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독창적 세계를 구축한 국내 조명 디자이너들과 그들의 대표작 네 개

특별한 조명에 특별한 여름밤이 깃들지니.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 조명 디자이너들과 그들의 대표작 네 개.

BYESQUIRE2021.06.01
 
 

LET THERE BE LIGHT

 

GHOST CASPER

글로리홀
GHOST CASPER/ 35만원.

GHOST CASPER/ 35만원.

글로리홀에 대한 소개글은 십중팔구 이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처음 내놓는 자리에서는 으레 적절한 해명이 필요한 네이밍이며(‘글로리홀’은 포르노의 한 장르를 지칭하는 은어다), 동시에 이 독특한 브랜드의 성격을 썩 잘 전달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뜻은 나중에야 알았어요. 그 표현을 처음 들었을 때 착안한 건 가마의 구멍이었죠. 유리를 가공하려면 불이 돌아가는 가마에 넣고 제가 계속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느낌을 받거든요.” 조형예술을 전공한 박혜인 작가가 유리공예 기반의 조명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한 건 2015년. 프로젝트성 전시 〈글로리홀 라이트 세일즈〉가 출발점이었는데, 그 영향인지 글로리홀에는 여전히 ‘조명 브랜드’와 ‘미술 작가’의 성격이 섞여 있다.
 
우선 기본적으로 주문 생산 방식을 따른다. 그런데 카탈로그가 없다. 유리 작업의 특성상 완전히 같은 모양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과감히 없앤 것이다. 노동량과 긴 공정을 감안하면 가격도 그리 전략적으로 산정됐다고 보기는 힘들며, 유리 속에 필름, 깃털, 비닐 같은 재료를 넣어 전구를 만들고 비정형으로 빚어내는 미감 역시 대중성보다는 작가의 취향에 골몰한 결과일 테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특성들이 글로리홀의 가장 큰 매력이다. “노동량에 비해 저렴하다고 하셨지만 사실 이 가격이면 유명한 수입 조명도 살 수 있거든요. 글로리홀을 구매하는 분들은 이 공정의 가치를 생각하는 분들이 아닐까 싶어요.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가치를요. 다른 것, 이상한 것, 거기서 나오는 아름다움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녀가 ‘여름밤을 위한 조명’으로 꼽는 작품은 펜던트 조명인 고스트 캐스퍼다. 어두운 실내에서 마주치면 정말 둥둥 떠 있는 귀신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름에는 빛도 서늘한 게 좋잖아요. 귀여운 서늘함이 있을 거예요.”


gloryholelightsales.com
 

 

LF03

권중모

LF03/ 300만원.

LF03/ 300만원.

권중모 작가가 한지라는 소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8년 전. 첫 한지 조명을 내놓은 건 2017년의 일이며, 지금 스페이스 이수에서 열리고 있는 〈라이트 하우스〉는 여태껏 그가 구축한 한지 조명의 세계를 망라한 개인전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막 새로운 소재를 발견한 작가처럼, 한지에 대한 질문 앞에서는 여전히 열띤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저는 투과성이야말로 한지라는 매체가 가진 가장 큰 특성이라고 생각해요. 빛을 머금고 확산하는 표현력은 다른 어떤 소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 같거든요. 빛을 디테일하게 표현하고, 눈에 자극도 덜하고, 따뜻한 느낌을 내고. 그냥 제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날씨나 미묘한 환경 변화에 따라서 느낌도 달라지고요.”
 
그의 작품들 역시 대체로 한지의 특성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레이어스(Layers) 시리즈는 겹친 정도와 접는 방식에 따라 투과성은 물론 빛의 색온도, 질감까지 달라지는 성격에 착안한 것이다. 하나의 한지 안에서도 폭넓은 음영이 표현된다는 것. 어떤 한지장이 어떤 방식으로 만든 한지인가의 범주까지 넘어가면 그야말로 무궁무진해진다. 물론 사용자가 그 모든 걸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작품들의 과묵한 이름에서 드러나듯 (예를 들어 이 페이지에 소개된 LF03은 ‘레이어스 시리즈 플로어 램프 3번’을 표현한 것이다) 권중모 작가는 표방이나 강요를 무엇보다 싫어하는 작가이며, 그의 집요한 탐색은 오직 감각을 위한 것이다.
 
“조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빛마다의 느낌이 있잖아요. 바람의 느낌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한밤에 한지를 통해 비치는 조명은, 바람에 비유하자면, 쳐놓은 발 아래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같아요. 에어컨처럼 강렬하진 않지만 질리지 않게 은근히 공간을 채우죠.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껴요.”
 
