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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25주년' 한국 인디의 시발점 크라잉넛의 관록

크라잉넛의 관록과 탄생을 둘러싼 오해.

BYESQUIRE2020.09.25
 
 
 

크라잉넛

1995년 결성. 크라잉넛은 홍대 앞 인디 신의 태동과 함께 탄생해 8개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그사이 수많은 밴드들이 인디 신의 역사를 수놓고 사라졌다. 이 밴드의 역사와 무게를 생각하면 반대로 크라잉넛의 결성이 홍대앞 인디 신의 시발점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① 관록

솔직히 크라잉넛이 연주를 아주 잘하는 밴드라는 느낌은 없었는데 이번 25주년 앨범을 들어보니 관록이 느껴져요.
한경록(베이시스트, 이하 ‘록’) 그런 얘기 듣고 싶었어요.(웃음)
새로 녹음한 의미가 완전 있어요.
연주가 막 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한 노래를 오래 연주하다 보면 느낌이 있거든요.
이상혁(드러머, 이하 ‘혁’) 옛날에 앨범 만들 때는 사실 몇천 번 연주해서 건져낸 게 아니었어요. 잘 안돼도 그냥 넘어갔죠. 이번에 녹음할 때는 진짜 오랜 기간 연주해온 곡들이라 안 쫄고 한 것도 있고요.
기타 연주가 엄청 화려해졌어요.
이상면(기타리스트, 이하 ‘면’) 최대한 뺀 건데 그래도….(웃음) 공연 때는 더 화려하게 연주하는데, 앨범에 너무 화려하게 넣으면 밸런스가 안 맞을 거 같아서 정리한다고 한 거예요.
원곡이랑 같이 들어보면 재밌더라고요. 음압이 완전히 다른 느낌?
맞아요. 정확해요. 그건 아마 그사이에 레코딩 기술이 엄청 발전했기 때문일 거예요. 녹음도 믹싱도 마스터링도 좋은 데서 했거든요.
우리 작업실도 좋기는 해요. 다른 앨범은 모두 여기서 했으니까요.(웃음) 이 귀요미 사이즈의 스투더(Studer) 믹서는 예전에 언니네이발관 드러머였던 김반장 형이 탐낸다고 하기에 냅다 사 온 거였어요. 그렇지만 이번 기념 앨범 작업은 저희가 아는 가장 좋은 데서 했죠. CJ 아지트 스튜디오요.  
이번 앨범에서 뭐가 제일 잘 나온 것 같아요?
전 개인적으로 ‘개가 말하네’가 녹음이 되게 잘된 거 같아요. 저번에 너무 못해가지고. 특히 노래가 저번보다 되게 잘된 거 같아.
박윤식(보컬, 이하 ‘식’) 그럼 저번에는 내가 못 불렀단 얘기잖아.(웃음)
(웃음) 아니, 저번에 못 부른 게 아니라, 이번에 노래를 되게 잘한 거 같다는 거지. 뭔가 들으면 되게 안정적이야.
김인수(키보디스트, 이하 ‘수’) 원래 앨범에 있는 버전을 녹음할 때 사건이 있었지. 드럼 다 녹음해놓고 기타 치고 있는데, 아예 통으로 한 ‘구다리’가 비는 거야. 그래서 드럼 처음부터 다시 녹음했잖아. 나 개인적으로는 ‘지독한 노래’가 원래 하고 싶었던 거 거의 다 한 케이스라고 해야 하나, 뭐 그래요.
아이튠즈 영어 제목 중에 제일 재밌었던 게 ‘Oh! What a Shiny Night’였어요. 원제는 ‘밤이 깊었네’잖아요.
저희가 그 당시에 외국 공연을 조금 나갔었어요. 한국 팬이 있는 곳은 괜찮은데, 모르는 사람도 있고 하니까 한번 시도해보자고 영어 가사로 번안해 부르기도 했죠.
아, ‘말 달리자’ 영어 제목은 뭐였더라? ‘Speed up Losers’였나?
난 ‘다 죽자’가 제일 웃겨. 영어 제목이 ‘All Die’야. 근데 외국 가서 영어로 노래를 몇 개 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별로 없는 거예요. 그냥 외국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말로 하는 걸 더 좋아하더라고요. 어설프게 영어로 번안하면 음악적인 라임이 사라지니까 음악이라는 느낌이 없나 봐요.
BTS 전에는 한류라고 해도 미국 가서 공연하면 앞자리는 전부 한국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게 말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 게, 사실 같은 말 쓰는 영국 밴드도 미국 가서 뜬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요.
저희가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SXSW)에 처음에 갔을 때는 아이돌 팀은 없었어요. 다 밴드였죠. 두 번째 갈 때부터 아이돌이 같이 참여하기 시작했죠. 그러다 아예 SXSW에 한국관이 만들어졌어요. 한국 아이돌과 밴드가 출연하는 관이 만들어졌고, 그게 SXSW에서 제일 인기를 끌었죠.
 
