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도 외향인도 아닌 '이향인'은 존재하는가?
나는 내향인이지만 사회 생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에서만 외향인이라면 일단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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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약간 시들해졌지만, MBTI는 한때 한국 사회의 대중심리학을 휩쓸었다. 혼자 있을 때와 함께 있을 때 중 언제 에너지가 충전되느냐로 I와 E를 나누고, 같은 상황에서 논리를 먼저 따지는지 사람의 감정을 먼저 따지는지에 따라 T와 F로 나누는 식의 이 심리 검사는 이제는 그냥 일상의 한 용어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진료실에 찾아오는 이들 중 자신을 ‘E’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까 혹은 ‘I’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까?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둘 다 아니다.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전 남들이 볼 때는 E이지만, 사실은 E인 척하는 I에요”라는 대답이다. 좀 풀어보자면 이런 말이다. “저는 사람을 좋아해요. 근데 오래 같이 있으면 너무 힘들어요. (누군가와) 오래 같이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무 말도 하기 싫고, 며칠은 혼자 있어야 해요. 그렇다고 혼자 있는 걸 즐기는 사람도 아니에요.” E인 척하는 I, 남들은 E라고 생각하는 I들. 이들은 내향인인가 외향인인가?
최근 <이향인(Otrovert>이라는 책이 번역 출간됐다. 정신과 의사 ‘라미 카멘스키’가 40년 임상 끝에 제안한 제3의 성격 유형. 사교적이지만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이향인이다. 미국에선 작년에 나왔지만, 한국에 출간된 것은 올해 3월이다. 반응은 갈렸다. “드디어 내 얘기가 나왔다”며 환영하는 사람들과 “또 마케팅이다”라며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소셜미디어에서 맞붙었다.
두 반응은 모두 이해 가능하며 동시에 절반만 맞다. 이 개념이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의 가슴을 건드리는지 이해하려면,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 인간은 집단 없이 살 수 없도록 진화했다. 이건 비유가 아니다. 뇌를 스캔해보면 사회적 배제의 고통은 신체적 통증과 동일한 뇌 영역을 활성화한다. 집단 안에서 고립감을 경험하자 신체적 통증과 거의 같은 신호가 뇌에서 발생했다는 나오미 아이젠버거의 데이터가 그것을 보여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은 즉 단순히 감정적인 반응이 아닌 뇌에 울리는 생존의 위협에 대한 경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은 집단에 완전히 흡수되도록 진화하지도 않았다. 벌이나 개미는 개체 선택이 집단 선택에 거의 종속되어 있다. 일벌은 여왕벌을 위해 번식을 포기하고도 고통받지 않는다. 그러한 감정 자체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하늘을 나는 이카로스처럼 두 개의 세계의 가운데를 날아야 한다. 집단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집단에 완전히 흡수되어서도 안 된다.
나는 외래 진료를 하면서 사회성의 두 가지 극단에서 발생하는 유형의 문제를 가진 병적인 인간 모두를 관찰한다. 하나는 다른 인간과 사고방식이나 세계관이 전혀 달라 거의 최소한의 의식주를 제외하고는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가는 유형의 환자들. 세속에서 조현병, 히키코모리로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의 대극점에는 직장에 완전히 종속되어 개인의 삶 없이 집단의 톱니바퀴로 살아가다가 번아웃에 쓰러지는 대기업 사원들이 있다. 우리 대부분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도 태양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도 추락하게 되는 이카로스처럼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지도, 완전히 융합되지도 않아야 생존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사회성의 본질이다.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이를 두고 인간은 불완전한 진사회성(Eusociality) 동물이라고 칭했다. ‘진사회성’이란 앞서 언급한 꿀벌처럼 완전한 번식 분업이 이루어지는 집단의 성질을 뜻한다. ‘불완전한’이라는 단서가 붙은 이유는 인간이 사회에 협력하면서도 이기심을 지닌 존재, 구조적으로 개인과 집단의 긴장을 내재한 존재라는 의미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베이컨은 이 긴장을 자기주장, 분리, 개체로서의 존재감인 ‘주체성’(Agency)과 집단과의 합일, 참여, 소속감을 뜻하는 ‘공동성’(Communion)이라는 두 힘의 균형과 긴장으로 정리했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의 근본 동기이고,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억압될 때 병리가 생긴다.
