859년 조반니 가야가 피에몬테 랑게 언덕에 있는 작은 마을 바르바레스코에 와이너리를 세운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이 가문의 이야기가 현대까지 굴러온 원동력을 생각하자면, 한 여성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2대 째인 안젤로(이탈리아는 아버지의 이름을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경우가 많아 한 세대를 걸러 안젤로가 반복해 등장한다)의 아내 클로틸데 레이는 '타협 없는 품질'이라는 신념을 아들 조반니와 손자 안젤로에게 깊이 새겼고, 바로 이 4대째 안젤로 가야가 1961년 가업에 합류하면서 지역 양조장에서 세계적인 에스테이트로 도약했다. 사실 그 전까지 바르바레스코라는 이름은 와인 지도에서 특별한 지명이 아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젤로는 사실 반쯤 미친 사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무너뜨렸으며 다시 보든 것을 바로 세웠다. 피에몬테 최초로 싱글 빈야드 와인을 선보였으며, 1967년 소리 산 로렌초를 시작으로 소리 틸딘, 코스타 루시 같은 단일 밭 바르바레스코로 '밭의 이름이 곧 와인'이라는 부르고뉴적 사고를 이탈리아에 이식했다. 프랑스산 바리크(소형 오크통, 큰 오크통에 비해 향과 맛이 짙게 밴다) 숙성을 도입했고, 네비올로의 성지인 랑게의 땅에 프랑스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을 심어 아버지로 하여금 '다르마지'(Darmagi, 아깝다는 뜻의 피에몬테 사투리)라는 탄식을 내뱉게 했다. 이후 그 탄식을 와인의 이름에 붙인 것은 일종의 유머다. 랑게 지역에서 생산한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가야 와인의 이름은 지금도 '다르마지'다. 전통의 수호자이자 가장 급진적인 혁신가라는 가야의 이중적 정체성은 이렇게 완성됐고, 모두가 그의 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시대에 바르바레스코가 바롤로의 그늘에서 벗어나 국제적 명성을 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야의 성공은 곧 이탈리아 와인 전체의 부흥을 견인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와이너리는 5세대인 가이아, 로사나, 조반니 남매가 부모 안젤로·루치아와 함께 이끌며 1859년에 창립된 와이너리의 정신을 다섯 세대째 이어가고 있다.
안젤로 가야의 본진 바르바레스코 와이너리의 모습.
2. 피에몬테를 넘어 토스카나로
가야의 본진은 여전히 피에몬테다. 바르바레스코 DOCG(바르바레스코, 트레이소)와 바롤로 DOCG(세랄룽가 달바, 라 모라)에 걸쳐 약 240에이커(97헥타르)의 에스테이트 빈야드(직접 소유해 경작하는 포도밭)를 보유하고 있으며, 모든 와인을 이 땅에서 난 포도로만 만든다. 샴페인으로 따지면 피에몬테의 가야는 완벽한 레콜탕 매니퓰랑(RM)이다. 1995년 라 모라의 유서 깊은 그로미스 가문 포도밭을 인수하며 바르바레스코의 제왕은 바롤로에도 깃발을 꽂았다. 처음으로 피에몬테 바깥은 나간 것은 1994년. 행선지는 토스카나 몬탈치노. 브루넬로의 심장부에서도 가장 추앙받는 입지에 자리한 피에베 산타 레스티투타를 인수했다. 수백 년 된 교구 성당(피에베)을 품은 이 에스테이트에서 가야는 산지오베제 그로소로 세 종류의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DM)를 빚는다. 가야의 도장 깨기는 이어졌다. 2년 뒤인 1996년에는 슈퍼 투스칸의 성지 볼게리(알타 마렘마)로 향했다. 아직 젊었던 안젤로 가야는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프랑, 메를로라는 국제 품종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싶어 했고, 토양 구획 지도를 뒤져 메탈리페레 구릉 기슭의 점토/석회질 토양에서 아직 포도가 심기지 않은 유일한 땅을 찾아냈다. 땅 주인과의 협상은 지난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난 와인에 카마르칸다(Ca'Marcanda), '끝없는 흥정의 집'이라는 뜻의 피에몬테 방언을 붙였다. 네비올로의 장인이 산지오베제와 보르도 품종의 슈퍼 투스칸까지 아우르게 되는 이 두 번의 거대한 영토 확장으로, 가야는 피에몬테의 챔피언에서 이탈리아 파인 와인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으로 변모했다.
바르바레스코 마을 가야가 소유한 빈야드의 전경.
3. 화산으로 가다
왕국의 가장 최근 영토는 시칠리아, 그것도 활화산 에트나의 비탈이다. 2016년 안젤로 가야는 에트나의 대표 생산자 알베르토 그라치와 손잡고 합작 와이너리 IDDA(이다)를 설립했다. '이다'는 시칠리아 방언으로 '그녀'라는 뜻으로, 현지인들이 에트나 화산을 부르는 애칭이자 경외의 표현이다. 이 프로젝트의 배경에는 기후변화가 있다. 안젤로는 20년 넘게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고지대 테루아와 만생종 품종을 찾아왔고, 그 답이 에트나였다. 흥미로운 것은 입지 선택이다. 에트나 와인의 명성이 집중된 북사면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남서사면, 벨파소와 비안카빌라 마을의 해발 600~800미터 화산토 비탈에 약 50에이커의 밭을 일군 것이다. 남들이 검증한 땅이 아니라 미지의 테루아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1960년대 바르바레스코에서 안젤로가 했던 도박이 반복되는 셈이다.(2026년인 지금 시칠리아 와인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면 엄청난 선구안이다) 벨파소에 신축한 와이너리는 2023년 첫 수확을 맞았고, 화이트 품종 카리칸테로 만드는 IDDA 비앙코와 네렐로 마스칼레제 기반의 IDDA 로쏘 두 와인이 화산이 일군 극한의 테루아를 품고 탄생했다. 용암과 바다의 색, 산의 고도와 계단식 밭을 형상화한 레이블까지, IDDA는 가야 5세대가 주도하는 왕국의 미래형이다. 피에몬테의 안개에서 출발한 가문이 화산의 열기에 이르기까지 150여년이 걸렸고 이 확장은 해외로 이어지고 있다.
