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

본 지면의 이미지는 AI 이미지 생성기인 Deep Dream Generator에 소설 제목과 함께 다양한 형식의 조건을 넣어 추출한 것입니다.
나는 블룸 앤 블룸의 진짜 모토가 마음에 들었다. 가난한 부모를 둔 아시아계 미국인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 말고 어디 있을까. 오리엔테이션 첫날 간부급인 40대 후반의 백인 남성이 연단에 올라 전통에 따라 소리쳤다. “쇼 미 더 머니!” 그의 선창에 따라 명문대 출신 머저리들이 소리쳤다. “쇼 미 더….”
합격 통보를 받은 날 저녁, 나는 단골인 파파이스에서 캐런 호에게 청혼했다. 캐런은 말했다. “파파이스에서? 진심이야?”
블룸 앤 블룸의 본사인 블룸 타워는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었다. 처음 느낀 건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욕이 나올 정도로 많다는 사실이었다. 다들 ‘퍼킹 엘리’라고 불렀는데, 1층의 서로 다른 구역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는 각기 다른 층으로 운행했다. 소문에 따르면 블룸 타워에는 총 5개의 엘리베이터 그룹이 있는데 높이 순으로 연봉과 직급 차이가 난다고 했다. 나는 두 번째로 높은 층인 45~60층에 배정받았다. 아이비리그나 MBA 출신 신입들이 보통 이 그룹에 속했다. “좋아할 건 없어. 그들 대부분이 죽을 때까지 같은 층에서 일하니까.” 오리엔테이션에서 선창을 한 프린스턴 출신 간부 제이 서머스도 나와 같은 그룹이었다. 회사에서 만난 그는 오티에서와는 인상이 달랐다. 그땐 범접하기 힘든 월가의 엘리트로 보였는데 지금은 알코올과 암페타민에 전 양배추 같았다.
엘리베이터 그룹에서 가장 의문스러운 건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룹이 총 4개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간부들이 포진한 네 번째 그룹은 61~70층을 배정받았고 그게 이 타워의 꼭대기였다. 그러면 다섯 번째 그룹은? 그들은 지하로 출근한다고 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는 지하층 버튼이 없었다. 지하로 가는 계단도, 통로도 본 적 없었다.
블룸 앤 블룸이 세계적인 그룹이 된 건 블룸 터미널이라고 불리는 데이터 분석 및 리서치 소프트웨어 덕분이었다. 신입 애널리스트들은 입사 초기 두 달 동안 집중적으로 블룸 터미널 교육을 받는다. 구역질 나도록 지겹고 고통스러운 기간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성적이 회사 생활의 성패를 좌우했다. 나는 이를 꽉 물고 달려들었고 최고점을 받았다.
다음 날, 평소와 같이 출근했는데 카드키가 먹히지 않았다. 제이 서머스가 술이 덜 깬 얼굴로 다가왔다.
“이쪽으로.”
서머스와 나는 1층 로비를 빙 둘러 타워의 안쪽 깊숙이 걸어갔다. 두 달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방향이었다. 이윽고 타워의 가장 안쪽에 이르자 창고 문처럼 보이는 작은 회색 문이 있었다. 서머스는 조금 떨어져서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상 문고리도 도어록도 보이지 않는 회색 직사각형이었다. 서머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카드키를 문에 댔다. 그러자 문이 안쪽으로 스르르 열렸다.
“들어가.” 서머스가 말했다.
문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둠의 농도가 조금씩 달랐다. 검은 사각형 안에 검은 사각형 안에 검은 사각형이 끝없이 이어졌다.
“들어가.” 서머스가 다시 말했다.
나와 서머스가 들어가자 문이 닫혔다. 어둠 때문에 우리가 있는 공간의 크기를 알 수 없었다. 휘청하는 나를 서머스가 붙잡았다. 곧 전기차의 엔진 소리 같은 고요하고 매끄러운 진동음이 들리며 어둠이 아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필립 글래스가 작곡했어.” 서머스가 말했다.
“뭐가요?”
“엘리베이터 소리. 그게 궁금했던 거 아니었어?”