나는 이 ‘이향인’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이 긴장의 한가운데에서의 경험을 포착한다고 본다. ‘사교적이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내향인들이 다 이렇게 된 것 아니냐’는 비판은 날카롭다. 틀린 말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내향인은 실패, 거절, 비판, 위험 신호에 예민한 사람, 즉 처벌 민감성이 높은 기질의 사람을 뜻한다. 처벌 민감성이 높은 사람에게 새로운 시도나 새로운 만남은 모두 위험 요소인데, 이들이 사회적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외향적 행동을 시도하고 학습하는 일은 실제로 일어난다. 그리고 그 외향인의 가면이 오래되면 얼굴과 구분할 수 없다. 이런 상태가 이향인이라는 단어의 허점을 일부 설명해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적응한 사람의 고통은 처음부터 그런 기질로 태어난 사람의 고통보다 덜할까? 쉽게 얘기하면, 내향인이 사회화의 관습에 적응하고 나면 좀 덜 고통스러울까? 나는 매일 진단명에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 환자들을 만난다. 우울증이라고 하기에는 주요 우울증의 진단 기준을 완전히 만족하지 않고, 불안장애라고 하기엔 좀 다르고, 조울증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상적이다. 그리고 이 애매함이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 언어가 없으면 규정할 수 없고, 규정할 수 없으면 도움을 청하기 어렵고, 도움을 청하지 못하면 혼자 감당하다 무너진다. 공황장애 환자의 상당수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자신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정의 받는 순간 그 고통이 경감되는 일을 경험한다.
만일 이향인이라는 단어가 이 회색지대에 있는 누군가의 고통을 규정해주고 그 규정을 통해 ‘나만 이런 게 아니다’라는 최초의 안도를 준다면, 그 기능 자체를 무가치하다고 보긴 어렵다. 한때 대중심리학을 휩쓸었던 ‘초민감자’ ‘엠패스’ 그리고 작금의 ‘이향인’의 계보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 용어들이 반복적으로 대중에게 먹히는 이유는 이것들이 마케팅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기존의 언어가 담지 못하는 어떤 경험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향인의 경우 그 경험이란 집단 안에서 안도하면서도 집단에 완전히 속하면 자기의 객체성이 소멸될 것만 같은 양가성에서 나오는 긴장의 고통이다.
뇌과학은 이것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를 설명해준다. 한때는 뇌과학의 화두였고, 이제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을 때 오히려 활성화되는 특정한 뇌의 영역으로, 주로 내측 전두엽 피질, 후방대상피질, 각회 등으로 이루어지는 네트워크다. 이 네트워크는 자아 참조, 미래 계획, 타인의 감정 이해 등 내적인 생각에 관여하는 부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이 말은 인간의 뇌에서 자기 참조와 타인의 감정 이해는 동일한 인지회로로 처리된다. 즉 자아와 타자는 같은 신경망을 공유한다. 집단 속에서 개체성이 지워지는 경험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이 회로가 억압되는 사건이다.
집단 위계 안에서 자율성이 만성적으로 침해되면 이는 생존에 위협을 주는 스트레스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다. 문자 그대로 사회구조가 뇌를 바꾼다. 이향인이 “집단 안에 속하면서도 집단 안에 있으면 소진된다”고 말할 때, 그것은 기질의 문제이기 이전에 생물학적인 사실일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향인이라는 단어의 내적 모순이다. 이 단어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향인이라는 집단에 속한다’라고 말해준다. 소속 불능자들의 소속집단이라는 역설을 단어 자체가 내포하고 있다. 이 역설이 왜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나는 ‘독립적’이지만, ‘나 같은 사람들이 있다’라는 이카로스의 고뇌를 허용해주는 언어를 사람들은 오랫동안 찾아왔던 것이다.
조심해야 하는 지점이 있다. 외래 중에 환자의 입에서 “저는 ENTP라서요”라는 말이 나오면 나는 잠깐 긴장한다. 정체성 언어는 설명이 되는 순간 변화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가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저는 이향인이라서요’ 혹은 ‘저는 트라우마가 있어서요’라는 말이 나는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에 변하거나 성장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면죄부인 것은 아니다. 만약 정체성의 언어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이해가 아니라 자기 봉인이다.
‘인간은 자유를 얻고 나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다시 복속되려 한다’고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말했다. 정체성 레이블에 대한 집착도 비슷한 구조다. 불확실한 자기를 탐색하는 불안으로부터의 도피다. 틀이 있으면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아도 되니까. 임상에서 내가 하는 일은 정확히 반대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감정이 소진된다는 증상으로부터 그 각각의 이유를 찾아 나선다. 왜 소진되는지, 그 소진 아래 무엇이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을 정의하는 틀은 도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이향인은 존재하는가? 그 경험은 존재한다. 그 고통은 존재한다. 집단 없이는 고통스럽고, 집단 안에서 자기가 지워져도 고통스러운 그 경험.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진화 과정에서 짊어지게 된 구조적 긴장이다. 이향인이 그 고통을 정확히 레이블링할 수 있는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름을 찾는 행위가 자기를 지우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라면, 나는 그것을 가볍게 볼 수 없다.
권순재는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및 치매전문센터장을 거쳐 현재는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의 원장이다.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와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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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박세회
- WRITER 권순재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MONTHLY CEL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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