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HE, SO NAKED
」비비 씨 같은 뮤지션에게는 특히 힘든 일이었겠죠.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음악을 시작한 사람이니까.(비비는 외톨이였던 청소년기에 자기 안에 있는 말을 표출하기 위해 음악을 시작했다고 밝힌 적 있다.)
네. 그런데… 그것도 처음에는 그랬는데, 나중에는 돈이 정말 벌고 싶었어요.
돈.
제가 참 그래요. 러키 걸인데, 뭔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이 또 있어요. 제가 장녀거든요. 가세는 제가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기울어 있었고, 동생은 알아서 잘하는데도 제 눈에는 마냥 귀여워서 자꾸 걱정되고. 그 안에서 계속 외로워했던 것 같아요. 사실 뭐 엄청난 시련은 없었어요. 밥을 굶은 적은 없으니까. 그런데 제가 스무 살이 넘어서 처음 한우를 먹어봤거든요. “나 한우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더라” 하니까 아빠가 그래요. 자기도 스무 살 넘어서야 국 안에 든 고기 말고 구운 고기를 처음 먹어봤다고. 딱 그 정도인 거죠. 정말 힘들게 해온 분들이랑 비교하면 애매한 시련인 거예요. 그런데 그게 제 안에서는 강박을 만든 거고. 그래서 돈이 정말 벌고 싶었고요.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다들 제가 사랑 많이 받고 잘 자랐을 거라 생각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어릴 때부터 혼자였거든요. 또 모르죠. 원래 다들 이 정도로 혼자인데, 제가 이상이 너무 높아서 혼자라고 더 느낀 걸 수도 있고요. 엄마 아빠가 곁에 없을 때가 많았어요. 짐짝처럼 여기저기 맡겨질 때가 많았고, 친구들 다 갖고 있는 게 나한테만 없을 때가 많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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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제로 말한 건 개선됐다는 뜻이겠죠?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형편이 좀 풀리긴 했는데, 또 코로나19 때문에… 하… 아빠가 여행사를 하거든요. 그나마 제가 돈을 보내드리긴 하는데, 자꾸 집 생각이 나요. 제 문제가 그건 것 같아요. 집에 돈이 얼마나 남았을까, 지금 저걸 사면 안 될 텐데, 자꾸 그런 걱정을 해요. 일을 하면서도 자꾸 버짓 생각을 하고요. 필굿뮤직도 별로 큰 회사가 아니잖아요.
회사 안에서도 장녀 마인드군요.
사실 제가 그럴 필요는 없는데, 이기적으로 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이죠. 이유는 모르겠어요. 그냥 그래요. 그런 근성이 제 몸에 남아 있나 봐요.
밖에서 보기엔 멋있었어요. 사장님에게 그랬죠. 열심히 해서 필굿뮤직 빌딩 올리겠다고.
빌딩은… 못 올릴 수도 있겠죠.(웃음) 못 올릴 수도 있는데, 저희 A&R하는 언니가 진짜 고생이 많거든요. 매니저 오빠도 그렇고. 어떻게든 뭔가를 되게 하려고, 더 효율적인 조건에 하려고 사정 사정하는 게 눈에 보이니까.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좋을 것 같아서 제가 열심히 하는 게 있어요. 돈을 열심히 벌려고.
비비 씨가 음악 하는 걸 부모님이 반대했다고 들었어요. 아버지가 음악을 했던 분이기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냥 계속 보험처럼 공부를 하라고 하셨던 것 같아요. ‘공부해라, 음악 하면 안 된다.’ 아빠가 제 장비들을 내다 버린 적도 있거든요. 저는 울면서 ‘내 마이크 어데 갔노’ 하면서 찾으러 다니고.
그렇게 뜯어말리면 오히려 마음이 더 열렬해지지 않나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음… 모르겠어요.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마음은 아니었어서. 음악은 저한테 진짜 갖고 노는 것, 딱 그거였거든요. 짜증 날 때 때리고 화풀이하는 인형 있잖아요. 요즘에는 ‘좋은 음악 해야겠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는데, 그때만 해도 짜증이나 화가 나면 음악으로 그 마음을 풀어내고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정작 비비 씨가 음악을 관두려고 할 때는 아버지가 잡아줬다고 들었어요.
타이거JK랑 윤미래가 같이 일하자고 연락했다니까 그런 거죠. 그런데 제가 또 반골 기질이 있거든요. 거기다 대고 그랬죠. “싫은데?” 그냥 대학 나와서 공무원 할 거라고, 스페인어 배워서 영사관에 취직할 거라고. 그렇잖아요. 음악 한다고 했을 땐 한 푼도 안 도와준 사람이 갑자기 그러니까. 그래서 또 엄청 싸웠죠. 제가 아빠랑 좋을 땐 막 서로 ‘옴뇸뇸’ 하면서 ‘아빠~’ ‘형또야~’(비비의 본명은 김형서다) 이러고 완전 사랑하는데, 싸울 땐 또 살벌하게 싸우거든요.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고맙겠어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왜 좋아하는 일이 돈이 되면 싫어지잖아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아, 차라리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걸 해서 돈을 벌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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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히 차려입고 영사관에서 일하는 게 더 힘들지 않았을까요?
