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본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엔딩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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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본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엔딩

오성윤 BY 오성윤 2022.06.24
 
 
삶의 모든 희망과 의욕을 잃어버린 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전 남자 친구가 떠넘긴 빚에 쫓기고 있지만 단지 그것만이 그녀를 지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지쳐버린 대상은 좀 더 본질적인 것, 즉 ‘세상 모든 것’에 가까웠다. 그녀의 독백처럼 여자에게는 모든 관계와 눈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다. 자신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채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그저 조용히 웃음 지으며 있는 듯 없는 듯 무력하게 살아간다. 지독한 우울을 가슴에 품고서 말이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멜랑콜리형 우울증 환자인 여주인공 미정의 서사는 여느 드라마에서는 조연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함께 사는 달걀흰자와 같은 지역 산포시처럼 대단한 드라마도, 뜨거운 감정의 소용돌이도, 박진감 넘치는 반전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대단치 않은 사연은 실제의 삶처럼 현장감과 공간감을 두르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그녀가 밤늦게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드라마 속 시간을 체크하게 된다. 매일 1시간 반씩 걸리는 전철을 타고 산포시로 향해야 하는 그녀의 막차 시간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듯 느리게 흘러가는 드라마 초반부의 일상을 통해 그녀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살면서 마음이 정말로 편하고 좋았던 적이 얼마나 있었나요?”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절여진 배추처럼 숨죽이게 하는 것들, 숨이 죽다 못해 계속 살아갈지 아니면 스스로의 손으로 이 하찮은 인생의 막을 내려버릴 건지 고민하게 하는 것들은 대개 단 한 명의 악당이나 단 하나의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다. 실체조차 보이지 않고 언제 시작했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어떠한 것들. 굳이 억지로 정의하자면 우리에게 축적된 삶의 흔적 그 자체이다. 우울증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나를 한 번에 죽이진 않지만 딱 오늘 하루만을 망치게 할 정도의, 트라우마 정도는 아니지만 경·중증 정도는 되는 마치 스토커 같은 스트레스.
우울증에 걸린 불쌍한 피해자의 사고 범위는 터무니없이 넓어진다. 하루 일과를 끝내기에도 버거운 한 명의 인간이 머릿속으로는 지나간 과거와 알 수 없는 미래 수십 년을 끊임없이 넘나든다. 사고는 끝없이 가속한다.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떤 말을 들어야 행복한지도 모르면서 나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별 볼일 없는 평가를 상상하며, 심지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타인의 완벽한 행복을 질투한다. 머릿속이 불행의 목소리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내 인생의 개새끼들도 시작점은 다 그런 눈빛, ‘넌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한 건 다 그런 눈빛들이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만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
우울의 끝은 어디일까? 자살? 일부 맞긴 하지만 그건 너무 극단적인 케이스고, 그렇다고 좌절이라고 표현하기엔 좀 약한 것 같다.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가 도달하는 곳은 사실 ‘무관심’이다. 삶이 지겨워지고 살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 노동이 된다. 최후의 방법으로 ‘기권’을 택한 희생자의 뇌는 모든 감정성을 차단한 채 그저 하루하루 버텨내기만 한다. 뇌가 그 주인을 죽게 놔둘 수는 없기에 차선으로 선택한 ‘살아 있지도 않고 죽어 있지도 않은’, 간신히 숨만 쉬며 연명하고 있는 상태다.
극 중 미정의 오빠 창희의 말대로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던가. 여자는 자신의 아빠 일을 도와주는 출신도 이름도 모르는 알코올중독자 구씨에게 홀린 듯 다가간다. 자신과 비슷한 냄새가 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발작하듯이 말한다. 날 ‘추앙’해달라고. ‘나는 한 번만이라도 채워지고 싶다’고. 그러자 사람하고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남자는 되묻는다. 그러는 너는 누군가를 채워준 적이 있느냐고. 그렇다. 일방적인 추앙은 신에게나 하는 것(worship). 인간끼리의 추앙은 배려나 사랑, 그 외 모든 숭고한 행위가 그렇듯이 ‘서로’에게 하는 것(respect)이었다. 그렇게 삶의 우울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두 남녀의 ‘추앙’으로 시작하여 ‘환대’로 끝나는 해방일지가 시작된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시작하면서 초반에 내가 목표로 한 것은 ‘공감하는 의사’였다. 공감, ‘상대방의 감정을 내가 겪은 것처럼 여기되 중심을 잃지 않고 환자를 위한 치료를 지속해나가는 것.’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는지 알고 있다. 내가 겪은 것이 아닌 사건을, 내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을 섣불리 이해하려는 것은 알코올중독자의 집 안에 쌓여 있는 수치스러운 빈 술병 무더기를 허락도 없이 치워주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오만하고 비공감적인 행위인 것을. (“둬, 그냥 두라고. 내가 싼 똥 누가 치워주는 게 너희들은 고맙냐?”) 여러 케이스가 실패로 끝난 후 나는 깨달았다. 상대방이 아닌 오직 나를 위한 위로, 나의 선함을 증명하기 위한 조언들. 내가 공감한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 후벼 파야만 했던 수많은 남의 상처. 좋은 의도만으로 사랑은 성립되지 않았다. 사랑을 체현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론이 필요했다.