눈앞에 끝없이 뻗어 나가는 복도가 있었다. 복도는 클라인 병처럼 벽과 바닥과 천장이 이어져 있었고 희미한 조명이 그런 느낌을 더 강조했다. 나는 서머스와 복도를 따라 걸었다. 먼 곳에 조명과 다른 색상의 빛이 보였다. 빛은 어느 방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 방은 외부와는 정반대였다. 쾌적한 온도와 청결한 공기, 화려한 조명과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면은 양털로 덮여 있고 바닥은 단단한 대리석이었다.
일정한 격자 그리드로 이루어진 칸막이 안에서 사람들이 두 모니터를 이어 놓은 블랙 인터페이스 화면을 보며 일을 하고 있었다. 기계는 블룸 터미널과 비슷했지만 여러 면에서 달랐다.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키보드를 세밀한 조작으로 다루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예술가들의 퍼포먼스를 보는 듯했다.
벽면에는 커다랗게 알파벳이 새겨져 있었다. N.Y.F.B.
“NYFB?” 내가 물었다.
“어….” 서머스가 뜸을 들이더니 나를 흘깃 보고 말했다. “좆도 신경 끄라고None of your fucking business. 그냥 닥치고 할 일이나 하라는 말이야.”
그 할 일이란 미노타우로스라는 이름의 기계를 조작하는 것이었다. 미노타우로스는 기하학적이며 논리적인 미로다. 미로의 중심에는 암소가 있다. 표면상 게임의 목적은 규칙에 따라 미로를 통과해 암소에 도달하는 거지만, 진짜 목적은 규칙이 무엇인지 추측하고 규칙을 새롭게 만든 후 다시 적용하며 그 규칙을 따르면서 다시 변형하는 자기 참조적 논리 비틀기에 있었다.
두 모니터의 검은 화면에는 수십 개의 작은 상자가 있다. 상자 속에는 여러 종류의 폰트로 추상적인 지침들이 쓰여 있다. 직원들은 전용 단말기를 사용해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의 상자를 동시에 커서로 가리킨다. 그리고 지침에 따라 양손을 움직여 예스 또는 노 방향으로 움직이며 미로의 중심에 있는 암소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게 대체 뭐예요?” 내가 물었다.
“N, Y, F, B.” 서머스가 말했다.
나는 그날 이후 지하층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연봉이 예전의 두 배였으니 닥치고 일할 만했다. 암소를 잡을 때마다 상여금이 나온다고 했지만 암소는 한 번도 잡을 수 없었다. 서머스는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고 말했다.
“고전적인 미로랑 비슷해.”
서머스가 알려준 방법은 ‘깊이 우선 탐색’이다. 이 방법을 이해하려면 우선 미로에서 서로 다른 경로 중에 선택하게 되는 임의의 지점, 즉 경로들이 만나는 지점을 노드로 정의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방법을 따르자.
1. 출발 노드에서 들르지 않은 임의의 이웃 노드에 들른다. 그리고 더 이상 들를 이웃 노드가 없는 가장 깊은 곳까지 계속 탐색한다.
2. 더 이상 들를 이웃 노드가 없을 경우, 들르지 않은 노드에 이웃한 첫 번째 노드를 찾을 때까지 이전 경로를 따라 되돌아온다. 그 첫 번째 노드를 찾으면 그곳에 들러 1을 반복한다.
3. 어떤 경로를 따라 되돌아왔다면, 그 경로는 다시 이용하지 않는다.
깊이 우선 탐색은 대개 스택 자료 구조를 사용하여 구현하며 그래프나 트리 구조에선 최단 경로를 찾는 문제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최단 경로가 아닌 경로를 먼저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노타우로스에서 중요한 건 최단 경로가 아니었다. 여기에서는 자기 참조적으로 변하는 규칙과 경로 자체가 중요했다.
암소를 찾은 직원에게는 임의의 방 번호가 주어진다. 직원은 복도를 따라 번호가 쓰여 있는 방이 나올 때까지 걸어간다. 그리고 그 방으로 들어가 경로를 입력하고 다시 돌아와서 일을 반복한다.
얼마나 오래 이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느 시점 이후 나는 암소를 잡을 수 있게 되었고 번호 방에도 들어갔다. 특별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뭔지 알 수 없다는 것 말고는.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의문을 갖지 않았다. 가끔 캐런이 회사에서 하는 일이 뭐냐고 물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캐런은 내가 점점 다른 사람처럼 군다고 했다. 일주일에 120시간은 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캐런에게 말했다.
