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플레이션이 온다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트럼프의 미국 경제는 과연 어디로 가는가? | 트럼프,도널드 트럼프,미국,경제,Portfolio

01. "당분간 파생 시장을 떠납니다. 파산했어요. 찾지 마세요."지난 11월 11일, 빼빼로데이이자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았던, 내가 봐온 몇 안 되는 파생의 고수는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안정된 선물 옵션 투자자였다. 주로 미국 선물을 다루는데 일주일에 2퍼센트 목표 수익률을 잡고 트레이딩 해온 그는 지난 10월부터 하방에 대한 비중을 점점 높여갔다. 이유는 바로 도널드 트럼프 때문이다.“트럼프가 무조건 당선합니다. 그리고 시장은 와장창 무너질 겁니다. 정 기자도 들어와. 1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원 웨이 폭락이야. 최소 3거래일은 그냥 폭락이지. 무조건 세 다블은 먹을 거야.”이 파생 고수는 마지막 습격을 노리는 사자처럼 조심조심 10월 말을 보냈다. 시장이 꾸준히 흘러내릴 때도 결코 리스크 헤지 포지션을 풀지 않았다. 엄청난 인내심이었다. 그리고 11월로 넘어왔고, 바로 그날이 왔다. 11월 9일 수요일 아시아 금융시장은 아수라장이었다. 트럼프가 플로리다에서 승기를 잡은 직후 미국 선물은 5퍼센트대 폭락했고 국내 시장도 4퍼센트 폭락에 국제 금값은 6퍼센트 넘게 올랐고, 달러 대비 엔화는 7퍼센트대까지 뛰어올랐다. 그간 철저하게 탐욕을 관리해오던 파생 고수의 맘이 무너진 것도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TV 화면엔 대문짝만 하게 “도널드 트럼프, 미 45대 대통령 당선”이라는 문구가 올라왔다. 그날 밤 난 술을 퍼 마셨다. 최순실과 트럼프, 술은 굉장히 달았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스마트폰 속 미국 증시의 모습은 쇼크 그 자체였다. 폭락은커녕 이전 선물시장의 폭락을 다 되돌리며 오히려 1퍼센트 넘는 상승으로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그다음 날에도 추가 상승을 하며 다우지수가 미국 주식시장 역사상 최고점을 찍었다. 나의 파생 고수가 파산한 순간이었다.02. “조심해, 이제부터 본격적인 사기장이야.”그런데 트럼프 당선 일주일 후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기업 사냥꾼’의 대명사로 불리는 억만장자 투자자 칼 아이칸 아이칸 엔터프라이즈 회장이 트럼프 승리에 배팅해서 초대박을 떠뜨렸다는 내용이었다. 똑같이 트럼프 승리에 배팅했는데 누군 파산이고 누군 초대박이라니.사연은 이랬다. 트럼프 당선 직후 파티에 초대받은 아이칸은 샴페인을 마시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더니 다시 나타나서 이런 말을 던졌다고 한다.“지금 선물 매수 포지션에 10억 달러 담그고 왔어.”그리고 3시간 후 미국의 본장이 시작됐고 낙폭을 빠르게 회복하면서 마침내 1퍼센트대 상승으로 마감했다. 아이칸은 이날 하루 1조원대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기사는 이 소식을 전하면서 아이칸의 투자 감각을 칭송했는데, 난 이거야말로 비열한 사기라고 한다. 트럼프의 당선에 미국 선물시장이 폭락한 것도 사기요, 아이칸이 시장의 급반등을 예상하면서 1조원을 배팅한 것도 사기다. 더 기계적으로 접근하면 미국 증시가 상승 반전한 건 아이칸의 1조원대 투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왜냐고?잘 알려진 것처럼 아이칸은 월가에서 유일한 트럼프의 ‘광팬’이다. 트럼프도 이 악덕 투자가를 “최고의 미국 재무장관감이야!”라고 말하며 엄청난 ‘꿍짝’을 자랑했다. 그런데 이 아이칸이 1조원을 쐈다는 건 다른 유대계 금융 세력에 어떤 메시지를 전했을까. 바로 대대적인 월가에 대한 규제 완화였다. 그 악질적인 아이칸이 1조원을 쐈다는 건 뭔가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다른 큰손들도 매도 포지션을 잡을 이유가 없다. 실제로 트럼프는 지금 도드-프랭크법이나 볼커 룰 등 오바마 정권의 금융 규제를 모두 폐지하겠다고 한다.이 기사를 읽고 있을 때 마침 한 금융회사에서 트럼프 시대의 투자 전략에 대한 기고를 부탁했다. 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조심하세요. 어쩌면 본격적인 시장 조작의 수렁에 빠질 수 있습니다.”03. 