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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시간에 걸쳐 같은 악구를 840번 연주해야 하는 곡 '벡사시옹'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프로필 by 오성윤 2022.10.13
지난 8월 20일, 흑석동에 위치한 음악 공간 중력장에서 오의진 피아니스트가 국내 최초로 ‘벡사시옹(Vexations)’을 일인 완주했다. 이 곡은 ‘짐노페디’ ‘그노시엔느’ ‘당신을 원해요’ 등의 작품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프랑스 작곡가 에리크 사티(1866-1925)가 작곡한 곡으로, 약 80초가량의 짧은 악구를 840번 반복해야 하는 ‘별난’ 음악이다. 한 장의 분량도 안 되는 간단한 멜로디와 화성 진행이 전부지만 그 관계가 까다로워 결코 쉽게 외워지지도 않을뿐더러, 악보에는 연주 전에 몸과 마음가짐을 단단히 준비하라는 당부의 글귀가 적혀 있다. 이 곡의 총 연주 시간은 거의 20시간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여러 명의 연주자가 번갈아가며 완주하는 릴레이 형식으로 연주하는데, 오의진은 약 21시간에 걸쳐 840번을 모두 연주했다.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현대음악을 좋아하고 즐겨 연주하는 그는 이날 공연을 위해 이틀 전부터 금식하고, 똑같은 악보 840장을 준비해 악구를 칠 때마다 한 장씩 바닥에 뿌려 새로운 악보를 사용하는 등 누구보다 전문적이고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현장을 방문한 34명과 더불어 온라인 중계에서도 1300회 이상의 접속이 이루어지며 작품을 감상하고 연주자의 도전을 응원했다. 그런데 이 곡을 들어본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이걸 도대체 왜 하는 건가? 단순하게 피아니스트의 체력적인 도전인가? 아니면, 행위예술인가? 작곡가가 의도한 게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솔직하게… 좋은가?
벡사시옹을 바라보는 내 관점은 이렇다. 이 작품은 ‘두 번’ 태어났다. 첫 번째 탄생은 앞서 말했다시피 에리크 사티의 작곡이다. 하지만 그는 생전에 이 곡을 출판하려고 애써 시도하지 않았다. 음악학자들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 쉬잔 발라동과 이별한 후 1893년쯤에 이 곡을 작곡한 것으로 추측하지만 정확한 작곡 연도나 배경에 대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다. 어떤 악기로 연주할지도 쓰여지지 않았고, 글귀 속 숫자 840의 의미나 반복의 의도 또한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오직 제목뿐인데, 그마저도 여러 가지 뜻으로 쓰여서 한 단어로 번역하기 쉽지 않다. (영어 사전에는 ‘괴로움’ ‘짜증’ ‘학대’ ‘모욕’ 등의 뜻으로 나와 있다.)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종이 한 장에 숨어 있던 음악을 발견하고 출판한 사람은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1912-1992)였다. 사티를 존경했던 그는 1963년 9월 9일 맨해튼에서 11명의 피아니스트와 함께 릴레이로 840번 반복을 완주하는 성공적인 초연까지 책임지고 기획했다. 벡사시옹이 처음 세상에 공개된 이날, 비록 기존 클래식 공연에 비해 관객수는 적었지만 큰 주목을 받았고 당시 현장의 감흥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기사와 인터뷰 영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의 대표작 ‘4분 33초(1952)’처럼 우연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으로 플럭서스 운동의 중심에 있던 케이지는 약 70년 전에 작곡된 사티의 음악을 활용해 고전적인 클래식과 20세기 예술 사조의 흐름을 연결하고, 자신이 지향하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로 재탄생한 벡사시옹은 클래식 피아노곡이자, 행위예술, 개념미술을 연장하는, 미시적으로는 모호하지만 거시적으로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작품이 되었다.
음악을 글로 표현하는 데에 한계가 있지만, 케이지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작품 중 비슷한 느낌의 두 곡을 소개하자면, 우선 ‘가능한 한 느리게(As Slow as Possible, 1987)’가 있다. 말 그대로 최대한 느리게 연주하는 곡인데, 케이지 사후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무려 639년 길이의 퍼포먼스를 계획했다. 단위를 잘못 쓴 게 아니다. 독일 할버슈타트에 있는 성 부샤르디 성당의 작은 오르간에서 2001년 9월 5일부터 연주가 진행 중이며, 2640년 9월 5일에 연주를 마칠 예정이다. 자동 오르간 페달 위에 모래주머니를 얹고 며칠, 몇 달, 길게는 몇 년이든 정해진 음의 길이만큼 시간이 지나면 다음 음으로 바꾸는데, 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 작품은 음악보다 메시지가 중요하다. 인간의 수명보다 긴 연주 시간은 결코 우리가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의미하며, 길게 지속되는 평범한 날들과 단 한 순간의 변화와 주목, 그리고 다시 길게 지속되는 음을 배경으로 어우러지는 소음은 그 자체로 음악이자 삶을 의미한다. 또 다른 곡은 앞서 언급한 ‘4분 33’초다. 국내에서는 올해 4월 8일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에서 부산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해 화제가 되었다. 