@jungmo_kwon
 

 

BLANKWIND

쉘위댄스

BLANKWIND / 미디엄 150만원, 스몰 70만원.

BLANKWIND / 미디엄 150만원, 스몰 70만원.

쉘위댄스는 이경규, 홍재진 두 사람으로 구성된 디자인 듀오다. 두 사람의 관계, 즉 두 사람이 부부라는 사실이 브랜드에 끼친 영향도 있을까? 가벼운 질문을 던지자 두 사람은 이렇게 답했다. “아무래도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고, 자연스럽게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항상 공유하게 됩니다. 작업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요. 이런 부분이 저희 작업의 퍼스낼리티와 밀도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를테면 블랭크윈드는 두 사람이 자주 교외에 나가 시간을 보내기에 탄생한 작품이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아름답게 일렁이는 물과 공기의 움직임을 포착해 작품에 담고 싶다는 영감을 얻은 것이다.
 
다양한 재료의 실험을 거쳐 도달한 답은 아크릴이었다. 빛의 움직임을 유연하게 담아낼 수 있는 소재. 즉 조명이라는 결과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영감에 부응하는 형상을 만들고 나중에야 조명 기능을 더한 것인데, 이런 작업 과정이야말로 쉘위댄스의 미적 지향점을 잘 보여주는 지점이다. ‘아슬아슬하고 미약한 사용성을 가진 물건이 선사하는 공허한 아름다움.’ 그리고 이렇듯 미술품 오브제의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기에, 작업의 해석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굉장히 열린 자세를 취한다.


“블랭크윈드에 여름밤 불빛이 반사되면 청량하게 부딪히는 파도가 연상되기도 해요. 표면의 잔잔한 웨이브를 보며 서핑하는 상상을 해보면 시원함이 밀려드는 여름밤의 무드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앞서 말했듯 블랭크윈드는 공기의 움직임과 일렁이는 호수에 착안한 제품. 하지만 파도가 되거나 유령이 되거나, 결국 그건 사용자의 마음이 조응하는 바에 달렸다는 뜻이다.

 
@shall.we.dan.ce
 

 

CIRKUS

아고라이팅
CIRKUS / 95만8000원.

CIRKUS / 95만8000원.

한국의 조명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유화성 작가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스톡홀름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바이마스’로 세계 시장에서 활동해온 작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국내 조명 시장의 고질적 문제와 가능성을 발견하고, 30여 년간 조명 유통업에 종사해온 모던라이팅 이우복 대표와 힘을 합쳐 을지로 기반의 조명 브랜드 아고라이팅을 만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나 프리미엄 브랜드가 있고 저가 제품 시장이 있죠. 하지만 보통 그보다 더 단단하게 자리 잡은 로컬 브랜드들이 디자인 경쟁, 제품 경쟁을 벌이면서 업계를 발전시켜 나가거든요. 한국의 조명 시장에는 그 부분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어요. 수입 제품과 카피 제품이 시장을 양분한 기형적 구조였죠.”
 
국산 조명 브랜드 아고라이팅은 그런 배경 속에 탄생했다. 모든 조명은 국내 제조업체들과의 협업으로 만들어지며, 작은 부품 하나까지도 국산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하우스 디자이너보다는 국내외 독립 디자이너와 협업해 상품을 개발하는 운영 방식도 국내 시장에서는 새로운 시도. 하지만 첫선을 보인 8종 중 국내외에서 가장 주목받은 컬렉션은 단연 브랜드 디렉터인 유화성 작가의 조명 서커스였다. 다양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U자 모듈이 벽등, 트랙형 조명, 샹들리에 형태로 변용되는 콘셉트로 조형성은 물론 기능성과 확장성까지 잡았기 때문이다.


“바이마스에서는 일체의 클라이언트 없이 제 디자인 실험을 개진했다면 아고라이팅의 서커스나 모찌는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더 많은 요인을 고려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게 공을 덜 들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도전적인 측면도 있었거든요. 특히 디렉터로서 처음 선보이는 제품은 프로세스에서 여러 결정과 판단이 필요한, 외부에서 보기에도 진행이 어려워 보이는 프로젝트여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간명하면서도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조명, 서커스는 이 다양한 요소들이 융합된 결과라는 뜻이다. 스톡홀름과 을지로, 디자인 실험과 브랜드 아이덴티티, 효율성과 복잡성, 그 모든 것이.
 
agolighti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