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이름의 세계는 꽤 재미있다. 까르띠에의 베누아 워치는 프랑스어로 욕조를 뜻하는데 실제로 욕조의 실루엣을 가졌고, 발롱 블루 워치는 풍선을 닮았다. 드레스 워치는 이름이 주는 뉘앙스가 우아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고, 스포츠 워치는 기능이나 용도를 함축하는 이름이 많다. 까르띠에의 아이콘인 탱크 워치는 우아한 시계 이미지와 정반대의 이름을 가졌다. 바로 육상전의 제왕 탱크에서 가져온 이름이기 때문이다. 물론 탱크 워치가 첫선을 보인 시기의 탱크는 지금처럼 빠르고 강력해 위협적인 병기는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을 끝내기 위한 아이디어로 참호를 넘을 수 있는 초기 형태의 탱크로 기대와 달리 실전에는 큰 활약을 못 했다. 연합군 소속의 프랑스는 자국의 르노(Renault)를 통해 탱크를 생산했다. 캐터필러(무한궤도)와 작은 포탑을 지닌 탱크 TF-17이 세상에 나왔을 때 많은 사람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루이 까르띠에도 탱크가 하루바삐 전쟁을 종식하길 바랐고 그 염원을 담아 탱크 워치를 디자인했다.
탱크 워치의 실루엣은 상공에서 탱크를 내려다본 것과 다름없었다. 직사각형 케이스 좌우로 배치한 브롱카(Brancards)는 영락없는 탱크였다. 탱크의 특징인 포탑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초기 탱크의 포탑은 보잘것없는 수준이라 없어도 무방했다. 다이얼은 로만 아워 인덱스와 직사각형 다이얼에 맞춘 레일웨이 미니트 인덱스로 구성했다. 심플하면서도 기능적인 형태였다. 이것은 당시 예술 사조였던 아르데코의 영향도 있다. 곡선을 강조했던 아르누보와 상반되는 아르데코는 직선적이었다. 탱크 워치는 예술 사조의 영향에도 힘입어 직선적이며 명료한 디자인으로 완성된 것이었다.
탱크 워치는 1919년부터 스톡 리스트에 올라가며 본격적으로 역사의 막을 올린다. 첫 모델에 해당하는 탱크 노말의 등장에 이어 1921년 베리에이션인 탱크 상트레(Cintree)가 선을 보였다. 굽은, 만곡이라는 뜻의 상트레는 케이스 측면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형태에서 유래했다. 1920년대 시계업계의 흐름 중 하나는 커벡스(Curvex) 케이스다. 말 그대로 커브를 그리듯 곡선의 케이스 백(혹은 글라스를 포함한 케이스 전체가 곡선을 지님)을 가진 시계를 의미한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손목시계의 착용감을 고려해 손목과 밀착할 수 있도록 등장한 기능적인 형태였다. 1922년에는 현 탱크 워치 라인업에서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탱크 루이 까르띠에(Louis Cartier)를 비롯해 탱크 알롱제(Allongee), 탱크 쉬누아즈(Chinoise)가 일거에 등장했다. 루이 까르띠에는 까르띠에의 설립자 이름을, 알롱제는 길이를 늘리다라는 뜻이므로 세로로 긴 케이스를 가졌다. 중국을 뜻하는 프랑스어 쉬누아즈는 사원의 지붕을 모티브 삼은 디자인이 특징이다. 탱크 워치 베리에이션에서 가장 복잡한 형태가 아닐까 싶은데, 브롱카 위로 두 개의 바를 가로로 쌓아 올린 형태로 사원의 지붕과 처마를 이미지화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비대칭 케이스의 탱크 아시메트리크(Asymetrique), 1950년대에는 엑스트라 씬으로 탱크 워치 디자인의 다양성을 드러냈다.
이 같은 디자인 베리에이션은 탱크 워치의 일가 형성에 큰 역할을 했고 기능성 또한 그에 못지않은 역할을 했다. 지금처럼 사파이어 크리스털이 글라스의 기본 소재로 사용할 수 없었던 시기에는 외부 충격에서 글라스를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있었다. 탱크 워치도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모양이다. 1928년 등장한 탱크 아 기쉐(Tank a Guichet)는 점핑 아워 방식의 윈도와 디스크 방식의 분 표시 부분에만 글라스를 적용하고 나머지는 금속판으로 덮어 글라스의 면적을 최소화하는 접근을 보여줬다. 덕분에 장갑으로 뒤덮은 탱크의 모습에 더 가까워진 디자인을 볼 수 있었다. 1930년에는 글라스 보호를 목적으로 케이스와 같은 소재의 글라스 덮개를 채용해 시간을 읽을 때는 이를 들어 올려야 했던 탱크 사보네트(Savonnette), 바를 연결해 만든 슬라이딩 커버(Sliding Strut Cover)로 글라스를 보호해 개방감을 준 탱크 워치가 등장했다. 탱크 바쉬큘란트(Basculante)는 글라스 보호 목적에서 가장 발전한 형태로 1936년에 등장했다. 무브먼트가 들어간 케이스를 뒤집어, 필요할 때만 글라스를 노출할 수 있도록 한 모델로 폴로 플레이어의 선택을 받기도 했다. 글라스 보호에 대한 해답 못지않게 당시에는 방수도 시계 회사들의 도전 무대였다.