“망할 니 일이나 신경 써.”
그날 캐런은 집을 나갔다. 나는 침대 귀퉁이에 앉아 다음 경로와 암소를 생각했다.
네 번째로 암소를 잡고 번호 방에 들어갔다 온 날이었다. 문득 복도의 길이가 궁금했다. 맨해튼의 지하를 개미굴처럼 빽빽이 채우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일까. 그때 복도 끝에서 어떤 형체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그 형체를 뒤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빨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복도가 꼬불꼬불해서 따라가는 게 힘들었다. 형체는 멈추지 않으면서도 계속 모습을 보이며 나를 유혹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복도 끝에 도착했다. 그곳은 마치 화재로 불탄 듯한 풍경이었다. 불길이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었고 지평선 너머로 확산되며 이글거렸다. 그것은 블룸 앤 블룸의 최후이자 최후의 세계, 종말의 풍경이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기서 뭐 해?” 서머스가 말했다.
놀란 내가 고개를 돌리자 언제 세상이 끝났냐는 듯 평범한 복도가 보였다.
서머스가 방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런데 복도가 예전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아니라, 옆으로 꺾여 있는 복도였다. 새로운 복도는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벽면은 거친 돌로 이루어져 있고 천장에는 낡은 전등이 매달려 있었다. 복도에 빛이 거의 없어서 우리는 어둠 속을 걷도록 강요받았다.
“여긴 뭐예요?”
“어떤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 실험하는 곳이지. 좀 복잡하지만 매우 유용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
“어떤 욕망이요?”
“음… 아…” 서머스가 뜸을 들였다. “말이란… 너무 부족해… 욕망은… 너무… 그… 알지. 그렇잖아. 애더럴이라도 한 알 줄까?”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이상한 장비와 실험 도구들, 그리고 끔찍한 유기체로 가득 찬 공간에 끌려들어갔다. 이건 블룸 앤 블룸의 비밀 프로젝트인가?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서머스의 눈빛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이상한 놈이었을 뿐인데 이제는 어떤 음침한 것이 그의 안에 깃들어 있는 듯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알게 된 건 그것이 예측하면 할수록 증폭된다는 사실이야.” 서머스가 말하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 미소는 어딘가 이상했다. 그의 웃고 있는 얼굴 위로 우는 얼굴이 보였고, 치켜뜬 눈 위로 게슴츠레한 눈이 보였으며, 피 흘리는 이마 위로 물에 젖은 머리칼이 보였고, 도망치라고 소리치는 그의 목소리 속에는 이곳에서 영원히 함께 일하자고 말하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서머스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괜찮아?”
“네.” 나는 헐떡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내 안은 복잡했다. 서머스의 말, 그리고 그 이상한 미소와 시선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복도를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서머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뚫어져라 앞을 보며 길만 계속 걸었다. 한참을 걸어가자 벽에 박힌 두 개의 문이 보였다. 서머스가 한쪽 문을 열었다.
“여기서 좀 쉬자.”
문 안으로 발을 디밀자 미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대와 취향과 정서가 계통 없이 뒤죽박죽된 이상한 방이었다. 한쪽 벽에는 오래된 미로 게임이 걸려 있고 다른 벽에는 글씨로 된 이상한 패턴이 있었다. 나는 그 패턴을 읽어보았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우리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 방에서 당신은 우리의 노예가 된다. 이제부터 당신의 삶은 우리의 손아귀에 있다. 탈출을 시도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더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속이 울렁거렸다. 유치한 협박이라고 생각했는데 철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감이 엄습했다. 서머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미로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조금 미친 것처럼 보였다. 서머스가 내 생각을 읽은 듯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나이스한 글귀네.”
그러자 갑자기 전등이 꺼졌다. 우리는 어둠에 휩싸인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인간의 비명 소리와 유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공포에 질려 허우적거렸다. 반면 서머스는 조용히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서머스가 말했다. “이제 곧 끝난다.”
굉음과 함께 전등이 다시 켜졌다. 우리 앞에 방금까지 없던 문이 나타났다. “들어가.” 서머스가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운명이 바뀌었다.
