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물은 '뉴노멀'이 되고 있는 중일까?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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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물은 '뉴노멀'이 되고 있는 중일까?

오성윤 BY 오성윤 2022.07.29
올해의 드라마를 선정해보자. 2022년이 갓 절반을 넘어섰는데 벌써 올해의 드라마라니 너무 이르다고? 그렇지 않다. 나는 올해의 드라마가 이미 나왔다고 믿는다. 미리 세 편을 선정하자면 jtbc의 〈나의 해방일지〉, ENA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그리고 OTT 서비스 왓챠의 〈시맨틱 에러〉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미 〈나의 해방일지〉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봤을 것이다. 전자가 한국 드라마 작가주의의 새로운 방향을 설정했다면 후자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도전한다. 2022년의 한국 드라마는 플랫폼의 다양화에 힘입어 다양한 방식으로 용맹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시맨틱 에러〉는? 나는 남자 대학생의 사랑을 다룬 이 비엘(BL) 드라마가 걸작이라고 말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솔직히 말해 꽤나 이성애 중심적인 남성 잡지 〈에스콰이어〉에 비엘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보이스 러브(Boys Love)의 약자인 비엘은 남자들 간의 사랑을 다루는 장르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퀴어(queer) 영화나 드라마와도 다르다. 비엘은 성소수자 인권이나 현실을 다루는 데 별 관심이 없다. 중요한 건 남성들 사이의 육체적 사랑이다. 나는 당신이 이 대목까지 읽고 책장을 넘겨버린다고 해도 이해한다. 하지만 당신은 곧 OTT와 케이블에서 남성들이 키스를 하고 연애를 하는 꼴을 매주 보게 될 것이다. 맞다. 이건 예언이다.
비엘이라는 장르는 일본에서 왔다. 1970년대 말 만화 잡지 〈주네(June)〉에서 시작된 이 장르는 협소한 독자를 대상으로 한 은밀한 오락거리였다. 남성들의 육체적 사랑을 보고 싶어 하는 소수의 여성 팬들을 위한 어둠의 장르였다. 여성이 아닌 나로서는 이 욕망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남성과 여성의 섹스를 다루는 만화는 어디까지나 남성의 욕망에 충실한 포르노그래피에 가깝다. 거기에는 분명한 성적, 육체적 계급이 존재한다. 그걸 남성과 남성으로 전환하는 순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이성애자 포르노그래피의 강건한 성별 계급 구도가 옅어지면서 좀 더 안전하게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가 된다. 비엘이 여성 독자를 위한 서브장르로서 살아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1990년대부터 비엘은 어둠의 세계를 벗어나 점점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우 서브컬처가 10년 정도 무르익으면 메이저로 치솟아 오르기 마련이다. 비엘이 한국에 상륙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당시에는 비엘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기 전이었다. 비슷비슷한 그림체를 가진 그 만화들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야오이’라는 말로 불렸다. 야마나시(やまなし: 주제 없음), 오치나시(おちなし: 결말 없음), 이미나시(いみなし: 의미 없음)의 앞 글자를 딴 신조어였다.
야오이는 2000년대를 지나 메이저 장르가 되면서 비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한국에서도 영화화된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의 요시나가 후미 같은 작가들은 좀 더 주류적인(그러니까, 노골적인 섹스를 제거한)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고, 그건 비엘이라는 장르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비엘의 탄생지인 일본에서는 지난 몇 년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티브이 채널들이 비엘 소설이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를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TV 아사히의 〈아재’s 러브〉와 TV 도쿄의 〈30살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될 수 있대〉 같은 드라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들의 전략은 간단하다. 비교적 수위가 낮은 원작을 선택해 가족도 함께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이 드라마들은 여전히 퀴어물이라기보다는 비엘이다. 동성애자들의 현실적 고민이나 사회적 장벽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는 이 드라마들을 일종의 여성향 판타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나쁜가?
