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수(이하 유) <고등래퍼2> 우승자 김하온은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었을까요?
김하온(이하 김) 선생님들 눈에는 반항아였겠죠. 그런데 저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신기주(이하 신) 학교에서 반항아인 게 맞는 거라고요?
김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해야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악수를 나누는 김과 유)
신 이 악수는 무슨 의미죠?
유 서른 살이 넘어서 깨닫고 실천 중인 저의 생활신조. 그렇게 하니까 마음이 가벼워지더라고요.
김 저는 그렇게 행동하니까(깊은 한숨) 피곤하더라고요. 선생님들이랑 대화가 너무 많아져요. 반말도 하지 않고 어떤 비속어도 섞지 않고 최대한 예의를 지켜 말씀드렸는데 버르장머리 없다고 하시니까.(깊은 한숨) 그럼 저는 똑같은 말을 또 할 수밖에 없잖아요. 예의를 지켜서 말씀드렸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면 “어디서 말대꾸야”라고 하시니.(깊은 한숨)
유 아이고, 그게 언제였죠?
김 고등학교 1학년 때요. 그런 상황에 지쳐서 학교를 그만 다니고 싶었던 것 같아요. 사실 성적은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잖아요. 성적이 안 좋아서 대학에 못 가는 것도 제가 초래한 일이고. 그래서 저는 편하게 생각했어요. ‘어차피 난 대학에 가지 않을 테니 상관없지’ 싶었거든요. 선생님들은 그런 저를 가만히 두지 않으시더라고요.
유 왜 처음부터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나요?
김 그 길이 너무 뻔했어요. 좋은 중학교,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편한 노후 생활. 그리고 그 길을 가려는 사람들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요.
신 그 뻔한 길에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도 있는데.
김 그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다들 자신만의 날개가 있는데.
신 사람들이 김하온의 노래를 들으면 날개를 찾을 수 있을까요? 날개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될까요?
김 다 때가 있죠. 때가 되었을 때 제 노래를 들으면 작은 힌트를 얻을 수도 있고요.
신 김하온의 노래를 들으면 ‘나도 날 수 있었나?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도 해요.
김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영혼이라고 해야 하나? 나이는 문제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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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언제부터 힙합 음악을 좋아했어요?
김 중학교 2학년 때 개코 형님의 ‘될 대로 되라고 해’를 듣고요. 충격이었어요. 멋있어서 계속 따라 했어요.
신 그렇게까지 임팩트를 준 음악이 없었어요?
김 전에는 아이돌 음악을 많이 들었어요. 블락비 ‘베리 굿’에 있는 지코 형님의 랩 파트를 듣고 ‘멋있다’ 생각했는데 너무 짧아서.(웃음) ‘될 대로 되라고 해’는 처음부터 끝까지 랩만 하는 랩 송이라 임팩트가 강하게 왔던 거 같아요. ‘아, 진짜 멋있다.’
신 하고 싶다?
김 네. ‘나도 해보고 싶다’ 해서 계속 따라 하고, 노래방 가서 친구들 앞에서 불렀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그때는 ‘래퍼가 되고 싶다’, ‘가사를 쓰고 싶다’가 아니라 ‘재밌네’ 하고 계속 따라 한 정도였어요.
신 사람들이 내가 랩을 하면 좋아하네?
김 네. 노래방에서 부르고 마는 정도였어요. 중학교 2학년 때 박종완이라는 친구가 빈지노 형님의 ‘아쿠아 맨’을 들려줬는데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어요. ‘이런 음악도 힙합이라고 하는구나.’
유 국내 재즈 힙합의 정수.
김 ‘힙합은 정말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거구나’ 하고 본격적으로 힙합이라는 장르에 매력을 느꼈어요. 바로 빈지노 형의 <24 : 26> 앨범을 구입해 아버지가 영어 공부하라고 사주신 시디플레이어로 들었어요.
신 가사에 영어가 나오긴 하니까요.
