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의 깊이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이순재는 그저 평생 열심히 한 배우로만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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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용준(이하 민) 요즘 노희경 작가의 <라이브>에 출연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순재(이하 이) 지난번에 출연하기로 약속했다가 다른 드라마 때문에 못 했거든요. 당시에 노희경 작가가 정말 사정했는데, 사실 나도 하고 싶었다고. 제대로 쓰는 작가니까 정말 같이 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하게 됐네요. 3월 10일이 ‘첫방’이에요. 일선 경찰관들 얘기인데 정말 많이 관찰하고 공부했더라고.

경찰 지구대 이야기라고 들었는데.

경찰의 제일 하부 조직이지. 각광받지 못하고 밑바닥에서 고생하는 일선 경찰 얘기를 조명한 거예요. 개인적인 애환도 그리고.

어떤 역할을 맡으셨나요?

거기 남자 주인공 배성우 아버지. 종옥이가 내 며느리고. 둘이 이혼한 사이인데 며느리가 시아버지랑 친아버지처럼 가깝게 지내요. 사돈댁 둘이 동시에 작고를 했거든. 우리 마누라도 와병 중이고. 아들이 경찰인데 조금 날라리라 사고를 좀 치고 그래요.

엊그제 선생님이 출연하시는 연극 <앙리할아버지와 나>를 예매해서 봤어요. 그런데 오늘 오후에도 무대에 서신다고요. 연세가 적지 않으신데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아요.

버티고 있는 거죠.

신기주(이하 신) 사실 연극은 집중력이 중요하잖아요.

원래 로렌스 올리비에가 연극, 영화, TV, 세 군데 다 해본 사람인데, 그 사람이 영화는 감독 예술이고 TV는 작가 예술이라면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했어요. 본인도 연극부터 시작했는데, 대단히 사실적인 규정이에요.

사실 배우 경력을 연극으로 시작하셨잖아요. 첫 연극이 <세일즈맨의 죽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하셨던 연극에서 받은 출연료 봉투는 열어보셨나요? 아직까지 열어보지 않으셨다는 말을 들어서요.

이제 나는 기억도 못 해. 1978년에 현대극장에서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 개관 프로로 했던 건데 평가가 상당히 좋았다고. 공연 기간을 더 연장했으니까. 평가가 좋았던 덕분에 처음으로 출연료라는 걸 받았어요. 1956년도 대학교 3학년 때 연극을 시작했으니 20년 만에 처음 출연료를 받아본 거예요.

그럼에도 어떻게 계속 무대에 섰을까요?

우리는 그냥 좋아서 했던 거지. 돈 벌려고 하는 건 아니었어요. 어차피 돈 나올 곳도 없고. 그 당시 전문 극단에 있던 대선배들도 연극 갖고 생활이 안 되더라고. 젊었을 때는 한두 번 정도 연출에도 참여해봤는데, 요즘 같으면 젊은 친구들이 오면 어른들이 밥도 사주고 그렇잖아요. 그때는 그 누구도 커피 한 잔 안 사주더라고. 오히려 나중에 우리가 차를 대접했어. 수익이 없어서 그런 거야. 연극 대박 쳐도 만원짜리 한 장 주는데 그거 갖곤 생활이 안 되니까. 대부분 가족까지 부양하는 상황이라 뭐, 이 양반들이 마음이 없어서가 아닌 거지.

그저께 연극 볼 때 객석에 빈자리가 없는 거 같았어요. 어린 관객도 많았는데 연세가 있으신 관객도 꽤 많아 보이던데요.

상황이 괜찮아요. 젊은 친구하고 나이 먹은 사람이 같이 나오는 드라마라 젊은 친구들도 많이 오고, 쌍방의 조건이 맞아서 관객이 꽤 차더라고. 사실 우리가 동숭동에서 중년 이상의 관객을 비교적 잘 끌어들이는 장본인이에요. 신구 씨하고 같이 동숭동에 잘 안 오는 양반들을 우리가 끌어당겼다고. 손숙이랑 같이 하는 <사랑별곡>도 마찬가지고. <사랑해요 당신은>도 말할 것 없고. 거의 중년 이상 관객들이 꽉꽉 차니까.

