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가 아니라도 괜찮아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이제 소고기 좀 썰어야 한다는 통념을 깰 때도 됐다. | 스테이크,파인다이닝

“‘아라카르트(A La Carte)’, 즉 단품 메뉴는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테이블당 산출해야 하는 매출액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손님 입장에서는 코스 메뉴를 택하는 게 더 이득입니다. 코스 메뉴에는 모든 음식이 이미 결정된 ‘원 코스’의 테이스팅 메뉴와 ‘프리픽스(Prix Frix)’라고 미리 정해진 금액 안에서 코스별로 원하는 요리를 고를 수 있는 메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후자가 손님 입장에서 취향껏 음식을 고를 수 있고, 요리사 입장에서는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주방 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국내 미식 시장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많은 레스토랑이 프리픽스 메뉴를 고수하길 바라지만 현재 원 코스 메뉴로 편중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러한 선택을 한 레스토랑이 더 각광받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지난달 파인다이닝에 관한 취재를 하던 당시 메르씨엘의 윤화영 셰프가 들려준 이야기다. 실제로 원 코스 메뉴는 전 세계 다이닝 트렌드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다. 영국의 지는 “한때 파인다이닝의 상징이었던 아라카르트 메뉴가 신임을 잃었다”라고 표현하며, 이러한 경향을 다소 격양된 논조로 풀어냈다. 미슐랭 별을 받은 레스토랑을 필두로 전 세계 파인다이닝들이 단품 메뉴를 없애고 원 코스로 변경하며 메뉴판을 간소화한 이유는 단순하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손님이 어떤 음식을 주문할지 예상할 수 없어 필요 이상의 식재료를 준비해야 하니 필연적으로 식재료가 낭비된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식재료만 낭비되는 게 아니다. 식재료를 다듬어 밑작업하고 소스를 끓이는 인력 또한 상당 부분 투입된다.가뜩이나 서비스 측면에서 유지비가 많이 드는 파인다이닝은 지속 가능한 레스토랑 운영을 위해 과감히 메뉴판의 숫자와 활자를 털어냈다. 어떤 레스토랑은 ‘카르트 블랑슈(Carte Blanche)’를 표방하며 아예 백지에 가까운 메뉴판을 내기도 한다.국내 파인다이닝의 행보도 엇비슷하다. 필자는 이달에 게재된 파인다이닝 특집 기사를 기획할 때 음식을 서비스하는 방식, 즉 원 코스, 프리픽스, 아라카르트로 분류해 소개하려 했다. 그런데 프리픽스 코스 메뉴를 갖춘 레스토랑이 몹시 드문 데다 그마저도 빠른 시일 내에 원 코스로 메뉴를 개편할 계획이라 하여 포기했다. 원 코스 메뉴가 미식계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박무현 셰프가 이끄는 무오키도 원 코스 메뉴 체제로 운영한다. 그런데 지금 메뉴가 본래 의도보다 덜 단순화된 형태라고 한다. “제가 워낙 오리고기를 좋아해서 메인 요리로 오리만 내고 싶었어요. 그런데 밀리우에서 근무할 당시 한국 사람 대부분이 스테이크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제 고집대로 메뉴에서 스테이크를 배제한다면 손님들이 다시 찾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생각에 미쳤죠. 그래서 메인 요리만큼은 오리, 양, 소 이렇게 세 종류로 구성해 선택권을 주고 있어요.”남아공 케이프타운에 있는 레스토랑, 더 테스트 키친에서 경력을 다진 박 셰프는 아프리카라는 지리적 여건 덕에 스프링복, 사슴, 비둘기, 호로새, 야생 멧돼지 등 다양한 육류를 다룰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귀국하여 제주 해비치 호텔의 레스토랑 밀리우를 맡고 나서 받은 문화적 충격 중 하나가 바로 이 육류와 관련이 깊다고 한다. “우선 특수육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토끼, 메추라기, 꿩을 제외하고 고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는 특수육을 여러 경로로 찾았으나 여의치 않았죠. 차선책으로 토끼를 택했습니다.” 박 셰프는 토끼 고기를 소금물에 담갔다가 꺼내 훈연하여 저온 조리해 냈다. 그런데 그 음식이 유난히 나갈 때와 같은 모습으로 주방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아예 내놓자마자 물리는 손님도 있었다고 한다. “코스에 속한 음식이니 별 의심 없이 주문해 코스대로 먹다가 토끼 고기를 받고 적잖이 당황스러웠나 봐요. 