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엑스레이 필름 같은 섹스 칼럼

못다 한 섹스.

BYESQUIRE2020.05.08
 
 

못다 한 섹스 

 
“수고했다. 그런데 왜 계속해?” 2019년 12월 내가 만든 섹스 칼럼에 있던 마지막 질문이다. “섹스 칼럼을 쓰고 싶지 않다면서 쓰고 있다면 결국 섹스 칼럼을 쓰고 싶은 것 아닙니까?” 같은 질문도 받았다. ‘자기들이 만드는 동아리 잡지에 섹스 칼럼을 넣고 싶은데 어떨지’ 내게 메일로 물었던 어느 대학생의 말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 한다.
내게 섹스 칼럼은 직장 생활의 일부였다. 몇 년의 잡지 생활과 잠깐의 다른 직업을 거쳐 〈에스콰이어〉에 취직했을 때였다. 〈에스콰이어〉 초대 편집장이 말했다. “여자한테 잘 껄떡거리게 생겼네. 네가 섹스 칼럼 써라.”
내가 여자에게 껄떡거릴까? 글쎄다. 이런 말엔 어떻게 반응할까? 어쩌긴. 가만있어야지. 잡지 에디터 일도 직장 생활이다. 직장 일은 이런 말을 들어도 해야 한다. 다만 나는 자위를 제외한 내 성 경험을 한 번도 섹스 칼럼에 쓰지 않았다. 그건 최소한의 존중이었다. 나와 시간을 보낸 어느 여자에 대한 존중. 그리고 내 존엄의 일부인 내 사생활에 대한 존중.
존중을 깔아둔 채로 자극적이면서도 웃긴 섹스 칼럼을 쓰는 게 기술적으로 쉽지는 않았다. 속이 쓰리지 않으면서도 매콤하고 금지된 재료를 쓰지 않으면서도 풍미가 풍부한 카레를 만들어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읽는 사람, 특히 여자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되 묘하게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섹스 칼럼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동시에 내 사생활을 팔지도 않고 자세한 이야기를 쓸 방법은 무엇일까. 구체적인 방법론을 고민하기 시작하자 섹스 칼럼은 나에게 기술적 과제가 되었다.
나는 옛날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에피소드의 흐름을 떠올렸다. 캐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타자를 치는 장면 위로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가 얹힌다. 그 뒤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 구성을 원고에 적용해보았다. 만난 적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코멘트가 이어지는 구성을 짰다. 에피소드가 얹히면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내려가는 구조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정리하자 섹스 칼럼은 나에게 일종의 구성적 실험이 되었다.
구성 실험의 구조를 짜면서 원고를 만드는 소프트웨어도 바꿨다. 나는 2017년부터 지금까지 〈에스콰이어〉 섹스 칼럼을 엑셀로 작성하고 있다. 한 셀이 한 문단이다. 문단 셀 옆에는 코멘터의 성별을 적어두는 셀이 있다. 나는 토픽이 나오고 나서 가능한 한 여-남-여-남의 의견이 번갈아 나오게 하려 했다. 그 옆에는 LEN 함수를 걸어서 글자 수가 표기되는 셀이 있었다. 문단의 글자 수는 가독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너무 긴 문단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당시 나의 또 다른 고민은 원고 작성의 효율 향상이었다. 직업 필자의 원고료는 정해져 있고 필자의 급이 올라가지 않는 이상 원고료는 그대로다. 내 급을 높이는 것보다 단위 시간당 원고 생산 속도를 높이는 게 더 현실적일 것 같았다. 원고 생산 속도를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구조화시켰다. 섹스 칼럼은 시스템화한 원고 작성의 좋은 모델이었다. 동일한 구성과 흐름에서 주제만 달라지니까. 매달 엑셀로 원고 작업을 할 때마다 엑셀 파일의 시트를 하나씩 늘려가며 같은 탬플릿에 원고를 만들며 효율성을 높였다. 모텔 건축가가 섹스광일 리 없듯 섹스 칼럼을 만드는 내 일상도 섹스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이것부터가 내 문제였을 수 있다. 내 일상이 섹스와 큰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섹스라는 소재의 파괴적인 면에 둔해지고 있었다. 내 소중한 친구들인 섹스 칼럼 코멘터들의 섹스는 대개 즐거운 것, 짜증 나는 일도 있지만 가끔 웃긴 일이 일어나는 것, 가끔은 엄청 짜릿한 것이었다. 즉 웃긴 농담 소재를 벗어나지 않았다. 나 역시 오래된 친구들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할 법한 농담 수준의 수위를 맞추려 했다.