사실 영화에 비해 연극을 보러 가는 건 쉽지 않은 편인데도 말이죠.

제대로 구성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면 손님이 있어요. 관객이 없는 게 아니에요. 옛날에 없었지만 요즘 와서 대폭 늘어난 관객층이 여성이에요. 60년대에는 여성들이 극장에 와서 연극 볼 경황이 없었다고. 생활 조건이 그랬으니까. 아침에 가족들 밥해 먹이고 점심때 애 점심 먹이고, 시부모도 모셔야 돼. 저녁에 빨래해야 돼. 저녁에 또 밥하고. 그러니 언제 극장에 와서 연극을 봐요. 명동극장에 80% 이상이 남자였지. 여자는 거의 없었어. 젊은 애들도 별로 없었고. 돈이 없으니까. 근데 지금은 오히려 70%가 여성이고 젊은 관객이에요. 조건이 확 달라졌어.

덕분에 어린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가벼운 연극이 많이 만들어지는 경향도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2000년도에 <세일즈맨의 죽음>을 2시간 40분으로 만들어서 공연했어요. 그때도 관객이 괜찮게 찼다고. 이번에도 그래. 서울에서도 다 채웠어. 그러니까 작품을 제대로만 만들면 관객이 있어. 그런데 그 좋은 작품을 굳이 비틀고 이상하게 만드니까 관객들이 봐도 이해를 못 하는 거지. 어떤 건 너무 치졸하거든. 되지도 않는 코미디나 하고 있고. 작품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배우 연기가 돋보이도록 연출해서 주제를 전달하면 관객들이 충분히 올 수 있어요. 그런데 전부 이상하게 만들어서 문학성이나 철학성은 전혀 없고 형식만 보여. 연출이 차고 나오는 거야. 그건 뒤로 가야 돼. 그러려면 연극이 아니라 영화를 해야지. 이상한 장치나 만들고 기본기도 갖추지 않은 배우들을 무대에 세우니까 안 되는 거야.

제대로 해본 경험이 있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데 젊은 연출가들은 관객을 믿지 않고 딴짓을 하려 드는 것처럼 보이니 답답하시겠네요.

나중에 나름의 예술적 방향과 방침을 설정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인 스탠드는 마스터하고 난 다음에 해야지. 그것도 안 되는데 이상한 것부터 하는 거야. 그러면 과연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만드는 거냐.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니더라고. 이름만 빌리는 거야.

어떻게 보면 연극이 각광받지 못하는 상태라 불가피한 상황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옛날에는 연극 기획을 동인지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흥행적 조건을 염두에 두니까. 그리고 창작극 중심으로 재미있는 연극을 만들어 롱런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봐요. 어쨌든 돈이 있어야 되니까. 하지만 장기적으로 그런 규모로는 버틸 수 없어. 그러니까 명동예술극장, 국립극단, 시립극단 같은 공영 단체에서 일반 극단이 못하는 걸 해줬으면 좋겠다고. 배우가 직접 명대사를 읊는 연극을 보면 감동받는데 그런 걸 안 한다는 거지. 사실 스토리는 간단하면 돼요. <햄릿>도 간단해. 복수지. 결국 연극은 배우의 연기를 보러 오는 거예요. 연기를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부수적 조건이 따라가야 되는데, 배우 말고 다른 조건이 먼저 보이면 그게 무슨 연극이야.

액자가 너무 화려해서 그림이 안 보이는 거네요.

최소한 원작이 제시하는 의미를 바탕으로 자기 해석을 해야 되는데 전혀 엉뚱한 걸 해. 그냥 자기 걸 한다고. 그런 용기를 가지려면 그 작품 위로 올라서야 돼. 내가 보기엔 만용이라고. 그러면서 지들끼린 자화자찬하지. 옛날 건 고루한 거 같고, 그런 건 새롭게 보인단 말이야. 하지만 알맹이를 따지면 차이가 엄청나. 결국 셰익스피어 같은 고전의 본질로 따질 때 과연 그 본질을 제대로 표현했느냐는 말이야.