할리우드는 지난 30년간 훌륭한 퀴어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필라델피아〉 〈브로크백 마운틴〉 〈캐롤〉 같은 걸작들은 고작 사랑을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동성애자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그려냈다. 하지만 미국의 퀴어 장르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이를테면 지난 10년간 가장 사랑받은 퀴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한번 생각해보시라. 아름다운 남자 배우들이 아름다운 장소에서 아름다운 연애를 하는 이 영화는 사실상 미국의 비엘이다. 물론 가벼운 사회적 코멘트가 등장하긴 하지만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의 의도는 명확하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유미주의적인 방식으로 동성애를 묘사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비엘과 퀴어물을 구분할 수 없는, 혹은 구분할 필요가 없는 시대에 마침내 접어든 걸지도 모른다.
일본 비엘의 영향력 아래서 시작된 한국 비엘은 2010년대에 와서야 웹소설과 웹툰의 방식으로 소수의 단단한 팬층을 일궈냈다. 왓챠가 첫 번째 오리지널 드라마로 리디북스에서 연재된 웹소설 〈시맨틱 에러〉를 선택한 건 일종의 틈새시장 노리기였을 것이다.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의 자본력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서브컬처로서 고정 팬이 있는 비엘이라면 적은 자본으로도 손해 보지 않는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려면  일본 비엘 드라마의 전략을 흉내 내면 된다. 19금 원작을 12금 수위로 낮춰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로 풀어내는 것이다. 왓챠의 전략은 성공했다. 기존 비엘 팬들뿐 아니라 퀴어 서사에 목마름을 느끼던 대중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비엘은 이제 2022년을 정의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8회 분량의 드라마를 편집한 극장판 〈시맨틱 에러 : 더 무비〉가 8월 CGV를 통해 개봉한다. 얼마 전 공개된 티빙의 〈나의 별에게 2〉는 티빙 드라마 인기 순위 상위권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다. 한국에서 드물게 퀴어 영화를 지속적으로 제작해온 김조광수 감독도 왓챠와 함께 리디북스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신입사원〉을 제작 중이다. 제작사 명필름도 퀴어 영화 감독 소준문과 손잡고 비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따라바람〉을 만들고 있다. 토종 OTT뿐만 아니라 전통의 충무로 제작사들까지 비엘에 뛰어들고 있다. 이건 스쳐가는 바람이 아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동성애자라면, 실존하는 편견을 매일매일 겪어야 하는 진짜 퀴어로서의 삶이 배제된 비엘 열풍이 못마땅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 불평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퀴어 주인공이 등장하는 문화 상품은 여전히 지나치게 부족하다. 한국에서 퀴어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는 2000년대 이후에야 아주 가끔 제작됐다. 문학? 소설가 박상영이 첫 단편집 〈대도시의 사랑법〉을 낸 것은 2019년이다. 이성애자들은 문학과 영상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이성애를 배운다. 배운다는 말이 거슬린다고? 세상의 모든 것은 배우는 것이다. 이성애도 배우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 주인공이 가득한 콘텐츠에서 주인공의 성별을 굳이 머릿속에서 교체해가며 동성애를 배운다. 이성애자들은 동성애자들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뒤틀리고 비틀리고 기울어 있는 운동장인지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어쩌면 한국 문화계는 비엘이라는 새로운 놀이를 위해 운동장을 넓히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1990년대 중반의 만화방 구석에서 당시 은밀한 야오이 팬들의 바이블이었던 미나미 오자키의 〈절애〉(1989)를 봤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림체부터 내용까지 하나도 마음에 드는 데가 없었다. 어떻게 봐도 퀴어 만화가 아니었다. 순정만화의 얼굴을 한 포르노그래피였다. 그러나 나는 주인공의 대사가 등장하는 순간 무릎을 꿇었다. “사람을 좋아하는데 옳고 그르고가 어디 있어. 내가 여자를 좋아하게 되면 올바른 사랑이고 상대가 남자면 잘못이라는 거야? 누구도 내 감정에 참견할 권리는 없어.” 나는 아직도 이 대사만큼 본질적으로 퀴어적인 선언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나는 당신 역시 걱정을 멈추고 비엘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란다. 기묘한 욕망에서 출발한 이 장르는 흥미진진하게 진화 중이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 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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