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피라는 자유 | 에스콰이어 코리아 (Esquire Korea)

루피는 계획대로 나플라와 함께 정상에 올랐다. | 인터뷰,음악,힙합,뮤직,랩

스윙스의 지적처럼 에 참가하는 래퍼를 디스한 전력이 있는데 출연하게 됐다. 만감이 교차했을 거 같은데.그 당시 내 마음이 좀 복잡했다. 한국에서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만이 능사처럼 보였는데 미국에 와보니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갖고 있더라.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더 고민하게 됐다. 그러다 점점 ‘Fuck the life, fuck the rules’라고, 기존의 시스템이나 룰을 거스르는 것에 대한 매력에 빠졌다. 그게 루피가 가져야 할 가치관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 래퍼들은 왜 에 출연해야만 하는 건지, 다른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질 순 없는 건지, 불만이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오만했다.(웃음)스스로 오만했다고 자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한국에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마인드였는데 한국에 와서야 깨달았다. 한국의 힙합은 보다 작다는 것을. 한국에 돌아와 서울 사당동에 살면서 LA와 달리 힙합이라는 걸 느낄 수 없는 환경에 어떻게 힙합을 접목시켜야 할지 막연해졌다. 그래서 이해가 됐다. 한국에서 그나마 힙합에 대한 관심을 만드는 것이 였다고.(이하 )에 참여한 건 메킷레인(Mkit Rain) 레이블을 운영하는 입장에서의 고민이 반영된 결과처럼 보이기도 했는데.회사가 3년 차에 접어들면서 현실적인 위기감이 생겼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에 나온 애들보다도 인지도가 떨어지는 상황이 되니까. 그래서 방송에 나가서 한국 힙합 신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빨리 보여주자고 생각했다. 지름길을 선택한 거지. 그렇게 생각을 조금 비트니까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행복해진다는 걸 느꼈다. 레이블을 운영하면서 마인드가 달라진 것도 있었고.원하는 바가 있었던 만큼 우승에 대한 목표도 뚜렷했을 거 같다.1차적인 목표는 (나)플라가 우승, 내가 준우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로듀서였던 코드 쿤스트도 그랬다. 씩이나 나와서 음원도 못 챙겨 가면 헛짓거리라고. 명확한 목적을 갖고 나왔으니 명확히 가져갈 수 있어야 현명하다는 거지. 그래서 과거의 내가 어떤 말을 했건, 어떤 욕을 먹건, 그 상황에서 얻어내야 할 것에 정확히 집중하려 했다. 좀 더 대중적인 음악을 하고자 했고. 그래도 전전긍긍하지 않을 만한 자신감 정도는 있었던 거 같다.목표가 명확한 만큼 탈락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진 않았나?플라가 당연히 우승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메킷레인이 더 알려지도록 본선 경연까지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긴장되긴 했다. 자칫 실수하면 불구덩이에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웃음) 그런데 플라가 실력 있는 래퍼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면서 좀 더 홀가분해졌다. 옆에 있는 친구가 다 죽여주니까 내 역할에만 집중하면 될 거 같아서. 메시나 호날두가 같은 팀이라면 골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메킷레인의 스트라이커는 나플라니까?2차 예선 때 나플라 무대가 끝난 뒤 더 콰이엇 형이 “처음으로 전 국민이 TV로 진짜 수준 높은 랩을 듣게 되는 순간이었다”고 말할 때 알았다. 그래서 녹화 끝나고 플라한테 오늘 네가 무슨 역사를 썼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역사상 최고의 랩을 보여줬다는 멘트를 더 콰이엇 형이 했고, 엠넷에서는 그걸 살릴 거라고. 그럼 너는 그 타이틀을 갖게 될 거고, 그 말은 계속 잘 해내야 하는 거라고. 그만큼 무거운 타이틀을 갖게 된 셈이지만 자기 것을 했는데 잘했다고 한 거니까 계속 자기 것을 해나가면 될 거라고. 더 잘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2015년에 발표한 ‘King Loopy’를 듣고 면도가 디스를 시작했고 디스곡을 주고받았다. 에서 당시 스트레스가 극심해서 병원에 다녔다고 고백한 바 있다.나는 싸움을 거는 타입도, 즐기는 타입도 아니다. 스윙스 형처럼 진짜 센 사람도 아니고, 센 척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한 대 맞았다고 느껴지니까 당연히 때려야 했던 거지. 하지만 절대 외모를 가지고 디스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저급하게 굴어도 수준 높은 곡으로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면도가 이겼다고, 그런 의미를 두는 게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런 면에서 디스곡 같은 걸 두 번 다시 내고 싶지 않았다. 에서는 쇼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했던 거고. 