김 그렇죠.(웃음) 한 곡만 들어야지 했는데, 그 자리에서 전곡을 다 들었어요.
유 명반이에요.
김 다 듣고 ‘말도 안 돼’ 했어요. 그때 벅찬 기분이 들었고, 처음 나도 가사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이야기를 써야겠다까지는 아니고요.
신 그것도 운명일까요? 하온의 가사를 보면 운명적인 걸 받아들이는 태도가 느껴져요. 지금 보면 개코의 ‘될 대로 되라고 해’를 듣게 된 것도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이잖아요. 그 순간에 그걸 듣고, 이걸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어떤 원리일까요?
김 사람마다 다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신 그때 공부가 너무 재미있었다면?
김 그럴 일은…(웃음) 공부는 시켜서 하는 거였어요.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반항심이 생겼죠.
신 초등학교 때까지는 공부는 하라니까 하는 거고?
김 네. 중1 때까지도 열심히 했어요.
유 힙합이 하온에게 자유를 줬네요.
김 네.
신 공부가 하기 싫은 와중에 무언가를 만났고 그게 터진 거죠?
김 맞아요. 전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신 내 이야기를 담은 가사를 쓰기 시작한 시점이 <고등래퍼1>과 <고등래퍼2> 사이 어디쯤일 거 같아요. 그 이전에는 다른 사람을 흉내 냈고.
김 그러면서 따라간 거죠. ‘이게 랩이구나’ 하면서.
신 내 이야기를 가사로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왜일까요? 경연에서 떨어져서?
김 차별화하기 위해 무얼 해야 할까 생각했을 때 나를 찾는 게 먼저였어요. 나는 누구일까 생각했을 때 정말 많이 헷갈렸어요. 그래서 TED 강연을 찾아봤는데 미립자라는 게 있대요. 세상 만물을 쪼갤 수 없을 때까지 쪼개면 미립자가 나오는데, 세상 만물이 이 미립자로 구성돼 있대요. 그때 내가 너이고, 네가 나구나 생각해서….
신 미립자까지 가면 너와 내가 구분이 없다는 말이죠?
김 네.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이걸 말해야 하나? 잠시만요. 너무 깊게 갈 거 같아서. (한참을 고민한다.) 하나의 삶에 진리를 찾았다고만 말할게요.
유 찾은 진리가 뭔지 궁금해요.
김 그건 각자만의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제가 말하면 너무 주제넘을 것 같아요.
유 우리는 진리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니까요?
김 네.(웃음)
신 내가 누군지 찾아 찾아 쪼개서 들어간다….
김 너와 내가 다를 바 없구나 생각했고, 거기서 다 털어놓고 시작했어요. 그리고 모든 걸 용서하게 됐어요.
유 용서요? 이해하게 된 게 아니라?
김 용서가 이해죠. 그러다 보니 굳이 화를 낼 필요성도 못 느끼겠고, 지금의 평화로운 내가 부정적이고 불필요한 단어를 써가면서 랩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해봤을 때 답은 당연히 ‘아니다’였어요.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걸 하면 돼’라고 내가 나에게 대답했어요. 그때부터 내가 보고 느끼고 믿는 걸 쓰자고 다짐했어요. 그런 생각을 할 즈음에 러시아 물리학자가 쓴 책 <리얼리티 트랜서핑>을 읽었던 거 같아요.
유 그 책이 진리를 주었나요?
김 갸우뚱했던 것들에 대해 확신을 갖게 했어요.
신 그 책은 어떻게 보게 된 거예요?
김 예전에 스윙스 형님이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책이에요. 인생을 바꿔주는 책이라고 해서 나중에 읽어봐야지 했는데, 자퇴하고 나서 문득….
유 이것도 운명처럼?
