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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본어와 한영어, 그리고 언어가 섞이는 순간들

한국 콘텐츠가 주목을 받는다는 이유로 어설프게 국뽕을 소환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한본어와 한영어는 극히 일부 비한국어권인들에게만 쓰이고 있는 밈(meme)에 가깝다.

BYESQUIRE2021.08.08
 
 

한본어와 한영어, 그리고 언어가 섞이는 순간들

 
[박찬호. Chanho Park. 지금은 ‘Too Much Talker’의 면모로 더 많은 관심을 끄는 것 같지만, 그가 LA Dodgers에 입단하여 한국인 최초의 major leaguer가 되었을 때는 ‘Korean 특급’ 박찬호에게 온 국민의 관심과 사랑이 쏠렸다. 1998년에 Lotte 삼강이 ‘찬호박’이라는 이름의 호박 맛 ice candy까지 출시했을 정도였음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한편 그가 미국 진출 후 rookie 시절 team 내 신고식에서 “노래 한 곡 뽑아보라”는 주문에 가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영어 노래였던 ‘Happy Birthday’를 불러 Dodgers의 locker room에서 폭소가 터졌다는 episode도 유명했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그는 그 뒤로 굳건한 career를 쌓아 올려 MLB 역사에 남을 legend급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이 글의 첫 문단에서는 일부러 영어로 쓸 수 있는 모든 단어를 영어로 써보았다. 어색한가? 불편했다면 왜(wae)? 그렇지 않았다면 wae not? “뉴스 보게 테레비 좀 켜봐” 같은 말이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이고 있는 한국에서, 알파벳으로 쓰인 단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겐 저 한 문단 정도는 별 거부감 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는 문단이었을 것이다. 어디 길고 평화로운 태평성대를 누려온 국가 혹은 지역이 인류 역사에 흔하겠느냐만, 격동의 20세기를 겪고 온갖 외세의 영향을 받았던 한반도에서는 언어 역시 외부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하자면, 1990년대에는 일상생활에 일본어가 필요했다. 1990년대 이전의 상황이 어땠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분명 더 심했을 것이다. 1980년에 태어난 내가 “여기 야끼만두 한 사라 주시고 다마네기랑 다꾸앙 더 주세요!”(여기 군만두 한 접시 주시고 양파랑 단무지 더 주세요!)라는 문장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친구들을 따라 당구장에 갔더니 또 새로운 일본어 단어들이 쏟아졌다. ‘300 이하는 맛세이 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고, 시네루니 오시니 하는 말들을 알아야 했다. 그 무렵 영화 잡지 〈키노〉에서 ‘미장센’이라는 프랑스어 단어를 처음 접한 나는 미장센이 일본어의 잔재라고 지레짐작했을 정도로 당시엔 일본어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었다.
 
2000년대에 광고 회사에 입사했을 때도 일본어에서 나온 업계 은어를 잔뜩 접하게 되었다. ‘데꼬보꼬’니 ‘헨께이’니, 광고업계 신입들을 위한 일본어 은어 정리 파일이 돌 정도로 업계에서는 이런 단어들을 많이 사용했다. 광고뿐만 아닌 여러 업계에서 이를 상대의 내공을 가늠하는 수단으로도 썼던 듯하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태평양 너머에서 공부하고 현장 경험을 쌓은, 한글보다 영어가 더 편한 20대 직원에게 50대 아재가 일본어 은어를 쏟아내며 텃세를 부린다면 “사요나라” 하고 도망가버리지 않을까?
 
시간은 흘러갔다. 인간/닝겐(人間)/human이 살아가는 세계/세카이(世界)/world는 쉬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달라졌다. 2021년 현재 한국어에 가장 많이 침범해 들어오고 있는 외국어는 이젠 아마 영어가 아닐까 싶지만, 일본어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료쿠 데스. 그러나 이제 한국어와 일본어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역사도 나름 오래되었다.
 
