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의 컬링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컬링 팀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 컬링,컬벤저스,팀킴,김은정

“의성 가는 버스 없어요.” 서초동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아침 8시 30분에 이런 말을 듣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동서울종합터미널로 가서 한 시간을 더 기다려 10시 30분 차를 타고 가야 했다. 아무도 없다시피 한 서울발 의성행 버스 안에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한국 국가대표 여자 컬링 팀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비현실적이었다. 경상북도 산간 지방에 왜 국제 규격의 컬링장이 있는 걸까? 한국 컬링의 아버지라는 김경두는 무슨 이유로 거기에 컬링장을 짓고 선수를 키운 걸까? 왜 여자 컬링 선수들은 다 의성여고 동창과 후배일까? 누가 왜 거기서 그렇게 오랫동안 노력을 한 걸까? 뭘 위해서?의성에 도착하자 더 궁금해졌다. 의성은 작았다. 의성시외버스터미널은 별도의 건물 없이 병원 건물 1층 일부를 빌려 쓰고 있었다. 터미널에 도착해 계속 걸어 돌아다녀도 봐야 할 곳을 다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터미널에서 의성군청까지, 군청에서 의성여고까지, 의성여고에서 컬링장까지는 각각 걸어서 15분을 넘지 않았다.의성공고 뒤편의 스포츠 시설 맨 끝에 컬링장이 있었다. 거기도 들어가보았다. 놀라운 걸 넘어 조금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번듯한 시설이 이렇게 작은 도시에 있다는 걸 믿기 쉽지 않았다. 이래서 의성이 컬링의 메카인가 싶었다. 언론 보도로 보았을 때는 의성이 컬링의 메카처럼 보였다. 의성여고 동창으로 이루어진 팀. 영미, 친구 은정이, 영미 동생 경애 같은 식으로 이루어진 동네 친구 팀. 말하자면 컬링장을 축 삼아 자연발화처럼 이루어진 팀같이 보였다.가보고 몇 명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얻은 결론은 조금 달랐다. 의성이 올림픽 메달 팀의 토양 역할을 한 건 맞다. 하지만 ‘컬벤저스’는 의성에서 자연 발생으로 자라난 팀이 아니었다. 토양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은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지금 의성에 없다. 여러 가지 이유로 컬벤저스의 신화를 만든 사람들이 적절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그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언론 매체의 약간은 안일한 취재이기도 했다.한국 컬링의 성공에 대해 답하려면 질문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다. 누가 이 컬링장에서 선진국형 클럽 스포츠 프로그램을 짜고 유지했는가? 다른 곳도 아닌 의성에서. 경상북도 내륙 지역에서도 소도시에 속하는 이곳에서. 노인 인구가 너무 많아서 인구 소멸도 1위인 의성에서.의성여고의 많은 영광은 컬링부가 가져다주었다. 본교 건물 가운데에 있는 현관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의성여고가 받은 트로피가 놓여 있다. 컬링 트로피가 많았다. ‘명예의 전당’란에서도 컬링부의 활약을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은 에디터를 보자 밀림의 원숭이처럼 높은 음역대의 소리를 질렀다. 을 촬영한 다음 날이라서 우리를 팀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이 아니라서 미안했다. 하루아침에 떨어진 게 아닙니다“하루아침에 떨어진 게 아닙니다”라는 말을 취재하는 내내 들었다. 김경두도, 김경석도, 장반석도 모두 비슷한 말을 했다. 아직 당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할 이런 사람들이 한국 컬링이라는 견고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런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이런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했을까. 