결국 남겨야 될 뼈대를 남기면서 새로운 살을 붙였느냐는 의미겠죠.

사실 셰익스피어 고전의 무대 장치는 이제 다 영상으로 커버할 수 있어요. 효과도 좋고, 얼마든지 장비를 바꿀 수도 있고. 나도 백그라운드를 전부 영상으로 써봤는데 얼마든지 가능하더라고. 호화로운 세트를 안 세워도, 무대에 영상만 있어도 살아난다고.

공간감은 주고 배우의 연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거죠.

결국 배우 훈련이 우선돼야 돼. 대사 한마디 제대로 수정 못하고, 캐릭터 설정 하나 할 줄 모르면서 연습만 하고 있더라고. 몇 년 전에는 대학교수들이 모여서 안톤 체호프 작품을 공연하는데 실소를 금할 수 없더라고. 이게 희극인데 슬랩스틱 코미디로 착각하고 있어. 희극 연기를 제대로 모르는 거야. 결국 내 앞에 있던 점잖은 친구가 1장 끝나니까 바로 가버리더라고.

브라운 재킷 마시모두띠. 니트 터틀넥 자라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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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에 처음 출연하신 게 56년도라고 들었습니다.

방송국이 56년에 생겼는데 그때 두어 번 하긴 했어요. 그리고 61년도에 KBS가 생기면서 한국 TV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지. 유치진 선생의 희곡 <나도 인간이 되련다>가 개국 특집 창작극으로 올라갔지. 우리 선배들이 참여해서 우리도 거기 끼어서 처음 하고. 그러다가 64년도에 9명이 전속 배우가 된 거지. 그런데 전속 배우라면 뭘 줘야 할 거 아냐. 계약금이든 뭐든. TBC가 그걸 처음 시작한 거야.

그 당시 연극에서 TV로 진출하는 배우들이 생겨나면서 직업적인 현실이 급변하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사실 우리가 학생 시절에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외화 때문이에요. 그 당시 셰익스피어 영화, 명작 영화, 명인들의 자전 영화 같은 것들. 그때는 한 번 보고 극장을 나가는 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앉아서 볼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좋은 걸 보다 보면 괜찮다고 느끼지. 예술성도 상당해 보이고. 그러니까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된 거고.

당시 어떤 배우의 팬이셨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사람이 햄릿을 연기했지만 로렌스 올리비에가 ‘죽느냐 사느냐’를 할 때 전율이 오더라고. 마음에 딱 손을 얹는 느낌인데, 정말 예술이구나 했지. 나중에 알아보니 당연한 거였지. 우리는 그때 예술가라 인정하지 않을 때라 그저 딴따라였는데, 로렌스 올리비에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 대우를 받는 배우였더라고.

연기도 철학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물론이지. 그건 우리 주임 교수였던 고형곤 박사가 한 얘기예요. 당시에 한국 영화가 일천한 단계라 우리끼리 모여서 연극이라도 하자고 했어요. 창작극으로는 안 하고 전부 고전을 갖고 했어. 셰익스피어, 아서 밀러, 손턴 와일더, 이런 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연극을 했어. 안톤 체호프는 이념 문제가 걸릴 가능성이 있어서 못 했고. 문학성이 있는 작품 위주라 흥행을 위한 연극은 아니었다고. 그러니 수입은 전혀 없었지. 그러다 KBS가 생기면서 연극쟁이들이 대거 TV로 전향한 거야. 이건 출연료가 있다 이거야.

먹고살려고.

그 1세대가 우리야.

정말 쟁쟁한 이름들이네요. 이낙훈, 오현경.

연출가로는 이기하, 황은진, 허규, 죽은 이남섭까지, 이 사람들 다 1세대지.

결국 TV가 직업 배우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든 매체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연극배우도 직업 배우는 직업 배우지. 다만 수익성이 없었던 거지. 정말 몇몇 배우 외에는 생활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고. 그나마 생활에 안정적 기반을 유지한 게 TV 덕분이란 말이야. TBC로 와서 자리가 좀 잡혔고. 사실상 TBC 시절은 내 집에 있는 거라 생각했지, 고용돼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60~70년대에는 영화에도 왕성하게 출연하셨어요.