이 곡은 아무런 음도 연주하지 않는 곡이다. 대신 관객은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울리는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협연자로 깜짝 등장해 가만히 서 있었던 양인모 바이올리니스트와 중간에 땀을 닦았던 최수열 지휘자의 퍼포먼스에 관객들은 조심스럽게 웃었고, 악단의 의도인지, 관객의 조롱인지, 연주 도중 박수와 휴대폰 소리, 노래가 객석에서 들렸다. 케이지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소음과 해프닝까지 다 합해 하나의 음악 작품이 된다. 즉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더 확장하면 모든 현상을 작품으로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케이지를 포함한 동시대 예술가들의 영향으로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무수한 개념적 예술 작품이 생겨났고, 그 장르를 구분할 수 없는 정체성 때문에 통상의 공연장을 넘어 현대적 공간이나 미술관에서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그들은 어떤 의도로, 왜 이런 예술을 추구하며, 왜 우리는 쉽게 즐기지 못하는 것일까? 내가 감히 모든 작품과 예술가를 대신해서 답변할 수는 없겠으나, 작곡가로서 내 생각과 경험에 비추어 말해보고자 한다. 유일한 정답이 아닌, 당신이 이런 유형의 예술 작품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의 실마리로서.
우선 예술가의 시작이자 끝은 자기만족에 있다. 미식이나 영화, 소설 분야에서 으레 드러나듯 아름다움의 취향은 저마다 천차만별인데, 예술에서의 ‘아름다움’은 그 선입견과 달리 조용하거나, 불쾌하거나, 시끄럽거나, 인간의 내면이든, 세상 어디서든,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 그렇듯 자신이 좋아하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찾아서 끌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작가의 아이디어만큼이나 프레젠테이션이 매우 중요하며, 관객에게는 그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와 시간적 여유를 필요로 한다. 낯선 음향에서 공포심과 쾌락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도 있고, 어떤 음악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동안 그 의미가 변모하는 과정에서, 사고 흐름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도 있다. 기도와 명상, 108배를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무아경에 이르는 것과 같다. 예술 행위는 창작자와 감상자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창작자의 의도와 별개로 본인만의 방향으로 나아가 그 감정이나 인상 또는 사고의 끝에 도달해도 무방하다. 오히려 호기심과 인내심을 가지고 그 지점까지 나아갔다면 문화적 교양이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감상이 작가가 애초에 의도한 바에 근접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작품에 대한 소개가 불친절한 이유는 대부분의 개념예술 작품이 빠지는 ‘스포일러의 딜레마’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찾아낸 특별한 아름다움을 어떻게 환기할지, 알고 접하는 것과 모르고 접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일지는 자명하기 때문에 창작자가 작품 소개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전 정보가 없는 관객 입장에서는 도통 무슨 내용인지, 이게 음악인지, 언제 끝나는지 알 길이 없으며, 공연장에 대해 무책임하다며 분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피아니스트가 독주회에서 5분 남짓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아 소동이 일었던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당시 그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겼지만, 지금은 감상하는 사람들이 그 곡이 어떤 곡인지 알기에 감흥의 정도가 다르다. 어쨌든 그 상징적인 메시지를 기념하기 위해 연주하는 것이다.
이런 작품은 어쩌면 우리 정서와는 거리감이 있을 수 있다. 바쁜 현대사회, 특히나 빠르고 간결한 정보 전달을 좋아하는 오늘날의 추세와는 완전히 다른 길이니까. 하지만 시간을 내 세상을 바라보는 자유로운 시각과 다양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분명 마음에도 좀 더 여유가 생길 것이다. 흔히 클래식은 아는 만큼 들린다고 하지 않던가? 아름다움도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손일훈은 작곡가다. 한예종을 졸업하고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원에서 작곡 석사과정과 최고 과정을 마친 후 국내외에서 작품 활동 중이며, 현재 대관령음악제 기획자문, 예술의전당SAC챔버앙상블 음악감독, 앙상블 ‘클럽M’의 상주 작곡가를 맡고 있다.

 

Credit

  • EDITOR 오성윤
  • WRITER 손일훈
  • ILLUSTRATOR MYCDAYS
  •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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