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패션의 시대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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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패션의 시대

김현유 BY 김현유 2023.02.01
나는 여러분처럼 당근을 한다. 처음 당근으로 판 물건 중 하나는 스웨덴 브랜드 아크네(Acne)가 초창기에 생산한 팔찌였다. 올리자마자 거래가 이루어졌다.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y2k 패션의 현신이 나와 있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팔찌를 꼼꼼하게 확인하며 말했다. “초창기 디자인 같은데 언제 시즌인가요?” 나는 그게 언제 시즌인지 기억할 정도의 패션광은 아니므로 대답을 할수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2만원을 깎아드렸다. 이런 친구라면 내 팔찌를 5분의 1 가격으로 넘겨도 행복할 수 있었다. 그 자리는, 과장해서 말하면 빈티지광의 세대교체식 같은 것이었다고 해두자.
나는 빈티지를 좋아한다. 빈티지 맛을 처음 접한 건 1990년대 후반 캐나다에서였다. 한국 아이들은 일본 아이들과 쉽게 친해졌다. 나는 몇몇 일본 아이들과 밴쿠버에서 가장 큰 빈티지 옷가게에 갔다. 당시의 나는 빈티지 옷가게라는 존재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일본 친구들은 컬럼비아니 파타고니아니 하는 브랜드의 빈티지들을 고르며 기뻐했다. 나는 가게의 옷 냄새가 역하다고 생각하며 빨리 거길 벗어나 갭(GAP) 매장에 갈 생각으로 가득했다. 바보 같은 것. 내가 타임머신에 탑승한다면 그 시간 그 가게로 돌아가 온갖 보물 같은 아웃도어 빈티지들을 잔뜩 사서 돌아올 것이다. 요즘 그것들이 거래되는 가격을 생각하면 한몫 잡을 기회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따위 야망밖에 품지 못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만.
서구와 일본에서는 이미 꽤 거대한 시장이던 빈티지 거래 문화가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은 건 겨우 지난 몇 년이다. 빈티지 가게는 어디에나 있었다. 빈티지 쇼핑몰도 어디에나 있었다. 대부분 한국 빈티지 가게들이 다루는 건 빈티지라기보다는 ‘중고’였다. 여기서 아주 간단하게 정의를 좀 내리고 가자. 중고는 중고다. 쓰던 물건이다. 빈티지도 중고다. 빈티지라는 단어가 붙을 때는 해당 중고 물건이 시대를 뛰어넘는 값어치가 있을 때다. 그건 샤넬 백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1980년대 대학 하키팀 스웨트셔츠일 수도 있다. 나는 몇 년 전 라프 시몬스의 2002년도 후디 따위를 100만원 가까운 가격에 구입했다. 그 시절 사람들은 “그 너덜너덜한 후디를 100만원에 샀냐”며 의아해했다. 지금 그 후디 가격은 500만원을 넘어가니 결과적으로는 나의 승리다.
지난 몇 년간 한국의 중고 명품 시장은 변했다. 인식도 변했다. 나는 이 변화가 당근마켓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근처 사는 사람이 무엇을 입고 있는지, 무엇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당근마켓이 등장하자 모두가 깨달았다. 공덕동, 아현동이라는 협소한 지역에서도 검색창에 ‘에르메스’를 치면 리스트가 끝없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모두 명품을 갖고 있었다. 우리 모두 팔고 싶은 명품을 갖고 있었다. 나는 빈티지 가게에 발도 들이지 않던 친구가 당근마켓으로 지난 시즌 구찌 반바지를 사는 걸 보고 확실히 깨달았다. 드디어 내가 바라던 빈티지 시장이 시작됐다는 깨달음이었다.