김 네. 딱 떠올랐어요. ‘책을 읽고 싶은데 무슨 책을 읽지?’ 하다 보니 ‘트랜서핑’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거예요. 찾아보니 얼핏 본 책 표지가 기억나더라고요. 한 권만 사서 봤는데, 마인드 블로였어요. 눈에 보이진 않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컨트롤할 수 있는지 알려주고, 또 우리가 원하는 현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해요. 내가 무언가를 느꼈으면 이야기해야 하잖아요. 사람들에게 알려주라고 하는 것 같아요.
신 그 책을 읽은 게 언제죠?
김 1년도 안 됐어요.
신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으려고 하다 명상을 하게 됐고?
김 명상은 그 이전부터 유튜브에서 보고 무작정 따라 했어요. 고2 학기 초에 선생님과 상담하다 명상을 한다고 했더니 신기해하셨어요.
신 명상을 하면 고요해져요?
김 네. 오늘도 잠을 한숨도 못 잤는데 2시간 동안 명상을 했어요. 몸에 힘은 없지만 정신은 맑은 상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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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고등래퍼2>의 거의 모든 미션에서 1위를 했어요.
김 그랬나요?
유 독보적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그런가, 그랬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학창 시절 제일 높은 등수와 낮은 등수의 과목이 궁금했어요.
김 아, 저 국어 전교 꼴등 해봤어요. 시험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문항 수만 확인하고 OMR 객관식 카드에 로또 하듯 체크했어요.
유 왜요?
김 귀찮았어요.
신 놀랍네요. 이런 가사를 쓰는 사람이 국어가 전교 꼴등이라니.
김 (‘헤헤’ 하고 웃었다.) 그렇게 전교 꼴등했다고 자랑하고 다녔어요.
신 국어 전교 꼴등이 이런 시를 쓴다는 거죠?
유 배신감 드는데요.
김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했어요.
유 제일 재미있었던 과목은 뭘까요?
김 고등학교 2학년 때 음악 수업 시간이었어요. 수행평가가 가창 시험인데 하고 싶은 노래를 하라는 거예요. “랩해도 돼요?” 하니까 그러라고 하셨어요. 그때 진짜 재밌었어요.
유 어떤 랩을 했나요?
김 ‘아쿠아 맨’요.
유 여학생들 반응이 굉장히 좋았겠네요.
김 에이, 몰라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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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요즘 인기를 실감하나요? 재미있나요? 할 만한가요?
김 최대한 즐기려고 해요.
유 <고등래퍼2> 이후 처음 하는 일도 많고, 많이들 알아보고, 좋아해주는 사람도 많고, 마지막 경연 곡처럼 붕붕 뜨는 기분일 것 같아요. 최근 가장 즐거웠던 적은 언제였어요?
김 공연할 때요. 많은 분들이 노래를 따라 불러주시는데 신기해요. 벅차고 신나요.
유 같은 무대지만 경연과 공연 무대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겠죠? 어떤 부분이 많이 다르던가요?
김 경연할 때는 내내 불안에 떨고 위태로웠어요. 그런데 공연은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즐기면서 하고,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아요. 공연하다가 가사를 두 번이나 놓쳤는데, 많이 창피하고 부족함을 느껴요.
유 경쟁을 초월한 듯한 하온의 모습을 보고 도사 같다고들 해요. 위태로웠다는 말을 들으니 승패에 연연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김 승패에 연연하지는 않았는데 ‘실수하면 끝이다’라는 압박감은 있었어요. 되돌릴 수 없고, 경쟁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저는 참 이상한 아이예요.
신 뭐가 이상해요?
김 상관없다고 하면서 엄청 떨었어요.
유 우승하고 펑펑 울었던 건 그동안 짓눌렸던 긴장이 풀어져서 그랬나 봐요.
김 그랬던 거 같아요. ‘댑따’ 위험한, 하지만 재미있는 외줄 타기를 끝내고 바닥에 무사히 안착한 기분이었어요. 땅을 밟고 안도감과 성취감을 느끼는데 부모님 얼굴이 딱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유 부모님은 어떤 표정을 하고 계시던가요?