가야 왕국을 대표하는 와인 5
1. 가야 바르바레스코 DOCG — 왕국의 심장, 피에몬테 바르바레스코
1859년부터 이어져 온 가야의 플래그십이자 존재 이유. 바르바레스코와 트레이소 마을에 흩어진 14개 자가 포도밭의 네비올로를 블렌딩해 만든다. 단일 밭 와인들이 각 테루아의 개성을 보여준다면, 이 와인은 가야가 해석한 바르바레스코라는 마을 전체의 초상이다. 바리크와 대형 캐스크를 병용하는 숙성 방식은 전통과 현대를 모두 취하는 가야 철학의 압축판. 장미와 타르, 붉은 체리와 감초로 요약되는 네비올로의 고전적 아로마 위에, 비단결 같지만 단단한 타닌과 수십 년을 견디는 구조가 얹힌다. 바르바레스코를 바롤로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반열에 올려놓은 역사적 와인이며, '가야'라는 이름의 기준점이다.
2. 가야 다그로미스(DaGromis) 바롤로 DOCG — 피에몬테 바롤로
이름 그대로 '그로미스 가문으로부터(da Gromis)' 온 와인. 1995년 가야가 인수한 라 모라의 그로미스 포도밭에서 출발했다. 현재는 라 모라와 세랄룽가 달바, 두 마을의 밭을 블렌딩하는데 이 조합이 절묘하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라 모라와 강건하고 구조적인 세랄룽가는 바롤로의 양극단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토양·향·수령이 다른 구획들을 로트별로 12개월간 오크 숙성한 뒤 블렌딩해 다시 18개월을 더 숙성한다. 젖은 흙과 따뜻한 향신료, 샌달우드와 주니퍼, 붉은 과실의 풍미가 겹겹이 피어나는, 바롤로 입문자와 애호가 모두를 만족시키는 가야식 바롤로의 정수다.
3. 카마르칸다 프로미스(Promis) 토스카나 IGP — 토스카나 볼게리
'끝없는 흥정의 집' 카마르칸다에서 만드는 가장 경쾌한 와인. 이름은 이탈리아어 프로메사(promessa), 즉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데, 젊고 대담한 성격으로 신선한 활기를 불어넣는 유망주이자, 토스카나에서 가치 있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겠다는 가야 가문의 약속을 동시에 의미한다. 볼게리와 인근 비보나의 석회·점토질 짙은 토양에서 자란 메를로, 시라, 산조베제를 블렌딩한다. 보랏빛이 감도는 짙은 루비색에 라즈베리, 블랙커런트, 블루베리 같은 야생 과실 향이 주도하고 핑크 페퍼콘과 감초 노트가 따라온다. 미디엄 바디에 둥근 타닌, 상쾌한 산도. 네비올로의 거장이 슈퍼 투스칸의 언어를 얼마나 유창하게 구사하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4. 피에베 산타 레스티투타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DOCG — 토스카나 몬탈치노
1994년, 가야 가문이 피에몬테 밖으로 내디딘 첫걸음의 결실. 몬탈치노에서도 가장 추앙받는 입지로 꼽히는 이 에스테이트는 중세 교구 성당(피에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와인 양조의 흔적은 무려 12세기 문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산조베제(브루넬로) 100%로 빚는 이 와인은 체리와 자두, 가죽과 발사믹 허브의 풍미에 몬탈치노 특유의 단단한 타닌과 긴 여운을 갖췄다. 단일 밭 브루넬로인 렌니나, 수가릴레와 함께 세 종의 브루넬로 라인업을 이루며, 네비올로로 증명한 가야의 정밀함이 산조베제라는 또 다른 위대한 이탈리아 품종에서도 유효함을 보여준다.
5. 이다(IDDA) 에트나 로쏘 DOP — 시칠리아 에트나
가야와 그라치, 두 가문의 합작이 낳은 화산의 레드. 에트나 남서사면 비안카빌라의 해발 700~800미터 밭에서 자란 네렐로 마스칼레제와 네렐로 카푸치오로 만든다. 붉은 베리와 야생 허브, 향신료의 아로마에 실키한 타닌과 생생한 산도, 그리고 화산토가 새긴 미네랄의 뼈대가 받쳐주는 스타일. 주니퍼, 흑연, 기나피, 오렌지의 응축된 노트가 장미 향으로 마무리되는 섬세한 결을 지녔다. 흔히 '지중해의 부르고뉴'로 불리는 에트나 네렐로의 우아함에, 미지의 남서사면이라는 새로운 테루아의 해석을 더했다. 피에몬테의 왕이 화산에서 쓰기 시작한 새 챕터의 첫 문장 같은 와인이다.
Credit
- PHOTO G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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