 

김인수

1974년 출생. 1999년 2집 〈서커스 매직 유랑단〉에 참여하며 크라잉넛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② 투어

25년을 함께한 멤버들이라 정말 할 얘기가 많군요. 생각해보면 그해에 태어난 아이가 이미 대학에 가고, 군대까지 갔다 와서 내년에 취업할 나이인데, 쉰 적이 없죠?
진짜 우리는 쉬어본 적이 없어요. 보통 밴드들은 앨범 녹음 들어가면 공연이나 일정 같은 거 안 잡고 쉬거든요. 우리는 그렇게도 쉬어본 적이 진짜 없어요.
녹음 중에도 계속 공연 강행인가요?
공연 들어오면 뭐, 감사합니다 하고 가야죠.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요. 코로나19로 모든 축제가 중단됐으니까.
코로나19 때문에 이번 25주년 앨범에 진짜 올인할 수 있었어요. 진짜 이 앨범 작업이 우리의 메인이었어요.
그럼 거의 유일하게 25년 중에….
처음 맞은 강제 휴가죠.(웃음)
원래는 한 4월부터 지금까지가 피크 타임이잖아요.
그렇죠. 5월부터 9월까지죠. 대학 축제, 여름 페스티벌, 가을 축제로 이어지는.
보통 저희 같은 밴드는 6월, 8월, 9월 이때, 그해 일 년 장사를 다 해요.
해수욕장 근처 업소랑 비슷해요.(웃음)
사실 올해에는 8월에 비대면 공연으로 일 년 장사를 다 했어요. 코로나19로 미루어오다 예산을 못 써서 써야 되는 페스티벌들이 있거든요.
투어 다니는 밴드가 한국에 많지 않죠? 그 일상이 궁금해요.
투어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게, 우리나라는 1일 생활권이라.
근데 외국 밴드들 얘기 들어보면, 진짜 한번 집에서 나오면 거의 반년을 못 들어간다고 하더라.
맞아. 밴드가 깨지는 이유가 바로 투어!
버스 안에서 반년을 살아야 되는 거예요, 밴드들이.
크라잉넛이 안 깨진 이유는 대한민국이 1일 생활권이라서인가요?
그런가 봐요.(웃음)
우리가 투어를 만들어서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예전에는 어딜 가면 무조건 1박을 했어요. 하다못해 수원 공연을 가도, 수원에 처음 가보니까 이게 신기하고 재밌는 거야. 박윤식은 인하대 다녀서 인천에서 맨날 출퇴근하면서도 인천 공연 가면 자고 왔어요.(웃음). 뭐 하는 짓인지, 그게.(웃음)
공연 끝나고 같이 술 마시는 게 재밌으니까 안 자고 와도 되는데 일부러 자고 오는 거죠.
그걸 한 10년 가까이 하다 보니 진짜 전국 맛집을 우리가 다 알더라고요. 그때부터 좀 식상해졌죠. 어딜 가도 새롭지가 않은 거야. 처음에는 인터넷도 없을 때라 우리처럼 맛집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없었어요. 현지인들이 소개해주는 진짜 맛집. 그때가 진짜 재밌었어요.
그때 맛집 책 하나 냈어도 됐을 거 같아.