디스라는 게 미국 힙합 신에서도 중요한 문화처럼 느껴질까?사실 미국 힙합 신의 디스 문화도 근래에 와서 많이 변했다. 원래 미국에서 다른 래퍼에게 디스를 당하면 맞디스곡을 내야 하는 게 아니다. 가서 쏴버려야 하는 거지. 그 정도로 살벌한 거다. 미국에서 디스는 농담이 아닌 거지. 그러니까 미국에 있을 당시 내 입장에서는 면도가 나를 디스했으니 나도 한 방 갈겨야 했던 거다. 한국에서는 면도가 노이즈 마케팅을 했다느니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는데 그걸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요즘에는 미국에서도 어그로를 끌어서 바이럴하는 마케팅을 한다. 트롤링(trolling)이라고 하는데 거의 짜고 치는 수준이다. 서로 디스하던 애들이 이목을 끌더니 다음 달에 앨범 발표하고. 힙합도 많이 변하고 있다. 예전에 우리는 투팍이나 비기를 듣고 힙합을 배웠지만 요즘에는 카니예 웨스트를 듣고 큰 1999년생 애들이 음악을 만드는 시대가 됐으니까. 문화가 바뀐 거다. 어쩌면 힙합은 이래야 된다거나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잣대도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파이널 경연 때 갑자기 왼눈 아래 피어싱이 생겼다. 결선 무대를 위한 세리머니였을까?별다른 의미를 두진 않았다. 원래 즉흥적인 편이다. 어느 날 타투를 하고 싶어지면 그냥 타투 숍으로 가는 식이다. 세미파이널 때 쌈디 형이랑 공연한 ‘NoNo’ 뮤직비디오를 찍으러 홍대에 갔다가 우연히 피어싱 숍을 보고 갑자기 피어싱이 하고 싶어져서 했다. 그런데 멍이 들어서 좀 당황하긴 했다. 방송을 해야 하는데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해서. 아무래도 즉흥적인 편이라 철저함이 좀 떨어지긴 하다.음악을 하는 것에 집안 반대가 상당했다고 들었다. 음악을 하게 된 것도 즉흥적인 선택이었나?어렸을 때 의사나 변호사가 돼야 한다는 부모님의 바람을 이뤄드려야 한다는 압박이 심했다. 그러다 재수까지 했지만 그만큼 학업에 열중하지 못해서 결국 단국대학교 일어일문학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출석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학고를 맞고 집안에서 군대나 가라고 해서 입대하게 됐다. 제대 후에는 유학하는 누나가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됐는데 사실 무엇 때문에 미국까지 왔는지 모르겠더라. 거기서도 제대로 학교를 안 다녔다. 그렇게 1년을 보내면서 부모님이 자꾸 내 인생을 결정하려고 드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됐다. 그러다 음악을 시작하게 됐고, 루피라는 이름으로 나를 명명하면서 부모님께도 내가 원하는 바를 전달했지만 화만 내셨다. 그래서 1년 넘게 연락을 끊고 살았다. 불효이긴 했지만 음악을 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생 부모님 말대로 살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살겠나 싶기도 하고. 물론 부모님께 상처를 입힌 거 같아 죄송하긴 하지만 지금은 부모님도 자랑스러워하시니까.힙합에 꽂힌 계기가 있었나?어렸을 때 타블로 형을 좋아했다. 가사가 좋아서. 기본적으로 글로 표현하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그렇게 힙합이라는 장르의 미학을 좋아했는데 미국에서는 라이프스타일로 다가왔다. 당당함이 극대화된 문화처럼 느껴졌다. 흑인 친구들은 자기들을 따라 하는 건 괜찮은데 그러려면 태도까지 따라올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떳떳한 태도를 가진다면 스타일이 어떻든 괜찮다는 거지. 그런 태도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결국 나로서 자유롭고 당당해질 수 있는 거니까. 그만큼 남들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사는지 관심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누굴 이기려 들 필요도 없고.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남이 어떻게 사는지 얘기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 시간에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게 더 중요할 텐데. LA에서는 모든 사람의 영어 발음이 다 다르다. 출신지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 그런데 한국인들이 유독 자신의 발음을 창피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한국에는 힙합이 정말 필요한 거 같다.좋아서 즐길 때와 좋은 걸 잘 해내야 하는 입장의 차이는 없을까?학생 때는 메모장을 열어서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드는 게 돌파구 같은 낙이었다. 그런데 프로가 돼서 24시간 동안 음악을 만들 기회를 얻고 음악만 할 수 있게 됐지만 오히려 더 안 된다고 느낄 때가 있다. 무섭기도 하고. 사람들이 이렇게 만든 음악을 안 들어주면 어떡하나 싶고. 그런데 결국 아티스트도 회사원처럼 생활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작업을 하고, 끊임없이 부딪치고 시도해보려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그게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보다 낫다. 뭐라도 나오니까. 