아예 시도도 하지 않고 물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당시 박 셰프의 토끼 요리는 스펙트럼이 한층 넓어진 국내 육식 트렌드를 대변하는 메뉴로 뉴스에 오르내렸지만, 그 이면에는 요리사와 일반 대중 사이에 좁혀지지 않는 인식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메인 요리 중 스테이크를 고르는 비율이 90%에 육박합니다.” 메르씨엘 윤화영 셰프가 제시한 수치는 조금 과장을 보탠 것이긴 하지만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경험한 결과에서 산출한 것이다. 오리, 돼지, 양, 생선 등 코스마다 네 종류 이상의 메인 요리를 다채롭게 제시했으나 결과적으로 스테이크의 주문량이 압도적이란 말이다. “안등채라고 들어봤나요? ‘안심, 등심, 채끝’을 의미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부위죠. 이 부위가 아니면 소고기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양식 레스토랑에서는 소가 아니면 고기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셰프들끼리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순간 가슴 한쪽이 뜨끔해지면서 어떤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왜 레스토랑만 가면 스테이크를 찾는 걸까.“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게 여전히 특별한 일이기 때문 아닐까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일이 잦을 경우 스테이크에서 벗어나 다른 육류 요리도 시도해볼 법한데, 많은 사람들이 기념일에 맞춰 1년에 두어 번 레스토랑을 찾으니 이왕 온 거 스테이크를 먹고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윤화영 셰프가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추론했다. 그는 특히 한국 사람들이 스테이크 중에서도 안심을 선호한다고 한다. 소 한 마리를 잡으면 얻을 수 있는 안심의 양은 6kg 안팎. 총 고기양의 2%도 안 되는 양이다. 그러니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으며, 한우를 고집한다면 재료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안심은 손질하고 나면 자투리 부위가 40% 정도 발생합니다. 등심은 20%가 넘고요. 그나마 채끝이 15%로 손실이 적어서 레스토랑에서 많이 활용하는데 그럼에도 비용을 맞추기 어려워서 스테이크를 선택하면 추가 금액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때로 그 추가 금액이 코스 가격의 절반에 이르기도 한다.콩피, 테린, 햄, 소시지 등의 샤퀴테리를 선보이는 랑빠스81은 재료와 조리법이 파인다이닝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그럼에도 전지오 셰프 또한 한때 스테이크를 해야 할지 심도 있게 고민해야 했다. “프랑스 음식점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으레 스테이크가 있을 줄 알았나 봐요. 프랑스 음식은 코스로 나오고 메인은 스테이크라는 고정관념이 은연중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초반에 스테이크를 찾는 손님이 많았어요. 특히 기념일에 자리를 예약한 손님들이 스테이크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죠. 자꾸 이런 일이 생기니 정말 스테이크를 해야 하나 싶어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어요. 연남동이라는 지역 특성상 음식 가격대를 높게 책정하지 못하니 자투리 고기를 망치로 두드려서 넙적하게 펼쳐 굽는 스테이크가 가장 적합해 보였죠. 그런데 문제는 한국 사람들이 스테이크는 자고로 안심처럼 부드러워야 한다고 인식하잖아요. 괜히 역효과 날까 봐 접었어요.” 전지오 셰프가 메뉴에 스테이크 없이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겪은 어려움을 토로했다.윤화영 셰프 또한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 등의 기념일만큼은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를 메뉴에 올린다고 한다. 그날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 중 상당수는 연간 레스토랑 방문 빈도가 낮은 만큼 상대적으로 익숙한 안심 스테이크를 선택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렇듯 난공불락의 성처럼 견고한 기호는 아무래도 소고기가 다른 고기보다 비싸다는 인식 때문이 아닐까. 