누가, 왜 이런 일을 했을까.“한 명의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유명한 아프리카 속담이다. 한국 컬링의 시스템을 취재하면서 이 말이 자주 생각났다. 한국 컬링은 혼자 크지 않았다. 20년이 넘는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해왔다. 각자의 이유로, 처음에는 꼭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해도, 결국 각자 자발적으로.현재 경북컬링훈련원장 김경두가 이 모든 걸 계획하고 밀어붙인 주인공인 건 확실하다. 그는 1976년부터 외국에 자주 나가서 컬링을 보고 왔다. “몇십 년 컬링을 해야겠다. 솔직히 그런 생각은 없었습니다. 체육 하는 사람이니까 새로운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김경두는 자기가 했던 것과 하지 않은 것을 예민하게 나누었다. “컬링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게 저는 아닙니다. 쌍방울이라는 기업이었어요”컬링에 왜 그렇게까지 열중했는지 묻자 그는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도 오래된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했어요. 이렇게 올 계획도 없었는데, 당신이 보기엔 내가 왜 그랬던 것 같으냐고. 어떤 친구는 저보고 머리가 나빠서 쓸데없는 데 시간을 보냈다고도 하는데, 나도 모르겠어요. 왜 그런지.” 그는 솔직하기도 했다. “대학 선생(교수)을 하는데, 큰 대학을 가서 폼 나게 하고 싶잖아요, 하는 거 제대로 해야 하잖아요, 그럼 솔직한 설명이 되겠습니까? 남이 안 하는 걸 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 누군가 일할 기회를 줄 거 아닙니까. 그런 욕구도 내 안에 내재되어 있었을 거예요.” 프런티어가 되고 싶다는 젊은 기운이 청년 김경두를 이끈 하나의 동기였던 셈이다.하지만 이제 초로가 된 김경두는 컬링 보급 말고는 큰 욕심이 없어 보였다. 김경두의 처음이 야심이었다고 해도 그에게는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공부하는 사람(그는 ‘교수’라는 말이 부끄럽다면서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의 말로 이야기하자면, 컬링은 미래의 스포츠입니다. 소득이 높은 나라에서 주로 가족들이 하는 스포츠예요. 북유럽과 북미에서 하는 건데, 속된 말로 배가 불러야 3시간씩 얼음에서 놀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는 평창 올림픽의 콘셉트도 가족 스포츠라고 생각합니다. 88올림픽이 엘리트 위주였던 한국 스포츠가 생활체육이라는 큰 영역으로 들어선 단계였다면, 이제는 가족 스포츠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가족이 같이 등산하고 수영하고 테니스 치는 문화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해요. 스포츠는 생활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그는 컬링을 꾸준히 해왔다.“가족끼리 하자는 말이, 가족끼리 뭘 해 먹고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뭘 해 먹는지도 모르겠는데.” 김경두는 ‘가족’이라는 말이 나오자 묻지도 않았는데 이 말을 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국 컬링이 잘되자 일각에서 ‘김경두가 다 해 먹는다’는 말이 나왔다고도 했다. 김경두의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이 컬링계에 있는 건 사실이다. 김경두의 딸 김민정이 여자 팀 감독이다. 남자 국가대표 팀 김민찬 선수는 아들이다. 믹스더블 감독 장반석은 김민정의 남편, 그러니까 김경두의 사위다. 하지만 그렇다고 김경두를 비난하는 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다. 김경두 일가는 한국 컬링이 이렇게 되기 훨씬 전부터 컬링에 헌신해왔다. 그리고 김경두 일가만 김경두를 돕지 않았다. 김경두와 별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김경두를 이런저런 면에서 도와왔다. 