트럼프 경제 정책-감세, 보호무역주의, 인프라 투자트럼프는 선거 기간 동안 경제 정책 중 세 가지만큼은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세금을 깎아준다는 ‘감세 정책’과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의 실천 방안인 강력한 ‘보호무역주의’이다. 또 화력 산업을 기초로 제조업을 부활시키고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통해 고용과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겠다는 포석이다.감세 정책의 경우 상당히 획기적이었는데 기업들이 내는 법인 최고 세율을 현행 35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내리고 상속세는 아예 폐지하겠다고 했다. 또한 애플 등을 겨냥해 미국 기업이 해외에 보유하고 있는 현금을 본국으로 가져오면 10퍼센트의 일회성 세금만 매기고 그 어떤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고 한다. 국민들에게도 감세를 내세웠는데 가령 연간 22만5000달러 이상을 버는 고소득층에 대해서는 현행 40퍼센트대 세율을 33퍼센트로 낮추고, 소득이 7만5000달러 미만인 저소득층에게는 20퍼센트대 세율을 12퍼센트로 낮추겠다고 강조했다.미국 우선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던 트럼프는 경제 정책에선 극단적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중국산에 45%, 멕시코산에 3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중국과 멕시코를 많이 언급했지만 우리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트럼프는 “한국이 (한미 FTA를 주도한) 미국을 비웃고 있다”는 등 억측도 쏟아냈는데 연간 약 300억 달러(약 32조원)의 대미 무역 흑자를 기록하는 우리에게 강한 통상 압박이 들어올 것이라 봐야 한다. 반덤핑 및 상계관세 부과, 지식재산권 보호 강화, 국가 안보를 근거로 한 수입 규제 등은 당장 사용 가능한 수단이다.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는 자유롭게 물건을 사고팔며 관세를 철폐하자는 모든 자유무역협정이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철회와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일련의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탈퇴까지 불사한다는 입장이다. 아마도 우리에게는 동식물 검역 완화와 쇠고기 연령 제한 해제 등을 요구할 텐데 유전자 변형 식물(GMO) 관련 규정과 현재 쌀 관세율 513퍼센트 등을 다 풀어줄 수도 있다. 중기적으로는 우리의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업종에 비상이 걸렸고 물동량이 줄어든다는 점에서 항공과 해운업종도 타격이 불가피하다.04. 원하는 게 달러 강세야, 달러 약세야?여기까지만 보면 그러려니 할 수 있다.하지만 마지막 퍼즐인 통화 정책에 대한 입장이 우리를 무척이나 헷갈리게 만든다. 결론부터 말하면 트럼프가 원하는 것이 강달러인지, 약달러인지 알쏭달쏭하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니까 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 거다.당초 트럼프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맹비난했다. 오바마 정권이 사용해온 초저금리 정책이 미국을 망쳤고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켰으니 당장 금리를 올려 저축한 사람들이 살기 좋게 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TV 대선 토론에 나와서는 ‘저금리는 경제를 살리는 데 필요하며 자신도 상당 기간 저금리 정책을 원한다’고 했다(저금리는 달러 약세, 고금리는 달러 강세라고 이해하면 좋다).이뿐만이 아니다.트럼프는 지속적으로 현재 재닛 옐런 연준 의장에 대해 임기인 2018년 2월까지만 두고 연임시키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연준 위원들도 금리 인상을 외치는 매파들로 채우겠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달러 강세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면 각종 모순적인 상황이 나온다. 우선 트럼프는 줄기차게 보호무역주의를 외쳐왔다. 그렇다면 ‘메이드 인 USA’를 싼값에 수출해야 하고 달러 약세는 필수이다. 게다가 트럼프는 가장 먼저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했다. 