매일 출근하듯 작업하는 게 프로인 거 같다. 사람들의 반응을 미리 짐작하기보다는 계속해보는 거지. 영감 같은 걸 기다리는 게 프로는 아닌 거다.나플라와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2013년에 LA 한인 타운의 작은 카페에서 하는 힙합 공연을 보러 갔다가 플라가 속해 있던 42크루의 무대를 봤다. 너무 잘하더라. 이후 우연히 마주쳐서 반갑게 인사했는데 플라가 나를 멀리했다.(웃음) 아무래도 뜨내기 유학생이라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 거 같다. 그러다 학업을 소홀히 하면서 부모님 몰래 일을 하기 시작할 때쯤 흑인이나 히스패닉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나 자신에게 큰 변화가 생겼다. 그리고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걸 플라가 듣게 됐고 그 뒤로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물론 당시의 나는 루피가 돼 있었던 때고.함께 음악을 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내가 플라한테 말했다. 우리는 한국어로 랩을 하니까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아침에 일어나면 켄드릭 라마와 같은 날씨를 공유하고, 치킨 주문을 받는 애들한테도 플로가 느껴지고, 지나가는 차마다 힙합 음악이 들려오는 곳에서 랩을 하는 우리가 인정받아야 한다고. 나는 그런 첫 번째 래퍼가 되고 싶다고. 그러려면 너희가 필요하다고. 모든 노래를 뮤직비디오로 찍을 텐데 혼자 하는 것보다는 함께 그림을 만들어주는 게 나으니까. 그때 플라는 내가 사기꾼 아닌가 의심했다더라.(웃음) 그러다 나중에 내가 만든 ‘Gear 2’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내 비전이 이뤄지는 게 보였다고 하더라. 그리고 플라가 발표한 ‘Wu’가 한국에서도 뜨면서 같이 주목을 받고 점점 한국에 나갈 준비가 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3년 만에 돌아온 한국의 인상은 어땠나?사실 한국에 돌아오는 게 두려웠다. 나를 다시 철들게 할 거 같아서.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고, 옷차림이 그게 뭐냐고, 그럴 사람이 너무 많다는 걸 아니까. 그리고 내가 설득해서 애들을 다 끌고 왔는데 당시에는 아무런 기반이 없었으니까.나플라를 비롯한 메킷레인의 아티스트들을 한국으로 데려올 때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을 거 같은데.학교에서 과제를 제출할 때 미국 애들은 자기 걸 맨 위에 올려둔다. 내가 한 거 보라고. 그런데 한국에서는 대부분 남들 것보다 아래 두려고 하지 않나. 농구할 때도 한국 애들은 멋있게 플레이하는 사람에게 끌려가는데 미국 애들은 엉망으로 슛을 쏘면서도 자기 플레이를 하려고 한다. 음악을 할 때도 한국에서는 발성을 어떻게 했냐, 멜로디를 어떻게 짰냐, 자꾸 답을 물어보는 느낌인데 미국 애들은 주제가 사랑이라면 사랑을 노래해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문화에 익숙해진 덕분에 그 차이를 알게 된 거 같다. 그래서 플라를 비롯한 42크루의 멤버들이 한국에서 보다 특별하고 멋있게 보일 수 있는 이유가 보였던 거지. 정작 자기들은 몰랐지만.(웃음) 그리고 한국에도 좋은 메시지와 움직임이 될 거라는 걸 알았고.미국에 갈 때와는 다른 사람이 돼서 돌아온 셈이다.완전히. 미국에 가기 전까지 군 복무를 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압박이 가장 큰 시기를 보냈던 셈인데 군대를 제대하고 미국에 가서 자유로움을 느끼며 많은 것을 흡수하게 된 거 같다. 경험주의자가 되기도 했고. 그러면서 남들이 정해주는 것보다는 내가 경험해서 느끼는 걸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을 통해 메킷레인의 존재만큼은 확실히 알린 거 같은데, 그만큼 야심이 커졌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든 조직의 수장으로서든.메킷레인의 아티스트들이 억지로 메인 스트림에 끌려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레이블이 아니니까. 꿀 빠는 것만 생각하기 전에 잃을 것도 생각해야 하고. 무턱대고 어디든 나가다 보면 이도 저도 안 되는 거 같다. 사실 요즘에는 나 자신이 무언가를 흉내 내는 기분이 든다. 계속 가면을 쓰고 있는 거 같다. 지금도 인터뷰하면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머릿속으로 열심히 따져보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많은 걸 결정해야 하는 입장인데 아직 안전한 시스템 안에서 보호받는 입장이 아니다 보니까 겪어가며 깨닫는 게 많다.언젠가 살아온 날을 돌아보게 됐을 때 웃었던 날에 빨간색을 칠하고, 아닌 날에 파란색을 칠하게 된다면 파란색보다 빨간색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는 어떤 것 같나?지금은 그냥 즐기는 거 같다. 오늘도 단 두 시간 자고 힘들게 일어났지만 지금은 깨어 있는 기분이다. 그때 그 얘기를 했던 루피와 지금의 루피가 짊어지고 있는 게 좀 다르긴 하지만 결국 내가 뱉은 말이니까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할 거 같다. /글_민용준http://esquirekorea.co.kr/people/%EB%82%98%ED%94%8C%EB%9D%BC%EB%9D%BC%EB%8A%94-%EB%8A%90%EB%82%8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