비싼 돈 내고 레스토랑을 찾은 만큼 같은 값이면 더 비싼 음식을 먹는 게 이득이라는 일종의 보상 심리가 작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소가 다른 고기보다 비싸기도 하고. 역으로 이런 의문도 든다. 소고기가 그중 가장 비싼 식재료이며 이미 입맛에 맞다고 검증됐거늘, 왜 굳이 다른 고기 요리를 선택해야 하는 걸까.“소고기는 맛의 짜임새가 견고한 만큼 잘 구워서 소금을 찍어 먹는 게 가장 맛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스나 가니시 같은 다른 무언가를 곁들일 필요가 없죠.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소고기 스테이크를 파인다이닝에서 다루는 경우가 매우 드뭅니다. 이는 셰프의 터치보다 재료 본연의 맛의 짜임새가 워낙 굳건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유명한 셰프가 있는 레스토랑에 가는 이유는 그 셰프가 만드는 요리가 궁금해서일 텐데 거기서 굳이 스테이크를 선택한다는 건 아쉬운 일인 셈이죠. 어쩌면 셰프가 자신의 실력과 개성으로 완성한 음식을 먹는 게 훨씬 더 즐거운 일 아닐까요?” 윤 셰프는 실제로 스테이크보다 다른 메인 요리를 택한 사람들이 전달하는 만족도가 더 높다고 전했다. 스테이크는 익숙한 음식이어서 그 맛에 대한 기대치가 이미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반면 다른 육류 요리는 우리가 기존에 알던 것과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차원의 맛을 이끌어낸다. 우리가 여태껏 알던 닭, 오리, 양, 돼지가 아닌 것. 주방에서는 이런 식재료의 단점은 가리고 장점을 부각하되, 부족한 부분은 메우기 위해 소스를 끓이고 곁들일 식재료를 조리한다. 사실 이들 요리가 스테이크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인력, 식재료를 잡아먹는다. 수요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고생스러운 고집을 이어가는 이유를 윤 셰프는 레스토랑이 단순히 ‘스테이크하우스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찾는 분들이 있어 스테이크를 둘 뿐입니다. 스테이크하우스가 아닌 프렌치 레스토랑으로서 아이덴티티를 끌고 가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할 뿐입니다.”윤 셰프처럼 손님의 요구를 받아들이되 꾸준히 다른 육류 요리를 제안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예 선택지에 소고기를 두지 않음으로써 특수육을 시도하게끔 하는 경우도 있다. 모수의 안성재 셰프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안 셰프는 메인 요리로 초겨울까지 메추라기를, 현재는 야생 오리를 내고 있다. “프렌치 레스토랑의 가장 큰 매력은 와인을 페어링하며 식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파스타 같은 탄수화물이 아니라 소, 돼지, 양, 닭, 오리 등의 다양한 고기에 어울리는 와인을 곁들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죠. 가령 화이트 와인에 닭고기를 곁들이면 더욱 완벽한 식사를 즐길 수 있는데, 닭이 싼 재료라는 통념 때문에 소를 택하는 경우를 보면 안타깝습니다. 소를 과감히 포기함으로써 훨씬 더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데 말이죠.” 윤 셰프의 말이 머리에 콕 박히면서 어떠한 깨달음을 남긴다.“작년에 토끼로 스튜와 파테를 내다가 또 다른 걸 하고 싶어 뺐어요. 그런데 토끼 요리가 사라진 걸 아쉬워하는 손님이 꽤 있더라고요. 처음에 많이들 꺼려했던 모습을 기억하기에 이러한 변화가 놀라웠어요. 양꼬치가 유행하면서 덩달아 레스토랑에서 양갈비가 스테이크처럼 기본 메뉴로 자리매김했잖아요. 덜 익혀 핑크색을 띠는 돼지고기 앞에서 더 이상 위생을 논하지도 않고요. 다른 특수육도 언젠가 이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요?” 서양식 특수육 요리의 최전선에 있는 전지오 셰프의 전망은 밝다. 레스토랑과 셰프들의 시도와 노력이 거듭되어 새로운 경험과 신뢰를 켜켜이 쌓는다면 조만간 셰프와 일반 대중 사이에 존재하는 의식의 간극이 좁혀질 터이다. 그렇다면 국내에서도 미디엄 레어로 구운 비둘기 고기에 부르고뉴 혹은 바롤로 와인을 곁들여 즐기는 것이 가능한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충분히 가능한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