그죠. 그건 제가 절대 못 했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웃음) 좋아하는 걸로 돈을 버는 게 힘든 건 자꾸 그게 미워져서예요. 왜 흔히 창작의 고통을 산고에 비유하잖아요. 저는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난자와 정자가 만난 것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땐 너무 좋죠. ‘와 대박’ 하면서 막 만들고, 가사 쓰고. 그런데 또 정리하고 믹스, 마스터해야 하잖아요. 배 안에서 키우는 그 과정이 너무 힘든 거예요. 그렇게 스트레스가 절정에 다다라서 곡을 탁 내놓죠. 그런데 또 그게 끝이 아니고.
그때부터 시작이죠.
정말로요. 곡 내고 나면 할 게 또 너무 많으니까요. 육아에 시달리는 것처럼. 그렇게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아이 보느라 피곤해 죽겠는데, 그 와중에 또 뭐가 옆에 와서 ‘자기야~’ 하면서 치대고.
그건 뭐예요? 새로운 곡의 영감?(웃음)
그쵸. 아, 세상에. 한껏 미워하면서도 ‘와 결국 다 끝냈다’ 하고 앉아 있으면 또 다른 곡의 영감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아 왜 이래’ 하면서도 또 어느새 작업을 시작하고 있고.
필굿뮤직 대표 두 분이 사운드 클라우드 작업물만 듣고 수소문해서 먼저 연락했잖아요. 첫 만남 때 뭐라고 하던가요?
만날 때까지 두 분이 제 나이도, 얼굴도,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어요. 목소리만 알았죠. 처음에는 ‘멜로디를 잘 짜는데 프로듀서로 키워볼까’ 이런 생각을 했대요. 그런데 만나보니까 애가 어리기도 하고 괜찮다, 그럼 가수로 계약하자 하신 거죠. 열아홉 살 겨울이었으니까 그때는 제가 많이 뚱뚱했는데… 얘기가 그렇게 멋있지는 않죠?
아니에요.(웃음)
사실 저도 두 분을 잘 몰랐어요. 그런데 안아주더라고요, 미래 언니가. 따뜻한 품으로 안아줬어요.
첫 만남에?
네. 첫 만남에. 저도 ‘어라’ 했는데, 엄마 같더라고요. 저희 엄마도 되게 마르고 골격이 작거든요. 그런 생각을 했죠. ‘엄마를 안고 있는 것 같네?’, ‘근데 나 머리 3일 안 감았는데?’
비비 씨가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던 것 같아요. 본인은 노래를 잘하거나 춤을 잘 추는 것도 아니고,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이야기를 잘 풀어놓는 게 유일한 장점인 것 같다고. 그런 경로로 가수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겠네요.
맞아요. 저는 그냥 얘기를 잘 지어내고, 제 얘기를 잘 푸는 편인 것 같아요. 저도 그게 좋고요. 나머지는 그냥 알량한 재능인 것 같아요. 진짜 알량한. 제가 끈기가 별로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것들로 최대한 잘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거죠.
노래나 무대로도 호평을 많이 받잖아요. 윤종신, 박진영 같은 굵직한 프로듀서의 러브콜도 받았고, 좋아하는 뮤지션인 릴체리의 새 앨범에도 참여했고, DJ칼리드가 참여한 프로젝트 ‘From Milan with Love’에도 출연했고. 자신감이 좀 붙을 법도 하지 않나요?
저한테 마음의 결함이 있는 것 같아요. 자기 혐오가 좀 있어요. 우월한 나와 열등한 나로 나누고, 그래서 우월한 내가 열등한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사람마다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제 단점이 너무 싫은가 봐요.
예전에는 그렇게 말한 적도 있어요. “나는 단점이 많은 사람이야. 하지만 나는 내 단점을 사랑해.” 자기 안을 자주 들여다보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워낙 모순이 많긴 한데….
시기의 문제이기도 하고요. 저는 다 사실인 것 같거든요. 제가 그렇게 가창력이 좋지도 않고, 나머지 부분도 그다지 탁월하지 않은 것 같고. 그런데 동시에 ‘그렇지 않음’이 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탁월하지 않음이?
네. 한편으로는 이런 알량한 재능들이 모여서 저를 이룬다는 게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만약 그 알량한 재능들로 성공한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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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와 인터뷰 풀버전은 에스콰이어 1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