버닝썬 사건이 터지자 그런 시선의 글도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일로 드러난 성범죄는 내가 상상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섹스 칼럼 코멘터 친구들의 이야기에 비교하면 장르도 폭력성도 다른 세계가 거기 있었다. 섹스가 이런 거라면 내 섹스 칼럼은 현실을 담지 못했다. 거기 더해 남성 잡지에서 이성애자 남자가 하는 섹스 이야기 자체가 현실 왜곡일 수도 있었다. 그때 내 마음과 상황을 말씀드리고 섹스 칼럼 연재를 중단하자고 했다. 섹스 칼럼으로 책을 내자는 제안도 미뤘다.
몇 달 후 〈에스콰이어〉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내게 “여자한테 잘 껄떡거리게 생겼네”라고 말한 초대 편집장님은 이미 그곳을 떠났다. 전화를 건 당시의 피처 디렉터는 “지금의 〈에스콰이어〉에는 나의 섹스 칼럼처럼 가벼운 농담 같은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감사한 일이었다. 좋은 추억이 있는 친정 매체에서 내 원고의 가치를 알아주어 일을 맡겨주셨다. 그만뒀다 해도 나는 여전히 〈에스콰이어〉를 좋아한다. 거절할 수 없었다.
그때쯤 되자 나 역시 목표 비슷한 게 생겨 있었다. 나는 ‘이렇게 하면 여자랑 잔다’, ‘이 여자랑 잤더니 이랬다’ 수준 이상의 원고를 만들고 싶었다. 삶과 사회는 복잡한 모순투성이고 섹스는 그 복잡도와 모순을 보여주는 단면이 된다. 예의를 지키는 우리의 마음속에 무례한 욕망이 묻혀 있다. 살다 보면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는데도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게 있다. 지금 너무 부끄러운데 동시에 더 부끄러워지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마음의 엑스레이 필름 같은 섹스 칼럼을 만들고 싶었다.
섹스를 하다 보면 선악도 윤리도 질서도 희미해지고 그 순간 둘만 아는 뭔가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건 단순한 육체적 오르가슴이나 절정 같은 게 아니다. 설명은 못 해도 눈빛과 땀과 눈에 안 보이는 페로몬 사이에서 떠오르는, 섹스를 통해서만 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정점이 있다는 걸, 그런 섹스를 해본 사람은 안다. 내 부족한 재주로 그런 걸 전할 수 있었으면 했다.
모든 섹스가 좋은 건 아니다. 그 사실은 모두 안다. 섹스나 사랑이나 쾌락 등등 이런저런 구실을 빌미로 되도 않는 요구를 하면 안 된다. 둘 중 하나가 원치 않는 섹스는 어떤 상황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적어두는 게 무색할 만큼 당연한 이야기다. 다만 서로가 최선을 다해 서로를 존중한다면 좋은 섹스를 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여전히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마주하지 않은 채 누가 올렸는지 모르는 글자 뭉치와 실시간으로 말싸움을 하는 시대다. 섹스는 그럴 때의 좋은 싸움거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도 섹스는 고민해봐야 할 일이 아닐까. 불편한 소재라도, 오히려 불편하기 때문에 가끔씩은 직시해야 하는 것 아닐까. 조금 더 나은 다음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며 성숙한 결론을 낼 줄도 알아야 하니까. 그게 어른이니까. 이런 생각으로 원고를 만들어왔다.
이게 내가 지금까지 섹스 칼럼을 계속해온 이유다. 기술적 목표가 있었다. 의뢰받은 일을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조금 더 성숙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알량한 책임감이 있었다. 구구절절 말해도 ‘섹스 칼럼 쓰는 주제에 어디서 헛소리야’라고 여기시는 분도 있을 것 같다. 이해한다. 섹스 칼럼을 처음 시작한 때부터 겪었던 시선이니까. 이 원고가 많이 퍼지지는 않겠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글 때문에 불편하거나 불쾌하셨을 분이 계셨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모두 내 능력 부족, 내 불찰, 내 탓이다.
내가 고만고만한 섹스 칼럼니스트인 것과는 별개로 좋은 섹스는 여전히 어딘가에 있다. 서로를 깊이 존중하는 동시에 서로의 광기를 터뜨리며 물고 찌르는 형용모순의 즐거움이 있다. 다만 그게 글이라는 메시지 형태로 표현되어 잘 전해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섹스 칼럼을 실어도 되겠느냐는 대학 동아리 잡지 편집장께 이렇게 답했다. 싣지 마시라고.
 
Who’s the writer?
박찬용은 〈에스콰이어〉 전 피처 에디터다. 지금은 매거진 〈B〉에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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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OR 김은희
  • WRITER 박찬용
  • DIGITAL DESIGNER 이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