김경두와 함께 컬링을 배워 오고 얼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오세정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모 교수도 꾸준히 아마추어 컬링 대회를 만들어 후원해오고 있다. 김경두의 가족 체육론에 동감한 사람들이 함께 해온 일이다.“올림픽까지만 하는 게 제 목표였어요.” 의성 경북컬링훈련원에서 우연히 만난 장반석이 말했다. 정말 다 해 먹으려는 것이었다면 김경두의 사위인 그가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올림픽은 가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올림픽까지 했어요.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네요. 저는 제가 할 바를 다 했다고 생각하고, 제 청춘도 바쳤어요.” 이것은 빈말이 아니다. 그는 경영학을 전공했고 국문학 석사를 취득해 학원을 경영하다 연봉이 3분의 1로 깎이는 걸 감수하고 컬링을 시작했다. “아내가 이 일을 하니까요. 그걸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강했어요. 사람이 너무 없었고, 몇몇 봉사자만 일하는 모습을 보니까… 올림픽을 위해 이렇게 고생하는데 작은 손이라도 거들자는 생각으로 왔어요.”“연꽃엔 뿌리가 있어요. 지금은 아름다운 꽃 이야기만 나옵니다.” 김경두가 말하는 스스로의 뿌리는 1995년부터다. “1995년부터 2006년까지, 의성에 가기 전 단계의 컬링의 한 시대가 있었고, (의성으로 넘어간) 2006년부터 한 시대가 있었어요. 1990년대에 이미 경주 아화중학교에서 온 이선미, 권수정, 박민주 선수가 있었습니다.” 김경두는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예민하고 고집스러운 부분은 있었지만 자신의 공을 독식하려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절대적이죠.” 선임 기자 정영재는 김경두가 한국 컬링에 미친 영향을 간단히 정리했다. 그는 2003년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에서 김경두를 처음 보았다. “저는 그때 바이애슬론을 취재해서 컬링은 잘 몰랐어요. 보통 사람들처럼 빗자루질 정도라고만 생각했죠. 그때부터 김경두 회장은 계속 컬링을 하고 있었어요.”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봤을 때 김경두 회장이 컬링에 이렇게까지 몰두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에서는 잘 하지 않은 가족 스포츠잖아요. 그리고 김경두 회장은 육체를 극한까지 쓰는 레슬링 선수 출신이에요. 적당히 힘을 쓰지만 두뇌도 쓰는 컬링의 매력에 빠진 것 아닐까요? 몸과 정신을 동시에 쓰는, 배움에 관심이 있는 사람 같아요.”하키, 피겨, 스케이트, 이런 종목 시간대가 배정되어 있어서 그게 끝나는 시간에 했어요.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대화 되는 친구들과 후배들도 데려왔어요. ‘애들 데리고 집에 있으면 뭐 해요. 데리고 오세요.’ 스포츠라는 하나의 놀이 수준에서 시작한 거죠.“대구실내빙상장에 경기장처럼 페인트로 그려놓고 시작했어요.” 김경두는 이런저런 민감한 이야기를 하면서 날카로워졌다가도 컬링 이야기가 나오면 금세 기분이 풀렸다. “하키, 피겨, 스케이트, 이런 종목 시간대가 배정되어 있어서 그게 끝나는 시간에 했어요.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대화 되는 친구들과 후배들도 데려왔어요. ‘애들 데리고 집에 있으면 뭐 해요. 데리고 오세요.’ 스포츠라는 하나의 놀이 수준에서 시작한 거죠.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운동선수 출신이고 집착하는 버릇이 있어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컬링이 발전하려면 컬링장이 필요했다. “대구도, 경북 자치단체도 (컬링장 건설이) 안 된다는 겁니다. 다 돌아다녔는데. 그때 의성군청 정해걸 군수가 도와주셨습니다.” 실제로 정해걸 군수 재임기인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의성에 컬링장이 만들어졌다. 당시 의성군수인 정해걸의 판단이 의성 컬링의 기반 중 하나였다. 김경두 역시 자기 집 땅까지 보태며 어떻게든 컬링장을 만들려 했다. 