심지어 빈티지 패션 시장은 점점 세분화되고 있다. 빈티지 패션광(그러니까 나 말이다)의 하루를 생각해보자. 나는 대개 당근마켓 알람으로 눈을 뜬다. 검색어에 넣어둔 브랜드 제품을 돌아본 뒤 중고 거래 앱 ‘번개장터’를 연다. 당근마켓과 달리 전국 모든 사람과 거래할 수 있는 앱이다. 패션에만 집중하고 싶을 때는 ‘후루츠패밀리(Fruitsfamily)’ 앱에 접속한다. 구하기 힘든 디자이너들의 빈티지가 많이 올라오는 앱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오프라인 빈티지 가게들의 인스타그램을 확인한다. 만약 당신이 날이 선 일본 디자이너들을 좋아한다면 홍대에 있는 ‘가버먼트서울’에 가면 된다. 더는 헬무트 랭의 1990년대 아카이브 아이템을 구입하기 위해 1년에 한 번 도쿄나 베를린에 갈 필요도 없다. 숨어 있던 빈티지 패션광들에게 지금은 역사상 가장 만족스러운 시기다.
나는 빈티지 명품 거래 시대가 열린 데는 지금 패션 브랜드들의 새롭고 느슨한 전략도 한몫하고 있다고 주장할 생각이다. 브랜드에 시즌이라는 것이 거의 사라졌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은 매 시즌 새로운 영감을 받았다고 하지만 지난 시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옷만 계속 내놓고 있다. 시즌별 특징이 희미해지면서 제품 사용 주기도 짧아졌다. 이제 명품은 오래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한 번 경험해보고 다시 팔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MZ세대(나도 이놈의 명칭이 지겹다. 하지만 찾을 수 있는 자료가 다 MZ세대를 뭉뚱그린 자료들이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소유보다 경험을 더 중시한다고 한다. 한 일간지 자료에 따르면 실제로 2030 중고 명품 고객 절반이 1년도 채 되지 않아 중고 시장에 제품을 내놓는다. 명품은 보다 럭셔리한 H&M에 가까워졌다. 스태티스타의 조사에 따르면 2018년 전 세계 명품 소비자의 36%가 MZ세대였다. 2025년에는 58%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명품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아졌는데 주머니 사정은 더 힘들어졌다. 팬데믹과 전쟁에 따른 전 세계적 인플레이션, 금리 인상으로 모든 것이 올라갔다. 명품은 더 비싸졌다. 샤넬 백은 2019년보다 두 배나 올랐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라. 새 샤넬 백을 사야 하나? 클래식 샤넬 백의 디자인은 어차피 많이 바뀌지도 않는다. 당근마켓만 검색해도 샤넬 백이 끝없이 이어진다. 게다가 겨우 몇 년 만에 당신은 “이 샤넬 백 당근에서 샀어"라고 말해도 딱히 민망하지 않은 시대를 맞이했다. 예전이라면 “걔 그거 중고로 샀다면서?”라는 뒷담화가 나왔을 것이다(세상에는 그런 뒷담화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롤렉스는 이런 흐름에 올라탔다. 자사의 중고 시계를 공식적으로 재판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어차피 중고를 사고팔 거면, 인증된 곳에서 하라는 이야기다.
인식이 바뀌고 시장이 열리면 더 큰 시장이 달려든다. 지난해부터 백화점들이 갑자기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듯 중고 매장을 유치하기 시작했다. 나도 몇몇 매장에 가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역시 백화점이 힙할 수는 없는 일이다. 럭셔리 브랜드의 안 팔릴 것 같은 제품들을 쌓아둔다고 백화점  1층이 갑자기 MZ세대 놀이터가 될 리는 없다. 우리가 백화점을 가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경험이다. 가장 압도적인 백화점 경험은 바스락거리는 새 쇼핑백에 새 제품을 넣고 점원의 인사를 받으며 매장을 나서는 것이다. 백화점은 거기에 더 집중하시라. 갑자기 임원 중에 힙스터라도 들어온 양 당근마켓과 대결하겠다고 나서지는 마시라. 여러분은 결국 실패할 것이다. 물론 라프 시몬스의 2002년 컬렉션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아는 사람을 고용한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도 있다. 아니다. 이건 나를 고용하라는 협박은 결코 아니다.
 
김도훈은 글을 쓰는 사람이다. 〈씨네 21〉 〈geek〉과 〈허프포스트〉에서 일했고, 에세이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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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김현유
    WRITER 김도훈
    ILLUSTRATOR MYCDAYS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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