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2021 F/W 제냐 쇼를 막 끝낸 알레산드로 사르토리와 줌으로 나눈 대화

그는 현대 남성에게 적합한 테일러링을 새롭게 제시했다.

BYESQUIRE2021.02.24
 
 

THE GREAT RESET 

 
알레산드로 사르토리는 지난 시즌에 이어 영상으로 쇼를 진행했다. 코로나19로 물리적 패션쇼가 불가능해진 지도 벌써 두 시즌째. 지난 1월 15일 아침, 출근도 하기 전 2021 F/W 제냐 쇼를 보기 위해 데스크톱 앞에 앉아 제냐 사이트에 접속했다. 이젠 익숙해진 패션위크 뉴노멀.
ALESSANDRO SARTORI Artistic Director of Zegna

ALESSANDRO SARTORI Artistic Director of Zegna

15분 20초 분량의 영상은 이탈리아 밀라노 특유의 산업적 양식의 건물이 데칼코마니처럼 어지럽게 뒤엉키며 시작했다. 카메라가 정착한 곳은 밀라노 남쪽 공업 지역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피아차 올리베티 건물. 미니멀한 유리 건물의 파사드와 넓게 펼쳐진 암청색 수면을 배경으로 나온 첫 룩은 이번 시즌의 큰 단서였다. 여유로운 폴로 니트와 더 여유로운 팬츠, 사르토리가 좋아하는 캐멀 컬러로 일관한 심플함 그리고 고글 타입의 스포츠 선글라스, 삭발의 동양인 모델. 대단한 변혁의 의지랄까. 직선적인 세련된 건축물들로 장소를 옮겨가며 이어진 룩들은 나의 짐작을 확신시켜줬다. 여유로운 숄칼라 재킷과 루스한 트랙 팬츠, 아늑한 핸드컷 저지 슬리퍼 등은 영락없는(하지만 초럭셔리한) 홈웨어 형태였다. 지난해 지루하게 이어졌던 유럽의 록다운 시기가 사르토리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이 틀림없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실내와 실외 활동이 복합된 요즘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스테이 앳 홈 웨어’로 컬렉션의 범위를 넓힌 것이다. 스포티한 뉘앙스의 캐시미어 코트, 더블 캐시미어 소재의 하이브리드 슈트, 셔츠를 대신한 니트웨어나 아우터 역할의 니팅 가죽 소재의 스웨터 등은 럭셔리한 현실 고증. 밀라노의 새로운 랜드마크들을 배경으로 하던 런웨이는 영상의 3분의 1이 지나자 실내로 전환됐다.
 