그렇다고 해도 경상북도 시골에 컬링장이 만들어진 건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그 놀라운 결정 덕분에 2018년 의성은 의성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진 고려 태조 12년 이후로 가장 인구에 많이 회자되고 있다. 전교생이 200명 조금 넘는 의성여고에 와 이 취재를 왔다. 동계올림픽 이후 의성 마늘은 재고가 다 빠질 정도로 많이 팔렸다고 한다. 15년 전 당시 의성군수의 용단과 김경두의 의지 덕에 지금 의성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덕을 본다. “이론적으로는 뽑을 수가 없죠”의성의 컬링에 대해 조금 잘못 표현된 부분이 하나 더 있다. 방과후수업으로 시작해 할 일이 없던 시골 아이들이 컬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진을 전혀 모르는 아이에게 프로급 카메라를 주었더니 그 아이가 혼자서 세계 수준의 사진가가 되었다는 말과 비슷한 비약이다.“설명으로는, 이론적으로는 뽑을 수가 없죠. 컬링을 본 적이 있나.” 의성여고 체육 교사로 일했던 김경석이 회상했다. 그는 2006년부터 2017년까지 11년 동안 의성여고에서 체육 교사로 재직했다. 하드웨어만 있다고 문화가 자라나지는 않는다. 사람이 새로운 뭔가를 즐기고 익힐 때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함께 즐길 사람이 필요하다. 헌신적인 교육자가 필요하다. 김경석이 그 헌신적인 교육자였다.김경석은 김경두의 동생이다. 그 역시 레슬링 선수 출신. ‘레슬링의 도움을 받아’ 대학교에 갔다. 김경두와 김경석은 둘 다 엘리트 스포츠의 한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시스템은 운동 아니면 공부. ‘쟤는 운동이나 하지’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선을 딱 그어놓는단 말이에요.” 그들은 단순히 컬링이라는 스포츠 종목을 보급하려 한 게 아니었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문화를 심고자 했다. 컬링은 그런 병행에 딱 좋은 스포츠였다. “컬링과 공부를 접목시켰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이걸 하면 좋겠다고요. 컬링은 머리를 많이 써야 하고 대화를 하면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전략이 40% 이상 차지하는 종목이에요. 이런 매력을 어떻게 알릴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체육 시간에 컬링 수업을 해보기로 했어요. 컬링장이 있으니까, 생소한 종목이고 이 아이들이 시골 아이들이지만 대도시 아이들보다 더 좋은 체육 수업을 한번 만들어서 보여주자고.”김경석은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다. 로마 시대의 조각 같은 인상이었지만 아이들을 이야기할 때는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다른 여건은 서울이 월등하게 좋지만 컬링 수업을 체육 시간에 전수해두면 아이들에게 이건 평생 가도 잊지 못할 추억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들도 컬링을 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고요. 그래서 선생님들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3단위니까 일주일에 한 번 3회 하는 수업을 3시간 연강으로 바꿔보자고. 컬링장까지 가는 데 걸어서 10~15분 걸려요. 옷 갈아입으면 30분 걸리니까 시간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3시간 연강으로 하기로 하고 아이들 데리고 컬링장에 갔죠. 그래도 들어가면 얼음에 미끄러지는 재미도 있고, 또 뭐 해보다가 옆 친구가 넘어지면 깔깔거리고 좋아하고, 애들은 평상시에 그런 변화가 없으니까 그런 이미지도 좋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김경석은 의성여고 학생들에게 컬링을 알리기 시작했다.이 이야기를 할 때 김경석은 눈앞에서 컬링장의 그 아이들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이 졸업해도 평생 동안 지금 유명해진 컬링 팀을 자랑할 거 아닙니까. ‘우리는 체육 수업에서 저걸 했다, 컬링을 할 줄 안다’고요.