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부채 장인은 겨울에 무엇을 할까?

햇볕 내리쬐는 계절이, 또 돌아올 테니까.

BYESQUIRE2021.01.07
 
 

선자장의 겨울

 
 
 
이 기사는 한파가 들이닥친 아침 불현듯 떠오른 한 질문에서 출발했다. ‘부채 만드는 장인은 겨울에 무엇을 할까?’ 선자장(부채 만드는 장인)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으니 설익은 호기심이긴 했으나 여름철 스키 리조트의 사정 따위를 궁금해하는 마음과는 또 달랐다. 어쩌면 질문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숭고함을 막연히 그리워하는 마음인지도 몰랐다. “옛 어른들이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죠. ‘합죽선도 8월이면 환갑’이라고. 벌써 늦여름부터 다음 봄까지는 부채가 안 팔린다는 뜻이에요.” 김대성 선자장 이수자는 부채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여름 물건이라고 했다. 실용품의 범주를 벗어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워낙 여름에 떠올리게 되는 물건이며 선물용으로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고. 그는 선자장 최초의 국가무형문화재인 김동식 선자장의 아들이자 가문의 5대째 이수자로 전주에서 공방 동성공예의 운영을 돕고 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합죽선 공방은 지금이 가장 바빠요. 10월에 대(나무)를 베면 그때부터 12월 중순까지 부채의 기초를 만드는 초조 작업을 해야 하거든요.” 수화기 너머로 그는 초조 작업도 다음 주 중순이면 마무리가 될 것이라 했고, 나는 곧장 전주로 가겠노라 답했다.

 
 
합죽선은 얇게 깎은 대나무에 종이나 헝겊을 발라 접고 펼 수 있도록 만드는 전주 전통 부채다. 더할 합(合)자에 대나무 죽(竹)자를 쓴 이름처럼 대나무 외피를 맞붙여 만드는 골조가 가장 큰 특징이다. 속대를 쓰는 여타 접선에 비해 튼튼하고 탄력이 좋아 시원한 바람을 불러오지만 대신 공정이 까다롭다. 흔히 합죽선 하나를 만드는 데에 손이 150번 간다고 말한다. 본래는 기술의 성격에 따라 2부6방의 여섯 장인이 달라붙어 하는 일이었으나, 선풍기와 에어컨이 득세한 이래로 김동식 선자장은 그 모든 일을 혼자 해왔다. 공방에 도착했을 때 선자장은 건물 옥상의 비닐하우스에서 손님을 맞았다. 습기에 민감한 작업들을 따로 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라고 했다. 설명 끝에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는 방에서 에어컨을 켜고 해도 되겠지만” 하는 단서를 달기도 했으나, 문장을 끝맺지는 않았다. 작업 방식의 작은 변화가 결과물의 미묘한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로 인해 자신의 작품으로 내놓을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가 숨어 있었을 테다. 후에 아들 김대성 씨가 헤아려 풀어준 바에 따르면. 선자장은 그 작은 차이들을 ‘균형이 흐트러진다’는 표현으로 뭉뚱그려 이른다고 했다.
 
 
선자장은 올해로 일흔여덟이다. 나이를 듣는 누구나 재차 되물을 정도로 정정하지만, 그렇다고 ‘강건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다. 순한 인상인 채 속으로 곧고 단단한 사람. 꼭 그가 만드는 부채 같다고 해도 과한 표현은 아닐 듯하다. 그가 처음 부채 일을 접한 게 열네 살 때였으니 그야말로 일평생 부채를 만들어온 셈이다. “합죽선을 만들던 외가가 부유했어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주에서 한 해에 4만 개 정도의 합죽선이 만들어졌고, 하나가 쌀 한 말 가격이었거든요. 그러니 저도 외가에 가서 삼시 세끼 밥 먹으면서 부채 일을 배웠어요. 외삼촌이 저더러 손재주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잘한다고 하니까 좋아서 더 열심히 하고 그랬죠.” 그러나 그가 군대에 다녀오자 상황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선풍기가 대중화되면서 부채의 입지가 급격히 위축되었던 것이다. 아무려나 그는 계속 부채를 만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부업 삼아, 나중에는 이 기술과 문화가 영영 사라질 것이 아까워서. 처음 지방무형문화재로 선정된 것이 2007년이니 인정도 기약도 없이 혼자 묵묵히 부채를 만들어온 세월만 몇십 년인 셈이다. 참 외로운 일이었겠다고 하니 그는 대뜸 예전에 알던 동네 선배 얘기를 꺼냈다. 90년대에 지인 보증을 선 게 잘못되어 가세가 심하게 기운 적이 있다고. 그때 부채 일을 아예 접으려고 했는데, 그 선배가 큰돈을 현금으로 쥐어줬다고. '좋은 기술 썩히지 마라'면서. 어려울 때 동네 사람들이 조금씩 도와줬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분들이 왜 나를 도와줬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를 착실하게 봤는지 어땠는지. 내가 그래도 젊었을 때부터 열심히 살긴 했거든요. 정말 열심히 살았어. 
 