오타쿠계의 이야기를 하자면 한국어와 어순과 문법 구조가 참 비슷한 일본어로 만들어진 콘텐츠에 친숙한 한국인들이 언제부턴가 한본어(쑻)라는 걸 쓰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일본의 한류 팬들도 한국어를 일상 대화에 섞기 시작했다. BTS/방탄소년단을 위시한 K-Pop의 인기가 세계로 퍼져가며 한국어가 영어에 스며든 “Ooh my oppa is jinjja handsome” 같은 ‘한영어’도 생겨났다. 외국어가 한글에 침투해 들어오는 상황에만 익숙했던 한국인들에겐 확실히 낯선 상황 전개일 것이다. 이거 이대로라면 야바인데(やばいンデ, ‘위험하다’와 ‘~인데’라는 뜻의 한국어 ‘ㄴ데’의 합성어. 일본에서 쓰이고 있는 한본어 중 하나다)! 아니, 그런데 정말 이게 위험한 일일까?
 
콘텐츠를 제작할 때는 타깃 층을 고려해, 또 제작을 편하게 하기 위해 언어를 대충 쌩 까고 퉁 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MBC의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가 그 예다. 10년 전의 미국이든 몇백 년 전의 유럽이든, 배경이 서양일 경우 서양인 배우가 나와서 영어로 연기한다. 반면 배경이 아시아라면 한국인 배우가 한국어로 연기한다(일부 예외도 있긴 하지만). 더 큰 스케일의 제작에서도 마찬가지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어딜 가나 영어로 소통할 수 있다. 인디아나 존스와 제임스 본드는 세계 어디에서든 영어로 지껄였고, 로케이션 지역의 사람들은 독특한 억양이 있을 뿐 다들 유창한 영어로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했다(그리고 상당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역할을 마치곤 곧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역사적으로 할리우드 영화계가 영어가 아닌 언어를 가장 존중한 사례는 〈반지의 제왕〉에서의 요정어 정도가 아닐까 싶다. 물론 〈반지의 제왕〉 속 요정들은 영어도 완벽하게 구사했다. 그래서 엘프들은 다들 북유럽 사람들처럼 생겼던 걸까. 북유럽 사람들은 영어를 잘해서 대중음악계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아바가 스웨덴어로 노래했다면 ‘댄싱 퀸’은 없었을 것이다.
 
반면 영어가 유창하지 못한 크리에이터들은 세계 무대 진출에 실패한 사례가 허다했다. 일본의 하드 록 밴드 X-Japan을 보라. 리더인 드러머 요시키의 관점으로 만들어낸 다큐멘터리 〈We Are X〉에는 미국 록 밴드 KISS의 진 시몬스가 “그들이 영어로 노래했다면 세계 최고의 록 밴드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인정해주는 척하면서 깎아내린 내용이 칭찬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스란히 실려 있다. 영어로 노래하지 않으면 세계적인 인기를 얻는 게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60년대생인 요시키가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다. 그런데 2020년대인 지금에는 한국 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상을 받고,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진 시몬스, 이건 뭐죠? 요시키, 어색한 영어 발음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한국 콘텐츠가 주목을 받는다는 이유로 어설프게 국뽕을 소환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한본어와 한영어는 극히 일부 비한국어권인들에게만 쓰이고 있는 밈(meme)에 가깝다. 세계적으로 관심을 끈다고 해서 한국 콘텐츠가 마냥 훌륭하다거나, 심지어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오히려 ‘이런 건 우리끼리만 잠깐 즐기다 말면 될 텐데 왜 굳이 가져가서 듣고 보고 하나’ 싶은 남부끄러운 콘텐츠도 많다. 다만 온갖 언어들이 섞이는 건 늘 있어왔던 현상이고,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의 뇌와 입을 통해 사용된 한국어가 우리의 귀와 눈에 전해지는 일이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에 익숙해질 때가 된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적응하는 데 필요한 완충의 시간은 있었으면 좋겠다. 다니엘 크레이그에 이어 다음 제임스 본드를 맡게 될 배우가 〈007〉 시리즈 속편에서 한국 술집에 찾아와 마티니가 아닌 소맥을 주문한다거나, 진 시몬스가 한국 TV에 출연해 “한국 뮤지션이 세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건 당연한 일” 따위의 멘트를 날리는 일은 당분간 보고 싶지 않다. 어차피 코로나19 때문에 불가능할 테니, 한숨이나 한 번 더 쉬어본다.
 

 
Who's the writer?
이원열은 번역가 겸 뮤지션이다. 〈헝거 게임〉 시리즈 등을 옮겼고 ‘원 트릭 포니스’와 ‘줄리아 하트’, ‘코스모스’, ‘라이너스의 담요’ 등의 밴드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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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OR 김현유
  • Illustrator 이은호
  • WRITER 이원열
  • DIGITAL DESIGNER 김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