지금 내도 될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서.(웃음)
근데 지금이랑 분위기가 다른 게, 지금은 맛집 블로거며 뭐며 굉장히 많잖아요. 그때는 그런 게 없었거든요. 그때 우리가 찾은 맛집이 ‘찐’이었는데.
예를 들면 제주도의 무슨 음식점을 가면 메뉴에도 없는 음식을 알려줘서 그걸 먹고 오고 그랬어요. 기억났다. 옥돔무국!
그거랑 뒷고기.
그렇게 하는 것도 지칠 때가 오지 않아요? 가서 1박 하고 술 마시고 놀고 다음 날 오는 거.
지치는 것보단 몸이 안 따라줘가지고.
너무 피곤해! 1박 2일 하면 공연은 안 힘든데 숙취가 너무.(웃음)
이젠 멤버 대부분이 결혼해서 가족도 있고, 서울에서 할 일도 많고. 그래서 이제는 하루 안에 다녀와요. 대신 차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차에서 다들 자기 개발을 하죠.
차에서 뭐 해요?
잠자는 거?(웃음)
잠자는 게 자기 개발.(웃음)
뭐 책도 읽고, 뜨개질도 하고.
펑크 밴드가 뜨개질… 새롭다.
결혼하면 바뀌는데, 일단 가족이 생기고 수익을 공유하니까요. 공연한 수익을 공유해야 하는데, 공연하고 나서 그 돈으로 밖에서 술 마시고 자고 들어오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어.
경록 형은 안 하지 않았나요?
아직 안 했어요.
경록이는 홍대랑 결혼했죠.
아, 싫다.
공연 수익이 음반 수익을 훨씬 앞지르게 된 시점이 있지 않나요? 처음엔 음반 수익이 그래도 좀 많았을 거 같은데.
저희가 3집까지 10만 장을 팔았대요.
MP3 나오고 나선 음반 수익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돼요. 순식간에 없어졌죠.
소리바다 같은 불법 공유가 판을 치면서 사라졌죠.
이제는 아이돌이 아니면 음반만으로 수익을 기대할 순 없는 거 같아요.
나만 해도 CD 안 사는데 뭐.
저희가 앨범 재판을 찍긴 했지만 워낙에 초판을 적게 찍었거든요. 그런데도 예스24에서 판매량 9위예요.(웃음)
그래도 CD를 계속 찍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장사가 되는 건 CD밖에 없으니까. 스트리밍으론 아무리 해도 돈이 안 되거든.
1000만 명이 들어도. 그냥 음반 100장 파는 게 더 많이 벌걸요?
일 년에 3원 번다는 사람도 있잖아요. 음원 수익은 그 누구도 제대로 모르게 계산하니까 그런 식으로 떨어지죠.
저작권도 그렇죠. 한 밴드의 싱어송라이터가 ‘이달에 2만원 들어왔다’고 말했는데 그 술자리에서 제일 많이 벌더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야, 오늘 플렉스하러 가자. 2만원 들어왔다! 뭐 그런 건가?
아이돌은 중국에서 팬덤이 듣다 보면 이게 0이 몇 개 더 붙으니까 그 정도는 돼야 돈이 되는 거죠. 인디 밴드가 음원으로 돈 벌기는 힘들어요.
 