 
 
김동식 선자장은 남원, 구례, 담양에서 공수한 자생 왕대로만 부채를 만든다. 일일이 물에 삶고 말려서 빛깔을 내고 나면 일정한 간격으로 쪼개서 깨끗한 것만 고른다. 그걸 얇게 쪼개고, 삶고, 다시 빛이 투과될 정도의 두께로 깎아낸다. 민어 부레를 끓여 만든 풀 어교와 동물 가죽, 힘줄, 뼈를 고아 만든 풀 아교를 섞어 겉대를 둘씩 맞붙이고, 백접선 기준으로 110 조각을 한 묶음으로 단단하게 고정하면 초조 작업이 마무리된다. 선자장은 불린 대나무를 옥상에 펼쳐 널고는 아래층 작업실로 향했다. 동성공예 공방은 사실상 선자장의 자택이었다. 방 하나를 작업실로 꾸리고 옥상을 오가며 작업을 이어온 것이다. 현재의 공방으로 이사한 것은 18여 년 전. 빚 보증 이후의 일이자 문화재로 선정되기 이전의 일이었으니 공방 시설에 마음껏 욕심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작업실은 서너 평 단출한 공간이었다. 몇십 년 관록의 도구들과 작업 중인 부채들 틈틈이 살림이 섞여 있었고, 수납장과 문 사이 여백에 달력과 외조부 라학천 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가문의 2대 합죽선 장인이자 김동식 선자장의 스승인 그는 고종에게 직접 만든 부채를 진상했을 만큼 실력자였다고 한다. “한번은 일본의 부채 장인이라는 사람이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방으로 들어서다 말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자기 아버지가 쓰던 공방이 딱 이랬다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김대성 이수자가 말했다. 혹여나 장인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는 결례가 섞여 나올까 봐 답을 미루고 있자니 그가 말을 이었다. 전통문화를 정리하는 움직임은 그래도 일본이 딱 한 발 앞선 경향이 있지 않느냐고, 우리의 여건도 점점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다고. 선자장은 사회생활을 하던 아들이 가업을 잇게 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근심을 덧붙였다. ‘잘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하지만 김대성 이수자는 확고하게 말했다. “잘하신 거예요. 저는 그런 걱정 안 해요. 아버지는 저를 걱정한다고 하지만 사실 저는 아버지 덕을 많이 본 거죠.” 그는 한 번씩 이제 고3인 아들까지 대를 이어 부채를 만드는 상상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 대에서 이 문화를 더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것으로 만들기 전에는 아직 상상일 뿐이라고도 했다.

 
 
김동식 선자장의 2015년 국가무형문화재 선정은 기다림의 결실이 아니었다. 도전의 성취였다. 그는 직접 기관에 연락해 응시를 하고, 정보를 선별하고 공정을 체계화해 100페이지 분량의 책을 만들었으며, 15일간 이어진 시험을 치러 처음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안에 선자장이라는 영역을 일궜다. 역시나 후대에 더 나은 여건을 물려주기 위한 행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는 ‘마음이 아파’ 그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어설픈 부채가 합죽선이라는 이름을 달고 돌아다니는 게 너무 마음 아파서.
 
제가 남이 만든 부채를 갖고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 사람은 나름대로 신경 써서 만든 부채일 것 아니에요. 부채를 삐뚤게 만들었으면 그렇게 만든 이유가 있겠죠.
 
선자장이 온화하고 열린 사람이라는 것은 반나절의 대화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 다만 그는 어떤 식의 개량을 꾀하든 ‘합죽선에 있어야 할 것은 다 있어야 합죽선’이며, 그래서 ‘합죽선은 어떻게 변형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라학천 선자장에게 합죽선의 정수를 배운 사람으로서, 그 배움을 한평생 다듬어온 사람으로서.
 
 
부채 애호가들은 김동식 선자장의 합죽선을 예술 작품 다루듯 한다. 고가의 장부채를 쥐고 다니며 멋들어지게 착 펼쳐 사용하는 사람도 드물게 있기는 하나, 대개는 좌대에 거치해놓고 도자기 보듯 감상한다. 선자장은 둘 중 어느 쪽이 작자의 마음에 더 흐뭇한지 꼽기는 어렵다고 했다. 아무튼 그도 자신이 만든 부채를 ‘작품’이라고 부르기는 한다. 무형문화재가 되기 전이든 후든, 저렴하게 내놓은 부채든 차마 값도 매기지 못한 부채든. 다만 작품들 중에서도 본인 마음에 차는 것은 극히 드물다고 했다. “45년 전에 만든 작품 하나를 아직도 갖고 있어요. 그게 제일 제 마음에 들어요. 지금도 한 번씩 펴보면 도대체 그걸 내가 어떻게 만들었나 모르겠어.” 경기전 안뜰을 걸을 때 선자장이 문득 말했다. 64년 동안이나 만들어왔지만 지금도 부채 생각만 한다고. 아직도 부채가 어렵다고. 때로는 내 평생 나만의 부채 하나를 만들 수 있을까, 초조해진다고.
 
 
합죽선도 8월이면 환갑이라지만 어떤 마음은 팔순을 바라보도록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한다. 그 마음은 누군가의 여름에 기여할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겨울에도. 적어도 취재를 다녀온 며칠, 나는 서럽도록 추운 날마다 막막한 방 안에서 부채를 깎는 선자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니 취재에 대동했던 사진가에게서 이 사진들을 받고 어찌나 기뻤는지 모른다. 특유의 서정을 잘 담아낸 것 같아서. 그 위안의 광경을, 당신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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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오성윤
  • PHOTOGRAPHER 이규철
  • PHOTO ASSISTANT 이수호
  • DIGITAL DESIGNER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