캐런은 더 이상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어떻게 존재 여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까. 캐런은 나와의 기억이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일종의 꿈. 하지만 꿈이 시각 피질이 만들어낸 뇌의 환상이라면 지금 그녀에게 일어난 일은 가능성의 무한한 삭제였다.
나는 새로운 복도를 걸으며 서머스를 찾았다. 이상한 장소였다.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중첩됐다. 복도는 선과 면이 아니라 점의 형태로 산산이 흩어졌다 모이길 반복했다.
어디선가 캐런이 나타나 말도 없이 손을 내밀었다. 손에는 작은 스위치가 있었다. “이걸 눌러.” 캐런이 말했다.
“왜?”
“어서.”
나는 스위치를 눌렀고 순간 공기가 변했다. 강한 바람이 우리를 휘감고 지나갔고 매캐한 냄새가 코로 들어왔다. 캐런과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며 이상한 존재들을 마주했다. 어떤 것들은 죽은 동물 같은 몸뚱이를 하고, 어떤 것들은 미래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무시하고 복도를 지나갔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갔다. 그러던 중 복도 끝에 하나의 문이 보였다. 문은 거대했고 문고리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컸다.
“여기서 선택을 해야 돼. 문을 열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거기가 어디가 될진 몰라. 문을 열지 않으면 여기에서 영원히 살아야 돼.”
나는 문을 열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검은색 숫자들이었다. 0과 1의 끊임없는 반복. 나는 캐런에게 물었다.
“무슨 의미야?”
“가능성.” 캐런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캐런의 말이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했고 가능성이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 두려웠다.
캐런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가능성을 무시하는 건 불가능해.”
캐런은 미노타우로스가 우주의 모든 변수를 포함한 분석과 예측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했다. 미노타우로스의 예측은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랐다. 무한한 양자 가능성 때문에 실제 현실은 예측 불가능하다. 진정한 예측은 예측을 생성하는 것이다. 예측을 예측하는 과정에서 미노타우로스는 가능 세계를 유한수로 한정했다. 이러한 개입은 중대한 문제를 야기했다. 가능성의 한정은 현실의 소거로 이어졌다.
“캐런이 그렇지.” 서머스가 말했다.
내가 혼란스러워하자 서머스가 위로하듯 말했다. “미노타우르스는 모든 걸 뒤죽박죽으로 만들지. 캐런은 기억 속에 있어. 너는 캐런을 떠올릴 수 있고 캐런과 있었던 일을 기록할 수도 있어. 하지만 캐런은 존재하지 않아.”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머스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더 놀라운 건 캐런 자신도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지.”
갑작스럽게 우주선이 복도 끝에서 나타났다. 우주선은 거대한 크기였지만 불규칙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건 모양이라기보다 하나의 흐름이었고 주름이었다. 빛나는 표면에는 기호와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우주선은 우리를 향해 전진했다.
“어떻게 해야 돼?”
“미노타우로스가 컨트롤러에 액세스해서 억제 필드를 작동시키면 우주선을 멈출 수 있어. 그러나 그건 위험해.” 서머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머스는 미노타우로스 컨트롤러를 잡았다. 나는 우주선 가까이 다가갔다.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우주선 안은 파도같이 요동치는 기계 장치들로 가득했다. 그때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우주선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차원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물리 법칙이 물구나무선 듯 뒤집히고 경계가 와해됐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은 미래 속에 있고 미래는 과거 속에 있었다. 시간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원인과 결과는 무의미한 것, 끝과 시작은 늘 함께 있었고 시간과 공간의 바깥은 늘 현재였다. 나와 서머스는 하나이자 둘이었고 모두이자 단독이었다.
“쇼…미…더…” 나와 서머스가 말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후 검은 머리의 여자 신입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자기 이름이 캐런 호라고 말했다.
“이 회사의 모토가 마음에 들어요.”