TBC 이후에 영화계에서 우리를 주목한 거야. 50년대 후반부터 한국 영화가 컬러로 바뀌면서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어. 최무룡, 김진규, 이런 양반들을 중심으로 내실 있고 좋은 연기자들이 나왔으니까. 그러다 60년대 중반에는 신성일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나오면서 청춘물이 올라왔고. 그러다가 TV에서 우리가 하는 걸 보고 데려다 쓰기 시작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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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10편 이상의 출연 영화가 개봉하기도 했던데, 그만큼 촬영도 타이트하게 진행됐겠죠. 그렇게 바쁘게 스케줄을 소화한 게 배우로서 도움이 됐을까요?

밤새우는 노하우가 생겼어. 한 달 내내 제대로 자는 시간이 없었거든. 20일을 밖에서 돌아야 되니까. 그때는 열정이야. 영화면 영화, TV면 TV, 연극이면 연극, 어딜 가서도 떨어져 보여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있었다고. 나름 자존심을 갖고 있었단 말이야. 나름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이라 스타가 되려는 사람들과는 좀 달랐어. 실력 있는 배우가 되겠다는 거지. 맡기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배우.

연기를 오래 할수록 실력이 느나요?

늘죠. 왜냐하면 연기라는 게 무조건 연습이거든. 학교에서 학생들과 하는 것도 결국 연습이에요.

어느 순간에는 한계에 부딪히기도 합니까?

자만에 빠졌을 때. 나는 이제 배우로 다 컸다. 내가 최고다. 이런 인식에 함몰되면 정체되는 거야. 연기라는 게 완성이 어디 있어. 지금 해도 안 되는 게 있는데. 끊임없이 개발하는 거야. 축구 선수하고 똑같아. 우선 기본기를 확보해야 돼. 기본기가 뭐냐. 화술부터 시작해라. 말부터. 그리고 경험할수록 확대되는 거야. 작품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져야 돼. 내 역할의 모든 조건이 그려져야 돼. 이 사람 키는 얼마나 되고 인상은 어떻고, 콧수염이 있는지 없는지, 지적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다 나와야 돼.

손해 보며 살자. 평소 이런 생각으로 사람들을 대한다고도 하셨어요. 롱런하려면 겸손과 오만을 경계하는 태도가 중요하잖아요.

다른 직종도 마찬가지지. 사회적으로 어떤 지위에 올랐다고 건방 떨고 자만하면 덫에 안 걸리나. 이 사회에도 팽배하잖아. 직위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편의를 권력으로 착각하면 안 돼. 국회의원들이 퍼스트 클래스 타고 가는 건 권리가 아니야. 편하게 가서 열심히 일하라는 거지. 국회의원이니까 타는 거 아니라고. 이게 잘못됐다는 거야.

나영석 PD랑 젊은 예능 프로를 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이런 태도 때문인가 봐요. 내가 선배니까 내 앞에서 이런 얘기하면 안 돼, 이런 태도가 없는 거죠.

그건 개인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어요. 희소가치를 가져야 된다는 사람도 있는데 일리는 있어. 베일에 싸여서 관객이나 시청자들이 궁금증을 갖고 대하게 만드는 거, 있을 수 있죠. 그 사람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환호해줄 테니까. 그런데 내 입장은 좀 달라요. 나는 모든 관객에게 필요한 사람이야. 그럼 관객들이 공연 끝난 뒤에 몰려온다고 해서 불편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야. 그 사람들이 없으면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형은 너무 쉽다, 이런 친구도 있어. 하지만 나는 고맙게 생각해. 내가 아무리 고고한 척해도 그 사람들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거야. 백작 출신 배우도 아니고. 지금 고맙다고 해서 손해 볼 거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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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에서 유현목 감독님의 <막차로 온 손님들>을 본 적이 있어요.

그게 내가 유 감독하고 한 대표작 중 하나예요.

굉장히 힘든 청춘에 대한 얘기인데, 사실 그 작품을 보면서 이순재라는 배우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구나 새삼 생각하게 됐어요.