김 어머니는 웃고 계셨고, 아버지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이었고, 형도 웃고 있었어요. 가족 모두가 눈물이 별로 없어요.
유 어떤 부분에서 눈물이 났을까….
김 모르겠어요.
유 ‘내가 해냈어요’ 이런 기분이었을까?
김 그런 거 같아요. 저를 믿고, 자퇴를 허락해주신 부모님에게 조금은 저를 증명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 같아요.
유 <고등래퍼2> 내내 외줄 타기 하는 기분이었다고 했죠?
김 재미있으면서도 정말 많이 떨었어요.
유 경연 동안은 그 떨림을 숨긴 건가요?
김 딱히 숨기려고 하지 않았어요. 정말 많이 떨었는데, 다들 왜 떨지 않느냐고 하더라고요.
유 긴장하고 있다는 걸 본인은 알았어요?
김 네. 굉장히 떨고 있었어요.
유 혹시 왼손잡이예요, 오른손잡이예요?
김 오른손잡이요.
유 그런데 마이크는 왼손으로 쥐더라고요. 랩을 시작하면 집게손가락으로 코를 막아요. ‘떨림을 이렇게 감추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어요.
김 오, 그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오른손으로 제스처하는 게 편해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유 영향받은 국내외 뮤지션이 누구인지 궁금해요.
김 비와이 형이오. 그분 노래를 많이 듣고 따라 했어요. ‘딕션’이라고 하는 발음, 스킬적인 부분에서는 대한민국 제일이라고 생각해요. <언프리티 랩스타2>에서 ‘The Time Goes On’을 부르는 모습이 결정적이었죠.
유 두 사람을 두고 많이 닮았다고들 해요.
김 똑같이 하려고 연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배었나 봐요. 존경하고 인정하는 분이라 그저 감사합니다.
유 따라 해서 이만큼 올라섰으니 이제 자신의 색을 찾아야겠네요.
김 노력 중이에요. 그런데 제 노래에서만큼은 누구를 따라 한 적 없어요. 가사에 내 이야기를 쓰는 것도 나 스스로가 되고 싶어서예요. 그래서 부정적인 걸 배제하려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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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어떤 가사를 쓰고 싶어요?
김 표지판 같은 거요.
신 표지판요?
김 글자가 없는 표지판이에요. 누군가 불현듯 그걸 보고 갑자기 무언가를 느끼고 행동하도록 하는 가사를 쓰고 싶어요.
신 김하온의 가사는 누군가에게 표지판이었으면 좋겠다?
김 네, 혹은 이정표.
신 그 가사가 스스로에게도 표지판이 되나요?
김 친구랑 대화하다가도 놓치고 있던 걸 깨닫잖아요. 가사를 쓰다 보면 생각의 바닥에 있던 예기치 못한 것이 튀어나와 마음에 새기게 하는 때가 있어요.
신 늘 생각하고 있던 건데 문득 말이 되어서 나오는?
김 맞아요.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건데 툭 튀어나와서 ‘맞아’ 깨닫게 하는 것들.
신 그렇게 뾰족 튀어나와서 가사가 된 건 어떤 게 있을까요?
김 ‘붕붕’에서 “난 붕 떠 like 풍선 툭 뚝 떨어져도 밑에는 쿠션 아님 ocean 바람이 날 모셔 상품이 되어버린 나의 emotion.” ‘모셔’랑 ‘이모션’이랑 라임이 맞구나가 시작이었어요. 사람들은 누군가가 감정이나 감성을 담으면 감성팔이라고 하고 그걸 깎아내리잖아요. 그게 아니라는 걸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상품이 되어버린 나의 emotion’이라는 가사를 썼어요.
유 자퇴 계획서에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겠다고 쓴 부분을 보고, 자퇴를 하는데 왜 유명해지고 싶은 건지 의아했어요. 누군가의 이정표가 되고 싶다는 말을 들으니 이제 이해가 되네요.
김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사람들이 저라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잖아요. 그래서 막연하게 썼던 것 같습니다.