 

박윤식

1976년 출생. 1995년 데뷔. 크라잉넛 메인 보컬을 맡고 있다.
 

한경록

1977년 출생. 1995년 데뷔. 크라잉넛 베이시스트를 맡고 있다.
 
 

③ 드럭

데뷔한 해인 1995년의 홍대는 지금이랑 완전히 달랐죠?
당시엔 지금처럼 번화하지 않았어요.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는 뭐, 거의 없었고요. 아기자기하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낭만적인 느낌이 많았죠.
번화가도 별로 없었어요. 홍대에서 번화가라고 하면 지금은 재개발된 곱창골목이 있었죠.
근데 1995년 4월 5일 커트 코베인 추모 공연 때 드럭에서 다른 밴드가 공연할 때 뛰어들어서 앰프를 부쉈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게 인연이 되어서 드럭 소속 밴드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4월 5일은 아니고요, 추모 공연은 맞아요. 저희는 그냥 놀러 갔었죠.
그때 드럭에 가려던 것도 아니었어요. 원래는 ‘락월드’라는 메탈 클럽을 가려고 했는데 거길 못 찾아서 드럭으로 갔지.
홍대를 기점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드럭이고 왼쪽으로 가면 락월드인데, 그게 홍대를 바라보고 갈 때 얘기거든요. 그런데 홍대에서 보고 반대로 나온 거죠.
그래서 우리 운명이 락월드에서 드럭으로.(웃음) 완전 지미 헨드릭스가 왼쪽으로 가서 펩시콜라를 선택하는 그런 느낌이네.(지미 헨드릭스 펩시 광고)
그날 드럭에서 한 공연은 일종의 기획 공연이었어요. H2O 멤버 몇 명이랑 성기완 형이 멤버였는데 밴드 이름이 아마 ‘토마토’였을 거예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블러드 슈가〉 앨범에 있는 ‘섹스 매직’을 부르는데, 그때는 진짜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 같았어요. 아직 스무 살 때였으니까요. 미국 시애틀의 클럽에 온 느낌이랄까?
식 계단 내려가는데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다들 담배 피우면서 노려보고.
그땐 좀 무서웠어.
그렇게 좋은데 왜 앰프를 때려부쉈어요?
아니, 외국 영상 보면 다 그러더라고요. 커트 코베인이 기타로 앰프 부수고. 근데 우리가 그렇게 심각하게 부순 건 아녜요.
그리고 거기서 공연하던 밴드 멤버들이 먼저 부쉈어요. 그래서 우리도 부숴도 되나 보다 하고.(웃음)
근데 당시 드럭 사장이 화를 안 냈다고요.
화냈어요.(웃음) 우리보고 이리 와보라고, 너네 뭐 하는 놈들이냐고 했죠. 그때 “우리 밴드 해요”라고 답했어요. 그랬더니 삐삐 번호 달라면서 오디션 보러 오라고 하더라고요.
아냐. 그때 “우린 록을 하죠” 그랬던 거 같은데.
“우린 록을 하죠”라고는 안 했을 거 같은데… 그건 좀 너무 영화 대사 아닌가?
아냐, 아냐. 뭔가 기억이 나요. “우린 록을 하죠” 그렇게 말했던 거 같아. 그게 기억이 나.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근데 그때 정말로 록을 하고 있었어요?
합주만 했죠.
곡도 없고.(웃음)
괜히 센 척한 거 같긴 해요.
어느 날 진짜로 삐삐가 와서 전화를 했더니 사장님이 “야, 니네 오디션 보러 온다 해놓고 왜 안 오냐”고 하더라고요. 부랴부랴 합주실 가서 노래 맞춰서 오디션을 봤죠. 엉망이었죠 뭐.
그때 그 오디션을 고구마 형, 코코어 우성이 형이 지켜봤는데 다들 뭐, 저희보다 못하는 사람 없었어요.
전 중학교 막 졸업하고 크라잉넛 공연을 처음으로 봤어요. 그때 생전 처음 봤던 클럽의 열기가 잊히질 않아요.