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제 목적 하나는 달성했다고 봐야죠.” 김경석이 일일이 면담해서 컬링부에 입단시킨 의성여고 1학년 학생들이 김은정과 김영미였다. 하지만 김경석의 진짜 업적은 따로 있었다.“다른 종목하고는 다르게 가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컬벤저스는 김경석이 만들어낸 식물원에서 가장 유명한 식물과 비슷하다. 김경석은 운동과 공부가 함께하는 식물원 같은 시스템 자체를 구축했다. “공부를 하면서 해보자고 했죠. 컬링 팀원들에게 고마운 게, 군소리 한 번 안 하고 졸업을 했어요. 나에 대한 기억이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뜻이 같았다고 봐요. 고등학교 다닐 때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대화를 많이 했어요. 대학 갈 때도 본인이 선택했고요. 모든 선택은 본인이 부모님과 상의해서 결정하면 저는 적극적으로 도와줬어요. (김)영미는 굉장히 착하고 아이들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유치원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해서 유아교육과에 갔어요.” 한국의 엘리트 체육 시스템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다.“다른 종목하고는 다르게 가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컬벤저스는 김경석이 만들어낸 식물원에서 가장 유명한 식물과 비슷하다. 김경석은 운동과 공부가 함께하는 식물원 같은 시스템 자체를 구축했다.김경석 역시 컬벤저스가 갑자기 나왔다는 사실을 반박했다. “컬링을 방과후수업 개념으로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하루 일과와 수업을 다 하고 난 후에 한 거예요. 인문계 고등학교가 8교시까지 하면 오후 6시에 마쳐요. 7시까지는 식사 시간이에요. 그때부터 10시까지 야간 자율 학습이고요. 그 시간을 이용해서 컬링을 한 거예요. 그 아이들이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정신력이나 사고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겁니다. 저녁 6시까지 공부하고 밤에 스위핑하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그러고 나서 자고 아침 6~7시에 일어나야 하죠. 그 생활을 3년이나 하는 걸 보통 의지력으로 할 수 있겠어요? 애들이 놀이 삼아 했는데 하루아침에 올림픽의 빅 스타가 된 게 아닙니다.”김경석은 자신에 대해 말할 때는 겸손했고 학생들에 대해 말할 때는 늘 그들을 감싸려 했다. “제가 선수들에 대해 말하면 그 선수들에게 누를 끼칠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제가 이 아이들 덕분에 당시 학생생활지도부장을 일에 도움을 받았어요. 의성여고는 기숙사 학교예요. 기숙사 생활을 하면 아이들이 교복을 잘 안 입고 교복 바지 안에 체육복 입고 다니고 그러잖아요. (김)은정이 같은 경우는 그런 걸 위반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주제 넘는 말이 될 수 있겠지만, 스포츠 문화가 발달하면 밤 문화가 망한다고 하잖아요.” 김경석은 의성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공부하는 체육인, 생활체육, 클럽 스포츠라는 새로운 모델을 짰다. “시골에서 아이들이 할 게 없잖아요. 그런데 밤마다 컬링 게임을 하고 주말에 리그를 만들어서 게임을 하면 애들이 얼마나 건전하게 성장하겠습니까. 실제로 애들이 그렇게 건전하게 컸어요. 주말에 거의 컬링장에서 보냈으니까. 다른 데 놀러 갈 시간이 없잖아요.” 그렇다고 아이들의 인생을 컬링에 묻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체육과에 간 애들이 별로 없어요. 전공도 다 달라요. 처음부터 똑같은 공부를 하면 팀 경기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서로 다른 분야의 공부를 하면서도 결국은 하나의 목표로 모여 있을 때 같은 마음이 되죠. 우리도 그렇잖아요. 어차피 대학 진로는 본인이 결정해야 하는 거고, 인생이 달린 부분이니까. 이렇게 운동 좀 했다고 무조건 체육과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컬링이 공부에 도움이 됐죠. 