신 그땐 막연했어요?
김 네. 뚜렷한 게 없었어요. 자퇴할 때는 나를 찾아야지가 먼저였어요.
신 나를 찾아야지….
김 <고등래퍼1>을 끝내고 든 생각이었어요.
유 그때 타격을 많이 받았나요? 외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던데.
김 그랬던 거 같습니다. 세상에 멋있고 재미있는 사람이 많다는 데 놀랐어요. 다른 사람과 차별화될 수 있는 나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게 여행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신 <고등래퍼1> 때만 해도 지금의 김하온과는 달랐다는 이야기네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김 네. 그때의 김하온도 저이긴 하지만, 지금의 삶이 더 흥미로워요.
유 자퇴 후 자유를 얻어서일까요, 원하는 걸 해서일까요?
김 일단 시간이 많아졌어요. 시간이 많다는 건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거예요. 그리고 무언가 시도할 수 있는 것도 훨씬 많아졌어요.
신 자퇴 계획서에 시간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시간 낭비다, 시간이 없다.
김 학교 수업을 마치면 다섯 시 반 정도 돼요. 학교가 언덕에 있었는데, 방과 후 비탈길을 내려와 집에 갈 때마다 노을이 지고 있었어요. 매일 그 모습을 보는데 너무 허탈한 거예요. 학교에서는 멍때리고 밥 먹고 친구들이랑 이야기한 것밖에 없고, 집에 오면 하는 것 없이 무기력해지고. 이건 아닌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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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두 시간 전에 하이어뮤직 공식 입단 영상이 떴어요. 멤버들이 굉장히 자부심을 갖고 있는 하이어뮤직 금 목걸이 수여식. 기분이 어떤가요?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진 않나요?
김 아직 자랑할 건 이 목걸이밖에 없어요. 일주일간 티셔츠 안에 넣고 다녔는데 이제 밖으로 빼고 다닐 수 있어서 홀가분합니다.
유 학교를 벗어나 하이어뮤직이라는 다른 형태의 조직에 자발적으로 들어간 게 의아했어요. 나와 보니 소속감이 그립거나 또 다른 울타리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생각했죠.
김 늘 같이 음악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냥, 그냥, 그냥 박재범 사장님이 너무 멋있어서요.(웃음) 그분이 회사 대표이면 믿을 수 있고 즐겁게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유 <고등래퍼2> 프로듀서였던 그루비룸이 아니라 박재범 씨 때문에 들어간 것도 의외네요. 직접적인 교류가 전혀 없었을 텐데.
김 자신은 소속 아티스트를 이용해 돈을 벌지 않는다고, 자신이 돈을 잘 벌어서 괜찮다고 말하는 영상을 봤는데, 그게 너무 멋있어서 바로 결정했어요. 믿음을 주는 사장님.
유 자퇴 계획서에도 구체적으로 경제적인 부분을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자퇴 후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나요?
김 네. 제가 번 돈으로 마이크와 음악 작업에 필요한 것들을 샀어요.
유 어떤 아르바이트였는지 궁금하네요.
김 휴대폰 가게에서 전단지 나눠주기요. 팝콘이랑 전단지를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인형 탈 쓰고 나눠줬어요.(웃음)
유 아르바이트도 고됐을 것 같고, 지금은 잠도 제대로 못 잘 만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학교 밖으로 나와보니 학교생활이 그립진 않던가요?
김 학교는 아비규환이에요. 모두가 화나 있어요. 모두가 너무 진지해요.
유 학교 밖 사회도 그런걸요.
김 그래서 바꾸려는 거예요.
유 바꾸고 싶어요?
김 네.
유 김하온의 영향력으로?
김 아뇨. 그렇지 않아도 친구들과 우리가 바꿀 수 있을까 이야기했는데 그때도 ‘운명이 허락한다면’이라고 말했어요.
신 사람들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을까요?
김 애초에 시작이 경쟁이니까요.
신 앞만 보고 달리라고 배웠으니까?