나는 캐런을 쳐다봤다.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모든 일이 실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EPILOGUE
러브레이스 테스트라는 인공지능 테스트가 있다. 인류 최초의 코드 작성자인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이름을 딴 이 테스트는 튜링 테스트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여러 면에서 생각해볼 만한 점을 시사한다. 러브레이스 테스트를 발명한 연구진은 이 테스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이 설계한 인공지능 기술 행위자가 결과물(예를 들면 단편소설)을 내놓는다. 이 창조 과정은 재현 가능해야 하고(즉 하드웨어 오류로 우연히 생긴 결과가 아니어야 하고), 이 행위자를 설계한 인간은 행위자가 그 결과물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할 수 없어야 한다. 간단히 얘기하면, 러브레이스 테스트는 창조성에 대한 테스트이다. 기계가 진짜 창조적인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창조성의 개념이 문제가 된다. 마커스 드 사토이는 창조성의 기준으로 ‘1)새로움, 2)놀라움, 3)가치’를 제시한다. 합리적인 기준이지만 이것 역시 문제다. 새로움과 놀라움, 가치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가. 창조성을 이렇게 정의하면 아마 인간이 창조한 대부분의 것 역시 이 기준에서 탈락할 것이다.
내가 챗GPT와 소설을 쓰며 염두에 둔 것은 러브레이스 테스트였다. 과연 이 단편소설은 러브레이스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몇 개의 간단한 원칙을 정했다.
1. 일반적인 형식의 단편소설일 것.
2. 챗GPT와 내가 쓴 부분을 구분하지 말 것.
3. 퇴고 과정에서 나의 판단과 챗GPT의 판단에 동일한 무게를 둘 것.
나는 2023년 3월 1일부터 3월 10일까지 유료 서비스인 챗GPT 플러스를 사용해 소설 작업을 했다. 정해진 설정은 단 한 줄의 제목이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
결론부터 말하면 챗GPT 플러스의 성능은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먼저 챗GPT는 소설을 써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그것은 창의성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영역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이는 프로그래머들이 만든 알고리즘에 따른 첫 번째 대답에 불과하다. 내가 반복해서 요구하자 챗GPT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의 내용이나 문장에 대한 평가는 뒤로하고 챗GPT의 가장 큰 문제는 원고지 5매 이상의 내용을 일관성 있게 서술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챗GPT가 그나마 잘하는 것은 소설의 시놉시스를 서술하는 것으로, 이는 소설의 전개를 제안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매우 전형적인 형태였다. 영어로 사용해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DeepL(AI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영문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소설을 썼다. 한글에 비해 여러 면에서 나은 결과가 나왔지만 의미 있는 결과는 아니었다.
나는 챗GPT와 소설에 대한 방향을 논의하거나 소설을 쓰라고 요구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 식으로는 일이 해결될 수 없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라는 제목 아래, 다양한 설정과 인물을 반복해서 제시하는 것이었다. 챗GPT는 그때마다 짧은 이야기를 서술했다. 나는 연결이 될 수 있거나 흥미로운 부분을 추출하고 배열해서 소설을 만들었고 이것을 다시 챗GPT에게 제시해서 뒷부분을 쓰게 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는 이 과정을 반복하며 쓴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내가 쓴 문장도 있고 챗GPT가 쓴 문장도 있다. 그러나 그 둘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꼈던 것은 챗GPT보다는 나의 변화였다. 챗GPT와 상호 작용하며 소설을 쓰는 일은 나의 문장을, 내가 생각하는 방향을 그에게 맞추는 일에 가까웠다. 나도 모르게 챗GPT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된 것이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 인간이 기계화된다는 의미일까. 이 지면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창조성과 지성에 대한 아이디어는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인공신경망은 대부분의 사람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문장의 정확도, 유려함, 쓰는 속도 역시 사람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인공신경망보다 인간이 훨씬 유연하다. 유연함이란 스스로에 대한 자각과 외부에 대한 인식 사이에서 변화와 균형을 동시에 추구하는 능력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형이상학적 의미에서의 위치감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공신경망에 결여된 것은 이러한 감각이다. 창조성과 지성은 지식이나 앎의 정도가 아니라 유연성의 정도를 뜻하는 게 아닐까. 이 기준은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Who’s the writer?
정지돈은 소설, 비평, 에세이 등을 쓴다. 사실과 허구의 관계를 묻는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역사와 현재, 미래의 의미를 묻는 작업을 지속 중이다.
〈내가 싸우듯이〉 〈모든 것은 영원했다〉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스크롤!〉 등 다수의 책을 냈다.