그때가 재밌었어요. 저희가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았는데, 우리가 노래를 내면 관객들이 소품을 사 왔어요. ‘빨대 맨’이란 노래를 만들면 팬들이 빨대를 엄청 구해 와서 공연 때 뿌려주는 거야. 그때 친구들 되게 재밌었는데.
맨날 사람들이 꽉 찼죠.
드럭에서 삼거리포차 골목까지 ㄱ자로 줄을 섰죠.
그때 분위기를 아무리 글로 설명해봐야 전달이 안 될 것 같아요. 진짜 그 동네 전체가 용광로처럼 끓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요즘은 그 동네가 ‘쿨’하잖아요. 그때는 진짜 뜨거웠어요. 돌아다니는 애들이 열이 많아서, 열정이 많아가지고 그랬나 봐. 우린 정말 놀 게 없었어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막 규칙 없이 놀다가 드디어 문화가 생겨난 거 같아요. 우리끼리 놀자. 근데 어떻게 놀까? 놀자는 열정은 대단한데 그 열정이 얼마큼 뜨거웠냐면, 겨울에 공연을 하면 드럭에 있는 조그만 한 창문에서 불난 것처럼 연기가 막 났어요. 진짜 농담 아니고 공연장 안에는 땀 때문에 구름이 생겼어요. 진짜 거짓말이 아니라 구름이 막 와! 천장에서 막 비가 왔어요. 진짜.
진짜 그때는 공연장 안에 산소가 부족해서 사람들이 약국에 가서 산소호흡기를 사다 쓰고 그랬으니까.
나도 샀잖아. 공연 때 노래 부르기 힘들어서.
그때 같이 공연하던 미국 밴드가 있었는데, 걔네가 노는 법을 알더라고요. 몸을 부딪쳐서 슬램을 하고 모싱하는 문화를 그때 처음 봤어요. 한국에 미국 펑크 신의 문화가 처음 전파되는 걸 본 거죠.
뜨거운 분위기가 왜 하필 그때 생겼나 생각해보면, 사실 그때가 우리나라 각 가정이 가장 부유했던 때가 아닌가 싶어요. 가계소득이 GDP 대비 가장 높은 시기였고, IMF 사태 전이었고.
돈도 시간도 있는데, 정말 노는 문화가 너무 없었어요. 노래방 하나밖에 없었는데 클럽 공연 문화가 생기고 스케이트 문화가 생기고. 그게 결합해서 새로운 음악이 탄생하고. 보드 타는 애들은 좀 막 나가는 도전 정신이 있거든요. 우리도 보드 타며 그런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새로운 걸 찾아다녔죠.
그때 하이텔, 천리안 이런 통신이 생겼어요. 유행이 점점 빨라졌던 거 같아요. 그 전에는 음악 들을 때 잡지가 전부였거든요. 〈핫뮤직〉 〈서브〉 뭐 그런 거였는데. 그때 컴퓨터 네트워크가 연결된 이후로는 정보가 빨라진 거죠.
그때는 뭔가 남과 다르려고 애를 많이 썼던 것 같아요. 스케이트 펑크니 스카 펑크니 로커빌리니 서브장르로 다 나누고, 내가 하는 음악은 다르려고 애를 썼죠.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였고요.
맞아요. 음악도 막 열심히 찾아 들으면서 ‘너 이 밴드 알아?’, ‘이 음악 알아?’라는 스웨그를 보여줬죠.
그것도 있었어요. 자기만 알고 싶고, 내가 아는 이 밴드는 안 떴으면 좋겠다는 마음.
요새는 좀 다르잖아요. 남들 다 아는 걸 모르면 부끄러워하고 남들 다 듣는 걸 알아야 하죠. 인싸력(인사이더가 되려는 노력)이 강해졌달까?
세상이 바뀌었어요.
‘말 달리자’가 브라보콘 CF에 나온 이후에는 인생의 진로를 결정할 시기가 왔을 것 같아요. 전업 뮤지션이냐 아니냐를.
그때 아직 대학에 다니고 있었어요. 3학년에서 4학년으로 넘어갈 때쯤이었는데. 갑자기 뮤직비디오 찍은 걸 방송에서 틀어주기 시작하면서 방송 출연이 좀 많아졌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엠카운트다운〉 같은 음악 프로그램이었죠. 원래는 대학교 다니면서 공연을 했고 거의 드럭 공연이 다였어요. 점점 외부 공연이 많아지면서 드럭 공연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4학년 때였는데 학교를 관뒀죠.
 