김 네. 등에 날개가 달려 있는데도.
유 우리 등에도 날개가 달렸어요?
김 네. 그런데 사람들은 달리기부터 시작해요. 그래서 두 날개가 땅에 질질 끌려요. 멀리 가면 날개가 다 닳아서 나중에는 날지 못해요.
유 그걸 언제 생각했어요?
김 최근에요.
유 그 날개를 다치지 않게 하는 방법도 알고 있나요?
김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각자의 삶에서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신 제 이야기 같네요.
김 다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그러니까 빨리 알려줘야죠.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의 ‘Find Your Wings’라는 노래를 좋아해요.(노래를 흥얼거렸다.) “날아, 넌 날아가야 해”라는 가사를 듣고 우리 모두 날개가 있는데 발견하지 못하고, 날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유 하이어뮤직은 김하온에게 어떤 날개가 되어줄 것 같아요?
김 더 많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유 무섭지 않아요? 학창 시절도, 키프클랜도 모두 또래들과 어울리는데 하이어뮤직은 모두 형들이잖아요. 회사에 들어간 건 사회인이 됐다는 거고, 진짜 경쟁을 해야 할 텐데.
김 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유 그럼 즐길 준비를 하고 있나요?
김 네. 더 큰 즐거움을 느끼고, 더 많이 도전할 수 있고, 더 많은 분들과 교류할 수 있는 곳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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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자퇴는 부모님이 단번에 허락해주시던가요?
김 “엄마 학교 그만 다니고 싶어” 했을 때 어머니는 “그래라” 하셨어요. 대신 “아버지 성격 알잖아. 세부적으로 세세하게 계획서를 써봐” 하셔서 자퇴 계획서를 써 갔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나중에 천천히 읽어볼게” 하고 가져가셨죠.
유 그걸 늘 지갑에 지니고 다니셨다잖아요.
김 굉장히 큰 사이즈로 프린트해 오셔서 제 방 벽에 붙이고 “이거 명심하면서 행동해” 하셨어요.
유 대자보만 한 크기더라고요.
신 형이 있다고 했죠?
김 세 살 터울 형이 있어요. 지금은 상병이십니다.
신 김 상병님은 자퇴 안 하셨나요?
김 네. 그러고 보니 대학교를 어디 갔더라?
유 혹시 형의 진학 과정을 보고 학교가 다니기 싫었던 건 아닐까 싶어요. 형이 고3일 때 너무 힘들어 보였다거나.
김 맞아요. 형이랑 아버지랑 많이 싸웠죠. 학교가 뭐라고, 참.
신 경쟁이 사람을 화나게 하고 있다….
김 너무 사람들을 진지하게 해요.
신 힙합, 랩의 주제가 ‘분노’인 이유도 경쟁에서 기인하는 걸까요?
김 힙합의 뿌리는 저항과 자유예요. 그런 걸 조금이나마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신 제가 알고 있는 힙합, 랩의 가사는 대부분 분노에 차 있거든요. 나를 질식시키는 세상에 대해서 욕을 하고 싸움을 거는 거죠. 잠시나마 그것을 통해 쾌감과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게 청중의 심리고요. 그게 일반적이었는데 김하온은 다른 메시지를 던진 거네요?
김 세상에 틀린 거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병재 가사가 비판적이면서 날카로운데 제가 병재 가사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본인이 진짜 느끼고, 자기가 살고 있는 진짜 삶을 얘기하는데 그걸 솔직하게 내뱉는 게 멋지다고 생각해요. 저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고요.
유 조금 걱정되는 게 지금의 하온은 사람들에게 한없이 착한 캐릭터예요. 긍정의 아이콘, 힙합 신에 떠오르는 평화의 비둘기 같단 말이에요. 언제나 평화의 아이콘은 위태로운 존재예요. 조금이라도 기대를 벗어나면 반발 심리가 클 테니까. 거기에 대한 부담감은 없어요?