위안화 약세를 위안화 강세로 만들어 중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건데, 스스로 달러 강세를 만들어간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또 하나, 지금 트럼프에게는 상당 기간 낮은 금리가 필요하다. 엄청난 국가의 돈을 푸는 초강력 재정 정책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1조 달러짜리 인프라 투자를 제시했다. 그런데 이런 천문학적 재원을 마련하려면 엄청난 빚을 져야 하고(국채 발행), 금리가 오를수록 정부가 내야 하는 국채에 대한 이자 부담은 커진다. 이런 상황에서 기준 금리를 무자비하게 올리는 걸 원한다는 건 모순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트럼프는 공격적인 감세 정책을 천명했다. 그 정책대로 간다면 연방 정부의 세수가 연간 1조 달러 정도 감소하는데 이런 식이라면 적극적 재정 정책을 펼칠 수도 없다. 따져볼수록, 생각할수록 미로에 빠져드는 것만 같다.05. 제국은 결국 ‘트럼플레이션’으로 가나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트럼프가 생각하는 미국 경제의 모습은 인플레이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미 상당수 경제학자들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일명 ‘트럼플레이션(Trumpflation, Trump+Inflation)’이라는 신조어도 만들어져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트럼플레이션의 첫 번째 목적은 ‘판타지’이다. 명목 가격 상승을 통해 미국인들에게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읽힌다. 가령 100만원 받는 명목 임금이 130만원으로 오르고, 5억원 하는 명목 집값이 6억원으로 오르면 사람들은 뭔가 잘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둘째 목적은 공격적인 재정 정책에 뒤따르는 국가 부채의 실질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쉽게 말해 화폐 가치를 떨어뜨려 1조 달러 부채의 실질 가치를 한 6000억 달러로 낮춘다는 의도이다. 로마제국 황제들이 즐겨 사용한 수법이다.그런데 이걸 완성하려면 필연적인 조건이 있다. 바로 ‘달러 약세’이다. 달러 약세가 돼야 미국 기업들이 살아나고 그 어마어마한 무역 적자를 해소할 수 있다. 달러 약세가 돼야 보호무역주의도 성공할 수 있고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를 커버할 수 있다. 그렇기에 트럼프 입장에선 어떤 식으로든 미국 연준의 기준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춰야 한다. 물론 인플레이션은 필연적으로 시중금리 인상을 만들지만 그나마 기준 금리라도 잡아놓으면 인상 폭을 줄일 수 있고, 국채에 대한 이자 부담을 덜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달러 약세의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향후 미국 달러화가 초강세가 된다면 트럼프의 경제 정책도 대대적인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봐야 한다.그런데 앞으로 달러 약세가 실현되면서 트럼플레이션이 본격화되면 미국 경제에 어떤 흐름이 전개될까? 긍정적인 시나리오는 정말로 경기가 살아나고 기업 실적도 좋아지면서 주식도 오르고 부동산의 실질 가치까지 오르면서 완벽한 경제성장이 완성되는 그림이다. 일단 자본은 현재 채권시장에서 빠져 나와 주식시장으로 넘어가고 있고, 월가에 대한 규제 완화로 금융자본은 매우 고무적인 상태이다. 그러나 정반대 시나리오도 있다. 대표적인 우려가 재정 적자로 인한 엄청난 부채의 증가이다. 실질적인 경제 성과보다 국가 빚이 더 빠르게 증가한다면 트럼프의 미국 경제는 한 1년 정도 반짝하다가 그대로 폭락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역대 제국이 망할 때는 항상 기축통화의 붕괴와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있었다. 트럼프의 미국 경제는 과연 어디로 가는가. 두 가지만 확인하자. 바로 인플레이션의 강도와 달러 가치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적당한’ 인플레와 ‘적당한’ 달러 약세이다. 하지만 트럼프가 ‘적당한’이란 단어와 워낙 거리가 멀기에 너무 걱정이 된다. 투자자들은 당분간 트럼프가 꾸미는 ‘탐욕의 유혹’에 주의하자. 그야말로 본격적인 ‘사기장’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