운동 자체가 과하지 않았고 소모적인 부분이 없었어요.” 대구한의대 한방재활의학과 수련의인 김태령이 회상했다. 김태령은 김은정과 동기인 의성여고 55기다. 당시 전교 1등을 해 서울대학교와 대구한의대학교에 동시 합격했다. 김태령에게도 컬링은 좋은 추억이었다. “체육 선생님(김경석)의 추천으로 시작했어요. 해봤을 때 흥미도 느꼈어요. 접하기 쉬운 운동이 아닌 데다 시원한 데 가서 하니까 스트레스도 풀리고 재미있었어요. 국·영·수 선생님 중에서는 걱정하신 분도 없지 않았지만 컬링하면서 성적이 떨어지지는 않았어요.” 김태령에게 컬링의 의미란 무엇이었을까. “즐겁게 학창 시절을 보낸 것?” 김경석의 모델이 성공적으로 작동했다는 증거였다.한국 프로스포츠의 근본적 문제는 극단적 엘리트 스포츠 편중이다. 한국의 대다수 스포츠 선수들은 공부와 학업이 완전히 분리된 환경에서 아주 비싼 스포츠 사교육비를 내며 엘리트 선수로 길러진다. 비용은 둘째치고 리스크가 너무 크다. 스포츠계에서 실패하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경우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엘리트 스포츠의 대안으로 클럽 스포츠가 거론된다. 공부와 학업을 병행하자는 이론이다. 선진국은 다 이렇게 하고 있다. 미국의 농구 선수와 야구 선수는 다 일정 학력을 넘어야 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모두 공부와 운동을 병행한다. 고등학교 때 스포츠 활동에서 두각을 보인 사람이 좋은 대학에 갈 때 가산점을 받는 이유도 공부와 운동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많은 일이 그렇듯 많은 사람들이 ‘한국은 이래서 안 돼’라고 하면서 가만히 앉아 페이스북 게시물 같은 걸 올리곤 한다. 김경석은 조용히 선진 스포츠 모델을 심고 있었다. 11년 동안.한국 컬링의 가장 멋지고 대단한 점 역시 공부와 컬링을 병행했다는 시스템 자체다. 이 시스템을 구축하기까지 김경석이 기울인 노력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의성여고는 인문계 고등학교예요. 고등학교는 대학과 직결되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그렇잖아요. 학생들이 전문 선수와 공부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주변 선생님들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죠. 우리나라 엘리트 체육 시스템을 그분들도 봐왔으니까. 자꾸 밤에 야간 자율 학습 안 하고 연습하러 다니니까. 애초에 스포츠하고는 다른 분야를 가시는 선생님들이니까, 이 분야를 이해해주려는 선생님이 열 명 중에 몇 명이나 있었겠습니까.” 이해가 가는 이야기다. “부모님들도, 운동해서 대학 갈 수 있나, 인기 스포츠라서 돈을 벌 수 있나, 관심사가 이거 아닙니까. ‘야는 졸업하면 대학교 가나, 대학 졸업하면 실업 팀은 어디에 있나, 연봉은 얼마나 받을 수 있나.’ 학부모님들이 걱정하는 부분은 이 정도입니다.” 컬벤저스는 그 고정관념 사이에서 김경석과 선수들이 함께 만들어낸 팀이었다. 부모가 없는 건강한 시스템성공한 한국 스포츠 엘리트에게서는 거의 두 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 극도의 엘리트 시스템이다. 야구나 축구 같은 경우가 그렇다. 야구나 축구 명문 초등학교에서 시작해 명문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후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길러진다. 오승환이나 기성용이 그런 경우다. 둘, 엄청나게 헌신적인 부모의 지원이다. LA로 낙지볶음을 공수해준 박찬호의 부모는 댈 것도 못 된다. 박세리부터 김연아와 손흥민에 이르기까지, 한국형 엘리트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종목이거나 엘리트 시스템 안에 들어 있다고 해도 남다른 길을 간 선수들은 부모의 헌신적인 지원이 필요하다.컬벤저스는 둘 다 해당되지 않았다. 의성여고 선수들은 고등학교 3년 내내 대입 공부를 했다. 아침부터 저녁 6시까지 공부하고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인 3시간 동안만 컬링을 한 친구들이다. 부모님의 지원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보통 이 정도 규모의 성공을 이루면 헌신적인 부모님의 지원 같은 후속 보도가 따라온다. 