김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다만 저를 너무 달관한 사람으로 보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배우는 중이고, 아직 자라는 중이라서요. 요즘은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을지 생각 중이에요. 재미있어야 많이 찾아주실 테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 재미있게, 뻔하지 않게 풀어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뻔하지 않았지만 계속 같은 걸 하면 분명 뻔해질 걸 알기 때문에 다음을 고민 중이에요.
신 ‘아직 자라는 중이니까’라. 가사만 보면 ‘달관한 사람인가? 어떻게 이 나이에 달관했지?’라는 착각을 하게 되기도 해요.
김 저는 아직 깨닫지 않았고, 정말 얕은 물에 손가락만 담갔을 뿐이에요. 다만 그렇게 알게 된 게 좋아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거예요. 그 매개체가 제가 좋아하는 랩인 거고요.
신 다들 달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달관한 척해버리면 거기에 갇히겠죠. 그러면 사람들이 하는 말에 자꾸 신경 쓰게 되고, 그 말을 따라가면 자신을 잃게 되고.
김 그렇죠.
신 개인적으로 ‘바코드’가 참 좋았어요. 한쪽에서는 현실을 직시하고, 또 한쪽에서는 위로를 더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씨줄과 날줄이 엮이는 것 같았어요. 자꾸 듣게 되더라고요.
김 세상에는 음과 양이 있잖아요.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게 있고, 뜨거운 게 있으면 차가운 게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병재가 어두운 면을 보면 저는 밝은 면을 보잖아요. 서로 다른 시선을 굳이 하나의 주제 안에 가두지 말자고 했어요. 자신의 입장으로 대화해보자, 그렇게 나온 게 ‘바코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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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요즘 사람들은 왜 이렇게 힙합에 열광하는 걸까요?
김 자유 때문이죠. 본질적으로 자유를 갈망하기 때문에. 말씀드렸듯이 힙합의 뿌리가 자유와 저항이라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 힙합, 힙합을 넘어 음악의 영향력이 더 커질 거라 생각해요.
신 어떻게 보면 슬프네요. 자유가 없는 상태가 계속될 거라는 말처럼 들려서.
김 음악이 가진 힘이 커지면서 바뀔 수도 있겠죠.
신 세상이 조금이라도?
김 네. 키프클랜은 그걸 원하고 있어요.
유 하이어뮤직은요?
김 하이어뮤직은 제가 몸을 좀 더 담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유 하이어뮤직 면접 봤을 때 어떤 질문을 받았어요?
김 어떤 뮤지션이 되고 싶느냐고 물었어요.
유 하온의 대답은요?
김 길잡이, 이정표가 되고 싶다고.
신 “바코드를 횡단보도 삼아 뛰어 넘어가야겠다”라… ‘바코드’ 가사를 들으면 두 사람의 내공이 장난이 아니에요. 분노에 멈춰 있으면 분노만 배설하고 끝날 거고, 위로만 던지면 공익 광고에 그치겠죠. 현실이 있고 위로가 있고, 그 너머에 의지가 나와야 하는데, 이 가사에서 두 사람의 내공이 40대 아저씨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어요.
유 음과 양, 흑과 백의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성향이 완전히 다른데?
김 애초에 조화로우라고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니까요.
신 응….
유 아….
유 저와는 대략 열 살, 편집장님과는 스무 살 정도 차이가 나요. 이상해 보이지만 우리도 꽤 조화로웠어요. 저희가 계속 질문을 했는데, 반대로 저희에게 묻고 싶은 건 없어요?
김 저를 봤을 때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유 인터뷰를 준비하면서는 김하온이 김하온이라는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했는데, 그냥 무념무상인 것 같아요. 인생을 마냥 진지하게 바라볼 줄 알았는데, 즐거움을 좇는 모습이 굉장히 귀엽고 응원하고 싶습니다.
김 으하하! 감사합니다.