미정은 말한다.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사랑 전문가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사랑은 현상이 아니라 행위다. 받는 게 아니라는 것. 작가는 추앙이라는 독특한 단어를 구사하며 구원을 말한다. 사랑이 타인을 위한 감정적인 행위 일체를 말한다면, 추앙은 사랑하는 행위의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추앙의 실천은 ‘조언하지 않고, 위로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하며 응원하는 행위’로 체현된다. 그렇다면 추앙을 통한 사랑은 두 사람을 변화시켰을까?
“예전엔 시키는 말 외에는 잘 안 했던 것 같아요. 누가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까… 근데 이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그냥 해요. 그냥 나와요. 그러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 올라와요. 갑자기 내가, 사랑스러워요.” 여자는 남자가 떠난 이후에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남자를 계속 사랑하고 응원하기로 한다.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기를. 매일 술을 마시던 그에게 숙취가 찾아오지 않기를.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정하고 사랑했으니까. 개새끼, 내가 만났던 남자들은 다 개새끼라던 그녀는 지금까지 스스로를 비참한 여자로 몰아세웠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어떤 증명과 설명을 원하니까. 그들이 더욱 확실한 개새끼임을 증명하려면 나는 비참해야만 했다. 하루에 최소 5분은 있었을 설렘을 외면하고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썩은 물이 도는 느낌’, 끊임없이 별로가 되는 내 자신과 삶이었던 것이다.
구씨가 자신을 떠나도 여전히 구씨를 추앙한다는 것은 그녀의 내면세계에서 사랑이 마침내 받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는 의미였다. 2년의 세월이 흘러 무심히 걸려온 남자의 전화는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지며 정신적 자살을 하려는 그녀를 구원한다. 그리고 그토록 자신을 아프게 했던 전 남자 친구가 정말 개새끼였다는 것을 증명할 최고의 기회 앞에서, 여자는 복수를 포기한다. 결코 오지 않는 연락과 결코 갚지 않는 돈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여자가 이제는 자신의 불행을 설명하기 위한 썩은 물 대신 그날분의 설렘을 담기 시작한다. 1초, 2초…. 설렘이 쌓이기 시작한다. 내 안에 무엇을 담을지 내가 결정함으로써 해방된 여자의 삶.
구씨도 한 걸음을 내딛는다. 과거의 그는 세상으로부터 보답받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에 분노했다. 업소에서 진 빚을 갚지 않는 손님에게 “너는 끝까지 나에게 예의 없었으면서 나는 왜 끝까지 예의를 지켜야 하느냐”고 외치던 그였다. 항상 배신만 당하던 여자와 여자의 아버지를 답답해하던 그가 이제는 자신을 배신한 동료를 용서하며 말한다. “형, 환대할게. 환대할 거니까 살아서 보자.”
추앙이 사랑의 방법이었다면 환대는 사랑의 결과였다. 선의로 한 말이 사랑했던 여자를 죽게 만든 것처럼 선의가 항상 보답받는 것만은 아니라면, 악의가 내게 남기는 것이 반드시 증오만은 아닐 터이다. 자신의 선의로 세상의 악의를 이겨내고 스스로를 회복시키며 진정으로 얻어지는 자신에 대한 용서와 환대.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데도 굳건히 지상에 버티고 있었던 500원짜리 동전과도 같은 나. 내가 남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게 아닌 것처럼, 남들도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소용돌이 같은 세상에서 무엇을 담을지를 내가 결정하는 것. 자신의 결정에 대한 추앙. 그 결과로 얻어지는 환대. 아침마다 그를 채우던 악연의 목소리 대신 설렘이 담기기 시작한다. 6초, 7초… 하루에 단 5분, 그 정도만 설레어도 충분하니까. 남자는 손에서 술병을 놓고 여자의 모자를 되찾아주러 도랑 위로 날아오르던 그때처럼 여자에게로 날아간다.
사람들은 말한다. 해방되라고. 너는 답답하다고. 어리석다고. 그러니 스스로를 깨라고.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부수고 나오라고. 하지만 〈나의 해방일지〉는 말한다. 자신 안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소망과 순수함을 달성하는 것이야말로 해방이라고 말이다. 자신 안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성역’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해방’이라는 것을 극은 역설한다. 그러니 당신이 해방되길 원한다면, 어떤 충고도 조언도 평가도 없이 자신과 타인의 성역을 그저 추앙하라.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그리고 환대하라. 당신이 당신과 타인의 성역을 환대한다면 마음은 결국 채워져 마음속에는 느낄 것이 사랑밖에 없을 것이니. 이미 당신은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세상과 만났던 것이다.
 
권순재는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원장이다. 〈정신의학신문〉에 ‘영화 속 마음을 읽다’와 ‘경제 속 마음을 읽다’라는 칼럼을 연재 중이며 저서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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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오성윤
    WRITER 권순재
    ILLUSTRATOR VERANDA STUDIO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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