2021 F/W 제냐 쇼 백스테이지의 한 장면

2021 F/W 제냐 쇼 백스테이지의 한 장면

작은 방에서 잠을 깬 한 남자는 문을 열고 옆방과 옆방으로 이동한다. 앞선 런웨이와 달리 영화적 내러티브를 따르는 이 영상 속 남자는 1970년대 모던 밀라노풍으로 꾸민 방을 이동할 때 마다 옷을 갈아입고 이웃을 만나고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그리고 〈제냐 데일리〉라는 신문을 집어 든다. 신문에는 이번 컬렉션을 암시하는 듯한 ‘THE (RE)SET’이라는 문구가 반복적으로 쓰여 있다. 무슨 의미일까. 영상은 다시 런웨이로. 보코니대학교의 원형 강의실과 건물 외부로 이어지는 런웨이 역시 한 가지 색으로 위아래를 맞춘 편안한 셋업 의상을 시작으로 그레이 톤의 하운드투스 체크 의상들이 나왔다. 제냐의 본사 내부로 이동한 런웨이는 볼드한 사선 스트라이프 패턴과 레드 의상으로 변주를 주었다. 시어링 소재는 랩 타입 재킷으로, 또 파격적으로 루스한 팬츠로도 활용되었다. 스웨이드 슈트와 건축적인 오버사이즈 코트 역시 매력적이었다. 다시 카메라는 방 안의 남자를 비췄다. 남자는 여전히 방을 옮겨가며 이웃을 만난다. 꽃을 다듬는 이웃, 사진을 찍는 이웃, 체스를 두는 이웃, 파스타를 먹는 이웃. 잠옷 상태로 제냐 쇼를 보는 지금의 나와 같은 이웃들. 일종의 런웨이 피날레를 마치고 다시 실내 영상으로 넘어왔다.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픽스〉 속 빨간 방을 연상케 하는 12개의 방은 3층 구조로 켜켜이 쌓여 있었고, 각 방에 있던 모델들은 무대 위로 내려왔다. 그리고 박력 있게 〈제냐 데일리〉를 펼치는 것으로 쇼가 끝났다. 방과 방, 안과 밖, 신문에 쓰인 ‘THE (RE)SET’은 록다운의 종료, 그리고 재결합에 관한 메시지였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리셋이었다. 사르토리는 이 리셋을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관한 리셋이자 제냐가 새롭게 제안하는 비전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현실에서 제냐가 추구하는 미학을 재확인하고, 스타일 코드를 해석해 현대 남성에게 적합한 테일러링을 제안하고자 하는 움직임.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옷이 통용되는 시대를 반영하고, 유니섹스 의상이 상당수였던 만큼 인종, 성별, 종교, 가치관, 성향을 강요하지 않으며, 이는 남성복 브랜드에 갇혀 있지 않겠다는 의지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 모든 상징적 메시지는 ‘THE (RE)SET’이라는 타이틀로 귀결됐다. 제냐의 위대한 리셋이 앞으로의 제냐를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THE (RE)SET’ 이라는 타이틀처럼 이번 컬렉션은 매우 새로웠다. 넉넉해진 팬츠와 재킷 실루엣, 편안한 소재에서 홈웨어가 연상되기도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사람들은 자연스레 편하고 캐주얼한 옷을 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새로워진 라이프스타일을 적극 반영했다. 물론 제냐의 톤 앤 매너를 유지하는 선에서. 기존 컬렉션이 익숙한 이들에게는 다소 갑작스러운 변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지금 대중이 필요로 하는 옷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정도면 테일러링의 새로운 영역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자유로움과 스타일리시함을 강조했다. 편안한 슈트가 존재한다는 것, 그 옷이 근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리-셋(Re-set), 리-인터프렛(Re-interpret), 리-테일러(Re-tailor) 과정으로 컬렉션을 완성했다고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
먼저 리-셋 단계에서는 현 시국에 맞춰 브랜드의 정체성을 재정의했고, 리-인터프렛 단계를 통해 스타일 코드로 구현했으며, 마지막 리-테일러 단계에서 현대 남성에게 적합한 컬렉션으로 완성해냈다. 밖에서 미팅할 때, 집에서 일과를 보낼 때 모두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는 슈트부터 넉넉한 핏의 팬츠, 루스한 실루엣의 재킷 등이 그런 결과물이다.
정통적인 테일러링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고 집을 나서는 일은 요즘엔 특히나 드물다. 그렇기에 라이프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한 루스한 실루엣의 슈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테일러링 장르가 될 여지도 충분하고. 40년 전과 20년 전 그리고 10년 전 테일러링의 정의가 모두 다른 것처럼 말이다.
제냐는 매번 훌륭한 디테일과 패턴 밸런스로 주목받았다. 이런 장점은 어떤 아이템에서 가장 잘 드러났나?
저지 소재 슈트를 주목해도 좋다. 자칫 흐물거릴 수 있는 소재를 자연스러운 형태로 완성하는 것은 마에스트로의 뛰어난 테크닉이 없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무릎까지 떨어지는 길이에 라펠이 없는 캐시미어 코트의 유려한 라인도 훌륭하다.
 