그게 다 TBC 역사가 없어져서야. 통폐합돼도 기록이 유지됐어야 하는데 다 없어져버렸다고. 우리 젊은 시절 흔적이 남은 게 없어. TBC 때 좋은 작품이 많았거든. 최초의 일일 연속극이 <형사수첩>이라는 수사물이었는데 내가 주인공이야. 거기서 내가 범인만 서른세 번을 했다고. 그때만 해도 범인 하면 이미지 나빠진다고 안 했어. 다들 도망간대. 그래서 뭐냐고 하니까 소녀 강간 치사 사건이라는 거야. 그걸 내가 했지. 그때 그 소녀가 얼마 전에 죽은 윤소정이야.

<광염 소나타>도 재미있게 봤어요.

그건 뭐 그렇고. 그 이전에 <초연>이라고 있어. 나하고 신성일하고 남정임이하고 셋이 한 건데, 그때만 해도 내가 영화에서 두어 번 단역을 해봤다가 그 작품으로 처음 영화계에서 주목을 받았지. 그다음에 쭉 주연, 조연으로 발탁돼서 의식 있는 영화에 출연했지.

2006년도에 <모두들, 괜찮아요?>라는 작품으로 18년 만에 영화 촬영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일종의 저예산 영화였고 감독 데뷔 작품이라 해서 오랜만에 요즘 영화는 어떤가 싶어 출연했지.

환경 변화를 크게 느끼셨겠네요.

그때만 해도 영화 쪽에서는 나를 다 잊어버렸으니까. 거의 70년대 후반에 찍고 80년대에는 바빠서 영화를 못 했어. 영화계에도 변화가 좀 있었고. 임권택도 명작 연출가가 아니었는데 80년대 침체기에 콘셉트를 바꿔버린 거야. 70년대 후반, 80년대가 영화계에선 암흑기였다고.

연기할 수 있는 영역이 사라졌다는 상실감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제일 처음 연기에 눈을 뜬 게 영화 덕분이었는데 영화 일을 할 기회를 놓친 거지. 80년대, 90년대에 좋은 작품에 참여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좀 아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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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영화 <덕구>가 개봉해요. 농촌 문제나 고령화 사회나 지금의 사회 현실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다문화 가정에 대한 문제의식도 있고, 가식이 없는 소박한 영화야. 어린애들 둘 데리고 있는 할아버지, 그 주변 인물들 얘기인데 아마 근래 나온 영화들과는 좀 다를 거야. 조금 잔잔하지. 너무 심심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영화는 장르가 많으니까. 재난 영화나 비리 고발 영화, 시대극, 아니면 폭력 영화. 아무래도 이에 못지않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영화지. 보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정이 넘치는 영화도 필요하지 않겠나. 그런데 상업주의가 강해지니까 이런 영화가 배제되지. 과거에 이만희나 유현목 같은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 나갈 기회가 있었으면 상 탔을 사람들이야.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 끝났지.

이만희나 유현목 감독은 당대의 거장 감독인데 영화를 볼 기회가 거의 없어서 대중적인 재평가가 될 기회도 없다는 게 아쉬워요.

유현목이나 이런 감독들의 영화는 주제가 강해요. 그 어려운 시절에 대한 은유적 시사성도 있고. 그게 니힐리즘 같은 시대적 울분이거든. 요즘 같으면 기가 막히게 찍었을 거야.

<덕구>는 아무래도 기본적인 설정이 있고 배우들이 많이 두드러지는 작품처럼 보입니다. 결국 배우가 설득력 있게 감정을 표현해주는 게 중요한 작품이었을 거 같아요.