컬링에는 그런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 김경석은 선수들 부모님의 얼굴을 거의 본 적도 없다고 했다.“작년에 제가 떠나기 직전까지도 애들과 스위스 또는 네덜란드로 여름에 캠프를 갔습니다.” 김경석은 거기 더해 컬링을 통해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 했다. 김경석은 매년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 훈련을 떠났다. “컬링은 일부분이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이 아이들이 부모가 시골에 살기 때문에 거기서 살고 있을 뿐이지 사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이에요. 그 지역에 내가 있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만들어졌을 때 여건만 된다면 더 많이 해주고 싶었죠. 그러다 보면 여러 사람한테 손도 벌려야 하고 살림도 아껴 살아야 했지만, 그렇게 다녀오면 아이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는 게 보여요.” 김경석은 컬링이라는 도구로 아이들에게 꿈을 꾸게 해주었던 건지도 모른다.“컬링장은 누가 외부에서 찾아오고 구경하고 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어떤 학생들이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못 보던 애들이었는데 말이죠.” 김은정과 김영미, 김경애는 김경석이 발탁한 선수들이다. 김경석은 그들 모두를 똑똑히 기억했다. “제가 불렀죠. ‘이리 와봐라. 너 누구냐?’ 제가 얼굴도 시커멓고 이미지가 강하잖아요. 아이들이 우물쭈물하며 ‘우리 언니가 있어서…’라고 말하더라고요. ‘언니를 왜 여기서 찾니?’라고 했더니 ‘우리 언니가 컬링해요’ 하더라고요. ‘어, 컬링 하면 여기밖에 없는데, 네 언니가 누구야?’ 하니까 ‘김영미요’라고 해서, ‘김영미가 네 언니야? 이리 와봐라’ 하고 부른 거죠. 그때만 해도 중학생의 앳된 얼굴이었어요. 눈이 동그랗고. 경애는 지금 모습하고 좀 많이 다르죠. 머리는 그때 유행하는 중학생 머리였고. 제가 말했어요. ‘이리 와봐. 네 언니가 컬링하는데 너도 해야지. 언니하고 같이 하면 되지’ 그렇게 연습을 했죠.”그렇게 한 명씩 설득하고 함께 외국에 가서 추억을 쌓고 담력을 키운 선수들이 국가대표가 되어 일본과 결승전 진출이 오가는 컬링을 하고 있을 때 김경석은 심판석에 있었다. 김경석은 지금 한국에 딱 한 명 있는 컬링 국제 심판이다. “컬링 지도자끼리는 ‘벤치 프레스’라는 말을 해요. 벤치에 앉아 있는 압박감. 선수들은 움직이니까 잘 못 느끼는데, 앉아 있으면서 생각만으로 ‘저리 가면 안 되는데’라고 떠올리는 심리적인 압박이 무시무시하거든요. 감독석에서 보는 거나 심판석에서 보는 거나 자리 위치만 다를 뿐이지 똑같죠.”“얼음 위에 처음 올라가서 넘어지고….” 김경석은 일본과의 경기에서 결정적인 샷으로 이겼을 때 머릿속에 바로 그 처음이 떠올랐다고 했다. “내려갈 때는 오른발 먼저 내려가야 한다, 왼발 내려가면 안 된다, 이런 걸 가르치던 게 생각나더라고요. 얼음 위에서 넘어지는 걸 보면서, 안 넘어지는 방법부터 설명해준 아이들이 지금 저기서 뛰고 있는데. 그동안 또 얼마나 별의별 상황을 다 겪었겠습니까. 그게 머리에 한 번에 떠오르니까….”김경석에게 컬링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도 깨끗한 운동이에요. 다른 종목처럼 심판이 즉흥적인 이미지로 판단하지 않아요. 룰 북에 모든 게 명시되어 있어요. 심판 영향력이라든지 주변 영향에 의해 승부가 뒤바뀌는 경우가 없습니다. 정말 깨끗한 스포츠예요. 기회도 똑같이 부여하고 모든 걸 공개합니다. 스톤 넘버까지 미리 다 사진으로 보내주고 연습 시간도 다 정해줍니다. 10개 코스에서 연습을 누가 먼저 할 건지도 결정합니다. 아주 매너 있어요.”김경두와 김경석은 엘리트 스포츠 코스 중에서도 레슬링을 한 사람들이다. 레슬링과 컬링은 거의 모든 면에서 반대다. 레슬링은 늘 몸이 붙어 있는 일대일 종목이다. 컬링은 모든 사람이 손 하나 닿을 일이 없는 팀 종목이다. 이들이 컬링에 헌신할 수 있었던 건 이들이 겪어온 스포츠맨으로서의 삶과 컬링이 전혀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팀을 하는 운동선수들은 실제로 (김경석이 구축한 의성여고 모델이) 이렇게 하면 된다는 모델이 됐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10년쯤 지나서 한국의 모든 운동선수들은 학교 수업을 다 받고, 시간 내서 스포츠도 하고, 그렇게 바쁘게 살아야 건강한 나라가 되는 것 아닌가 싶어서요. 