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원초적 즐거움을 주는 오디오 북으로 책 듣는 일

길 위에서 소설을 읽는 일.

BYESQUIRE2020.06.10
 
 

길 위에서 소설을 읽는 일 

 
원초적 즐거움을 주는 오디오 북으로 책 듣는 일

원초적 즐거움을 주는 오디오 북으로 책 듣는 일

매달 열 권쯤 책을 사고 그중 절반 정도를 읽는다. 장편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다. 다른 책 읽는 사이사이 문학상 단편집이나 체호프, 고골 등의 희곡선을 읽는 정도. 나이가 들고 주변이 복잡해져서일까? 언젠가부터 가만히 앉아 장편소설을 집중해 읽는 일이, 그 방대한 세계 안에 몰입하는 일이 어쩐지 한가하게 느껴졌다. 잡지 기자로 오래 일하며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내가 자동차와 운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잡지 기자 시절 서킷에서 람보르기니를 시속 270km로 몰고, 핀란드 얼음 호수에서 아우디 R8을 액셀러레이터 페달만으로 회전시키고, 클래식 벤틀리로 호젓한 영국 시골길을 달려보기도 했지만 짜릿함은 잠깐뿐이었다. 자동차 출장으로 떠난 여행에서 마음에 남는 건 언제나 자동차를 타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물며 일상에서의 운전은 말할 것도 없다. 왜 사람들은 운전대를 잡으면 답답해지거나 파렴치해지는 걸까? 막히는 출퇴근길, 더디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짜증만 더해갔다.
그런데 최근 출퇴근길이 한결 견딜 만해졌고 장편소설 몇 편을 끝냈다. 오디오 북을 듣기 시작한 후의 일이다. 러닝머신 위에서 42.195km를 달렸다고 해서 마라톤을 완주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오디오 북을 듣는 것과 독서는 꽤나 다른 경험이다. 무엇보다 손과 눈이 자유롭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80% 이상의 사람들이 오디오 북을 들으며 다른 일을 한다. 운전은 물론이고 산책이나 조깅, 자전거 타기 등 운동을 하거나 청소나 설거지, 요리 등 집안일을 하는 중에도 오디오 북을 들을 수 있다. 게으름 피우고 싶은 날에는 침대나 소파에 누워 가만히 있기에도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 물론 이내 잠들기 일쑤라는 단점도 있지만. (불면증에도 효과적이다!)
흥미로운 건, 다른 일을 하며 오디오 북을 들을 때도 온 신경을 집중해 독서할 때처럼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적 행위라기보다는 보다 원초적인 경험에 가깝다. 마치 어린 시절 이야기 속에 흠뻑 빠져들었을 때와 같은 즐거움이다. 이야기가 벌어진 현장 한가운데에 불쑥 들어간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보다 공감각적인 경험이라고 할까?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며 오디오 북을 들으면 줄거리를 따라가는 한편으로 풍경과 바람 냄새, 촉감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오디오 북을 들으며 하는 반복적인 행위(운전, 운동, 집안일 등)의 지루함이 훨씬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다.
오래전 라디오 드라마를 들으며 느끼던 즐거움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오디오 북이 라디오 드라마와 다른 건,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성우 한 명이 내레이션과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모두 낸다는 점이다. 대개 이야기 속 화자나 주인공의 성별과 나이에 성우를 맞춘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70대 노인의 회한과 다섯 살 어린아이의 투정 섞인 목소리를 번갈아 내는 모양새가 의아해 제작비 때문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여러 성우가 녹음한 오디오 북을 듣고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성우가 글을 읽으며 만들어낸 세계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어오면 여지없이 몰입감이 깨져버린다. 마치 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전혀 문체가 다른 작가의 글이 등장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오디오 북은 그 내용만큼이나 성우가 정말 중요하다.
구조주의 언어학을 창시한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글로 적힌 텍스트가 소리 내 말하는 이야기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실제 얼굴보다 사진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고 말했다. 가령 “잘생겼다”는 문장을 활자로만 읽으면 앞뒤 맥락을 파악하지 않을 경우 그게 칭찬인지 비꼬는 말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소리 내 읽으면 그 의미를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텍스트를 완전히 파악하고 읽는 성우와 그렇지 않은 이가 읽는 오디오 북을 들었을 때 그 차이는 무척이나 크다. 목소리 톤과 속도, 말투도 취향에 맞아야 한다. 오디오 북은 대개 책 한 권을 끝내는 데 8~12시간이 걸린다. 그 긴 시간 동안 성우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떨까? 앞서 인용한 소쉬르의 이야기처럼 텍스트가 사진이라면 음성은 실제 얼굴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오디오 북을 구매하기 전 미리 듣기를 꼼꼼히 들어보기를 권하는 이유다.
오디오 북으로 듣기에 어울리는 책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처음 오디오 북에 흥미를 붙이려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연구 결과가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오디오 북과 독서 사이에 이해력의 차이는 그리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거나 난도가 높은 텍스트의 경우에는 책을 읽은 사람들이 오디오 북을 들은 사람들보다 훨씬 내용을 잘 파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나왔을 때, 앞 장을 다시 넘겨 보거나 거듭 읽는 등의 일이 오디오 북을 들으면서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디오 북을 선택할 때는 새로운 정보를 획득하려 하기보다는 순수한 재미를 좇게 된다. 다른 일을 하면서 들을 수 있다는 사실도 재미를 추구하는 한가로움에 대한 죄책감을 줄여준다. 소설을 읽는 경우에는 단편보다 장편이 듣기 전의 기대감 때문에 더 좋았다. 출퇴근길 간선 대로로 접어드는 답답한 길이 즐거워질 정도로! 중간에 멈추고 며칠 후에 다시 들어도 신기할 정도로 소설 속 세계로 쉽게 몰입된다. 이미 읽은 책이라면 영어 원서로 들어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성우가 괜찮다면, 그 말투와 뉘앙스만으로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요즘 나는 첫째 아이가 읽고 있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영국 배우 스티븐 프라이가 낭독하는 버전으로 듣는다. 존 르 카레가 직접 읽는 그의 작품이 그리 훌륭하다는 정보도 입수해둔 참이다.
우리 모두 독서가 아닌, 아버지나 어머니, 선생님이 소리 내 읽어주는 이야기로 처음 책을 만났다. 문자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고작 6000년. 인류가 구술로 이야기를 전한 건 훨씬 오래된 일이다. 오디오 북으로 책 속 이야기를 듣는 건 우리 유전자에 기록된, 잠시 잊고 있던 원초적 즐거움을 다시금 일깨우는 일이다. 그것도 멀티태스킹이라는 가장 현대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Who’s the writer?
정규영은 〈GQ〉 〈루엘〉 등의 피처 에디터를 거쳐 지금은 출판사 모비딕북스 편집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