까르띠에는 시계 생산에서 르쿨트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1931년의 탱크 에탕쉐(Etanche)는 방수 능력을 갖춘 탱크 워치를 함께 내놓게 되었다. 탱크 에탕쉐는 케이스 속 이너 케이스와 로킹 크라운 구조를 갖춰 아직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던 방수 기법에 하나의 방법을 제시했다. 탱크 워치는 까르띠에가 거점으로 삼았던 파리, 런던, 뉴욕에서 각 지역에 맞춘 독자적인 모델을 선보이기도 했다. 단순한 지사가 아니라 독립성과 권한이 있어 탱크 앙글레즈(Anglaise), 탱크 아메리칸(Americaine) 같은 독자적인 모델을 발표했다. 예를 들어 탱크 아메리칸은 탱크 상트레의 뉴욕식 재해석으로 뉴욕의 높다란 마천루를 우람한 브롱카로 묘사하는 식의 베리에이션을 낳았다.
탱크 워치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수많은 사람이 이 시계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은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다. 아마 탱크 워치를 가장 사랑했던 인물일지도 모른다. 탱크 워치 외에도 무수한 시계를 수집했던 워홀이지만 그의 사진 중에 탱크 워치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정도면 평소에 얼마나 애용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앤디 워홀은 탱크 워치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었으며, 시계를 와인딩하지 않고 착용하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시계를 작동시키지 않고 착용했다는 사실로 비춰볼 때 탱크 워치 그 자체를 사랑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앤디 워홀 외에도 미국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 듀크 엘링턴은 탱크 아 기쉐의 유니크함에 빠졌다.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할리우드의 황금기에 영화배우 게리 쿠퍼와 클라크 게이블이 탱크 워치를 착용하고 찍은 사진을 발견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이브 몽탕, 잉그리드 버그먼, 재클린 케네디, 알랭 들롱처럼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탱크 워치의 아름다움과 매력에 빠졌다. 입생 로랑, 무하마드 알리, 고 다이아나 비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각 분야의 유명 인사들도 탱크 워치의 매력을 피해갈 수 없었다.
2021년 까르띠에는 탱크 머스트 워치를 부활시켰다. 1970년대 첫선을 보인 바 있는 탱크 머스트는 쿼츠 손목시계 등장과 오일 쇼크로 인한 이중고를 겪던 시기에 등장했다. 탱크 머스트는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골드 케이스 대신 버메일(Vermeil) 케이스를 택했다. 스털링 실버를 금도금한 케이스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고객층을 확대하고자 했고, 특히 젊은 층을 새로운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케이스뿐 아니라 과감한 버건디나 네이비 컬러 다이얼에 로고를 제외한 인덱스를 과감하게 생략하는 베리에이션을 내놓아 시선을 집중시켰다.
1977년 탄생한 버건디 컬러 다이얼 머스트 워치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 1980년대 정신에 충실한 새로운 탱크 머스트는 까르띠에 DNA가 담긴 레드, 블루, 그린 세 가지 단색 버전으로도 만날 수 있다. 1980년대 모노크롬에 대한 경의.
탱크 머스트는 레 머스트(Les Must) 컬렉션의 방향성을 공유했다. 당시 까르띠에가 다루던 아이템 전반을 아우르는 레 머스트는 1970년대 까르띠에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낼 역할을 담당했고, 분산되어 있던 역량을 하나로 집결시켜 위기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게 했다. 부활한 탱크 머스트의 디자인은 탱크 루이 까르띠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둘은 소재의 차이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탱크 루이 까르띠에는 골드 케이스, 탱크 머스트는 더 많은 사람들이 탱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스테인리스스틸 케이스를 택했다.
단종을 앞두고 있던 탱크 솔로의 요소를 일부 계승해 브레이슬릿 버전으로도 나온다. 단 의도적으로 곡선미를 절제한 탱크 솔로와 달리 볼륨감이 있는 탱크 머스트에 맞게 브레이슬릿 디자인을 수정했다. 탱크 머스트가 지녔던 섹터 다이얼은 탱크 루이 까르띠에로 옮겨갔다. 탱크 워치의 기본 다이얼 구성인 로만 아워 인덱스와 레일웨이 미니트 인덱스를 라인과 컬러로 구획해 화려함을 드러내는 디테일은 이제 탱크 루이 까르띠에의 새로운 선택지다. 섹터 다이얼의 가세로 루이 까르띠에는 더욱 넓어진 외연을 확보했다. 탱크 머스트가 뜨겁지만 탱크 워치의 구심점은 탱크 루이 까르띠에다. 탱크 워치의 원점에 가까운 디자인과 상위 포지션을 확인할 수 있는 기계식 무브먼트 중심의 탑재, 골드 케이스를 사용한다. 탱크 워치의 입문은 탱크 머스트, 마무리는 탱크 루이 까르띠에라는 밑그림이 드러나는 행보다.
1922년 출시된 루이 까르띠에를 새롭게 다듬었다. 레일 트랙, 카보숑 사파이어, 로만 인덱스 등 까르띠에의 상징을 우아하게 적용했으며 블루와 레드 두 가지로 선보인다. 매뉴얼 와인딩 매뉴팩처 1917 MC 무브먼트를 탑재했다.
탱크 워치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써 내려왔고 2021년에도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완성했다. 한 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디자인, 기능, 지역과 문화를 아우르며 단순한 시계가 아닌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시계와 한 시대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자 기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