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 "지나다 보면 지나져요"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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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하 "지나다 보면 지나져요"

윤하는 시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음악을 한다. 전석을 매진시키며 성황리에 마친 앙코르 공연을 앞두고,
공연 전엔 어떤 스케줄도 잡지 않는다는 그를 예외적으로 만났다.

박세회 BY 박세회 2022.03.23
 
 원피스, 글로브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원피스, 글로브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최근 곡들에서 우주, 기후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죠. SF 단편 소설집을 본 것 같았어요. ‘6년 230일’에선 멸망이 6년 230일 남은 지구와 식어버린 관계를 엮고, ‘별의 조각’에서는 우연히 지구를 사랑하게 된 어떤 존재에 대해 말해요.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어요?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오만 가지 걱정이 들어요. 지구가 망하면 어떡하나, 그걸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어디서부터 설명해주면 될까? 그러다 보면 결국 인간이 왜 존재하는가로 수렴해요. 인간이 없으면 다 해결될 것 같은데? 도대체 인간은 왜 존재하지? 나는 왜 존재하지? 나는 왜 태어나서 여기 있는 거지? 그러다 보면 물리학으로 돌아가게 되더라고요. 우주에는 무한한 이야기들이 있어요. 저는 그걸 자연스럽게 줍는 거예요. 저는 열일곱 살 때 ‘기다리다’ 같은 곡을 쓰고 제가 천재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 게 아녜요. 세상엔 떠다니는 이야기들이 있고 그걸 몇백 몇천 년 전에 다 겪은 인류가 있어요. 그걸 얼마큼 보고 얼마큼 발췌해나갈 수 있느냐의 싸움이죠. 세상은 이미 존재하고, 물리학자들이 그냥 있는 현상을 발견하듯이 예술가들은 이미 있는 것들을 주워 담는 거예요.
그런 가사를 쓰고 나면 관심이 자연히 환경문제로 넘어갈 것 같아요.
예전부터 더불어 사는 일에 관심이 많았어요. 장바구니를 들고 웬만하면 일회용 용기 대신 유리병을 쓰죠. 이젠 조금씩 그래도 좀 쓸 만한 인간이 된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END THEORY〉의 11개 트랙에서는 ‘끝’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탐구를 해요. 지구의 끝, 관계의 끝, 우주의 끝, 내가 갈 수 있는 한계의 너머, 보이지 않는 미래, 마지막을 함께할 사람 등. 왜 끝을 주제로 했나요?
이 앨범을 작업하기 시작한 게 코로나19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어요. 셧다운이 되고, 사람들도 만날 수 없고,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서 계속 혼자 있으면서 코로나 블루가 왔죠. 주변에서도 많이들 그랬고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전쟁이 벌어질 때 평화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위로가 될 수 있는 앨범을 만들어야겠다. 그러려면 끝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겠다. 그렇게 ‘끝’을 주제로 고민을 시작했죠. 언제나 희망은 있어야 하잖아요.
정규 6집에 신곡 3곡을 더한 리패키지 앨범 출시를 앞두고 있어요. 앙코르 공연을 하고 리팩을 낼 만큼 애정이 각별하구나 싶은데요. 이번에도 직접 작사·작곡한 ‘사건의 지평선’ ‘살별’ ‘블랙홀’ 신곡 세 곡.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아요.
너무너무 애정이 가서, 더 완벽하게 완성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이제 3곡을 넣고 나니 비로소 완전해진 느낌이에요. 세 곡 다 록을 기반으로 해요. ‘살별’은 혜성의 순우리말이고, 제가 예전에 피아노 치면서 노래했던 ‘혜성’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이기도 하죠. ‘사건의 지평선’은 이벤트 호라이즌이라고도 하는데, 블랙홀의 바깥 경계를 뜻하거든요. 완전히 미지의 영역이죠. 이것만 넘어가면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걸 이별에 빗대어 노래를 만들어봤어요.
작사가 김이나는 윤하의 가사를 자주 칭찬했지요. 데뷔 초에는 사랑에 호소하는 솔직한 언어를 보여줬다면, 지금은 은유적인 언어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요.
데뷔 초반에는 나오는 대로 지껄이듯이 노래했죠.(웃음) 지금은 제 상상을 사람들이 공감하기 쉽도록 구체화하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져요. ‘사건의 지평선’도 우주의 진공 상태에 사람이 있다는 전제 자체가 이상한 거잖아요? 그런데 그 앞에 선 상황 자체가 이별의 감정으로 이어지게끔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작업이 필요해요. 끝까지 밀어붙이면 가사가 나오더라고요.
SF 같은 상황을 로맨틱하게 잘 풀어내네요. 꿈을 많이 꾸나요?
네. 꿈꿀 때마다 기록하는 꿈 노트가 있어요. 꿈에서 본 것도, 누가 내게 해준 이야기도 가사가 되기도 하죠.
자신이 쓴 가사 중에 가장 좋아하는 가사가 있어요?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사건의 지평선’ 가사인데, 요즘 제가 느끼는 마음이에요. 지금 제 주변에는 내가 인연을 맺고자 해서 다가갔던 사람은 없고, ‘희한하게 만났는데?’ 싶었던 사람들만 남았어요. 이런 것만 봐도 인연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보내줄 때 잘 보내주고, 오는 사람들도 잘 맞이하고. 순리대로.
연애 많이 해봤다고 들었어요.
하여간 제가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해가지고.(웃음) 그럴 것 같나요?
그럴 것 같았어요. 듣는 사람이 호소력 있다고 느끼는 노래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했을 테니까.
음, 좋은 연애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해볼 만큼은 했어요.(웃음) 많은 경험이 제 노래에 도움이 되었죠.
 