신 작년 11월호 듀오 인터뷰에서 라종일 교수를 인터뷰했어요. 75세, 이 칼럼의 최고령 인터뷰이. 하온은 올해 19세니까 최연소 인터뷰이예요. 그런데 56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나는 두 분에게 관통하는 태도가 있어요. 될 일은 될 일이다. 라종일 교수도 산전수전 다 겪은 분 아니겠어요? 남북 관계가 어떻게 될 것 같느냐는 질문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마세요. 될 일은 됩니다”라고 하셨죠.
김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걱정은 쓸모없는 일이다. 만약 그 일이 잘될 일이면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 일이 잘 안될 일이라면 걱정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요.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아요.
신 팔순을 앞둔 노학자와 10대의 래퍼가 삶에 대해 하나의 태도를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
김 재밌네요.
신 저도 신선해요. 그리고 그 태도를 잘 공유하지 못하는 건 저 같은 40대가 아닐까 해요. 하온의 랩으로 30~40대가 위로받는다는 건 어쩌면 가장 자유롭지 못한 나이 때여서 그런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입시생들의 경쟁도 피 튀기지만 저희 세대의 먹고사는 경쟁도….(웃음)
김 그럼요. 저도 저희 아버지를 봐왔잖아요.
신 실례지만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세요?
김 디자인 쪽 일을 하시는데 묵묵히 하세요. 계속해서 수정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거절 한번 하지 않고 묵묵히 다 해주시죠. 그걸 옆에서 보니까, 하.(깊은 한숨)
신 아버지가 그런 고충을 티 내실 것 같진 않은데.
김 네.(깊은 한숨) 아버지는 “난 괜찮으니까 너네 해” 하세요. 언젠가 아버지 생일을 까먹은 적이 있는데 만취해 들어오셔서 처음으로 서운함을 표현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다음 날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내 생일은 잊어도 어머니 생일은 잊지 마라” 하셨어요. 저희 아버지는 그런 분이에요. “난 괜찮아, 너네 해” 그런 아버지.
유 집에서는 어떤 아들이에요?
김 굉장히 말 없는 아들입니다.
유 혹시 믿는 종교가 있나요?
김 무교예요.
유 인생의 여행자는 어디로 날아가고 싶어요?
김 바람 부는 대로요.
유 폭풍우를 만나면?
김 그것도 즐겨야죠. 롤러코스터라 생각하고.
신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는 이야기 자주 듣죠?
김 많은 물줄기도 결국 바다로 모이잖아요. 그것처럼 모두 날개가 있고, 날 수 있으며, 어느 곳에나 행복이 있고 어느 곳에나 평화가 있다는 걸 결국엔 모두가 다 알 거예요. 다만 언제 아느냐, 시기의 차이인 거죠. 저는 운이 너무 좋아서 그 시기가 빨리 찾아온 것 같아요.
신 부럽네요. 트랙에 올라서 달리고 또 달려야 다음 트랙이 나오거든요. 끊임없이 경주해야 하고. 언젠가는 그 트랙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어 있는데, 그 순간이 40~50대에 오면 힘들죠. 그래서 중장년층이 김하온을 좋아하는 걸까? 저 사람은 내가 그때 알았어야 하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
김 늦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 무언가를 느끼신다면 그걸 찾아서 떠나셨으면 좋겠어요.
신 그럼 지금은 일단 퇴근을 해야겠어요.(웃음)
김 하고 있는 일이 행복하지 않고 고통뿐인데 오직 돈을 위해서만 한다면 분명 행복할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돈을 위한 삶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고. <리얼리티 트랜서핑>에서도 “돈은 부속품에 불과하다. 영혼과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면 돈은 알아서 따라온다”라고 해요.
신 그런 것과는 아디오스 한 거죠?
김 그럼요.
신 이제 마지막, 낯간지러운 질문인데 재미있는 답변이 나와요.
유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이에요.
김 네. 순간순간 매우 행복하나, 행복하나…(생각에 잠긴다) 저는 모두가 다 같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노력 중이고, 노력하는 와중에도 저는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