아이들이 기능적으로만 발달하고 지적으로는 뒷받침이 안 되어 후회하는 선배들의 전철은 앞으로는 밟지 않아야 한다고 봐요.”내가 그렇게 살았다고 해도“내가 그렇게 살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 발전이 없는 거잖아요. 그보다는 더 좋은 길을 가는 게 먼저 가는 사람이 길을 닦는 이유 아닙니까.” 김경석의 말은 스포츠를 하는 사람뿐 아니라 이른바 업계의 불합리한 관행을 느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귀담아들을 내용이다.컬링을 둘러싼 이것저것을 취재하면서 이 안에 한국 사회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걸 해보려는 고집스러운 선구자가 있다. 그 선구자는 현실의 온갖 요소에 계속 부딪힌다. 끝내 버틴 선구자가 성과를 냈을 때 성공의 조각을 나누려는 사람들이 모기처럼 달려든다.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염치가 있어서 입을 쉽게 열지 않는다. 당시에는 도움을 주지 않은 사람들이 공짜로 이익을 얻는다. 안타깝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공짜로 이익을 얻은 사람들은 자기 이익이 공짜라고 말하지 않는다. 김경두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버티고 싸우면서 의성에 컬링장을 세웠다. 김경석을 비롯한 가족들과 지인들이 그 사이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싸우고 버텨냈다. 사실 그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자존심.” 수성구의 커피숍에서 김경두가 지나가듯 한 말이 답 같았다. “사실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싸우잖아요. 이해관계 때문에 싸우는 것보다 더 심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싸우는 건 끝이 없거든.” 그 자존심의 방향도 자존심의 세기만큼이나 중요하다. 김경두는 제대로 된 컬링을 보급하겠다는 데에 자존심을 걸었다. 그 자존심을 위해 평생을 쏟았다.그래서 김경두와 컬벤저스는 이겼을까? 아직 모를 일이다. 이제 진짜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김경두는 앞으로 컬링장을 10개 더 지을 거라고 했다. 김경두가 원하는 대로 가족 스포츠로서의 컬링이 더 많은 곳에 확산되려면, 김경석이 원하는 대로 더 높은 수준의 학원 스포츠가 자리 잡으려면 앞으로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더 많은 모기 같은 사람들을 피해 다녀야 할 것이다. 컬링처럼, 언제 어느 곳에서 스톤이 미끄러져 내려와 표적의 가운데 있는 스톤을 쳐낼지 모를 일이다.하지만 이 이야기를 따라다닌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떤 문화가 초창기에 긍정적으로 자리 잡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컬링의 고집스러운 원칙주의자들은 이 싱거운 게임 속에 들어 있는 고도의 즐거움을 알아버렸다. 고도의 두뇌 싸움을, 엄격한 규칙 안에서 벌어지는 경쟁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철저한 팀플레이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멋진 순간을. 그 덕에 우리도 동계올림픽 내내 컬링이라는 종목을 즐겁게 볼 수 있었다.그 증거가 컬벤저스다. 모범적인 시스템 안에서 자라난, 인성과 두뇌와 건강한 멘탈을 가진 새로운 시대의 스포츠 영웅들이다. 그들을 기르기 위해 한 마을 사람들이 오래 공을 들였다. 김경두와 김경두의 가족이, 당시 의성중학교와 의성고등학교 선생님들이, 그리고 여기 이름을 올리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이, 모두 조금 더 괜찮은 뭔가를 만들기 위해 시간과 공을 들였다. 나쁜 기운처럼 좋은 기운도 순환되며 확장된다. 덕분에 한국은 동계올림픽 컬링에서 은메달을 땄다. 쉽진 않겠지만 앞으로도 컬링이 조금씩은 잘되었으면 좋겠다. 일본과의 준결승전에서 김은정이 했다는 말처럼, “길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