이야기가 강한 건 별로 없어. 일상성을 표현하는 부분이 드라마틱한 게 어려운 거지. 배우 입장에서 제일 어려운 건 평범한 역할이야. 평범함 가운데서 적절한 표현과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데 쉽지 않아. 옛날부터 우리가 좋은 배우로 꼽는 건 <햄릿>에서 호레이쇼 역할을 제대로 하는 배우였어. 장면마다 다 나오지만 정작 자기 장면은 없어. 그럼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고. 그 역할을 얼마나 적절하게 소화하느냐, 그게 진짜 배우다 이거야. 그게 어려워. 그걸 쉽게 생각하면 진짜 맹물이 된다고. 우리가 고심하는 게 그런 문제지. 똑같은 배역을 맡아도 나이를 먹으면 눈은 어디를 보냐, 앞을 보냐, 위를 보냐, 내려다보냐, 상대방을 볼 것이냐, 말 것이냐. 대사의 톤은 어느 정도 가져가나. 우리는 이걸 다 계산한단 말이야. 맨날 할아버지만 한다 해서 다 같은 할아버지가 아니라고. 작가나 회사에선 비슷한 거 잘하시네, 이번에 또 해주세요, 이러는데 나는 그걸 또 할 수 없어. 재벌이라고 다 같은 재벌이 아니잖아. 정주영하고 이병철이 다른 거랑 같아.

그렇게 캐릭터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분석하는 이유는 잘 표현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60년 가까이 연기를 하면 결국 나라는 사람의 뭔가를 끌어다 쓰는 과정의 반복이니 소진되는 부분도 많을 거 같아요. 결국 미묘한 차이나마 끄집어내기 위한 노력일지도 모르겠어요.

바로 그거예요. 미묘하게라도 새로운 걸 만들기 위한 고민과 노력을 하는 거죠. 그게 보람이고. 아까도 말했지만 어느 작품에서 인기를 얻고 정상에 올랐을 때 안주해버리면 더 이상 발전도 안 되고 언젠가 없어지게 돼 있어. 거기서 떨어지면 자괴감이 들거든. 정상이라는 게 쉽게 올라가는 게 아니야. 옛날에는 10년, 20년 정도 걸려서 올라갔는데 요즘은 운 좋으면 툭 튀잖아. 그런데 그 수준에 걸맞은 실력이 없으면 결국 내려가게 돼 있어. 운이 좋아서 뜬 거라 올라가려는 노력과 의지가 뭔지도 모르지. 지적 표현도 안 되고.

평생 배우로 살아오면서 배운 철학, 몸으로 배운 기술, 이런 건 책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 현장에서 전수할 수밖에 없겠죠.

옛날에 우리 때는 연기론 책도 없었어. <배우 수업>도 번역된 게 없어서 일본 책 갖다가 봤어. 그런데 지금은 교본만 수백 권이잖아. 그런 거 보면 기본적으로 마스터는 돼. 근데 연기는 이론 갖고 되는 게 아니야. 이론의 인식은 필요하지만 행위를 통해서 하는 거지. 자기 신체를 연기에 활용하려면 기술이 들어가야 돼. 노하우가 있어야 되고. 알아서 되는 게 아니야. 좋은 지도자 밑에서 연기를 배워야지. 우리 때는 눈 뜨는 거부터 지도했어. 근데 요즘은 ‘대사 해봐, 오케이’ 그거 아니거든. 그건 지나가는 사람도 다 해. 배우의 표정은 그게 아니다 이거야. 정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작품이나 인물의 사상을 구체화시키려면 조금 더 정밀해야 돼. 관객에게 감동을 전달하는 것과 슬쩍 흘리는 건 강도가 전혀 달라.

<덕구>에 출연한 계기가 궁금한데요.

앞으로도 다문화 가정 얘기가 또 나오겠지만 상당히 인정적인 영화예요. 마음이 푸근하면서도 고운 심성을 촉발하는 영화고. 나는 시나리오 보면서 울먹울먹해서 사실 돈 많이 못 받았다고. 러닝 개런티 하자는데 손님이 많이 들어야 의미가 있지. 근데 작품은 좋아. 그다음에 감독이 여류 감독인데 데뷔작이에요. 이준익 감독 사단이고. 작업도 재미있게 잘했어. 애들 연기도 탁월했고.

선생님과 동시대 고민을 공유하는 노인 문제라 더 관심이 갔을 것 같기도 한데요.