이상혁

1976년 출생. 1995년 데뷔. 크라잉넛 드러머로 이상면과 쌍둥이다.
 

이상면

1976년 출생. 1995년 데뷔. 크라잉넛 기타리스트로 이상혁과 쌍둥이다.
 
 

④ 오해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밴드라 더 고민했을 것 같아요.
그 전까지는 록 음악 하면 메탈이었으니까. 백두산, 시나위가 전부였지.
약간 머리 길고 잘생기고 키도 크고 그런 사람들이 하는 게 록이었죠. 근데 어디서 그냥 동네 애들 같은 우리가 튀어나오니까. 방송에 내보내려고 드럭 사장님이 그때 애를 많이 썼죠. 방송국에서 경비한테 쫓겨나기도 하고.
진짜요?
저희도 들은 얘긴데, 그때는 피디 방 문 앞에 매니저들이 쫙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데가 있었대요.
옛날에는 피디가 왕인 구조였다면, 지금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으로 채널이 다양화됐고 기회가 더 많아졌어요. 근데 왜 음악의 다양성은 줄어드는 것 같죠?
사실 따지고 보면 다양해졌다고 하는데, 머릿수만 늘었죠. 근 20년 동안 판은 똑같은 것 같아요.
요새는 밴드를 해도 설 무대가 없지 않나요?
제가 크라잉넛 말고 다른 밴드도 만들었거든요. 근데 그 밴드는 이제 인기가 없으니까 그 수준의 다른 밴드들과 묶어서 공연을 많이 하는데, 진짜 다섯 팀이 공연하는데 관중은 10명인 경우 많아요.
근데 신기하게도 아직도 밴드가 있어요. 너무 신기해. 난 진짜 이런 생각이 들어요. 잘한다 못한다 실력을 떠나서 지금 록 밴드를 시작하는 애들이 ‘찐’인 것 같아. 진짜 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정말 멋져. 지금 하는 애들이 진짜 순수한 애들이야. 뭘 바라지 않고 그냥 이게 좋아서 하는 거야. 나는 얘네들 보면 진짜 응원해주고 싶고, 술 한잔 사주고 싶어요.
‘홍대 인디 밴드’라는 관용적으로 굳어버린 단어 때문에 많이 오해받지 않아요? ‘악동’이라고는 하지만 제가 알기론 인수 형이랑 경록이 형 말고는 술도 그렇게 많이 안 마시지 않나요?
술은 많이 마셔요.
집에서.(웃음)
전 술 끊었어요. 의사가 먹지 말래서.
인디 초창기에는 좀 다른 얘기를 엄청 많이 들었죠. ‘인디가 뭐냐’는 얘기. 하도 질문을 많이 하니까 사실 우리도 인디가 뭔지, 펑크가 뭔지 고민을 많이 한 시기가 있었어요. 근데 이제 세대가 바뀌고 보니 그렇게 주장을 펼치는 게 무의미해진 거 같아요. 인디다, 홍대 인디 밴드다, 펑크다, 조선 펑크다, 이런 거 말고 ‘크라잉넛이다’가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그게 다 386 먹물들이 문화 공부 한답시고 록 음악 학습하다 보니까 생긴 문화지.
옛날에는 인디, 언더그라운드란 개념 자체를 사람들이 굉장히 알고 싶어 했고, 그걸 정의 내리려고 했던 거 같아요.
요샌 음악 스타일로 해석하는 시선도 있죠.
하긴 ‘홍대 인디 밴드’ 하면 다 펑크 밴드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길바닥에서 통기타 치면서 데미안 라이스 카피하는 애들을 떠올리더라고요.
심지어 레이블 이름이 ‘인디’인 레이블도 있어.
냉장고 회사 이름이 ‘냉장고’인 거랑 똑같지.
그런 것도 있잖아요. 열심히 연습하거나 노력하는 이미지보다는 하루 종일 집에서 막 숙취에 절어 있다가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서 기타 잡고 곡 쓰는 이미지?
일단 우리 세대에서 제일 성공한 건 글램 메탈, LA메탈이라 불렀던 머틀리 크루나 건스 앤 로지스 그런 형들인데, 〈더 더트〉 영화 보면 나오잖아요. 이 형들이 맨날 마약하고 파티하고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조깅하고, 공연할 때 칼같이 박자 맞추고 그랬어요. 새벽에 떡이 되어서 들어와도 눈뜨자마자 공연장으로 업혀서라도 다시 가서 공연하고.
펑크 이미지가 맨날 술 마시고 연습 안 하는 건 줄 아는데, 그렇게 하면 공연 자체를 못 하죠.
1970년대 펑크는 그랬어요. 우리를 그 기준에 놓고 술만 먹는 망나니 같은 모습만 부각시키는 거죠.
그게 편리하니까. 우리를 쉽게 표현할 방법이 그거밖에 없으니까.
 
 
*인터뷰 풀버전은 에스콰이어 10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