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벌어지는 '새 시대의 시위'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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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벌어지는 '새 시대의 시위'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

김현유 BY 김현유 2022.12.03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정확히는 명화를 본 적이 있다. 사실 대학 시절에는 외국에 나가도 미술관에는 가지 않았다. 미술 교과서에서 본 그림을 꼭 실제로 볼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에 갔을 때 강제로 미술관에 끌려갔다. 미술 애호가인 러시아 친구가 나를 다그치며 억지로 데려간 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이었다. 대영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치에 맞았다. 레닌이 공산혁명으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기까지 러시아는 꽤 부유한 국가였다. 로마노프 황제라거나 아나스타샤 같은 이름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러시아 황조는 유럽에서 꽤 왕성하게 미술품을 수집했다. 공산주의 이치에 안 맞지만, 스탈린을 비롯한 소비에트 독재자들은 그 미술품들을 불태우지 않았다. 중국이었다면 어림없는 소리다. 마오쩌둥의 반문화적인 문화혁명에 의해 깡그리 소각됐을 것이다.
에르미타주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큰 감흥은 없었다. 아래층에는 러시아 황조의 모습을 그린 고급진 그림들로 가득했다. 층계를 올라가는 순간 사람들이 우글우글했다. 겨우 그림에 가까이 다가갔다. 파란색, 녹색, 붉은색으로 그려진 거대한 그림이었다. 마티스의 ‘춤’이었다. 당신은 분명 그 그림을 고등학교 교과서로 배운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정도의 명성을 지닌 그림을 아는 것은 현대 시민의 의무다.
얼어붙었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런 소리를 하면 분명 ‘어디서 부르주아적 망상을 경험처럼 풀어내냐’며 혀를 차는 독자 여러분도 있을 것이다.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정말 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감동이 생각보다 지나치게 컸다. 미술이 이런 감동을 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탓이다.
미술이 주는 감동 따위를 풀어내는 글을 쓰려고 이런 기나긴 경험을 지루하게 늘어놓은 것은 아니다. 마드리드에서 본 고야의 ‘검은 시대’ 그림들이 얼마나 큰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쓰지 않겠다. 이 글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느 정도는 미술 세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전제해야만 하므로 말이 길어졌을 따름이다. 그러니 나에게는 지난 몇 달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시기였는지 당신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아니라고? 전혀 짐작 가는 데가 없다고? 빙고. 이게 바로 당신이 미술 뉴스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지난 몇 달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몇 점의 명화가 연속적으로 테러를 당했다. 시작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였다. 케이크를 맞았다. 다음은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였다. 토마토수프 세례를 맞았다. 그러고는 모네의 ‘건초더미’였다. 으깬 감자를 맞았다. 다음은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다.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의 머리와 손을 이 그림에 풀로 붙여버렸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앤디 워홀의 ‘캠벨 토마토수프’ 시리즈다. 이들도 자신의 몸을 그림에 붙여버렸다.
아, 나는 지금 너무 이르게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미술사의 영역에서야 그들은 테러리스트겠지만 좀 더 범위를 넓게 보면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는 좀 과하다. 그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유럽 각국의 환경단체 회원들이다.
다행히도 환경운동가들에 의해 다양한 음식물을 공급받은 명화들이 큰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다. 이 그림들은 지나치게 유명하기 때문에 보호 유리판이 덧대어져 있었다. 모든 명화에 보호 유리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유리 때문에 온도와 습도 조절이 힘들기 때문이다. 보호 유리판이 있으면 오히려 그림이 상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되도록이면 그림은 온도와 습도 조절이 잘 되는 큰 공간에 걸려 있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들로 인해 이제 세계 모든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은 보안 강화에 나섰다. 우리는 머지않은 미래에 번들거리는 유리판에 끼워진 명화들을 뉴노멀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틀림없다.
시위를 벌인 운동가들은 영화 〈2012〉 초반에 나오는 과학자들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소식을 듣고 모인 언론 카메라를 향해 외쳤다. “기후 비상사태다! 자본주의는 위험하다!” 가장 흥미로운 건 베르메르의 작품을 훼손하려고 한 환경단체 ‘저스트 스톱 오일’ 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관람객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막으려 들자 “눈앞에서 이 아름답고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 훼손되는 걸 보는 기분이 어떠십니까! 우리 눈앞에서 지구가 파괴되는 것을 볼 때 그런 기분입니다!”라고 외쳤다. 이들은 명확하게 자신들의 행위를 설명했다. 아름답고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을 파괴하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혁명의 불씨를 일깨울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행위다. 모르겠다. 나는 학생운동이 몰락하던 시기를 약간 떨어져서 지켜본 X세대이므로 운동이 파괴적으로 흘러갈 때 자기파괴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대충은 겪은 바 있다. 그러니 이 글은 원래대로라면 아름다운 것을 파괴하는 운동이 얼마나 비호감이 되어 역풍을 불러오게 될지에 대해서 논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베르메르의 그림에 자신의 손을 붙인 운동가가 한 다음 말을 듣고 생각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머리를 약간 보라색으로 염색한 그는 외쳤다. “이 그림은 유리로 보호되어 있지만 우리 아이들은 기후변화에서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내 생각만큼 담대하게 파괴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히 그림이 유리로 충분히 보호될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검토한 다음 일을 벌였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건? 인스타그램에 많이 올라가는 것이다. SNS에서 많이 공유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끼얹기만 하는 시위에서 몸을 그림에 붙이는 방식으로 변해가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그림의 사진만 SNS에 나오길 원치 않는다. 자신들의 얼굴이 나오기를 원한다. 모든 것이 인스타그래머블한 시대다. 시위도 인스타그래머블해지고 있다.
그게 나쁜 일이냐고? 아니. 나는 그들이 지나치게 순진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한다. 영악한 어리석음은 용서하기 힘들다. 순진한 어리석음은 용서할 수 있다. 용서받아야 한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10대와 20대로 보이는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세대에 맞는 새로운 방식의 시위를 시험하고 있다. 나처럼 화염병 좀 밟아본 세대의 사람들은 그들을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는 있지만 과격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나보다 약간 나이 많은 세대는 그 당시 서울에 루브르 박물관이 있었다면 진즉 모나리자부터 불태웠을 것이다.
다만 미술 애호가로서 내 정체성은 여전히 긴장하고 있다. 훼손 시위는 올해 시작됐다. 운동가들의 사진이 계속해서 전 세계 SNS를 폭파시킨다면 이런 방식의 시위는 계속될 것이다. 세상에 명화는 많다. 유리판이 없는 명화도 많다. 모든 과격한 정치 그룹 중에서는 조금 더 과격한 그룹도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어쩌면, 언젠가, 결국 유리판으로 보호되지 않는 그나마 가장 잘 알려진 명화에 수르스트뢰밍을 던질 수도 있다. 그중 한국인이 있다면 홍어 애를 집어 던질 수도 있겠다. 왜 한국인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지금은 K의 시대인데. 어쨌든 그날이 온다면 나는 이 지나치게 웃기려는 헛된 시도로만 가득한 글의 다소 부드러운 어투의 글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최악을 상상하며 살지는 말자. 이런 말을 하면 반드시 최악은 오기 마련이다만.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 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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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김현유
    WRITER 김도훈
    ILLUSTRATOR MYCDAYS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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