소재와 컬러가 포근하면서도 자연스럽고 또 세련돼 보였다.
소재는 편안하고 활동성 높은 것을 주로 사용했다. 제냐만의 기법으로 완성한 저지와 캐시미어, 울 소재 등. 저지는 숄칼라 재킷이나 로브, 그리고 트랙 팬츠 같은 캐주얼한 아이템에 사용해 활동성을 극대화했다. 컬러 팔레트는 알파인스타 화이트, 단풍 베이지 등 웜 톤 계열과 블랙, 스모키 그레이 등의 무채색 위주다. 핵심은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무드를 연출하는 것.
개인적으로는 하운드투스 패턴의 노치트 라펠 재킷 셋업과 라펠이 없는 벨티드 코트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당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룩도 궁금하다.
물론 모든 룩에 애정이 가득하지만, 하나를 꼽자면 저지 소재 그레이 슈트와 로브. 루스한 팬츠와 재킷의 밸런스도 훌륭하면서, 이번 컬렉션으로 말하고 싶은 제냐의 새로운 에티켓을 가장 잘 대변했다.
〈에스콰이어〉 독자들을 위한 스타일링을 제안해준다면?
모든 아이템을 한 가지 컬러로 매치하는 모노크로매틱 룩을 추천한다. 다크 그린, 블랙, 그레이 등 튀지 않는 컬러를 고른다면 더욱 세련되게 연출할 수 있다. 오프 화이트 컬러도 괜찮다. 조금 지루하다면 캐시미어, 저지 등 다양한 소재의 아이템을 매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신발은 로퍼나 슬리퍼 같은 캐주얼한 슈즈가 좋다.
제냐에게 지속 가능성이란 가치도 빼놓을 수 없다. 이번엔 어떤 노력이 있었나?
많은 요소 중 사용했던 천을 재가공한 원단을 꼽겠다. 하운드투스 패턴의 팬츠나 재킷을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다른 조직감이 보인다. 심미적으로도 매우 만족스럽다.
컬렉션 영상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많다. 한 남자가 보낸 일상의 모습 속에 모든 룩을 녹여냈다. 스토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2021 S/S는 패션쇼 형식의 영상이었다면, 이번에는 한 편의 영화 같은 패션 필름을 완성했다. 주제는 관계가 단절된 사람들이 다시금 연결되고 연합하는 것. 어느 때보다 빠르게 개인화되고 있는 현 시국이 호전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담았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세트 앞에 모델들이 모여 신문을 펼치는 모습이 꽤 의미심장했다.
록다운된 현실의 종료이자, 재결합의 시작이라는 메시지를 내포한다. 나눠진 방에서 나온 모두가 한 장소에 모여 하루 일과의 처음인 신문을 펼침으로써, 재결합한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표현했다.
영상 속 배경은 새로 지은 보코니대학교 건물, 제냐 본사, 피아차 올리베티 등 모두 밀라노의 건축물이었다. 이 장소를 고른 이유가 있나?
이번 컬렉션처럼 모던하고 간결한 분위기의 장소를 선정했다. 격자형 구조의 세련된 건축물. 물론 제냐와 밀라노의 깊은 유대감도 큰 이유이고.
 
남성복 시장에 관한 견해도 듣고 싶다. 글로벌 남성복 시장의 트렌드와 그 속에서의 테일러링 마켓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글로벌 남성복 시장은 매우 빠르게 변한다. 매일 새로운 브랜드와 앰배서더가 등장하고, 사라진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 정밀한 감도 조절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테일러링은 다소 정적인 애티튜드인데, 이런 때일수록 적극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탈리아 브랜드의 상황은 어떤가?
이탈리아 마켓도 비슷하다. 많은 저명한 브랜드도 실적 싸움에 시달리고 있으니까.
남성복 시장이 극단적 캐주얼과 극단적 포멀로 양극화되고 있다고 느껴진다. 현재 제냐의 브랜드 포지션은 어느 위치에 있는가?
지금의 제냐는 캐주얼웨어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운동복을 만들지는 않지만, 그만큼 편안한 레저웨어를 만들고 있다. 럭셔리 레저웨어가 가장 어울리는 표현 같다. 제냐는 앞으로도 이 포지션을 굳건히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예정이다.
한국 내에도 개성 있는 테일러 숍이 많이 생기고 있다. 남성복 시장으로서 당신에게 한국의 서울은 어떤 도시인가?
서울은 베를린, 런던, 뉴욕 등과 함께 좋아하는 패션 도시 중 하나다. 많은 트렌드가 한국에서 시작하고 있고, 그만큼 훌륭한 숍도 많다. 빠른 시일 내에 방문하고 싶다.
2021년 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이런 변화 속에서도 제냐의 계획은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고객들에게 정말 필요한 컬렉션을 완성하는 일에 집중했다면, 이젠 고객들에게 제냐의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는 이미지 작업에 집중하려고 한다.
피지털(Phygital) 쇼로 벌써 두 시즌을 진행했다. 처음과는 아마 달랐을 것 같다. 관객이 없는 무대는 외롭기도 할 텐데.
패션쇼 현장이 주는 흥분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영상으로 대중을 만나는 일도 충분히 즐기고 있다. 이번 영상의 반응이 좋은 만큼 지난 시즌보다 발전했다는 성취감도 느껴진다. 무엇보다 기존 제냐가 생소한 대중에게 근접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라 생각된다.
리셋하고 싶은 순간이 있나?
코로나19가 성행하는 지금을 리셋하고 싶다. 사실 제냐와 함께하는 요즘이 모든 걸 리셋하는 순간이다. 일하는 방식, 디자인 스튜디오, 컬렉션까지 많은 것을 바꾸고 있다.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즐기고 있다. 두 번째는 처음의 떨리는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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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고동휘/ 임일웅
  • PHOTO 제냐
  • DIGITAL DESIGNER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