고령화돼서 노인 인구가 500만, 1000만이 돼가는데 이걸 어떻게 재활용하느냐 이거야. 청년 실업 문제도 시급하지만 노인들을 활용하는 것도 국력의 문제거든. 그리고 본인들도 사회와 지역을 위해 봉사하고 서비스할 여력은 얼마든지 있다고. 문화원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노하우 전해주고, 먹고살 용돈만 있으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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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구>에서 연기한 덕구 할아버지나 <앙리할아버지와 나>에서 연기한 앙리 할아버지는 후대에 대한 고민을 하는 노후 세대잖아요. 나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고민이 있을 것 같아요.

어차피 나이 들면 자기 인생의 한계를 각오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체력이 유지되니까 지금 하는 거지, 이게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어. 그걸 미리 예견하고 주저앉는 사람이 있고, 쓸 때까지 한번 해보자는 사람이 있고.

선생님은 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가보자는 쪽인 거죠.

앙리나 덕구 할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남을 위한 조건으로 쓰는 거지. 앙리도 지병이 있는 사람인데 오히려 좌절한 대학생한테 기운을 주는 거란 말이야. 그게 어른들이 전수할 수 있는 노하우인 거야.

선생님 연세가 올해 여든넷이잖아요. <덕구>와 <앙리할아버지와 나>의 두 인물이 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시는지.

어렴풋이 늘. 언제 가느냐가 문제지. 생각하지 말자는 얘기야. 우리 집사람이 내조한다고 몸에 좋은 거 챙겨 먹으라고 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안 죽을 거 아니니까. 정신적으로 건강한 게 건강한 거지. 그리고 나는 자신 있어. 내 행복을 갖다 쓰는 게 최고의 행복이야.

한 인터뷰에서 대사를 다섯 번 이상 잊어버리면 연기 그만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작업 현장에서 밤새우고 작업하는데 내가 미안, 다시 한번 해, 이걸 다섯 번 하면 애들한테 얼마나 피해야. 이건 자존심 문제야. 한번은 리허설 끝나고 보니까 후배 녀석이 대사를 써놓은 거야. 이거 뭐냐. 치워라. 너는 간판 여배우야. 네가 이거 보고 하면 후배들도 다 이거 따라서 해. 이건 네 자존심 문제야. 대사 못 외우는 건 네 사정이니까 못하면 관둬야지. 그렇게 훈련시켰다고. 우리끼리도 쪽지 대본은 안 돼. 자존심이 있으니까 밤새워 외우는 거야. 그래서 대본이 무지개야. 한 번 외우고 노란 색깔로 칠하고, 그다음엔 파란 색깔, 마지막에 다 외우면 까만 색깔. 그래야 경쟁이 되지. 대사 못 외우는 놈들은 일찍이 다 나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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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직진 순재, 이런 말 들어보셨는지요?

그건 애들이 갖다 붙인 거잖아. 물론 내가 걸음이 좀 빨라요. 골프 배울 때 가르치는 양반이 필드에서 빨리 걸어야 된다고 해서 몸에 뱄거든요. 궁금하니까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생각에 빨라지기도 했지. 어려운 시간 내서 왔는데 뭐 하나 더 봐야 하잖아. 게다가 연장자니까 도의적인 책임도 있고. 맏형이 알아서 하라고 하는데 누구든 일단 나서야 되니까 나선 거고. 그러니까 별명이 붙은 거지. <꽃보다 할배>는 조건만 맞으면 한 번 더 할 것 같기도 해.

재미는 있으셨어요?

꾸민 거 없으니까. 그리고 네 사람 개성이 다 달라. 나는 걱정했어. 이 넷을 묶으면 분위기가 좋게 나갈 수 있겠나. 취향과 생각이 다 다른 사람들이야. 다들 만만치 않고. 근데 역시 나이 먹은 게 있어서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니까 잘 넘어가더라고.

그런 것 때문에 우정도 느껴지고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픽션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생활의 단면만 보는 거니까.

얼마 전 메르세데스-벤츠 행사에 갔는데 박근형 선생님이 모델이시더라고요. 광고 콘셉트가 이거예요. 박근형 선생님께서 운전을 하세요. 그때 “당신의 오른쪽 빈 좌석에는 누가 있습니까?” 이런 카피가 나와요. 실제로 박 선생님의 아내분이 나오시고.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봤던 벤츠 광고 중에 가장 좋았어요. 박근형 선생님이 벤츠 광고에 나오시는 것도 따지고 보면 <꽃보다 할배>의 영향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꽃보다 할배> 찍을 때도 박근형이 아내랑 전화를 많이 했거든. 집사람이 건강이 좀 안 좋으니까 맨날 전화야. 반면에 나랑 신구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이런 편이었고. 나는 전화기도 안 가져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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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인 궁금증이 하나 있는데요. 왜 배우가 되고 싶으셨어요?