브라톱, 팬츠 모두 에트로. 재킷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브라톱, 팬츠 모두 에트로. 재킷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프로듀서로서의 윤하가 보는 가수 윤하는 어떤 사람인가요?
되게 성실한 친구죠.(웃음) 기대치가 높고요. 의지가 되고, 어떤 어려운 것을 맡겨도 잘 해낼 것을 알고. 그렇기에 가수로서 보는 프로듀서 윤하는 정말 정말 일하기 싫은 사람이에요! (웃음)
목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 때도 있었고, 오랜 공백기를 겪은 적도 있었죠. 지금은 다시 전성기라는 평을 받고 있고요. 윤하는 슬럼프를 어떻게 통과했나요?
지나다 보면 지나져요. 당시엔 안 끝날 것 같잖아요. 목이 여러 번 상했고 그게 완벽하게 낫지는 않아요. 어딘가 찢어지면 그 흉터가 일평생 남아 있듯이. 그래서 저는 제가 지금 최고의 보컬리스트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단지 제가 입은 부상을 티 나지 않게 하는 기술을 쓰는 거예요. 그게 잘 넘어가지니까 다들 “너무 잘됐다, 제 기량을 되찾았구나”라고 말해주는 거죠. 인생도 비슷하지 않나 싶어요. 완벽한 사람은 없고, 세월 앞에 장사 없다 해도, 그걸 요리조리 잘 피해가면서 나의 장점을 얼만큼 노련하게 잘 보여주느냐의 싸움이죠. 싸우다 지치면 쉬면 되고요. 결국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지나가요.
어느덧 17년 차 가수예요. 작사·작곡한 노래 ‘잘 지내’에서 ‘아이를 안아줄 어른이 되었다는 게 자랑스러워. 가끔은 좀 막막해도 견디고 내일을 위해 잠이 들 줄 알아’라는 가사가 지금의 윤하를 말해주는 것 같더라고요.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말 있잖아요. 어릴 땐 그런 말을 들으면 너무 열 받았거든요.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다고?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생각해요. 소위 운이라고 하는, 어떤 순리가 있고 그게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얘기였구나. 열심히 했는데 안 되는 건 이상한 게 아녜요. 그걸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이젠 알아요.
그때와 지금 윤하의 음악은 어떻게 다른가요?
열일곱 살 때 저는 제가 영감이 떠오르기만을 기다리는 천재라고 생각했고 아티스트 ‘뽕’에 차 있었죠.(웃음) 그때 제가 저를 자랑하고 싶은 꼬마였다면, 지금은 직장인처럼 출퇴근을 하면서 일지를 쓰는 기분으로 하루하루 한 작품 한 작품씩 작업하고 있어요. 매일 작업실로 오후 1시쯤 출근해서 10시쯤 퇴근하면서 직장인들처럼 9시간씩 일하죠.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게 있던가요?
되게 어려운 질문인데, 그런 생각이 드네요. 빛나던 순간은 변치 않는다고. 언제나 공연을 매진시켜주는 팬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때가 있었어요. 2015년쯤, 목을 다치고 앨범도 계속 못 내고 있는 때였는데요. 제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공연을 보러 오는 분들을 보면서 ‘왜 오시는 거지? 왜 망하지 않지?’라고 생각했죠. 내가 공연을 주최할 만한 가수인지 자존감이 떨어져 있었는데, 팬들은 언제나처럼 박수를 보내주시더라고요. 저 사람들은 대체 왜 저렇게까지 다정할까. 그 마음을 생각해보니,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빛나던 순간들로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계속 건재해주길 바란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겠더라고요.  
이젠 여성 보컬리스트로서, 롤 모델로 자주 꼽히는 선배가 됐어요.
저도 아직 선배를 찾아요. 새로운 상황과 고민에 부딪힐 때마다 선배님들은 어떻게 하셨어요? 자주 묻죠. 하지만 점점 물어볼 사람들이 사라져요. 생존자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거죠.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건재하는 아티스트가 그만큼 소중한 거예요. 저도 후배들이 찾아올 때만 답을 줄 수 있는,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네요. 망해서 방구석에 있으면 도움을 줄 수 없잖아요.(웃음)
당신에게 여전히 야심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후학을 양성하는 선배들의 마음을 알겠어요. 저도 이젠 선배들께 받은 걸 나누고 싶어요. 누구 키드, 누구 키드 하잖아요. 유전학적 사명감이랄까요.(웃음) 좀 더 준비가 되면 뮤지션들을 위한 스튜디오를 운영해보고 싶어요. 비슷한 취향을 가진 친구들과 함께 교류하고 작업할 수 있다면 즐거울 것 같아요.
윤하는 뭘 믿나요?
세상엔 순리라는 게 있어요.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행복이 있으면 슬픔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거. 저는 그런 총량의 법칙 같은 물리학을 믿거든요. 어떠세요? 카르마는 믿지 않는다고요? 어쩌면, 그 총량은 이번 생을 넘어 다음 생일 수도 있고, 이 우주가 아닌 다른 다중 우주일 수도 있을 거예요. 그 우주에서도 윤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 같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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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FREELANCE EDITOR 이예지
    PHOTOGRAPHER 레스
    STYLIST 구원서
    HAIR 김성환
    MAKEUP 이나겸
    ART DESIGNER 최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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