글쎄. 나는 우리 부모가 다 월남 세대라 집안에 직종의 특성이 전혀 없었지. 결국 스스로 내 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데, 나는 체격이 큰 편도 아니고 경제적 바탕이 단단한 것도 아니고. 철학과이긴 하지만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라 다른 데 가면 떨어질 것 같아서 기준을 낮춰 간 거고. 아까도 말했지만 대학교 때 취미 생활이 이것밖에 없었어. 좋은 작품, 좋은 영화, 좋은 연기를 보니까 나도 모르게 점점 저것도 해볼 만하지 않겠나 싶어서 시작했지. 그런데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보자 했는데 재미 들려서 결국 여기까지 온 거지. 만약 처음에 못한다 했으면 관뒀을 거야. 근데 잘했다 하더라고. 물론 열심히 했으니까 그런 건가 싶기도 한데, 그럼 한번 더 해봐야지 한 거고. 결국 밥을 굶더라도 덤벼들어야겠다 생각해서 뛰어든 거지.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요?

<로미오와 줄리엣>을 하고 있을 때였어. 물론 로미오는 내가 아니었고. 나는 후발로 들어갔는데 배역이 하나 있다 해서 시작했더니 이게 망했어. 출연료 준다고 했는데 한 번도 못 받았지. 부모한테는 창피해서 연락도 못 하고. 그런데 아버지가 연락도 없이 찾아왔더라고. 마지막으로 이거 꼭 해야 되겠니, 하시더라고. 길이 없다, 해보겠다고 했지. 말려도 안 될 것 같으니까, 그래, 앞으로 세상은 뭘 하든 일류가 되면 밥이야 먹지 않겠니, 하시면서 용돈 주고 가시더라고. 허락받은 거지.

혹시 지금도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배역이 있을까요?

나이 먹었으니까 역할의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꼽자면 셰익스피어의 리어. 그리고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 뭐 이 정도인데 기회가 올지 모르겠네요.

이순재의 리어 왕은 꼭 보고 싶네요.

리어 왕은 내가 세종대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과 한번 해보려고 했거든. 너무 좋은 작품이야. 그러니 제대로 해야 돼. 이것도 저것도 다 빼고 뭉뚱그려서 현대식으로 뒤바꿔놓으면 안 된다고. 배우가 그 대사를 어떻게 읊느냐에 따라 멋이 생기고 깊이가 생기니까. 그걸 제대로 해야 된다고.

62년 연기 인생 끝에 이순재는 어떤 배우로 기억될까요?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세요?

내가 번쩍번쩍 빛나서 모든 영광을 누린 배우는 아니란 말이야. 80년대 들어서 그 흔한 방송대상 하나 못 탔다고. 여러분이 기억하는 중요한 작품에서조차도 안 주더라고. 그런데 뭐, 살아보니까 그런 건 지나고 보면 중요한 게 아니야. 난 그냥 열심히 한 사람으로만 기억해주면 돼. 난 열심히 한 사람이야.

마지막 질문입니다. 행복하세요?

지금 행복해요. 평생 뭘 얻기 위해 굽실거린 적은 없어. 배역 따려고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그러다 보니까 손해도 봤어. 나도 술 좀 먹고 그랬으면 조금 더 돈도 모으고 대접받았을 텐데 술도 못 먹으니까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러나 지나고 보니까 결국 그게 큰 손해는 아니야. 아직 기력이 있으니까 열심히 해서 집사람 노후에 먹고살게 했고, 손자들 좀 도와줄 수 있게 됐고, 또 사회적으로 크게 피해 입히지 않았고, 그러면 됐지, 뭐. 뭘 더 바라. 정말로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이순재는 그저 평생 열심히 한 배우로만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